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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

나무사업 외길 30년에 인도네시아 합판왕 되다

  • < 소설가 이상락 >

나무사업 외길 30년에 인도네시아 합판왕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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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대표작은 ‘게르니카’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에 할 말을 다 못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사람, 죽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목이 빠져라 흐느껴 우는 어머니, 옷이 벗겨지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여인, 이제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만세’ 부르는 사람, 쓰러지며 울부짖는 말, 근엄한 표정을 지은 황소….

‘게르니카’는 평온과 정상이 아니라 파괴된 일상에 대한 분노와 절규, 절망, 죽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1937년 4월26일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퍼부은 나치 독일의 폭격에 대한 한 예술가의 분노와 항의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은 1만 권의 스페인 내란 역사서보다 더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술의 위대성을 ‘게르니카’가 증명했던 것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게르니카는 그 직후 가진 유럽 순회전시회가 끝나자 곧바로 뉴욕 현대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화가가 ‘스페인에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그걸 맡겼기 때문이다. 81년 프랑코가 죽자 작품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박물관으로 되돌아왔고, 마치 파리의 오르세처럼 현대미술만 전시하는 소피아왕비미술관이 92년 마드리드에 문을 열면서 그곳으로 이전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소피아왕비미술관에는 ‘게르니카’ 원작뿐 아니라 습작과 드로잉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대작의 출산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으며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게르니카’를 보고 마드리드를 떠난 나는 바로셀로나를 거쳐 마르세유에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인류학박물관을 관람했다. 아프리카는 순수했다. 그러면서도 역동적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즐겨 말하는 ‘에랑 비탈(생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젊은 시절 피카소도 파리의 인류학박물관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아프리카 민속가면들을 그렸다고 하니까. 내가 느꼈다고 해서 특기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시 니스로 향했다. 그곳은 문명의 이름으로 걸쳤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버린 듯 사람들은 벌거숭이에 가까웠다. 그리고 ‘꼬뜨다쥐르’라 부르는 푸른 바다 위로는 파도가 넘실댔다. 내 눈에는 그게 꿈과 낭만의 조각 같아 보였다. 니스는 그렇게 부담 없는 도시였다. 여기에는 멋진 미술관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시간을 죽여야만 했다.



남불은 19세기에 들어 유럽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물가가 싼데다 광선이 투명하다고 소문이 나서였다. 샤갈,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모딜리아니, 시냑, 콜레뜨 등의 화가와 장 콕토, 사르트르, 보부아르, D.H. 로렌스 등의 문학가, 소피아 로렌, 그레타 가르보, 카트린 드뇌브 등의 영화배우들이 이곳을 찾았다. 자연 그들의 작품이 이곳에 남게 됐고, 이를 소장한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먼저 찾은 것은 샤갈미술관(정식 명칭은 국립샤갈성서메시지미술관).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앞뜰을 지나 미술관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무중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새, 꽃, 천사들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시간도 멈춘 듯했다. 에덴동산 이전의 세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샤갈의 그림은 그렇게 신비로웠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이스라엘을 여행하고는 잇따라 시리아와 이집트도 여행하게 됐는데, 그때 성서의 분위기를 체득했다. 그것을 토대로 1954년부터 13년 동안 17점의 연작 ‘성서의 메시지’를 제작했다. 천지창조, 다윗, 노아, 모세, 이삭 등의 인물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들을 67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프랑스는 그 답례로 니스에 이 미술관을 지어 73년 샤갈의 86회 생일날에 맞춰 개관했다. 살아 있는 화가에게 바쳐진 프랑스 유일의 미술관이었다.

‘색채의 반란’. 이것은 샤갈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마티스미술관이 내게 던져준 인상이다. 마티스만큼 색채의 천재가 있었던가. 넓은 전시공간에 포진해 있는 그림, 도자, 포스터 등에 구사된 색채 감각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는 색채와 색채의 관계, 색채의 구조 등에 관해 치밀하게 연구한 것 같았다. 거기에 표현된 적·청·녹의 색채는 자연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마티스만의 것이었다. 그는 그런 색채로 인간을 그렸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여인들을.

