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시묘하는 동안 적막한 공간에 혼자 있다 보니 새들과 친해지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소리를 내면 새들이 자기 친구인 줄 알고 초막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 ‘구경 중에는 사람 구경이 최고’라는 말이 있듯이, 명택에 살고 있는 명인을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세상 사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배우는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울 때 그 즐거움은 더욱 증폭된다.
천안에서 온양온천까지 가서 다시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외암리 민속마을이 나온다. 새마을운동 이전의 한국 시골 풍경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외암마을이다. 모두 65가구 중 50여 가구가 초가다.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만 보고 살다가 누런 지붕을 인 초가들을 바라보니 삶의 긴장이 풀린다. 오밀조밀하게 열려 있는 돌담길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이끼 낀 돌담에 스며 있는 냄새를 맡아보니 세월을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나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예안이씨 종가는 마을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있다. 이 동네에서는 참판댁이라고 일컬어진다. 하마석(下馬石) 앞에다 차를 세우고 선비 집안의 품격을 갖춘 솟을대문을 지나니, ‘성인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의 ‘희성당(希聖堂)’ 편액이 걸려 있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 앞에서 집주인이자 예안이씨 종손인 이득선씨(李得善, 61)가 반갑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필자가 이 집을 찾아온 까닭은 이 사람의 ‘시묘살이 3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이득선씨가 체득한 내공(內功)이 바로 ‘3년시묘(三年侍墓)’. 일생 동안 한학자로 살던 부친(李用聖, 1903∼1970)이 돌아가시자 묘 옆에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년 동안 생활하며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염을 간직했던 것이다.
현대에 살면서도 동시에 200∼300년 전의 ‘중세적 삶’을 경험한 인물이라고나 할까. 유교의 관혼상제 가운데 가장 고난도 의례가 3년시묘라는 장례절차일 것이다. 여기에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이득선씨다. 아마도 남북한을 통틀어 근래에 3년시묘를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은 이득선씨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필자가 본 이득선씨의 첫인상은 예상과 달랐다. 눈빛이 형형하고 깡마른 체구의 대쪽 같은 풍모를 예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올해가 회갑인데도 얼굴 하나 상한 데가 없다. 원래 미남으로 태어난데다가 자기 관리에도 충실했다는 증거다. 분위기가 거칠거나 경직되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맑게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눈빛도 날카롭거나 탁하지 않고 그윽하다. 한국사람으로 이만한 연배라면 온갖 풍상을 다 겪었을 터인만큼 이 정도로 정제된 얼굴과 담백한 기운을 갖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하듯이 일단 얼굴과 풍채가 좋으면 호감이 간다.
부자 2대의 3년 시묘살이
―3년시묘는 언제 하신 겁니까?
“제 나이 서른 살이던 1970년 겨울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시작하여 서른두 살 겨울까지 했죠.”
―3년시묘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의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학까지 졸업한 현대인으로서 굳이 하게 된 이유랄까 동기가 있는지요?
“몇 년 전에 주한 프랑스대사가 저희집에 와서 물은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첫째는 부모님이 나를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품안에서 기르는 기간이 대략 3년입니다. 유교의례에서 말하는 3년시묘의 3년이라는 기간은 부모가 자식을 품안에서 기르던 3년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3년시묘하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부님(李貞烈, 고종때 이조참판을 지냄)이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역시 3년시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당연히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는 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한양대 토목공학과)을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종손이지만 하숙비를 아끼기 위해서 어느 여관의 변소 바로 옆에 붙은 허름한 방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화장실 냄새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밤에는 추워서 마스크 쓰고, 장갑끼고, 코트까지 입고 자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한때는 아르바이트로 외과병원 청소부도 해보았습니다.
종가의 재산을 지키려면 그런 고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그런 내핍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제 학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아야만 했을 겁니다. 광복 이후 토지개혁으로 인해 천석 남짓하던 저희 전답이 거의 해체된 처지여서 살고 있는 집 외에는 별로 남은 재산이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충청도 인근의 몇몇 종가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집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종가가 사라지고 말았죠.
