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영어에 울고 교육에 웃는 자영업자 코리언

현지르포·캐나다의 한국인·한국인 사회

  • 황용복 < 전 중앙일보 기자, 밴쿠버 거주 >

    입력2005-04-21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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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한국인들이 대거 캐나다로 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무엇보다 캐나다가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토에 인구는 3000만 정도다. 97년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1만9670달러로 세계 14위, G7 회원국인데다 공무원들의 청렴도도 세계 최고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유엔이 해마다 발표하는 인간 개발지수 또한 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 연속 1위다. 그렇다 해도 캐나다가 ‘아무나 이민 오면 살기 좋은 나라’는 결코 아니다.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을 극복해야만 한다.
    영어를 거의 못 하는 교민 최모씨(44세, 토론토 거주)의 자동차가 1998년 어느 날 고장이 났다. 냉각수가 과열돼 일어난 고장이었다. 그는 몇 달 전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차를 딜러의 직영 정비공장에 맡기고 수리기간에는 그 딜러의 부담으로 다른 차를 렌트해 탄 적이 있었다. 최씨는 이번에도 같은 서비스를 받으려고 정비공장을 찾아갔으나 담당직원은 차는 고쳐주겠으나 렌트비는 부담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영어실력이 문제였다. ‘같은 고장이 보증수리기간에 일어났는데 왜 서비스 내용이 다른가? 두 번이나 같은 고장이 났으니 이번에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라는 항의를 최씨는 손짓 발짓을 포함해 온갖 지혜를 다 짜내 제기했으나 직원은 끝내 거절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며 그는 인근 렌터카 업소로 발길을 돌렸다. 대중교통수단이 빈번히 운행되지 않는 이곳에서는 당장 집에 돌아가려면 자기 부담으로라도 차를 빌릴 수밖에 없다. 렌터카 직원이 차를 내주려고 준비하는 동안 최씨가 동행한 딸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뜻밖에도 그 직원이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다. 그 직원은 초등학교 때 이민 온 한국인 1.5세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가 즉각 유창하고 매서운 말투로 정비공장에 항의 전화를 대신 걸어 렌트비의 절반을 딜러가 부담하게 했다.

    처음 수리를 맡겼을 때 정비공장의 담당직원은 중국계였고, 두 번째 수리 때는 백인이었다. 최씨는 만약 자신이 백인이었거나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그 직원이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인종과 관련한 최씨의 예단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나 영어 부분은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캐나다 드림을 좇아 한국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 앞의 최씨처럼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뿌리를 박고 살 결심을 하는 이들이 왜 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무엇보다 캐나다가 살 만한 나라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면적(998만㎢)에, 약 3000만(1996년 센서스 당시 2853만)의 인구가 산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997년 미화 1만9670달러(자료: 세계은행)로 세계 14위였고 선진 7개국의 협의기구인 G7 회원국이다.

    캐나다의 공무원들은 청렴한 편이다. 1998년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연례 국가별 투명도 조사에서 조사대상 85개국 중 6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는 각국 관리들의 청렴성에 대한 국제기업인들의 견해를 지수화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매긴다.

    유엔이 해마다 발표하는 각국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는 캐나다를 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 연속 1위로 평가했다. 이 지수는 각국의 평균수명, 문맹률, 국민소득 등을 종합해 산정한다. 7년 동안 순위에 변동이 없으니 이 나라의 뉴스미디어들은 근년 들어 유엔이 새로 지수를 발표해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이 이를 이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유엔인간개발지수 7년 연속 1위

    이쯤의 데이터만으로 캐나다가 공기 맑고, 물 깨끗하며, 경관이 수려하고, 인정이 덜 각박한 나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캐나다는 분명 ‘살기 좋은 나라’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나 이민 가도 살기 좋은 나라’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다음에 드는, 교민사회 실상 몇 가지를 이해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민을 결행해야 할 듯하다.

