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오래 살려면 笑盲부터 치료하라”

유머達人 4인의 웃음철학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황일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4-20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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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삼아 남에게 웃음을 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 팍팍한 세상은 그들의 건강한 유머로 말랑말랑해진다.
    • 4인의 유머리스트가 털어놓은 유머예찬.
    “웃길 준비 끝? 성공 예약 끝!”

    개그작가, 유머 코디네이터, 코미디학과 교수, 한국소맹(笑盲)퇴치운동본부장, 한국 코미디스쿨 원장…. 김재화씨(49)의 직함은 무려 10여 가지에 이른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웃음’과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웃음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이다.

    김씨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73학번이다.



    시골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그의 아버지가 선생님이 되라고 권했을 때 그는 “연극영화과에 가도 교직과목을 이수하면 국어선생님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김씨는 약속대로 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하긴 했지만, 교단에 서기도 전에 방송국에 스카우트돼 개그작가의 길을 걸었다.

    1974년 TBC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개그 프로그램 ‘살짜기 웃어예’를 시작했다.

    임성훈, 송영길, 고영수, 전유성 등이 출연했는데, 김씨는 때리고 넘어지는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와는 성격이 판이한 작품을 선보였다.

    “서영춘과 배삼룡을 보고 무조건 웃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로 웃기는 코미디를 보여준 거죠. ‘전깃줄에 참새가 10마리 앉아 있는데 포수가 총을 쏘았더니 9마리는 죽고 1마리가 살았다.

    그 참새가 뭐라고 했을까’ 이렇게 물으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게 당시의 개그였어요.”80년대. 김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유머1번지’ 제작팀에 합류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동작그만’ ‘부채도사’ ‘아르바이트 백과’ 등이 그가 참여해 히트한 작품이다.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강연을 요청하는 곳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인의 웃음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죠. 제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 우리 사회는 여러 모로 웃음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한국소맹퇴치운동본부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였죠.”소맹퇴치운동본부 초대 이사장은 양성철 전 국회의원(현 주미대사)이었다.

    양 전의원이 미국으로 떠난 뒤부터 이사장 자리는 공석이다.

    당연히 활동도 주춤한 상태. 김씨는 조만간 새 이사장을 영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유머는 섹스 같은 것

    김씨는 소맹퇴치운동본부를 설립하던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병원이 운영하는 ‘유머 워크(Humor Work)’라는 연구소에 다녀온 일이 있다.

    이곳은 사람의 웃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기관인데, 웃을 때 신체의 근육이 몇 개 움직이는지, 호르몬이 얼마나 분비되는지를 실험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사람을 임상 실험한 적이 있었대요. 한 사람에겐 마취제를 투여하고, 다른 사람은 겨드랑이를 간질였답니다.

    그리고는 간단한 수술을 했는데, 마취제를 맞은 사람이 통증을 더 느끼더랍니다.

    다시 말해서 웃을 때는 우리 몸의 통증이 줄어든다는 거죠. 섹스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오르가슴에 도달하면 칼로 상처를 입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거든요.”미국을 다녀온 뒤 김씨의 활동 폭은 더욱 넓어졌다.

    한국 최초의 코미디 스쿨을 만들고 동아방송대에서 개그창작을 강의했다.

    모두가 유능한 웃음꾼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김씨가 자칫 외설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는 ‘전국 Y담대회’를 연 것도 이때다.

    “코미디와 섹스는 즐겁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죠. 까놓고 말하는 것보다 은밀하게 했을 때 더 재미있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성적인 웃음은 남녀 모두에게 최대의 관심사인데, 그 동안 억압해온 측면이 많았어요. 그것을 공개적으로 한다니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Y담대회에는 고등학교 교감선생님, 가정주부, 대학생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고, 유명인사들도 찬조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날 대상을 받은 어느 대학생의 ‘정치인 Y담’은 PC통신 등을 통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최근 인터넷 방송에서 ‘세계 섹스조크대회’를 열자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세계 각국의 섹스조크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자는 거죠. 저는 7월7일을 ‘웃음의 날’로 선포하고 ‘웃음박람회’를 열 예정인데, 그때쯤 세계 섹스조크대회를 열었으면 하는 생각이에요.”김씨는 성(性)을 소재로 한 칼럼니스트로도 필명을 날렸다.