하루는 아버지가 저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와서 자취방에서 주무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내심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저한테는 그런 내색을 안 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가 외암 집에 돌아가셔서 일주일 동안 마루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자식이 고생하는데 내가 어찌 편하게 잘 수 있느냐 하는 심정에서였겠죠. 저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부자지간의 정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는 선비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자긍심이었죠. 저희 집안이 이 지역에서는 소문난 선비집안인데, 그 집의 종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저희 집안의 선비정신이 이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죠. 선친께서는 순종황후인 윤비(尹妃)께서 1966년에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총괄하는 장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저희 집안은 기호학파의 명맥을 잇는 집안이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3년시묘는 양반 중에도 일급양반의 반열에 속하는 계층에서 행하던 상례(喪禮)였다. 유교사회의 중심가치는 효이기 때문에 조선조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 양반일수록 그 신분에 비례해 효를 중시했다. 3년시묘는 그러한 가치관의 산물로 상류층만의 풍습이었다. 지도층이 아닌 하층 양반은 굳이 3년시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체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3년시묘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이자 징표였기 때문에 후에 가서는 이 행위 자체가 신분 상승의 기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걸 행함으로써 그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양반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의례가 사라지고 극소수의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집안에서만 명맥을 이어왔다.
―시묘살이를 시작할 때 이상하게 여기는 주변의 시선이나 반대는 없었습니까?
“처음에는 동네사람들이 반신반의했죠. 잘하면 석 달 하다가 말 거라고 보았죠. 저는 그런 말이 들려올 때마다 반드시 3년을 채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개인적인 자존심도 작용했다고 봐야죠.”
―시묘살이 생활은 어떤 겁니까?
“매일 해뜨기 전 새벽에 묘소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때 시각이 대략 새벽 5시30분 전후가 됩니다. 짚신을 신고 머리에는 굴건(屈巾)을 쓰고 굴건 위에 다시 삿갓(方笠)을 씁니다. 옷은 제복(祭服)을 입고 갑니다. 이른바 ‘굴건제복’을 착용하는 거죠.
집에서 묘소까지 3km 정도 거리인데 걸어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더군요. 묘지에 도착해서는 묘소 앞에서 절을 하면서 아버지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원두막같이 지어놓은 초막에서 생활합니다. 점심은 집에서 준비해간 누룽지로 대신합니다. 시묘하는 처지에 맛있는 반찬을 곁들인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식수는 주변에 있는 옹달샘에서 해결했어요.
초막은 넓이가 가로 세로 2m 정도이고, 지상에서 70cm 정도 높이에 설치했는데 그 모양이 원두막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하루종일 이 안에 있다가 가끔 묘소 둘레를 산책하기도 하죠. 그러다가 저녁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인 유시(酉時) 정도면 집으로 내려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이 일과를 반복하는 것이죠.”
―제일 어려웠던 일은요?
“눈이 올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눈이 올 때는 짚신을 못 신고 장화를 신어야 합니다. 비가 올 때는 고무신을 신고요. 눈이 많이 오면 묘지에도 눈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그 눈을 치울 때 양손으로 눈을 헤쳐서 묘지에 이르는 길을 내고, 그 다음에는 묘지 주변의 눈을 전부 한쪽으로 치웁니다. 그러노라면 두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엎드려서 눈을 치우기 때문에 눈, 코, 입과 가슴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죠. 1분 정도 치우면 관자놀이가 아프면서 머리가 띵하고 코, 입술이 달라 붙습니다. 얼얼하니 감각이 없지요. 그때가 참 힘듭니다. 그러나 10분 정도 손으로 눈을 치우다 보면 ‘탁’하고 얼었던 코와 귀가 터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탁’ 소리가 나면서 터지면 이때부터는 수월합니다. 얼굴 근육이 추위에 적응했다는 신호니까요.”