    한국인 이민자가 가장 먼저 느끼는 불편은 언어장벽이다. 이민 온 지 10년이 넘은 사람 중에서도 이 나라 말(주로 영어, 일부 지역에서는 프랑스어)을 거의 못 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영어로 물건 사기, 길 묻기 등 생활에 필수적인 대화를 하거나 자기 비즈니스 분야에서 의사소통하는 데 큰 불편이 없는 교민은 교민사회에서 ‘영어 잘 하는 사람’ 축에 든다.

    그러나 인생과 사랑, 종교와 예술, 대중문화와 스포츠, 그리고 경우에 따라 음모나 배반에 관한 얘기를 이 나라 말로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한 언어장벽으로부터 해방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솔직히 이민 1세로 교민사회에서 영어를 잘 하는 편에 드는 사람조차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종차별 탓도 없지 않겠으나 더 큰 원인은 주류사회 구성원들과 자유롭게 교감할 만큼 영어실력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토론토나 밴쿠버처럼 한국교민이 많은 캐나다 도시에는 한국인이 한국어로 생활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가 많다. 의사·치과의사·한의사·변호사 등의 영역에서부터 이·미용실, 한국식품점, 가전제품전문점, 표구점 등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업소가 한국어로 서비스한다. 이렇다 보니 교민 수가 수십만명씩 되는 미국의 대도시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한국인이 영어 한 마디 못 하고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럭저럭 버틴다’는 말의 이면에는 큰 고통이 감춰져 있다. 자녀의 진학상담을 위해 교사를 만나야 할 때, 한국인 아닌 전문의를 만나야 할 때, 잘못된 전기료 고지서가 날아들었을 때…. 싫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수많은 장벽 앞에서 영어가 달리는 사람들은 심한 좌절을 느낀다. 상업적 통역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돈도 돈이거니와 ‘내 수족처럼 나를 위해’ 봉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없고, 영어 잘 하는 교민에게 부탁하기도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듣기와 말하기뿐만 아니라 독해력의 부족도 장애가 된다. 우편함에 날마다 배달되는 많은 양의 우편물을 선별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주류사회가 발행하는 신문은 읽을 엄두도 못 내는 교민이 숱하다.

    영어를 못하면 일상생활이 불편하고 생업 선택에 제약을 받는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영어권 사회와 접촉을 기피하게 되면서 지적인 소외감과 무력감, 쉽게 말해 바보가 된 느낌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해야 하는 영어를 잘 못해, 혹은 잘못 알아들어 큰 낭패를 보지 않을까 긴장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 나라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기 어려워 교민사회 내에 움츠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캐나다에 일단 입국한 뒤에 영어 실력을 보충할 수 있고, 정부가 그런 프로그램을 무료 또는 싼 값에 많이 제공한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영어에 능숙해진 사람도 많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런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캐나다에 이민 와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미국 등 다른 이민지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캐나다의 한국교민들이 어떤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지에 관한 데이터는 교민의 거주지 분포 자료 이상으로 찾기 어렵다. 필자의 관찰과 교민사회 사정에 밝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가장 보편적인 생업이 소형 자영업이다. 상시고용(풀타임) 근로자로 취업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말과 문화가 다른 이민지에서 생업 선택의 폭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교민이 어떤 업종의 소형 자영업에 많이 종사하는지는 다음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일보 캐나다지사가 발간한 온타리오 주 한인전화번호부(1997년판)의 업소·인명부 편에는 총 1361개 업소가 140개 업종으로 나뉘어 게재돼 있다. 이 자료에는 업소가 가장 많은 업종인 그로서리(식품잡화점)는 제외돼 있다. 업소 수 상위 15개 업종은 와 같다. 밴쿠버 한인회가 발간한 1997년판 한인록에는 총 1397개 업소가 101개 업종으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역시 상위 15개 업종은 와 같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한인협동조합실업인협회가 1998년 12월 집계한 회원업체들의 업종별 수는 과 같다.