    그가 6년째 스포츠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에로비안나이트’는 일상생활을 성적으로 풀어내는 칼럼이다.

    대권주자가 사창가에 출입했을 때 벌어지는 가상 시나리오, 백지영 비디오 파문을 즐기는 한국 남성들의 관음증을 질타한 격문, ‘매춘과의 전쟁’을 선포한 김강자 종암경찰서장에게 보내는 편지 등은 대단한 화제가 됐다.

    또한 지난해부터는 ‘일요신문’에 ‘골프&섹스, 19홀에서는 버디를’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며 골프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Y담과 골프와 섹스의 공통점 등을 코믹하게 들려주고 있다.

    김씨는 한국인의 ‘웃음 부족증’ 원인을 순탄치 못했던 과거 역사에서 찾는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통일신라의 장보고를 끝으로 한민족은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다는 것. 늘 쫓겨다니다 보니 웃고 싶어도 웃을 여유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사람을 바꾸는 웃음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국밥이나 비빔밥이잖아요. 빨리 먹고 도망가야 하거든요. 그런 상황에 누가 누구를 웃길 수 있었겠어요.”그는 근엄함과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도 유머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한다.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들이 적게 웃는다는 과학적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여성들은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자의 웃음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금기로 여겼잖아요. 기방에서 남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기생의 어색한 웃음을 ‘각기함소(各妓含笑)’라고 하거든요. 조선의 여인들은 그렇게 웃음을 자제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김씨의 진단에 따르면 한국 사람의 상당수는 소맹이다.

    웃음이 나오는 통로가 막혀 있다는 뜻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웃지 못하는 환자’라고나 할까. 김씨는 그래서 우리도 미국처럼 ‘웃음치료사’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웃음이 차단된 공간이 많잖아요. 교도소, 군부대, 노사분규 현장…. ‘웃음치료사’는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개그맨들과 함께 소외된 지역을 다니면서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도 세워놓았다고 한다.

    자신은 웃음에 대한 강의를 하고, 개그맨들은 실제로 웃음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형식이다.

    “언제 어디서든 조금만 노력하면 웃음을 만들 수 있어요. 특별한 재주가 없으면 말장난을 해볼 수도 있고. ‘Pun(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 is fun’이란 우스갯소리도 있잖아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외국인이 한국 젊은이에게 길을 물었는데, 몇 번이나 못 알아들은 젊은이가 신경질을 부리며 ‘아이, XX놈이’라고 욕을 했대요. 그러자 외국인이 젊은이를 계속 따라가더랍니다.

    왜 그랬을까요? 외국인은 ‘I see. Follow me’라고 알아들은 거래요. 단순하지만 이런 정도의 유머만 구사해도 세상은 훨씬 밝아질 거예요.”그는 ‘웃음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수백 차례의 강연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말 그대로 ‘웃음은 최고의 보약’이라는 것이다.

    “잘 웃는 사람은 내장이 튼튼합니다.

    웃을 때 배가 아픈 것은 그만큼 장이 운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죠. 인상을 쓸 때는 근육이 2∼3개밖에 안 움직이지만, 웃을 때는 30개 이상의 근육이 움직입니다.

    15초 동안 웃으면 3분 동안 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웃으면서 들은 얘기는 오래 기억해서 좋고, 웃으면서 말하면 상대방이 호감을 가져서 좋지요. ‘일노일로(一怒一老) 일소일소(一笑一少)’처럼 지혜로운 말씀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웃고 싶어도 세상이 암울하다면 마음대로 웃을 수 없는 노릇이다.

    분위기가 우울한데도 무작정 웃는다면 정상이 아닌 사람일 것이다.

    김씨도 이를 인정한다.

    한국인의 소맹을 근원적으로 퇴치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머는 따뜻한 인간애의 표현입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유머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성의껏 들어줘야겠죠.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허무개그’를 보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그건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답하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그런 썰렁한 유머가 유행하는 거지요.”김씨는 지난해부터 예원대 코미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코미디학과 또한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이로써 김씨는 “연극영화과에 가서 선생님이 되겠다”고아버지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됐다.

