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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명택|<3>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감도는 명당

  • 조용헌 cyh062@wonkwang.ac.kr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감도는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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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는 신사(紳士, Gentry), 인도는 브라만, 일본은 무사 계층이 그 사회를 주도하였다면, 조선조를 주도했던 계층은 당연히 양반 계급이었다. 추사는 충청도 양반인데, 그것도 보통 시시한 양반이 아니라 일급 양반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양반에도 종류와 격이 있다. 조선의 양반을 연구해온 일본학자 궁도박사(宮島博史)에 따르면 양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서울에 주로 거주하는 재경양반(在京兩班)과, 지방의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在地兩班)이 그것이다.

재경양반은 양반층 중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가계가 많다. 이들 가계는 대대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 거처를 정하여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고 고위 관직을 상당수 차지했다. 조선의 왕실인 전주 이씨를 비롯해 파평 윤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라 하더라도 모두가 재경양반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경양반으로서 위세를 유지했던 가계는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 중에서도 특정한 파(派)였고, 재지양반층으로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가계도 있었다.

재경양반층 사이에는 중앙정부의 권력 변동에 따른 세력의 성쇠가 있긴 했지만, 그들 가계는 그 근본이 분명했고 더구나 대대로 많은 관료를 배출했기 때문에 특권 계층인 양반 신분에 속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쉽게 인지되었다.



이에 비해 향반(鄕班)으로도 불리는 재지양반층은 그 상황이 재경양반층과는 달랐다. 재지양반층은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첫째는 과거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조상과 연결된 계보 관계가 명확해야 했다.

둘째,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대대손손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는 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奉祭祀, 接賓客)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는 대대로 결혼 상대, 즉 혼족의 대상도 첫째에서 셋째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집단에서 골라야 한다.

그런데 재경과 재지양반 중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재지양반 쪽이 양반의 주류를 이루어 나갔다. 이는 중국의 사대부층이 명에서 청대에 걸쳐 점차 향거(鄕居;농촌 거주)에서 성거(城居;도시 거주)로 그 존재 형태가 변화하였고, 일본의 무사계층도 중세에 농촌에서 거주하다가 근세가 되자 성하정(城下町; 성 아래의 마을)에 집주하게 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층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준에 비추어 보면 추사 집안은 재경양반인가, 재지양반인가? 흥미롭게도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집안이었다. 추사는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충남 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소위 ‘한다리 김문(金門)’의 명문 집안이다.

먼저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興慶, 1677∼1750년)은 영의정(1735년)을 지낸 인물이다. 김흥경의 막내아들이 김한신(漢藎, 1720∼1758년)으로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년)와 결혼함으로써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가 된다. 그러니까 추사는 월성위 김한신이 증조부요, 화순옹주가 증조할머니인 로열 패밀리인 것이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기에 큰사위인 월성위도 영조의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영조는 옹주가 태어난 잠저인 창의궁(彰義宮,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이 있던 통의동 35번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적선방에 월성위궁(月城尉宮, 현재 정부종합청사 부근)을 마련해주고 내당을 종덕재(種德齋), 외헌을 매죽헌(梅竹軒), 소정(小亭)을 수은정(垂恩亭)이라고 손수 써서 하사하기도 하였다.(‘과천향토사’, 154쪽)

이처럼 영조의 각별한 배려를 받은 월성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도 옮기게 된다. 즉 월성위 때부터 해미의 한다리에서 신암면의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 것이다.



육로와 해로의 교통요지, 용궁리

월성위는 서울 동대문 밖 검호(黔湖)에 거처를 마련하는 한편으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오석산(烏石山)과 용산(龍山) 주변을 사들였다. 용궁리 일대는 삽교천 중류에 위치하여 내포(內浦)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해로의 교통요지다. 서울에서 인천을 거쳐 배를 타고 하룻길이면 아산만에 진입하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오면 곧바로 선착장인 용궁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용궁리에 도착하여 말을 타고 10리만 가면 신례원(新禮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는데, 역원에서 말을 바꿔 타고 한나절이면 월성위의 조상 선영이 있는 서산에 도착할 수 있다. 이처럼 용궁리는 서울과 서산의 선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다.