    세 가지 자료의 업종 분류 방식이 서로 다르고, 교민업소가 모두 수록돼 있지는 않지만 교민들이 보편적으로 차리는 업종(교회·한글학교 등은 제외)이 ▲그로서리 ▲식당·패스트푸드점 ▲세탁소·빨래방 ▲부동산중개 ▲개인교습소 ▲한국식품점 등임을 알 수 있다.

    소형 자영업소들은 대개 부부가 중심이 돼 소수의 종업원을 고용해 운영된다. 자녀들이 일손을 돕는 경우도 흔하다. 이와 같은 가족형 자영점포를 북미에서는 ‘mom-and-pop store’라 부른다. ‘엄마·아빠 가게’라는 뜻이다.

    토론토 소재 한인비즈니스자문그룹(KBAG)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온타리오 주에 정착한 한국인 사업이민자(entrepreneur, 한국 이민알선업계에서 통칭 ‘기업투자이민’)는 총 1053명(부양가족 제외)이었고, 1인당 평균 투자액은 9만5512달러였다(이 글에 나오는 화폐단위 ‘달러’는 모두 캐나다달러를 지칭한다. 2001년 2월 초 현재 1달러의 매매 중심 환율은 약 830원이다). ‘사업이민’이란 캐나다 이민법에 따른 경제이민의 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이민자(가장)는 이민입국 후 2년 내에 사업을 시작, 가족 이외에 최소 1명의 상시종업원을 고용하는 조건(컨디션)으로 이민비자를 발급받는다.

    교민 직업1위 식품잡화점

    여기서 ‘투자’란 업체를 새로 차리거나, 기존 업체를 인수하거나, 기존업체에 동업으로 추가 출자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말한다. 밴쿠버 일원의 한국교민 업체들의 매매가격도 온타리오와 비슷한 10만 달러 내외가 중심치인 것으로 보인다.

    광역밴쿠버에서 이 정도의 돈으로 소형 비즈니스를 시작해 부부가 함께 뛰면 한 달 순이익 3000∼4000달러를 기대할 수 있다. 이 액수는 부부의 인건비는 따로 없다고 본 것이다. 이 정도의 월수입이면 4인 가족이 넉넉하지는 않으나 그리 쪼들리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부가 함께 주 6일(월 25일)간 하루 10시간씩 영업하는 점포라고 가정하면 두 사람이 각각 한 달에 250시간씩 합계 500시간의 노동력을 제공한 셈이다. 그 결과로 얻는 월 3000∼4000달러는 시간당 6∼8달러에 해당한다. 밴쿠버가 소재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시간당 최저임금이 8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교민들이 많이 종사하는 비즈니스는 그리 수익성 높은 장사가 아니다.

    그러나 비록 하찮게 여겨지는 비즈니스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교민들은 정착속도가 빠르고 그 자녀들의 가치관도 안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영어가 달리더라도 진취적 기상으로 이를 극복한다. 웃자고 다소 과장했겠지만 미국의 교민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떠돈다.

    “뉴욕에서 청과물 가게를 차린 한국인 K씨는 영어를 못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미화 100만 달러를 벌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영어는 ‘생큐’와 ‘아이 앰 소리’뿐이었다. 고객이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내더라도 그는 연신 이 말만 계속했다. 그랬더니 찡그린 고객들의 얼굴이 펴졌고 차츰 단골이 늘었다.”

    그가 만약 영어를 조금할 줄 알아 이치를 따지며 대들기 일쑤였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캐나다 사람들은 소형 비즈니스의 업주를 얕보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실시되는 여러 형태의 직업별 존경도 조사를 보면 소기업 오너가 존경받는 위치에 있고 오히려 정치인·공무원·변호사·언론인 등이 그 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소형 점포에서 고객이 거만하게 굴어 업주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캐나다가 한국에 비해 훨씬 적은 것으로 보인다.