―힘들게 손으로 눈을 치울 일이 아니라 대빗자루로 눈을 치우면 수월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할아버지 시묘할 때 따라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도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눈을 치우셨습니다. 그때 제가 ‘왜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부모님이 누워 계신 곳을 감히 어떻게 빗자루로 쓴단 말이냐, 정성스럽게 손으로 치워야 법도에 맞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힘들지만 손으로 눈을 치웠습니다. 조부님도 그랬고 선친도 그랬고 저도 그렇게 한 것이죠.”
―하루종일 묘지 옆에 있다 보면 아주 심심할 것 같은데, 어떻게 시간을 보냈습니까?
“인적이 없는 산중 묘지에서 혼자 있으려면 사실 무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양의 고전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편람(四禮便覽)’ 3권을 집중적으로 탐독했죠. 2년이 넘어가니까 거의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책을 보는 것에 지치면 주변에 날아드는 새들을 관찰했습니다. 적막한 공간에 혼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들과 친해진 것이죠. 친해지다 보니까 여러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새들과 친구가 되다
―어떤 새들인데요?
“쑥스럽네요. 제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까치, 참새, 까마귀, 뜸부기, 청둥오리, 비둘기, 기러기, 염소, 닭, 개, 고양이 소리입니다. 제가 소리를 내 부르면 새들이 사람인 저에게 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뜸부기 소리를 내니까 뜸부기가 자기 친구인 줄 알고 초막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참 신기했죠.”
―시묘 3년이 면벽 3년의 수도생활과 비슷했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적막한 자연과 친해진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자연의 소리라고 할까요, 그걸 접한 것 같아요.”
―3년시묘를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3년 동안은 머리도 깎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다 수염이 텁수룩했죠. 그래도 예비군 훈련에는 참석을 해야 했습니다. 예비군 훈련장에 굴건제복에 장발한 사람이 나타나니 훈련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저에게 쏠립디다. 제 몰골이 아마 가관이었을 겁니다. 굴건제복을 하고 예비군 훈련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예비군복을 그 자리에서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예비군 중대장에게 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라고 이야기하자, 다음부터는 예비군 훈련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훈련을 면제받았습니다.
한번은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군청에 꼭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장발에 굴건제복 차림이었죠. 그런데 그 시기가 마침 의례를 간소화한다는 정부의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 때라 군청 직원들이 제 모습을 보더니만 크게 긴장했습니다.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자기들이 상부로부터 문책당할 수 있으니 제발 그만둘 수 없느냐고 설득해요. 그래도 안 되자 군청직원들이 나중에는 제발 군청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합디다. 집에서 전화만 하면 자기들이 대신 일을 처리해준다고 말입니다. 시묘살이 덕을 보기는 본 셈입니다.”
모친상 때는 3년간 마루에서 잠자기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득선씨는 3년시묘를 예정대로 마쳤다. 3년시묘를 하기 전까지 그는 한양공대 토목과를 졸업한 뒤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야 했으므로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70~80년대 건설 붐이 한창일 때였던지라 그는 잘 나가는 건축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실제로 고속도로와 각종 건축공사 현장에서 한양공대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3년시묘를 하는 과정에 인생행로가 일백팔십도 바뀐 것이다. 도시에서 잘 나갈 인생을 포기한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명문가의 종손답다’라는 주변의 평판이었다.
어떻게 보면 ‘중세적 삶’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특수한 삶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그라고 해서 서울과 직장생활이라는 보편적인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종손인 자신이 아니면 누가 집안과 가문을 지킬 것인가 하는 사명감 때문에 생각을 접곤 했다. 흔히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한다. 하지만 이득선씨의 신언서판으로 보면 그는 굽은 소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헌칠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 사례다.
―만약 주변에서 다른 사람이 3년시묘를 하겠다면 권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3년시묘보다는 3년심상(三年心喪)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해보니 상례의 본질은 마음으로 재계(齋戒)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젊어서 건강할 때니까 괜찮았지, 만약 제가 지금 나이에 3년시묘를 했으면 건강이 크게 상해 십중팔구 병이 들었을 겁니다. 병이 들면서까지 하는 예는 과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시묘 대신에 3년집상(集喪)을 했습니다. 집상이란 묘소에 안 가고 3년 동안 집에서 추모의 예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신 잠은 방에서 자지 않고 마루에서 잤습니다.”