당시 해로는 요즘의 고속도로와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새우젓도 여기를 통해서 들어왔고, 1868년 4월 남연군 묘를 도굴하러 온 프러시아의 오페르트 일당이 배를 대고 상륙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이곳 사람들이 인천에 가서 많이 살게 된 계기도 해로를 통한 교통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개통된 동양 최장의 서해대교(7.3km)가 바로 아산만을 가로질러 충청도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대교다.

아무튼 이곳을 고가로 사들인 월성위는 부친의 묘소(추사 고조부의 묘)도 쓰고 집도 지었다. 이 집들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이 1칸씩 부조하여 53칸 집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월성위가의 명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상을 정리하면 추사집안은 영의정, 판서, 대사헌을 지낸 인물에다 영조의 부마까지 배출한 명문이다. 그리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가지고 있고, 시골에도 역시 세거지를 가지고 있던 양수겸장의 일급 양반 집안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용궁리의 지리적 특색 때문이다. 용궁리는 서울의 재경양반과 충청도 내포의 재지양반을 연결하는 고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월성위가 이곳 용궁리에 터를 잡은 일차적인 이유는 일이 있을 때 배를 타고 서울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둘째 이유는 두말할 필요없이 이곳이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기 때문이다. 음택과 양택에 모두 합당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명당인가. 당대의 일급양반이 많은 돈을 들여 구입할 만큼 과연 명당이었던가. 필자가 1박2일 동안 현장을 면밀히 답사해본 결과 월성위가 왜 이곳을 탐냈는지, 그리고 이름을 하필이면 용궁리(龍宮里)라고 했는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이 동네의 소종래(所從來)를 더듬어 보자. 추사고택이 있는 마을 이름은 용궁리이고, 고택이 자리한 바로 뒷산 이름은 용산(龍山)이다. 용산 줄기는 멀리 팔봉산(八峰山)에서 시작된다. 팔봉산은 용산의 조산(祖山)에 해당하는 산으로 용산까지는 20리 정도의 거리다. 즉 팔봉산이 20리를 꾸불꾸불 오다가 그 끝자락인 용산에서 나지막하게 혈을 맺은 것이다.

‘천리행룡(千里行龍)에 일석지지(一席之地)’라는 풍수 용어가 있다. 용이 천리를 내려오다가 자리 하나를 만든다는 말인데, 호박을 자세히 관찰하면 줄기 끝에 열매를 맺듯이 혈자리는 그 끝자락에 있는 법이다.

이곳 사람들은 꾸불텅 꾸불텅 내려온 20리 산줄기를 구절비룡(九節飛龍)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그 산줄기의 내려온 모양이 아홉 마디를 지닌 비룡과 흡사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구절이란 꼭 아홉 마디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많은 마디(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만큼 마디가 많다는 것인데, 풍수에서는 갈지자 형태로 이리저리 마디를 많이 만들수록 좋다고 본다. 마디없이 한일자처럼 직룡으로 내려온 줄기는 묘용(妙用)이 없다.

용산은 팔봉산에서 20리를 내려온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 용의 머리가 삽교천의 물로 들어가려는 형국이다. 용궁리에서 삽교천 강물까지는 300m 정도로 지척간이다.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있는 곳은 용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었지만 원래 김흥경의 묘 앞에는 방죽이 있어서 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순옹주묘 앞에까지 물이 들어와 있었는데, 85년도에 경지정리를 한다고 흙으로 전부 메워버려 지금은 평토가 되었다.