    돈을 많이 갖고 이민 온 교민 중에는 놀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 이 나라에서 큰 비즈니스를 벌이려면 위험부담이 많고, 소형 자영업은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교민들은 골프나 교회 일 등에 매달리거나 한국에 자주 드나든다.

    캐나다에서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이자나 임대소득을 얻는 교민도 많다. 이 경우 역시 몸만 캐나다에 와 있을 뿐 정신적으로는 캐나다의 일원으로 통합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초기(1960∼1970년대)에 이민 온 교민 중 당대에 의사·교수·판사 등 엘리트적 지위를 확보했거나 소형 비즈니스를 넘어선 기업을 일군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지만 이들은 30세 이전에 이민 또는 유학을 와서 이곳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니며 주류사회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젊은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들 중에는 오자마자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에 매달리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목표는 평생 대학에 남거나 아니면 학위를 받은 뒤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미국에 비해 교육수준이 그리 뒤지지 않는데도 학비는 훨씬 싼 것이 캐나다의 매력 중 하나다.

    자녀들의 교육을 생각해 캐나다로 이민 오겠다, 또는 왔다는 사람이 많다. 자녀가 입시에서 해방되고, 인성 위주의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영어는 저절로 잘 하게 되는데다 학부모는 사교육비 부담이 없고, 공교육도 고등학교까지 무료고…. 대체로 이런 것들이 한국인 이민자들이 기대하는 캐나다의 교육환경이다.

    한국과 캐나다의 교육 여건을 맞비교하면 이 말들이 대체로 맞다. 특히 이 나라 학생들이 인성 위주의 교육 프로그램 아래 수업하고, 입시에서도 거의 해방돼 있는 점은 한국인으로 화가 치밀 정도로 부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래 교육받은 학생이 이 나라로 이민 와 교육을 계속 받는 상황을 상정하면 몇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영어는 저절로 잘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관해서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1∼2학년의 한국 학생이 이민을 온다면 이 대목은 기대에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삼은 학생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언어장애 때문에 예외없이 큰 홍역을 치른다.

    1992년에 이민 와 몬트리올에 살고 있는 유충근씨는 한국에서 중3을 마치고 온 아들 영규씨(24세, 맥길대 재학)가 이민 초기에 말이 안 통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최근에 우연히 알게 돼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유씨 집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몇 명이 묵었는데 그 학생들이 유씨의 아들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더라는 것이다. 다음은 유씨의 말이다.

    “아들이 이민 초기에 학교에서 말이 안 통해 집에 돌아와 여러 차례 울었다고 했다. 부모가 마음 아파할까 봐 보는 데서는 못 울고 베란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곳 학교에서는 토론 위주의 수업이 많은데 알아듣지도 못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 처음 얼마간은 다음 시간이 영어수업인지 수학수업인지, 숙제를 내준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교민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몬트리올에서는 그러지도 못했다.”

    유씨 아들의 경우는 프랑스어계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고충이 더 컸겠지만 다른 지역 영어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늦게 이민 온 경우라면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봐야 한다. 어른들이야 말이 안 통하면 피해갈 수도 있지만 학교 다니는 자녀들은 그럴 수도 없다.

    이런 과정을 참아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대학 입학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캐나다의 대학들은 별도의 입학시험 없이 고교 내신성적 위주로 신입생을 받기 때문에 한국처럼 입학 관문이 험난하지는 않지만 이 나라에서 일정 기간(5년 안팎)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지원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토플 점수를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 교민 자녀들이 사교육의 신세를 지는 일도 보편적이다. 과외 과목은 영어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일반 과목도 대상이 된다. 과외교사는 원어민인 경우도 있고, 오래 전에 이민 와 영어에 능통한 교민(주로 1.5세)인 경우도 있다.

    토플 기준을 충족시켜 입학에는 성공한 학생에 대해서도 첫 학기 수강신청 전에 토플로는 측정이 안 되는 영어작문 능력을 테스트해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까지 수강을 제한하는 대학이 대부분이다. 또이를 통과하더라도 원어민 학생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고 중도탈락하기 일쑤다.

