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화는 빵 위에 발린 잼이 아니다. 빵 그 자체다.” 이는 지난해 6월 서울을 찾았던 영국 기업예술지원협의회 ‘아트 앤드 비즈니스(A&B)’의 콜린 트위디 사무총장이 ‘기업과 문화예술,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국제 심포지엄에서 한 연설의 테마였다.
흔히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도 하고, ‘이제 키워드는 문화다’ ‘문화가 강해야 이긴다’는 말도 자주 들었지만 그렇게 실감나지는 않았는데, 그는 그 핵심을 이처럼 명쾌하게 설명해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문화는 고상한 장식품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며 나아가 그것을 실천적·전략적인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에 조금만 살을 붙인다면 ‘한국이 지금 직면한 위기는 한국 문화의 위기’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정치제도나 경제체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우리 문화가 가진 문제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비생산적인 정치·경제제도는 부산물이거나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의 문제점은 물론 문화의 중요성을 그 이상 명쾌하게 지적한 말을 듣지 못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처한 위기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섬뜩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문화에 대한 종래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산업의 힘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문화’라는 말은 그 개념의 폭이 워낙 넓어 쓰는 사람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누구는 좁은 의미로 예술과 지적 활동을 지칭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주 넓게 해석해 의식주와 종교, 놀이 등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체계까지 포함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어떤 의미로 쓰이든 문화라는 것이 지금처럼 인류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온 적은 없었으며, 보통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도 일찍이 없었다.
트위디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문화는 이제 주변적 요소가 아니라 핵심적 요소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됐고, 세계는 기술전쟁 시대에서 문화전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부드럽게만 여겨지는 문화가 어찌하여 살벌하기만 한 ‘전쟁’과 손잡게 됐으며, 이를 위해 첨단무기 구실까지 하게 된 것일까.
21세기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가 무엇인지 구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왜 21세기를 일러 문화의 세기라 부르는지, 또 그에 따라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그러한 문화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 그것의 행동반경을 따라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그 방문지는 가능한 한 개체와 관련이 많은 곳으로 잡았다. 준비가 됐다면 이제 함께 길을 떠나보자.
첫 기착지는 ‘문화산업’이란 곳이다. 문화산업의 실체를 먼저 살펴봐야 이야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을 들으면 몇 년 전 극장가를 달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쥬라기공원’이 먼저 떠오른다. 그 영화 한 편으로 벌어들인 돈이 한국의 자동차 업계가 1년 동안 자동차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보다 조금 많은 8억5000만 달러라며 언론이 연일 대서특필해댄 적이 있다.
그 뒤에 나온 할리우드 순정영화 ‘타이타닉’은 공상과학 영화인 ‘쥬라기공원’을 훨씬 앞지른 12억 달러의 판매수익을 올려 문화산업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곧이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그 위세는 더욱 가공할 수준이 되었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벽은 이렇게 넘는 거야”라고 시범을 보이듯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포켓몬스터’는 순식간에 전세계 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로잡으면서 출시 석 달 만에 무려 5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귀족에서 대중으로
냉장고나 자동차, 라면처럼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는 달리 아무런 실용적 기능을 갖지 않은, 단순한 ‘재밋거리’가 이렇게 가공할 파괴력을 과시하는데,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인구 4000만을 조금 넘는 우리나라에서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음반과 영화, 책이 등장했고, 극장이나 공연장이 아닌 대형 경기장이나 공원에서 수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그만큼 수요층이 넓어진 것이다.
어렵사리 수십 개의 도장을 받아서 공장을 지어놓고도 공해물질이 배출될까봐 이런 저런 설비를 추가 설치하고, 원만한 노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회사를 운영하건만 벌이가 시원찮아 늘 걱정인데, 이른바 ‘스타’로 한번 뜨기만 하면 수십억 원을 벌어들일 수가 있다니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때부터 문화산업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고, 우리 정부도 문화산업 육성책과 문화복지 정책 등을 잇따라 내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산업에는 정보통신 기술과 접합된 음반, 비디오,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주축으로 스포츠와 음식, 관광, 레저, 이벤트, 바둑, 출판, 디자인, 광고 등이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문화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미 한 차례 꽃피운 적이 있다. 그 주역은 ‘이목구비 가운데 봐줄 만한 것은 눈뿐’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외모가 별 볼일 없던 메디치가(家)였다. 이름없는 약장수 집안에서 태어나 숱한 질곡과 부침을 거쳐 피렌체의 실력자가 된 메디치가, 그들은 금융업을 통해 이룩한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수장이 된 뒤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13세의 미켈란젤로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하고는 그를 적극 후원해 대가로 키워냈으며, 피렌체의 명물 두오모(대성당)를 탄생시킨 건축가 브루넬레스코와 화가 다 빈치, 보티첼로, 라파엘로 등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이들은 덕분에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역사에 남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메디치가 사람들이 자선 차원에서 후원자를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엔 수준 높은 그림이나 조각작품을 모으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것이 정치행위이자 경제행위였다. 많은 도시국가가 경쟁하던 그 시기에 영주나 주교들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또는 주민들의 단결심을 드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안팎을 아름답게 장식했는데, 피렌체는 많은 예술품을 그들에게 수출할 수 있었다. 예술은 그렇듯 르네상스 시대에도 ‘돈 되는 일’이었으니 그것을 문화산업이라고 일컬어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지금의 문화산업은 내용으로 볼 때 르네상스 시대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최근에 번창하고 있는 문화산업은 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후원자가 특정한 소수 권력자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 즉 대중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과거 왕이나 귀족, 권문세가, 국가 또는 종교단체가 행하던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자 구실을 해내자 예술가들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시장의 변화에 늘 촉각을 세우고 있는 기업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관련기술 개발에 매진한 결과, 이와 같은 성과를 얻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산업은 대중문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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