정작 자신은 3년 시묘와 3년 마룻바닥 생활을 해내고서도 필자에게는 심상(心喪)을 강조하는 이득선씨, 거기에서 우러나는 겸손이 느껴진다. 말이 마루에서 3년 동안 잠을 자는 것이지, 이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뜻한 보일러 방에 길든 요즘 사람에게 3년 마룻바닥 취침은 감히 엄두도 못낼 고행이다.
어떻게 보면 3년이란 고행 기간은 집중적으로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이다. 그 기간에는 죽음과 삶이 흑과 백으로 확연하게 분리되지 않고 무채색의 중간 상태로 섞여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에 대한, 가장 장중하면서도 충분한 송별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예란 서양으로 치면 매너와 에티켓에 해당할 것이다. 매너와 에티켓의 본질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조선의 예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물론 한걸음 더 들어가 종교적 자기수양 내지 자기완성의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예의 밑바탕에는 극기와 절제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한 극기와 절제가 효라는 유교의 절대가치와 결합하면서 3년시묘라는, 종교적 고행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의미와 과정을 생략하고 겉으로 나타난 형식만 가지고 보면 3년시묘는 쓸데없는 고생에 지나지 않지만, 그 종교적 수양의 의미까지 포착하면 왜 그렇게 조선의 유학자들이 예학(禮學)에 몰두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득선씨가 실천한 3년시묘라는 상례는 서구의 매너를 훨씬 넘어선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의 차원에 속하는 예라고 볼 수 있고, 매너의 차원에서 굽어다 보아서는 결코 납득되지 않는 행위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유교적 고행자이자 아마도 기호학파의 맥을 잇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예학자(禮學者)가 아닐까 한다.
그의 고행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인근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관혼상제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예를 들면 혼인할 때 사주단자는 어떤 종이에 써서 보내는 것인가, 회갑상에 올리는 과일은 무엇이 중요한가, 초상이 났을 때 곡(哭)은 언제까지 하는 건가, 장남이 입는 상복과 차남이 입는 상복은 어떻게 다른가, 제사 때 물을 먼저 올리는가 아니면 차를 먼저 올리는가, 술을 먼저 올려야 하는가 등등이다.
그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고서적을 뒤져보거나 또는 전국의 유명한 전문가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법이다. 한 30년 넘게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제사, 다도, 의복, 고건축, 굿, 음식, 묏자리, 족보, 부적 등 전통문화 전반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과 체험을 갖게 되었다.
이씨는 걸어 다니는 ‘민속학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국의 전통적인 의·식·주 전반에 관하여 막히는 부분이 없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경지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특히 책에도 나오지 않고 오직 관례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세세하고 미묘한 부분들을 짚어낼 때는 마치 1세기 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경지에 있으니 국내외 많은 민속학자들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충청도 시골의 외암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다반사. 복식전문가 석주선씨, 궁중음식 전문가 황혜성씨가 자주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외암마을이 민속마을로 지정된 데도 이득선씨의 공이 컸다. 1978년 당시 충남 도지사였던 정석모씨가 도내에 전통마을을 지정하기 위하여 물색할 무렵, 예안이씨 종가인 이득선씨 집에 1000여 점의 각종 민속자료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기에 외암마을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외암마을은 1988년에 국가지정 전통건조물 보존지구(제2호)로 지정됐다가, 2000년 1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승격 지정되었다. 그만큼 한국의 전통적인 마을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 외암마을이고 예안이씨 종가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낙안의 민속마을에 비해서 상업화되지 않고,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를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동네 전체에 걸쳐 5km에 이르는 돌담길도 인상적이다.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집
그렇다 보니 이득선씨 집을 다녀간 외국인들도 많다. 특히 프랑스 사람들이 이 집을 많이 찾아오는데, 주한 프랑스 대사들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기와, 마루, 솟을대문, 아궁이 등 우리나라 전통문화 전반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세밀하게 물어본단다. 프랑스인 외에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러시아 사람들도 외암마을과 이득선씨 집을 찾아온다.