용궁은 물 속에 있듯이, 이곳이 용궁리인 것은 용의 머리 주변에 자연적인 방죽이 둘러싸고 있어서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은 재물로 간주한다. 이렇게 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 재물도 풍족하게 유지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길게 누운 용이 머리를 물에 대고 막 입수(入水)하려는 지점인 용궁리.

등산화 끈을 조이고 야트막한 용산에 올라 동네를 관망한다. 아마도 150년 전 처음 이 집터를 잡을 때 풍수깨나 한다는 한다리 김씨들도 필자처럼 이곳에 올라 주변 사격(청룡·백호·주작·현무)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들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온통 솜이불로 덮인 평화로움뿐이다.

팔봉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걸음 한걸음 주령을 타고 걸어본다. 지관은 눈으로도 보아야 하지만 반드시 발로도 밟아보아야 맛이 난다. 천상 ‘발로꾸니’가 되어야 한다. 산줄기라도 전혀 험하지 않고 뒷동산 산책하는 것같이 평탄하다. 이놈은 순한 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룡고조의 추사 고택

패철로 추사고택의 좌향을 재보니 유좌(酉坐)다. 유좌는 정동향(正東向)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전(秘傳)에 의하면 정동향집은 아침에 태양이 정면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정좌(靜坐)를 하기에 적합한 터다. 정좌는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받는 작업이므로 정신수련에는 좋지만, 늦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곤란하다. 뻘건 해가 동창을 물들이니 눈이 부셔서 빈둥빈둥 누워 있기 힘들 것 아닌가.

추사고택에서 정면 오른쪽을 보니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동네사람 임수일씨에게 산 이름을 물어보니 팔봉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집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이기도 하다. 용이 머리를 획 돌려 자기가 출발한 지점을 다시 쳐다보는 형국을 회룡고조라고 한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무정물에 지나지 않는 산을 용에다 비유하고, 그 용도 그냥 용이 아니라 머리를 획 돌린 용으로 보는 것이 풍수다. 무정물에 생명이 있어서 꿈틀거린다고 여기는 사유방식, 바로 이것이 동양인 풍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그래서 풍수를 서양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애니미즘(animism, 物活論)과 상통한다고 본다. 애니미즘에 의하면 산과 바위에는 모두 정령(精靈)이 있다. 우리 시각으로 이야기하자면 산과 바위에는 지기(地氣)가 있으며, 지기가 우리 몸속에 들어와 꿈으로 나타날 때는 정령으로 현현한다.

예산 지방에는 추사의 탄생과 더불어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추사가 태어나던 날 고택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뒷산인 용산과 그 조산이 되는 팔봉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추사가 태어난 뒤에 물이 다시 샘솟고 풀과 나무가 생기를 회복하였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었다. 인물이 날 때는 주변 산천의 정기를 모두 끌어당겨서 태어난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다. 산천의 정기와 인물을 둘로 보지 않는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다.

추사고택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니 얼마 전에 출간된 김구용(金丘庸) 선생의 일기가 눈에 띈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65년 4월에 추사고택을 답사한 일기가 소개돼 있다. 60년대 중반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에도 문화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추사고택을 답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산에서 경찰서 지프를 빌려 타고 출발하여 언덕산을 넘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용궁리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만 해도 추사선생의 4대 종손인 김석환옹(金石煥, 당시 72세)이 생존해 있었고, 6대 종손 김완호씨(金阮鎬, 당시 32세)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 안에는 완당선생 도장이 많이 있어서 종이를 미리 준비해 가면 그 도장(낙관)들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나무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용궁산은 기계로 깎은 듯이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고, 추사고택은 외딴 초가 한 채만 덜렁 있는 상태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어느날 밤 원인모를 불이 나 옛 건물은 모조리 타버렸고, 그 바람에 완당선생의 필적과 유물도 많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추사고택은 1968년 다른 사람에게 매도됐는데, 1976년에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옛날 53칸집은 아니다. 현재의 집은 인간문화재인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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