    ‘국어선생님’이 ‘코미디학과 교수’로 바뀌긴 했지만. 그는 앞으로 한국의 해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한국 최초의 개그맨 전유성 연구’도 꼭 쓰고 싶은 논문 주제라고 한다.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일상을 발칵 뒤집어보라”

    올해 마흔 한살의 소설가 성석제씨는 문학계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거침없는 입심의 소유자, 너스레의 달인으로 불린다. 그의 글은 서사와 우화,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생생한 돌발상황을 끊임없이 촉발함으로써 ‘소설=고상’이라는 관념을 여지없이 전복(顚覆)시킨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에 따르면 그는 “서사라는 행위에 잠재된 장난을 능청맞게 연출”하며 사람들을 홀린다. 이런 재주는 그의 독특한 유머철학에서 나온다.

    “유머는 간단치 않습니다. 특유의 고집스러운 정서가 있어요. 예를 들면 ‘기쁘다’는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하다’는 더 깊고 포괄적인 감정상태를 내포합니다. 유머는 바로 후자와 닮았죠. 엄숙함과 강함이 풍자로 무너지는 데서 촉발되는 게 유머입니다. 그러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대상을 형편없이 만들면 그건 공격이지 유머가 아닙니다.”

    성씨는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바라보는 부류가 있는 반면, 가볍고 집착이 별로 없으며 낙천적인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후자가 전자에게 농담을 거는 것이 그가 말하는 유머다. ‘유머’를 둘러싸고 이렇듯 전혀 유머러스하지 않은 대화가 몇 마디 오가자 갑자기 그가 자세를 바꾸며 말머리를 돌린다.

    ‘월급쟁이 K는 아침이면 출근해 회사에서 일만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텔레비전을 보다 잠드는 게 하루 일과다. 예외가 거의 없다. ‘1’부터 ‘12’까지 적힌 숫자판을 365일 멈추지 않고 제자리 돌기 하는 시계바늘처럼 틀에 박힌 생활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K에게 얼마 전부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인터넷에 접속해 새로운 유머를 체크하는 일이다. 왜? 요즘 사람들은 유머러스한 남자를 좋아한다니까.

    방송국 PD인 L은 자타가 공인하는 Y담의 대가다. 회사 복도든 술자리에서든 그와 마주치면 누구도 Y담을 듣지 않고 지나칠 수 없다. L의 주머니에는 늘 손바닥만한 수첩과 볼펜이 들어 있다. 수첩을 들춰보면 깨알 같은 글씨의 Y담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일상의 전복(顚覆)이 주는 웃음

    성씨는 “유머러스해지려고 매일 유머를 체크하고 수집하는 상황, 바로 이런 상황은 그로테스크할 뿐 아니라 유머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작 그의 유머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너나 없이 가난하던 60∼70년대 시골마을. 그 시절 ‘상이군인’ ‘거렁뱅이’ ‘문둥이’ ‘미친 여자’는 어느 마을에서나 마치 풍경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초등학생인 성씨에게 상이군인은 ‘왜 팔에 쇠갈고리를 달았을까. 나 같으면 방울을 달 텐데’ 하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 상이군인이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평소 깡통 밥이 너무너무 맛있게 보여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더군요. 그래서 툇마루에 상이군인과 마주앉아 도란도란 깡통 밥을 먹고 있는데 부모님이 돌아오셨어요. 상이군인은 당장 쫓겨났고 저는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문득 그의 소설 ‘순정’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주인공 이치도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슬며시 겹쳐진다.

    걸핏하면 악다구니를 퍼붓는 술집 주인 어머니와 허구한 날 술주정에 싸움질을 일삼는 한심한 땜장이 아버지를 둔 이치도는 온갖 욕설과 몽둥이 찜질에도 끄떡없이, 꿋꿋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느 날, 아버지의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던 집에서 어린 이치도는 슬그머니 소주병을 챙겨들고 나와 엿장수에게 간다. 나중에 엿장수는 이렇게 말한다.