    어린 나이에 이민 오는 학생들의 경우 별로 고통받지 않고 영어를 익히지만 대신 한국어 실력이 해가 갈수록 퇴보하게 된다. 1994년에 이민 와 앨버타 주 캘거리에 살고 있는 현이섭씨(52세)는 우연히 11학년(한국의 고2에 해당) 아들이 한국의 친구에게 보내려고 써둔 편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아들이 쓴 한글 편지의 수준이 문장력은 둘째치고 아예 받침 없이 소리나는 대로 적었더라는 것이다.

    현씨는 “이민 초기에 아들이 한국어는 다 익히고 왔다고 생각해 영어에 전념토록 요구했던 것이 현명하지 못했다”며 “그 뒤로는 한국의 친척에게 편지 쓰기, 한국어 책읽기 등을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어만 잘하고 한국어는 못하는 교민 자녀가 사회에 나갈 경우 한국에서건, 영어권 나라에서건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자녀는 영어·한국어 모두 공부해야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아이덴티티(identity) 면에서도 한국과 캐나다 양자의 장점이 몸에 밴 사회인으로 2세를 길러 내야 자녀교육에 성공한 이민이라 할 수 있다. 외형은 한국인인데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완전히 서양인인 교민 자녀를 교민사회에서는 ‘바나나’라는 슬랭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나나는 겉이 노랗고 속은 희다.

    모든 면이 만족스럽다 해도 이민은 일단 익숙한 것들로부터 단절을 겪게 한다. 이 나라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모국어만큼 편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익힌, 살아가는 방법을 포기하고 새 문화에 적응해야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멀리 두고 새 사람들과 사귀어야 하니 그 자체로서 큰 상실이다.

    교민사회가 상실의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줄 수는 있으나 ‘한국 교민사회’가 ‘한국 사회’와 같을 수는 없다. 생활필수적 서비스라면 교민사회가 그런대로 공급하지만 지적·문화적 부분으로 가면 그 인프라스터럭처가 매우 빈약하고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한다.

    설사 교민사회 내의 자원이 흡족하더라도 새 이민자가 그 속에 안주한다면 ‘캐나다’로 이민 온 것이 아니라 ‘캐나다 내 교민사회’로 이민 온 꼴이 된다. 교민사회가 한국의 연장이란 시각에서 보면 토론토나 밴쿠버의 교민사회는 인구가 각각 5만, 3만쯤 되는 지방 소도시다.

    와야 할 사람, 오지 말아야 할 사람

    이민, 그중에서도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은 당사자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앗아간다. 개인의 여건과 품성에 따라 대단히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고, 큰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잃는 것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얻는 것을 극대화시킬 사람이 이민에 적절한 사람이다. 이민 1세들이 겪는, 앞에 쓴 어려움을 극복할 자질을 갖춘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상당히 많은 한국인 이민자가 한국으로 되돌아간다. 한국 외교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1996년에 3073명의 한국인이 캐나다로 신규이민했고 368명은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1997년에는 3918명이 신규이민했고 316명은 역이민했다.

    이 역이민 수치는 캐나다 영주권을 반납하고 한국의 주민등록을 복원한 사람들만 집계한 것이다. 이처럼 명백히 역이민한 사람말고도 절반만 돌아간 사람도 많다. 자녀를 이 나라에 남기고 부부 혹은 그 한쪽만 되돌아가 경제활동을 하는 사례가 전형적인 반(半)역이민이다. 자녀는 캐나다 사람이 낸 세금으로 공짜교육을 받게 하고, 부모는 다른 나라에서 경제활동(납세)하는 것을 캐나다가 좋아할 리 없다. 이민 온 사람이 주(主)거주지를 캐나다로 하지 않는 것은 불법이지만 살벌하게 규제하기가 어려워 당국이 고민하고 있다. 반역이민의 사례는 한국인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 중국계(홍콩·대만·본토 등) 이민자가 훨씬 많다.

