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지하 토용병마군단이 위용을 자랑하고, 양귀비가 발가벗고 현종의 혼을 빼던 화칭못엔 오늘도 뜨거운 온천이 솟아오르고, 비림(碑林)엔 당·송대의 명필들이 휘갈겨 쓴 명문들이 고스란히 음각돼 살아 꿈틀대고, 장쉐량(張學良)이 국공합작으로 항일(抗日)을 외치며 장제스(蔣介石)를 납치할 때 핑핑 날던 육혈포 총탄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칼자루를 쥔 강자만 비추는 법. 역사의 꽃밭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힘없는 잡초들은 밭둑 아래 그늘진 곳에서 기약 없는 목숨을 이어간다.
인간은 지구상에 출현하면서 자연동굴을 주거지로 삼는 혈거(穴居) 생활을 했다. 인류사에 가장 유명한 혈거 유적은 구석기시대 중국 화북지방의 주구점(周口店)이다. 비바람과 추위를 막고 맹수의 습격을 피할 수 있는 자연동굴은 그 희소성과 집단주거의 필요성 때문에 신석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인공 동굴 형태로 바뀐다.
그 후 문명이 발달하며 인간들은 굴에서 나와 지상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이 혈거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안의 응달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땅굴 속에서 살아간다.
시안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50여km, 산시성 란톈현 유팡샹의 양좡춘 마을 80여 호는 완만한 언덕 중턱에 땅굴을 파고 살며 깨·밀·옥수수·고추농사를 짓는다.
주거형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 마을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60여 호는 수천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살아온 그 방식대로 땅굴 속에서 살고 20여 호는 땅굴에서 나와 지상에 집을 짓고 산다.
곱게 늙은 자신티엉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가 일흔에서 두세 살이 빠진다고 말한다. 우선 자신티엉 할머니의 집구조를 살펴보자.
25년 전에 여럿이서 지었다는 이 동굴집은 구조상 다세대 주택이다. 먼저 가로 10여m, 세로 6m, 깊이 5m쯤 되는 직육면체형 구덩이를 남향으로 반듯하게 판다. 가로 10여m인 남쪽벽엔 두 개의 동굴을 내고, 각각 6m인 동쪽, 서쪽벽엔 1개씩의 동굴을 아치형으로 뚫는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걸 막으려면 정교한 아치형 구조는 필수적이다.
이렇게 해서 북쪽벽에 둘, 동·서벽에 각 한 개씩 모두 네 집의 다세대 동굴집이 생겨난다. 지하 5m 깊이에서 10 X 6m 크기의 마당을 네 집이 공유한다.
비가 내려 마당에 괴는 물은 집수정에서 땅밑으로 매설한 토관을 타고 마당보다 낮은 언덕 아래 도랑으로 나간다.
이런 블록이 그 앞에 또 하나 있는데, 두 블록은 아치형 통로로 연결되었다. 경사진 언덕에 조성되어 앞블록의 마당은 뒷마당보다 훨씬 얕아서 앞마당 남쪽이 바깥과 접한 부분의 깊이는 2m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횡렬식 토굴집의 절대적인 축조 조건은 언덕진 점토질 땅이다.
뒷블록 북쪽면 서쪽의 자신티엉 할머니 동굴집 내부를 한번 들여다보자. 둥근 아치 천장은 점토가그대로 노출되었지만 사람의 손이 닿는 벽면은 부분적으로 도배되었다. 7∼8평이 될까 말까 한 공간에 네 식구가 살아가려니 너절한 살림살이로 발디딜 틈이 없이 비좁기만 하다.
며느리는 딸들을 남겨둔 채 어느날 밤 도망가 버렸고, 시안역 앞에서 신을 기워주는 일을 하는 아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들르고, 4살 아래 영감님은 병든 딸을 돌보러 사위집에 간 지 몇 달째라, 할머니는 지금 손녀 둘과 함께 살아간다.
자신티엉 할머니는 이웃에서 얻은 사과를 내놓으며 동굴집 자랑을 늘어놓는다.
“돈을 모은 집은 동굴에서 나와 벽돌집을 짓고 살지만 여름이면 더워서 쩔쩔맨다오.”
▶여행안내
시안(西安)여행을 하면 진시황을 만나고 양귀비와 당 현종을 만나고 현장법사를 만나는 게 보통이지만 하루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토굴마을에도 가볼 일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역사의 현장을 보다가 갑자기 가난에 찌든 토굴 속의 서민들을 보면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세월이 흘러도 진시황의 지하 토용군단은 그대로 있겠지만 토굴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시안 시내에서 조선족이 중국인을 상대로 문을 연 조그만 식당 ‘순룡(順龍)불고기’집에도 들러볼 일이다. 숯불 불고기도 좋지만 개고기껍질 무침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