―외국인들이 찾아와서 주로 어떤 것을 물어봅니까?
“나라마다 성향이 약간 달라요. 독일인들은 주로 한옥의 구조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 고건축에서는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에 들보를 얹을 때 기둥에 Y자형으로 홈을 판 뒤 그 홈 사이에 들보를 얹어놓는 반면, 한국에서는 기둥에 요철 모양의 홈을 판 뒤 그 홈 사이에 ‘사개’(일명 개미허리장)를 박아넣습니다. 그러면 아귀가 꼭 맞아서 전혀 움직이지 않죠. 한국에서 Y자형 홈을 파서 짓는 것은 외양간이나 헛간을 지을 때 쓰는 방식이라고 독일인들에게 설명해줍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돌과 나무에 대해서 많이 물어봅니다. 화강암이 어느 지역에서 많이 산출되느냐, 보령의 오석(烏石)은 주로 어디에 사용되느냐, 가구는 주로 어떤 나무로 만드느냐, 수령이 어느 정도냐, 어느 지역에 좋은 소나무가 있냐 등등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돌 중에서는 오석을 최고로 치고 화강암이 그 다음이죠.
일본사람도 많이 옵니다. 몇 년 전 어떤 일본인이 집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며 무조건 팔라고 하더군요. 손님으로 처음 방문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해서 무턱대고 주인집 물건을 팔라고 말하는 건 예의에 벗어나는 일 아닙니까. 이 집이 어떤 집인데요. 하도 팔라고 하기에 조용히 한마디 했죠. ‘팔 테니까 그 대가로 당신 목을 줄 수 있느냐?’고요.”
이득선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TV방송국에서 촬영을 하러 왔다. ‘족편’이라는 전통음식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이득선씨는 족편에 대해 설명을 하고 부인 최황옥씨(崔晃玉·59)는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가마솥에 장작을 지핀다. 족편에 대한 이득선씨의 설명은 이렇다.
“족편은 암소 앞다리로 만드는 음식입니다. 일종의 묵이죠. 수놈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반드시 암소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리는 한두 개 가지고는 부족하고 네댓 개 정도가 적당해요. 암소 다리도 뒷다리보다 앞다리가 힘을 덜 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죠. 암소 앞다리를 무쇠솥에 넣고 장작으로 4∼5시간 불을 때서 고아야 합니다. 은근한 불에서 고는 게 요령이죠. 중간에 한 두번 위에 떠 있는 기름기를 창호지로 걷어낸 다음, 충분히 고아지면 광목이나 베수건으로 걸러냅니다. 이걸 그릇에 밭아놓고 10시간 정도 지나면 뿌연 묵처럼 굳죠. 그 위에다 실고추, 달걀을 얇게 부쳐서 무늬를 넣으면 아주 예쁠 뿐 아니라 먹음직스럽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요. 족편을 칼로 두부 크기만큼 자르는데 이때 아주 예리한 칼을 사용해야 모서리가 깔끔하게 잘라집니다. 무딘 칼을 쓰면 모서리가 너덜너덜 떨어져 보기에 좋지 않아요. 이렇게 만든 족편은 아주 귀한 음식이라서 나이 드신 어른들 또는 참판과 같은 대감의 술상에 안주로 올랐습니다. 족편은 꼬들꼬들하고 냄새가 없으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소화가 잘 됩니다. 노인에게는 최고의 술안주지요.”
음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연엽주(蓮葉酒)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연엽주는 예안이씨 종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주(家酒)이자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소문난 술이다. 집안에서만 먹던 술을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려고 5년 전부터 시판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판하고 있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고 한다.