    설사 자질이 있는 사람이 이민 온다 해도 캐나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오는 경우가 많아 먼저 온 교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안타깝다. 이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해 매우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이 오고, 와서도 이를 갖출 기회를 얻지 못하니 캐나다의 일원으로 통합되기 어렵고, 주류사회로 진출할 엄두도 못 낸다.

    이 나라가 과거 영국 식민지였고, 수도는 오타와며, 프랑스어권인 퀘벡 문제가 시끄럽더라는 정도만 알면 이 나라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또 캐나다가 미국의 연장쯤일 것으로 생각하고 오는 이민자도 많아 보인다. 국내에, 또는 이곳 교민사회 내에 캐나다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지 못한 것이 일차적인 원인이라 하겠다.

    이 나라와 그 교민사회에 관해 보편성이 낮고 천박한 ‘조언’들을 듣고 생존의 ‘실전 노하우’를 익힌 것으로 생각하는 이민자들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교민 간의 사기를 조심하라 ▲가서 처음 한두 해는 노는 것이 좋다 ▲김치를 먹으면 냄새 때문에 손님이 끊어진다 ▲사람들이 걸핏하면 소송을 걸어 시비를 가리려 하니 조심하라 등이 그런 ‘조언’들이다. 이들 얘기는 부분적으로 옳을 수도 있으나 캐나다나 교민사회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 말을 듣는 이민자는 머리에 편견이 쌓이고 마음은 움츠러들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캐나다에는 한국계 교민이 얼마나 살고 있을까? 캐나다에 사는 한국계 교민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다. 영주권자 혹은 시민권자의 자격으로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교민이 150만 명 가량인 데 비해, 캐나다는 10만이 조금 넘는다. 1990년 이후 약 10년간 새로 이민을 가는 한국인의 수도, 연도별로 편차가 매우 크기는 하지만, 미국행이 해마다 1만명 안팎이었고 캐나다행은 5000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몇 년간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이 급증해 1999년에는 처음으로 미국행을 앞질렀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라의 크기를 감안하면 미국은 캐나다에 비해 이민의 문호가 좁다. 미국으로 신규이민을 가려면 ▲가까운 연고자의 초청을 받아 긴 세월(경우에 따라 10년 이상) 기다려 비자를 받거나 ▲거액의 돈을 투자하거나 ▲특별한 직능이 있어 고용초청을 받는 경우 등으로 한정돼 있다. 캐나다는 가까운 연고자가 없거나 적은 돈을 묻어 둘 사람도 받아들인다.

    10만 명이 조금 넘는 캐나다의 한국계 교민 중 5만 명 가량이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온타리오 주 광역토론토(토론토 및 그 인접 도시)에, 3만 명 가량이 세 번 째로 큰 도시인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광역밴쿠버(밴쿠버 및 그 인접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밖에 캘거리(앨버타 주), 에드먼튼(앨버타 주), 몬트리올(퀘벡 주) 등에 각각 2000∼4000명의 한국계 주민이 산다.

    한국계 교민의 수에 관한 믿을 만한 통계는 한국 외교통상부, 캐나다 주재 한국 공관, 그리고 캐나다 각 도시의 한국 교민회 어느 곳에도 없다. 실제로 교민 수의 집계는 어려운 일이다. 국내에서 이민 출국신고를 모으면 될 듯하지만 캐나다로 왔다가 제3국으로 나가는 사람과 제3국에 갔다가 이 나라로 오는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2세·3세 등 후손의 출산은 한국 당국에 신고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미신고 역이민자(이민 왔다가 되돌아간 사람), 불법체류자 등의 요인까지 있어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