니스 시내의 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작품 등을 관람하고, 르 콜레트라는 교외 마을에 들러 신경통과 류머티스로 고생하던 르누아르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죽을 때까지 12년간 작품활동을 계속했던 아틀리에를 찾아서는 아직 식지 않은 그의 체취를 느꼈다. 그리고는 산길을 따라 20여 분 달려, 작으나 아주 아름다운 생폴 마을에서 벌레와 새들이 우짖는 깊은 숲 속에 자리잡은 마그재단 미술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저를 닮은 2층 건물과 굴곡이 많은 정원으로 구성된 미술관에는 그림보다는 조각이 많았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미로의 ‘미궁’과 ‘태양 새’,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에 샤갈의 환상적인 모자이크와 유화,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라크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태져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예술공간이 됐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아직 언급하지 못한 것으로 내가 보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찾기를 권하고 싶은 유럽, 아시아의 박물관, 미술관의 이름이라도 열거해야겠다. 뮌헨의 과학박물관, 동서양의 도자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 드리스덴의 쯔빙거궁, 로마의 바티칸미술관과 로마문명박물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리스본의 항해박물관, 바르셀로나의 후안 미로재단미술관,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과 고흐미술관, 오슬로의 콘티키박물관(헤이에르달의 문명탐험 관련), 튀니스의 바르도박물관(세계 최대의 모자이크 컬렉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박물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박물관과 성서의 전당(Shrine of Book), 이스탄불의 톱카프박물관, 파키스탄의 페사와르박물관, 뉴델리의 인도박물관, 베이징의 고궁박물원, 타이페이의 고궁박물관, 상하이의 상해박물관, 도쿄의 동경박물관, 오사카의 동양도자박물관 등이 그것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뛰어난 기획력

미국은 유럽인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땅이었다. 정치적·종교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기아에서도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 관문인 뉴욕에는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다. 이런 뉴욕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이 특히 유명하다.

맨해튼 53번가의 모마는 한때 ‘게르니카’를 소장했다. 피카소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든 저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이곳에 있어서였을까. 모마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하는 곳이 아니다.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통한 미술사 학습공간’이기를 지향한다. 생각해보라. 1년에 수백 점이나 되는 대작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걸 무슨 수로 구입하고 전시할 수 있겠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들에 집중 투자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그 대열에 들고 싶어 작품을 기증하는 작가가 나타날 테고. 피카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미술관 운영에는 이런 고도의 지적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곳엔 유럽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인상파 대가들의 것도 있지만 그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데 쿤닝, 잭슨 폴록 같은 미국산 대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모마는 또 기획전도 자주 갖는데, 그때마다 세계의 주목을 받곤 한다.

21세기 첫 전시회를 백남준에게 헌정한 구겐하임미술관은 달팽이 모양의 독특한 외관과 현대미술의 최첨단 흐름을 반영하는 수준 높은 기획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의 최대 컬렉터이기도 하지만 피카소, 콘스탄틴 브란쿠시, 알렉산더 칼더 등 유명 작가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달팽이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6층까지 올라가면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끊기지 않고 그 느낌이 계속될 수 있어 좋았다.

모마와 구겐하임이 전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면 매디슨 애버뉴 75번가의 휘트니미술관은 미국 현대회화가 주 전공이다. 전시작품들을 보면 왜 뉴욕이 20세기 들어 세계미술의 메카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주역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미국현대회화사의 학습장인 셈이다.