어쨌든 연엽주는 약주(藥酒)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약으로 먹는 술인데, 구한말 고종 황제에게 올리던 술이기도 하다. 당시 가뭄이 심해서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자 임금도 쌀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며 잡곡밥을 먹었다. 잡곡밥을 먹다보니 기력이 떨어졌고, 임금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대신들이 회의를 열어 전국에서 유명한 약주들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두견주, 국화주, 송화주 등 전국의 유명한 가양주가 무려 120여 종이나 올라왔는데 그중 예안이씨의 연엽주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임금이 마실 연엽주는 특별한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한다. 하루 중에 양(陽)기운이 새로 시작하는 한밤중 자시(子時)에 그릇을 놓고 이슬을 받았다. 술을 빚는 날도 좋은 달에 좋은 날짜를 택했으며, 술독을 놓는 방향도 따졌다. 술을 빚는 날은 정갈하게 목욕재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업을 할 때는 침이 튀지 말라고 입에다 창호지를 물었다 한다.
예안이씨 선조들이 남긴 ‘치농(治農)’이란 책을 보면 연엽주 제조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쌀 일곱 홉과 찹쌀 반 홉을 섞어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지에밥을 찐다. 그 다음 아침 이슬을 한 공기 정도 받아 누룩과 섞어 연잎에 싸서 반양반음(半陽半陰; 너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곳)에 놓아둔 후 일주일쯤 지나 베 헝겊에 짠다. 이렇게 해서 연엽주가 완성된다. 주 재료는 넓은 연잎, 솔잎, 감초이고 여기에다 도꼬마리, 이팥, 녹두, 옥수수, 엿기름으로 만든 누룩이 들어간다. 연엽주를 오래 먹으면 몸이 가뿐해지고 머리가 명석해질 뿐만 아니라 혈관이 확장되고 양기를 보존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대만지관이 극찬한 명당 집
선씨는 전통과 민속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 보니 내외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문을 구하러 이득선씨를 찾아온다. 어느 때는 하루에 3∼4팀이 동시에 찾아와서 괴롭힐 때도 있는가 하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부엌에 들어가 밥그릇을 살피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정신이 없다. 논에 나가 논두렁 풀도 깎고 밭에 가서 김을 매는 일이 생계를 유지하는 본업인데 손님 치르다 보면 풀 깎을 시간이 없다.
자문을 해주는 대가로 상담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방송국에서는 몇 시간씩 취재하고 나서 출연료라고 해서 3만몇천원을 던져놓고 간다. 받기도 그렇고 안 받기도 그렇다. 옆에서 보기에 영양가는 없이 바쁘기만 한 생활 같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시콜콜 물을 때면 상당히 짜증날 것 같은데요?
“그 단계를 지나야 합니다. 내가 해보니까 대략 3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단계는 짜증나는 단계죠. 내가 이걸 배우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공짜로 알려달라니! 하는 반감이 듭니다. 이 과정을 지나면 두 번째로 망신 단계가 나타납니다. 모르는 걸 질문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망신스럽죠. 그러면 거기 답하기 위해서 원로를 찾아가서 여쭙기도 하고 관련 서적도 찾아보죠. 이 과정을 극복하면 짬뽕단계에 들어갑니다. 전후좌우 종횡무진으로 물어보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건축이면 건축 한 가지만 물어보아야 하는데, 제례를 물어보았다가, 다시 음식 물어보았다가, 갑자기 사주단자에 대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아주 헷갈리죠. 조선생님(필자) 같은 경우가 세 번째 짬뽕단계에 해당되는 질문자인 줄만 아세요.”
내공이 고강한 이득선씨에게도 잘 모르는 분야가 하나 있다. 풍수다. 이 분야는 원체 깊고 넓어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마침 필자가 풍수를 연구하고 있다니까 잘 만났다고 하면서 한 가지를 물어본다.
6년 전쯤 대만의 유명한 지관이 이 동네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외암마을과 이득선씨 집을 둘러보고 교과서에 나오는 명당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동네라고 격찬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득선씨에게 이 집은 50년쯤 후에 발복하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득선씨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의 요지는 왜 50년 후에 발복하느냐, 그 50년이란 숫자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냐는 내용이다.