    “제 애비가 됫병짜리 소주병에 담긴 석유를 먹고 죽었다는데, 얘가 그 병을 들고 와서 엿을 바꿔 달라더라구. 내가 보는 앞에서 눈도 깜빡 안하고 엿을 쪽쪽 빨아먹는데, 공동묘지에서 여우가 해골을 빠는 것 같더라니까. 내참 기가 차서….”

    성씨는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각자의 대처방법에 따라 유머러스할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다”며 “돌발적으로 솟구쳤다 사라지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생생한 현실 상황,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켰다가 그걸 한번 탁 꺾어서 예상을 여지없이 빗나가게 하는 기지(奇智), 무안하거나 민망한 기색 없이 천연덕스러운 행동이 빚어내는 유머를 좋아한다”고 유머관(觀)을 들려준다.

    그는 힘들고 우울한 상황에도 낙천적이고 엉뚱한 짓을 곧잘 저질러 웃음짓게 만드는 사람에게 애정을 느낀다. 때문에 다소 엉뚱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이치도 같은 인물이 그에게는 편안하고 익숙한 존재로 다가선다.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 황당하고 어이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통해 일상의 전복을 꾀하는 성씨의 유머는 그래서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유머에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조롱이나 희화화, 가시가 없다.

    “주변에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유머러스한 친구들을 세 유형으로 나눠볼까요? 우선 ‘교향곡 스타일’이 있어요. 이 친구는 말을 할 때 적당한 속어나 비어에 박력있는 행동까지 가미하죠. 또 다른 유형의 친구는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 말 자체를 재미있게 합니다. 나머지 한 친구는 온몸으로 인생을 사는데, 그의 삶 자체가 유머로 가득합니다. 생김새도 좀 싱거워 보이지만, 자신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옵니다.”

    잘 웃기는 친구들과 자주 술자리를 갖는다는 성씨는 그들의 말투와 몸짓, 눈빛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서 소설 재료로 삼는다.

    쓰라리고 슬픈 ‘ 진짜 유머 ‘

    즐거운 대화와 유머러스한 상황을 즐기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성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은 대부분 60∼70년대의 도시 변두리나 시골 읍내 등 서민들의 공간이다. 그는 왜 이미 흘러간 지난한 삶에 끈질기게 매달릴까.

    “어린 시절 제가 익숙하게 보아온 광경이고 삶이기 때문에 일단 그리기가 편안해요. 또한 팍팍한 시대를 살아온 작가로서 자기 시대에 대한 방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월급쟁이든 사장이든 제 또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난한 어린 시절의 상처 하나쯤은 가슴에 간직하고 살 겁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절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 그때 이야기를 자꾸 쓰게 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는 부부싸움, 술주정꾼의 고함소리가 담벼락을 흔들고, 먹고 살기 위해 악을 쓰며 부대끼는 사람들 속에 능청맞고 엉뚱하고 황당한 주인공을 슬쩍 끼워넣어 눈물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게 성씨 특유의 유머감각이다.

    “그 시절 고달픈 서민들의 삶은 그 동안 많은 작가들이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저는 같은 시대를 조금은 덜 어둡고 덜 우울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인물을 내세워 유머러스하게 끌고 갑니다.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영국 총리를 지내고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처칠은 “유머의 가장 심오한 요소는 쓰라림과 슬픔이다. 그것은 내면적으로는 아픔으로 작용하지만 외적으로는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성씨의 유머는 바로 이 점을 관통하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요즘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그 틈에서 사람들 역시 바쁘게 사니까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늘 있는 그대로, 사실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생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유머는 바로 그런 상황을 깨뜨리며 윤활유 노릇을 합니다.”

    한국에서 유머가 주는 위험은 자칫 ‘실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데 있다. 사람들을 일부러 웃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인터뷰 말미에 성씨가 눈빛을 빛내며 들려준 경험담 하나.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에 걸렸어요. 옆에 나란히 와서 선 차가 하필이면 경찰차였습니다. 순간 찔리는 구석이 있던 친구가 슬쩍 곁눈질을 하다 경찰관과 눈이 마주쳤어요. 직업적인 감각이 발동했던지 경찰관이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요. 결국 친구는 경찰관에게 5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네주고 위기를 모면했어요.