뉴욕에 이런 미술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영박물관에 맞먹는 규모와 질을 자랑하는, 흔히 ‘메트’라 부르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레이트 홀이라 부르는 로비에서 시작되어 이집트관, 로마관, 중세관 등으로 이어지는 메트는 센트럴 파크에 연해 있는데, 유럽 박물관이 미처 갖지 못한 마야와 잉카, 인디언 관련 유물이 풍부하다.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외교를 주름잡는 미국이 문화재 분야에서도 결코 남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중생대의 거물 ‘바로소루스’ 공룡이 마치 ‘여기는 우리 같은 동물의 세계야’ 하며 안내하는 자연사박물관은 며칠을 보아도 다 못 볼 정도로 표본이 방대했다. 동물을 박제해서 그들의 생활환경을 재현한 것에서부터 조개와 어류,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 운석, 광물, 보석, 나무와 풀, 그리고 인간. 이들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공룡들의 세계…. 4층의 공룡전시실은 그들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지구상의 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것을 보노라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엔 보스턴미술관이, 시카고엔 시카고미술관이, LA엔 게티미술관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이 최고다. 16개 박물관과 7개 연구기관, 그리고 9개 교육시설과 동물원. 이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문화시설은 놀랍게도 시 외곽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었다.



‘용산시대’ 개막에 붙여서

스미소니언은 제임스 스미손(1765~ 1829)이란 영국 과학자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가 죽기 전 조카 제임스 헝거포드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네가 만약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내 유산을 모두 미국에 기증하여 지식 증대와 보급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는 데 쓰도록 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헝거포드가 자식이 없이 1835년 일찍 죽게 되자 그의 유언대로 미국에 맡겨졌고 그리하여 이 박물관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미손이 모국인 영국이 아니라 평소 별다른 인연도 없었고 한번도 찾은 적도 없었던 미국에 유산을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미국 의회는 1846년 그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을 설립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다.

본부 기능을 하는 스미소니언 캐슬에서 얻은 팸플릿을 보니 없는 게 없었다. 박물관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은 실로 넓었으며 또 깊었다. 인류가 도달한 항공·우주 분야에서의 기술발전과 그 가능성을 함께 보여주는 항공우주박물관, 미국의 과학적 발명의 성과와 미국 역사를 들려주는 미국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세계적인 대가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 현대미술과 야외조각에 초점을 맞춘 허숀미술관, 아프리카미술관과 아메리카미술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아시아 미술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새클러미술관과 프리어미술관, 미국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모아놓은 초상화박물관, 20세기 미국 공예작품의 컬렉션인 렌윅갤러리, 산업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업미술관, 여기에 분점으로 뉴욕에 쿠퍼 휴트미술관과 인디언미술관이 있었다.

부러운 것은 이런 것만은 아니다. 창립 이래 150여 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 무료입장 전통,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연중 무휴 개관, 무료 짐 보관시설, 완벽한 안내정보 시스템 등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감탄했던 것은 연방정부가 예산의 75%를 부담하면서도 종신직(본인의 의사에 의한 사임은 가능)인 박물관장에게 운영의 전권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17명으로 구성되는 ‘평의회(Board of Regents)’를 두고 있다. 평의회는 당연직인 대법원장(감사 겸임)과 부통령, 상원에서 추천하는 3명의 상원의원, 하원에서 추천한 3명의 하원의원, 그리고 6년 임기의 사회 각 분야 저명인사 9명으로 구성된다. 관장은 평의회의 간사지만 표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평의회가 있다고 해도 제도와 사람에 대한 신뢰 없이는 이런 제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미국인들은 박물관장을 단순한 행정관료로 보지 않기에 이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창의적이어야 하기에 대통령도 간섭이나 지시를 할 수 없다. 세계의 박물관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가 창의적인 개인의 아이디어와 노력을 씨앗으로 해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박물관의 수집과 운영, 전시기획 등 모든 일은, 그것이 국립이건 시립이건 관료적인 분위기 속에서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용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건축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밝히는 종합운영계획의 수립이 사실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박물관 직제의 개편, 필요한 인력의 확보와 양성, 기자재의 확보도 포함돼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부와의 관계 정립, 다시 말해서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또는 예산 당국과의 관계 정립이다. 그들로부터 독립하지 않고서는 중앙박물관은 제 구실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아직 그런 위상을 갖지 못했는데, 우리가 언제 중앙박물관의 독립을 보겠는가. 관장을 임명식이 아니라 개방형으로 채우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문화의 세기에도 후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동아 200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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