1박2일간 필자로부터 각종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이득선씨가 드디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면서 어려운 수를 하나 던진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답변을 많이 했으니 당신도 내가 모르는 것 하나 정도는 답변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다. 일방이 아닌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호혜적이라는 사실은 여기서도 증명된다. 만약 이런 순간에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은근히 망신당한다.
사실 이 질문은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에 속한다. 이 부분은 풍수의 양대 골격인 형기(形氣)와 이기(理氣) 중에 이기 분야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풍수에 관한 질문은 형기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형기란 청룡, 백호를 비롯한 주변 산세의 형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생사추와(生蛇追蛙; 산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국)라든가, 옥녀직금(玉女織錦;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세)이라는 등 산의 생김새를 논하는 것은 모두 형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기는 어느 시점에 발복할 것인가, 즉 운이 언제 오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선천팔괘(先天八卦), 후천팔괘(後天八卦), 음양오행(陰陽五行), 10간(干) 12지(支), 28숙(宿) 등을 통달해야 비로소 이기라는 분야에 접근이 가능하다. 그만큼 난해하다.
결국 형기가 공간의 문제라면 이기는 시간의 문제다. 공간이라는 X좌표와 시간이라는 Y좌표가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 어디인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풍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산의 관상, 즉 형기에 대한 관점은 대개 일치하지만 산의 사주, 즉 이기에 대한 관점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10인10색이다. 이기를 연구하다 보면 마치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풍수가에서는 ‘형기학파(形氣學派)에 관한 책은 진서(眞書) 아닌 책이 없고, 이기학파(理氣學派)에 관한 책은 위서(僞書) 아닌 책이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이기학파에 관한 책들은 그만큼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다는 말이다. 복잡하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풍수의 천재들은 상대적으로 이기학파 쪽에 더 많이 몰려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어쨌든 대만 지관이 이야기했다는 50년 후 발복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기학파에 의존해야 한다. 현재 대만의 풍수학계를 석권한 이기법은 현공법(玄空法)이라는 학설이다. 언제 발복하는가, 즉 발복하는 타이밍을 중시하는 것이 현공법이다.
현공법에서는 먼저 좌향을 중시한다. 이득선씨 집 좌향은 계좌(癸坐)인데, 현공법에서 말하는 계좌의 운은 제1운에 발복한다고 되어 있다. 운은 제1운에서 제9운까지 있는데, 1운의 단위는 20년이기 때문에 1운에서 9운까지 한 바퀴 도는 데는 180년이 걸린다고 본다. 여기서 더 복잡한 계산법은 생략하기로 하고, 현공법에 따르면 1984년 입춘일부터 2004년 입춘 전날까지 20년간은 제7운에 속한다. 그러므로 올해 2001년은 7운에 해당한다. 그 다음으로 2004년에서 2024년 입춘 전날까지는 제8운, 2024년에서 2044년 입춘 전날까지는 제9운이다. 그리고 다시 제1운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2044년 입춘일부터 2064년 입춘 전날까지의 20년인데, 좌향이 壬,子,癸인 집터는 제1운에 드는 2044년부터 발복이 시작된다. 6년 전 대만의 지사(地師)가 이 동네를 방문했으므로 그때부터 계산해 50년을 더하면 바로 2045년이 나온다. 현공법의 공식이 맞는지는 그때 가보아야 확인되겠지만, 어찌되었든 50년 후 발복이라는 한 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공식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이기학파의 세계다.
삼산(三山) 양수(兩水)론
외암마을에 예안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벼슬을 지낸 이정(李珽) 때의 일이다. 예안이씨를 빛낸 인물은 이정의 6대손인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다. 이간은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며 우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데, 외암마을이라는 이름이 이간의 호를 따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외암마을은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교과서적인 명당을 일컬을 때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배산임수를 좀더 자세하게 인수분해하여 보면 배산은 삼산(三山)으로, 임수는 양수(兩水)로 나뉜다. 뒤로는 세 봉우리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동네 앞으로는 좌우 양쪽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 물이 합쳐지는 곳을 삼산양수지지(三山兩水之地)라 부른다.