    경찰관이 돌아간 후 친구에게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줬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 덤덤한 표정으로 ‘괜찮아, 부도난 수표야’ 하는 겁니다. 경찰관한테 봐달라고 찔러준 돈이 부도수표라니…그제서야 둘이서 한참 웃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생생한 유머다 싶어서 소설 쓸 때 당장 써먹었죠.”

    “과도한 비탄의 강요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유머의 힘”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박은경 자유기고가

    “ 쉼없이 눈치보고 우회하고 풍자하라 ”

    장진씨(31)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희곡 작가에 연극연출가다. 종종 그를 특정 직업으로 지칭하는 데 난감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의 다양한 직업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문화예술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다 연기자와 MC 영역까지 넘나드는 장감독은 “일상에서 레크리에이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기억 한 토막. 수업시간에 호랑이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며 묻는다. “오늘 어디 할 차례지? 사(4) 단원? 자, 단원 사…” 이때 장감독이 선생님의 말을 재빨리 가로채며 “안 사요” 하고 소리친다. 조용하던 교실이 폭소로 떠들썩해지고 수업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매질과 함께 선생님의 성난 목소리가 이어진다 “넌 반드시 1000대를 채우고 2학년에 올라갈 거다. 너한테 필요한 건 맷집밖에 없다.”

    숙명여대에서 특강을 하던 장감독에게 한 여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 스크린쿼터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국 영화 보호라는 명분은 있지만, 정책적으로 묶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감독님은 스크린쿼터 사수하자는 시위에 나가셨어요? TV에 얼굴이 나오던데.”

    “선배들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가긴 갔지만 양심에 찔려 뒷줄에 있었어요. 구호도 정말 작은 목소리로 외쳤는데….”

    학생들의 왁자한 웃음에 그제서야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표정으로 잠시 얼떨떨했다는 장감독이다.

    “학생들 앞에서 거짓말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그게 학생들의 예상과는 빗나갔던 모양이에요. 변명 비슷한 거라도 늘어놓지, 설마 그렇게 까놓고 말할 줄은 몰랐겠죠. 이렇게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빚어내는 웃음과 재미, 바로 그런 게 진짜 유머라고 생각합니다.”

    유머로 메세지 전달

    그의 작품은 흔히 ‘위트’와 ‘재미’ ‘유머’로 요약된다. 그의 천부적 유머감각은 ‘무척 재미있는 분’이었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는 뜻밖에도 그런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많이 맞으며 컸다고 한다. “입만 떼면 헛소리 아니면 엉뚱한 소리만 하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헛소리라서 야단을 맞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제 얘기에 공감을 못 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타박을 들으면서도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나 반응을 살펴가면서 웃기는 게 재미있어서 ‘헛소리’를 멈출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는 유머를 구사하면서 ‘반응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 사람들의 요구를 못 읽고 흐름에 뒤처지면 동시대인들이 유머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대중의 기호와 호흡을 놓치지 않고 따라잡아야 할 뿐 아니라 반 발 정도 앞서가야 훌륭한 유머죠.”

    재미있게 사는 그도 가끔은 딜레마에 빠진다. 가령 ‘나는 별로 재미없는데 관객의 반응은 열렬할 때’ 그렇다. 그는 갈수록 유머에 대한 감각이 급변하면서 거칠어짐을 느낀다고 한다. 더러는 감을 잡기가 미묘해 극도의 예민함이 요구될 때가 있다는 것.

    그가 유머를 통해 추구하는 건 ‘재미’다. 그래서 재미있게 일하고, 재미있게 놀고, 재미있게 산다. 그는 재미가 없으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크랭크인한 영화 ‘킬러들의 수다’는 “우리에겐 늘 누군가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심정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도 킬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은 데서 착안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정말 진지하게 “킬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장진식 유머’다. 그의 유머는 작품 곳곳에 태연한 얼굴로 도사리고 있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이다.

    신부:고백성사 본 지 얼마나 됐죠?

    재영:이번 주는 일을 그다지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다섯 정도…죽였습니다.

