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숙은 늘 바바리 코트를 입고 스산한 가을 길을 거니는 우수에 찬 여인 역을 맡았고, 윤인자는 술취한 연기가 일품이었다. 악역배우 허장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선한 역을 맡은 영화가 ‘이 세상 어딘가에’였다면서 “그런데 거기서도 사람을 둘이나 죽였습죠”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한번은 박철수 감독에게 한국영화의 컬러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더니, 아마도 필름을 무료로 현상해주는 국립영화제작소의 장비가 최첨단이 아니어서 그럴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컴퓨터의 선진국인 우리가, 웬일인지 영화 테크놀로지에 관한 한 미국에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는 셈이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진 외국영화에 익숙해져 가는 데 비례해, 한국영화로부터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직 테크놀로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외국영화, 한국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았다. 그때는 영화 그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걸리면 무기정학인데도 나는 몰래 극장에 다녔고, 그때 목숨 걸고 본 영화 중에는 한국영화들도 많았다.
사실 전후의 암담하고 가난하던 시절, 영화는 우리 세대에게 꿈과 웃음과 망각을 가져다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심지어 간첩을 신고하라고 제작한 반공 계몽영화인 ‘똘똘이와 복남이의 모험’(1950년대 초에 시공관에서 무료로 상영했음)까지도 재미있어서 여러 번 보았는데, 카빈총을 어깨에 멘 경찰관들이 트럭을 타고 간첩을 잡으러 갈 때에는 모두 신나게 박수를 치곤 했다.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우울한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그때는 희극배우 양훈과 양석천이 주연한 ‘홀쭉이와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나 ‘오부자’, ‘로맨스 그레이’ 같은 코미디 영화가 인기였다. 물론 극장에서 이미 다 본 것들이지만 중학교 개교기념일에 학교 운동장에서 무료로 상영해주면 또 쫓아가서 그 영화들을 보며 깔깔 웃는 것이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행복과 행운 그 자체였다.
아직도 생생한 김승호의 명연기
그러나 그저 실컷 웃을 수 있는 외국 코미디 영화와는 달리, 한국의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감상적인 교훈과 울음을 웃음과 뒤섞는 바람에 재미를 반감시켰다.
1950년대 국민학생 시절에 본 외화로는 존 웨인과 수전 헤이워드가 주연한 ‘칭기즈칸’,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의 ‘쿼바디스’, 숀 플린의 ‘로빈 후드’, 토니 커티스와 커크 더글러스의 ‘바이킹’, 스티브 리브스의 ‘헤라클레스의 모험’, 존 웨인의 ‘역마차’와 ‘리버티 바란스를 쏜 사나이’와 ‘유황도의 모래’, 게리 쿠퍼의 ‘하이 눈’, 커윈 매슈즈의 ‘신밧드의 항해’, 크리스토퍼 리의 ‘흡혈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납인형의 비밀’, ‘공포의 별장’, ‘추억의 이스탄불’, ‘전함 발진하라’, ‘킹콩’, ‘율리시즈’, ‘트로이의 헬렌’, 그리고 H.G. 웰스 원작의 ‘타임 머신’과 앤서니 퀸의 ‘길’ 같은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외국영화 외에도 당시 김승호의 ‘마부’나 ‘곰’ 같은 국산 수작영화들을 보고 감동받았으며, ‘이 세상 어딘가에’ 같은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악역배우 허장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선한 역을 맡았던 영화가 바로 ‘이 세상 어딘가에’였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거기서도 사람을 둘이나 죽였습죠”라고 말해서 좌중을 웃겼다). 또 ‘마부’에서 가난한 김승호가 사돈 될 사람의 저택에 가서 생전 처음 보는 홍차가 나오자,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만 티백을 찢고 찻잔에 부어 무안을 당하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 온다.
액션 배우로는 황해, 박노식, 장동휘, 이대엽 등이 있었는데 주로 항일 독립운동이나 반공영화 혹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나 ‘창살 없는 감옥’, 또는 ‘상하이 박’이나 ‘나는 고발한다’ 같은 영화가 그런 범주에 속했고, 나중에 제작되어 대히트를 했던 ‘빨간 마후라’도 같은 계통의 영화였다. 성격배우로는 이예춘, 허장강 등이 있었고, 드라마 배우로는 최무룡, 김진규가 누구보다 인기였다.
신성일과 ‘맨발의 청춘‘
그때 감명 깊게 본 영화는 피폐한 전후 한국사회를 그린 이범선 원작의 ‘오발탄’과 손창섭 원작의 ‘잉여인간’, 그리고 ‘혈맥’ 같은 문예영화였다. 여배우로는 김지미, 최은희, 문정숙, 전계현, 엄앵란, 태현실 등이 있었는데, 문정숙은 늘 바바리 코트를 입고 스산한 가을 길을 거니는 우수에 찬 지적인 여성 역을 맡았고, 윤인자는 술취한 연기가 일품이었다.
한국 영화사에 신성일의 등장은 60년대 산업사회의 시작과 맞물려 이른바 영화의 사회비판시대를 열었다. 물론 단순한 청춘 멜로물이 많았지만, 신성일이 주연했던 영화들 중에는 산업사회 속에서 때로는 왜소해지고 또 때로는 출세를 위해 야망을 펼치다 파멸하는 현대인의 삶을 그린 것이 많았다. 김승옥 원작의 ‘안개’도 그렇지만, 6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맨발의 청춘’이나 ‘위를 보고 걷자’ 같은 영화도 당시의 그러한 사회상을 잘 나타낸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여자가 극장의 주요 관객이어서 여성을 울리는 멜로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나는 그중 아역배우를 등장시켜 관객들의 눈물을 유도하는 영화를 싫어했다. 왜 순진한 어린아이를 동원해 갈라서는 엄마 아빠 사이를 오가며 두 시간 내내 신파조로 울게 만드는지, 또 왜 관객들은 그걸 보며 그렇게 울어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얼마나 강렬한 호소력으로 당시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70년대에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단연 최인호 원작,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를 살던 젊은이들의 좌절과 방황, 그리고 고뇌와 고민을 그린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탄탄한 영화다. 물론 테크놀로지 면에서가 아니라, 주제나 메시지나 상징적인 장면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60년대에 이미 대학생활을 마쳤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나의 대학생활과 당대의 정치상황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바보들의 행진’ 속편에 해당하는 ‘고래사냥’과, 역시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 또는 조해일 원작의 ‘겨울여자’도 당시 산업사회의 인간소외를 잘 그려낸 영화들로 기억된다.
최근 한국영화가 많이 좋아졌다는 평을 받는다. 내가 아는 감독들만 해도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뛰어난 감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분이 많다. 예컨대 ‘301/302’의 박철수 감독,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 ‘49일의 남자’의 김진해 감독 등은 상업적 흥행과는 무관하게 우리 영화의 수준을 높이고 미래를 밝게 해주는 믿음직스러운 감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에는 여전히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흔적이 별로 없다. 심지어 흥행에 성공해 마치 대작영화처럼 여겨지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JSA’조차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제작비를 많이 들인 큰 스케일의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특히 배경이 판문점으로 고정되어 있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는 마치 연극을 영화로 만든 것 같은 소품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외화의 경우에는 시고니 위버의 ‘진실’이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런 영화들은 주로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게 되는데,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면전환이나 시공의 이동, 또는 사건의 발발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외시장에서는 자칫 별로 공들이지 않은 ‘저예산 영화’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나는 한국영화가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 또는 ‘허준’ 정도의 주제와 스케일과 극적 구성을 갖춘다면 세계시장에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장점을 조화시켜 보는 것도 우리 영화를 세계화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