고려 말 서역 출신인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제자인 나옹(懶翁, 1320∼1376)에게 법을 전할 때 가장 이상적인 절터의 요건은 삼산양수니, 삼산양수지지를 찾아서 절을 지으라고 당부한 바 있다. 지공이 개산하고 나옹이 중창한, 경기도 양주군 천보산에 위치한 회암사(檜岩寺)가 바로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사찰이다.
외암마을의 뒷산은 해발 350m인 설아산(雪峨山)이다. 설아산 반대편 자락에는 조선 초의 명재상인 맹사성(1360∼1438)의 고택으로 알려진 맹씨행단(孟氏杏壇)이 북향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맹씨행단 반대편 자락에 외암마을이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니 산의 앞뒤쪽으로 쟁쟁한 반촌(班村)이 포진한 형국이다. 설아산의 봉우리는 삼산, 즉 3개의 봉우리로 연달아 내려온다.
내룡의 봉우리가 3개이면 품(品)자 형태와 닮았다고 해서 귀하게 여긴다. 품격 있는 산이라서 귀인이나 고위관리가 배출된다고 본다. 品자 형태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부분은 가운데 위치한 봉우리가 제일 높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양쪽의 어느 한 봉우리가 가운데 봉우리보다 높으면 격이 떨어진다고 본다. 설아산은 가운데 봉우리가 제일 높다. 교과서대로다.
노적봉을 뛰어넘는 자손?
사랑채 앞에서 보면 솟을대문 너머로 안산이 보인다. 안산의 형태는 나락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노적봉이다. 노적봉이 있으면 밥은 떨어지지 않는다. 종가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노적봉 때문에 우리 집이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노적봉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안대가 너무 높으면 집터를 내리누르게 된다. 안대의 높이는 대문 앞에 사람이 섰을 때 눈높이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 봉우리 끝이 눈높이보다 높으면 높다고 간주하는 것이고, 눈높이보다 낮으면 낮다고 본다.
예안이씨 종가의 노적봉은 눈높이보다 올라가서 약간 위압감을 준다. 필자가 이득선씨에게 노적봉이 좀 높은 것 같다고 지적하니까 “저 노적봉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손이 나오면 크게 이름을 떨치지만, 기가 약한 사람이 뛰어넘기에는 좀 힘든 봉우리”라고 답변한다. 집안 어른들도 노적봉을 돌파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사랑채는 계좌(癸坐)를 놓았는데, 솟을대문의 좌향은 간좌(艮坐)를 놓아서 사랑채의 정면 방향과 대문의 정면 방향이 15도 각도로 틀어져 있다. 15도 각도를 비켜서 대문 좌향을 잡은 이유 역시 노적봉과 관련이 있다. 계좌를 놓으면 노적봉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지만, 간좌를 놓을 경우에는 노적봉을 약간 비켜서 바라보게 된다. 짐작건대 안대인 노적봉이 높아서 집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지니 대문 방향을 약간 틀어서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 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이 동네의 특이한 장치는 수로다. 동네 중심부를 에스(S)자 형태로 굽이 돌면서 흐르는 조그만 수로가 인공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길을 일부 돌려서 마을 가운데로 끌어들였는데 이는 화재예방을 위한 장치라고 한다.
옛날에는 초가가 많아 화재가 빈번했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이 수로를 흐르는 물을 이용하면 쉽게 진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맥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지표면에서 30cm 정도의 깊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적막한 밤에는 수로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도 운치가 있다고 한다. 다른 마을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장치다.
삼산양수의 전형적인 명당에 해당하는 외암마을. 마침 동네입구를 돌아 흐르는 냇물의 바위에도 ‘외암동천(巍巖洞天)’이라고 큼지막하게 각자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동천(洞天)은 원래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닌가. 한국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외암마을은 동천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비록 신분과 직위는 사라졌지만 우리 전통문화가 지닌 격조와 풍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외암동천의 이득선 선생은 이 시대의 선비이자 정신의 귀족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