    신부:저런… 농구부 한 팀이구먼. 그래도 한결 조금 죽였네요. 그래, 아무튼 될 수 있으면 사람을 죽이진 말고, 정 힘들면 그렇게 숫자라도 좀 줄여나가고….

    영화 ‘기막힌 사내들’에서는 도둑질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죄수가 석방되는 날 감방동기들이 한자리에 모여 엄숙하게 송별곡을 불러준다.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는 잡히지 말아요…”. 그의 유머는 이렇듯 슬쩍 상식을 무너뜨리면서 재미와 웃음을 자아낸다.

    “내가 만드는 영화 속의 유머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우회하는 쪽을 좋아한다”는 장감독은 작품에서 반드시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담기 위해 유머를 도구로 쓴다.

    요즘은 의도적이거나 강압적인 메시지가 전혀 먹히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우회적, 풍자적으로 대사와 상황을 끌고 간다고 한다. 관객이 유머러스한 재미에 빠지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메시지에 스며들게 유도한다.

    “기분좋은 자극을 주는 유머가 있는가 하면 미세한 충격을 주는 유머가 있습니다. 후자는 의외의 상황, 의외의 반응이 주는 즐거움으로 나타납니다. 80년대까지는 무겁고 답답한 사회 상황이 유머를 요구했지만, 지금은 불안함이 유머를 필요로 합니다. 최상의 유머란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장감독은 본능적으로 보고 느낀 대로 재미있는 것을 좇아 기억에 저장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는 드물게 적지 않은 골수팬을 확보하고 있다. 젊은 ‘장진 마니아’들은 “재미있고 신선하고 깬다”며 그의 영화를 치켜세운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그런 관객을 웃기고 재미있게 만들까” 하는 게 장감독의 고민이다. 그렇지만 고민하는 얼굴에도 웃음이 서려 있다.

    “서른 살이 넘었으니 지금 죽어도 ‘요절(夭折)’은 물 건너갔고… 아무튼 급사(急死)든 뭐든 제가 죽었을 때 사람들 사이에 제가 어떻게 남아 있을까를 가끔 생각합니다. 그때 ‘그 자식 참 자유롭게, 재미있게 살다 죽었구나’ 하는 얘기나 들었으면 좋겠어요.”

    ♣박은경 자유기고가

    “ 점잔빼는 부모가 박제된 자녀를 만듭니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 ‘선교사’라는 공식 직함으로 16장의 음반을 낸 복음성가 가수. 서울대 성악과를 나와 서울시립합창단에서 관록을 쌓은 경력. 100kg이 넘는다는 당당한 체구…. 약속장소로 나가는 길에 그의 프로필을 대충 훑어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연스레 ‘경건’ ‘거룩’ ‘고결’ 부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사정없이 ‘깬다’. 프로필로 넘겨짚은 선입견을 깨고, ‘이런 말을 하겠거니’ 하는 예상을 깨고, 그 스스로 자신을 ‘엄청 깨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87년 데뷔 이래 지금까지 100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팔아치운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기독교 대중음악) 가수 박종호씨(39)는 한마디로 ‘생날라리’다.

    “창원에 공연 갔을 때 일이에요. 객석 구석에 웬 양아치 애들이 몰려와서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조용한 노래를 부를 때는 몸을 배배 꼬고 있더니만 힙합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하니까 ‘어쭈! 저 자식 골때리네’ 하면서 몸을 움찔움찔하는 게 보이더군요. 그리고나서는 그냥 신나게 놀았어요. 살 떨어져 나가게 흔들어대고, 소리지르고….”

    복음성가라면 다들 고상하고 얌전빼는 노래로 알겠지만 박씨 앞에서 그런 편견은 금물이다. 대개 올림픽 체조경기장 같은 대형 무대에서 현란한 조명과 ‘빵빵한’ 사운드를 활용해 노래부르는 그는 공연 내내 관객을 ‘가장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가진 공력을 죄다 쏟아붓는다.

    랩, 재즈, 레게, 록, 클래식을 무시로 넘나드는 레퍼토리, 전문 댄스팀의 안무에 따라 육중한 몸을 흔드는 격렬한 힙합춤, 쉴새없이 뒤바뀌는 다양한 표정은 객석을 간단없이 웃음바다로 만든다.

    그의 춤은 그저 양념 삼아 추는 게 아니다. ‘한국의 파바로티’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은 미성(美聲) 못지않게 춤솜씨 또한 자타가 인정하는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재미가 있어야죠. 돈 내고 공연 보러 온 사람들인데 질 높은 상품으로 만족시켜야죠. 특히나 아이들은 일단 마음이 열려야 ‘저놈은 내편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그런 후에야 복음이 들어가든 메시지가 들어가든 할 것 아닙니까.”

    편가르지 말고 당당하라

    박씨의 이러한 공연철학 덕분에 한 차례에 2억 원 가까운 돈을 쏟아붓는 그의 콘서트는 늘 만원이다. 공연 때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비(非)기독교인들이 관객의 30%쯤은 된다는 게 그의 자랑.

    “우리끼리 농담삼아 그러지요. ‘예수 안 믿는 어린 마귀새끼들, 교회 떠난 날라리놈들 잡으러 공연 다닌다’고.”

    결국 그가 뿜어대는 웃음과 재미는 ‘선교’를 위한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그렇지만 웃음을 전략으로 선택한다고 해서 아무나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 뭔가 독특한 비결을 기대하며 그만의 ‘유머원론’을 청했다.

    “즐거움을 주는 비결요? 편가르기만 안 하면 되는 것 같아요. 편을 가른다는 건 결국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거든요. 가령 ‘저놈이 내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저걸 받아들이면 우리 고유의 모습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같은 두려움 말입니다.”

    그는 “남들에게 웃음을 주며 살고 싶다면 우선 당당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생기면 마음은 열리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정말 재미있는 말과 웃음이 가득한 인간관계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 특별한 준비나 특화된 기술 없이도 그가 유머 넘치는 사람으로 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깊이’에 있는 듯하다.

    여느 기독교인들에게선 좀체 듣기 어려운 걸쭉한 입심이 그의 당당함을 잘 드러내 보인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얌전한 이미지가 제일 싫다”는 그다. 특히 지나치게 경건한 부모 때문에 박제처럼 얌전해진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욕지거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고, 쉴새없는 수다에다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며 제스처, 손짓 발짓을 총동원하는 그와의 대화는 흡사 껄렁껄렁한 말썽꾸러기 고교 동창과 마주한 술자리 같았다.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왜 저를 안 불러주는지 모르겠어요. 서세원 같은 사람하고 붙여놓으면 두 시간쯤은 정신 못차리게 떠들 수 있는데…. 종교 매체에서야 불러주지만 그런 곳에선 저에게 요구하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거기에 맞추는 건 성질에 안 맞죠.”

    그의 ‘성질’은 기독교에 귀의하기 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다. 선화예고 다닐 때부터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나 어떡해’ 같은 대중가요를 불러제꼈고, 대학 시절에는 장안의 물좋다는 나이트클럽을 누비며 정신없이 퍼마시고 피워댔다. 그는 그런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끌어안으면서 또 한번 예상을 깬다. “그런 시절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있겠어요? 모든 게 일종의 준비였다고 생각해요. 그때 열심히 나이트클럽을 드나들었으니까 지금 이 나이, 이 몸매에도 힙합을 소화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며.

    그렇다고 그를 쇼맨십에나 기대는 가수로 생각한다면 이만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인 성량에 늘 최고만을 고집하는 편곡과 연주로 그는 내로라하는 대중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금도 미국 매네스 음대 대학원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면서 방학 때만 귀국해 공연을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보수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질타, 대화 중에 내뱉은 욕설을 그대로 인용해도 좋겠느냐”고 묻는 기자의 소심한 염려를 그는 단칼에 날려버린다.

    “즐거운 건 목숨 걸고 하지만 내게 불편한 일은 절대로 안 해요. 그런 말들이 불편했다면 아예 하지도 않았겠죠.”

    스스로 즐거워야 남들도 즐겁다? 역시 ‘CCM계의 생날라리’다운 끝맺음이다.

    ♣황일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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