    가장 최근의 센서스는 1996년 5월 실시돼 98년 결과가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캐나다 전체 한국계 주민 수는 6만4840명이고, 그 44%인 2만8555명이 광역토론토에, 26%인 1만7085명이 광역밴쿠버에 산다. 이 수치를 기초로 집계 누락 요인과 조사일 이후 신규이민자, 역이민자, 자녀출산 등을 감안해 ‘대강’ 추정한 수치가 이 글에 나오는 교민 수다. 이들 상주 교민 외에 수만 명 수준의 한국인 유학생(주로 어학연수자)도 이 나라에 와 있다. 그러나 유학생은 체류기간이 짧고, 주거 이동이 빈번해 집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센서스를 통해 캐나다 내 한국교민의 약 70%가 토론토와 밴쿠버 두 도시에 집중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 뿐 아니라 캐나다로 새로 오는 이민자 대다수가 대도시로만 몰리는 경향을 보인다. 소도시 또는 벽지로 인구가 분산해 국토를 균형 있게 가꾸려는 것이 한국은 물론 캐나다에서도 중요한 정책 과제이고, 이민 당국도 이를 위해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하고 있으나 성과는 신통치 않은 것 같다.

    한국인 캐나다 이민의 역사도 살펴보아야 할 사안이다. 오늘날의 캐나다 땅에는 프랑스인이 먼저 식민지를 개척했다. 7년전쟁(1756∼1763년)에 진 프랑스가 북미지역에서 손을 털고 나간 후 그때까지 주로 오늘날의 미국(동부)에 해당하는 지역만 차지하고 있던 영국이 캐나다의 동부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때부터 주로 영국계 주민들이 이 땅으로 새로 이주해 왔다.

    19세기 말부터 캐나다 서부에 정착할 필요성이 커졌다. 그냥 놔두면 미국이 캐나다 서부를 차지해버릴 기세였기 때문이다. 캐나다 정부는 영국계(앵글로 색슨)만으로 서쪽에 정착할 주민을 채울 수 없어 ‘앵글로 색슨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믿었던 영국 이외의 유럽(동유럽·남유럽)인의 이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유색인종의 유입은 이민법을 통해 사실상 금지했다.

    이민법에서 유색인종 차별조항은 1962년에야 완전히 없어졌다. 이는 복 받은 땅에 사는 혜택을 세계 만민과 함께 누리자는 뜻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국제정세 때문으로 해석된다. 냉전 상태에서 세계가 동·서 진영으로 양분되자 유색인종이 대부분인 제3세계 사람들을 가급적 친서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이 먼저 이민법의 인종차별 조항을 삭제했고 캐나다·호주가 이를 뒤따랐다.

    이때부터 유색인종의 캐나다 이민이 급증해 1990년대 이후 이민자의 인종구성은 백인이 30% 이내이고 아시아계가 50∼60%를 차지한다.

    한국인 캐나다 이민 역사

    그러나 오랜 기간 백인 위주로 이민을 받아온 결과, 1996년 센서스에서 이 나라 전체 인구(2853만) 중 소수민족(유색인종)으로 조사된 사람의 비율이 12%에 불과하다. 다만 소수민족 신규이민자가 주로 정착하는 대도시에서는 그 비율이 매우 높아 광역토론토는 32%, 광역밴쿠버는 31%가 소수민족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인들의 캐나다 이민도 1962년 이민법 개정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캐나다 한국 교민 중 초기이민 세대라고 볼 수 있는 1960∼70년대 이민자는 크게 세 부류로 갈라진다.

    첫째 부류가 전문직 종사자, 특히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들이다. 당시 캐나다는 부족한 의료인력을 이민으로 충당하던 때여서 그들이 이민법 개정에 따른 기회를 가장 먼저 잡을 수 있었다.

    둘째 부류는 파독광원(派獨鑛員) 출신들이다. 경제가 암울하던 196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외화획득과 실업해소의 일거양득을 노리고 서독의 탄광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대거 내보냈다. 그 무렵에 한국의 간호사도 많은 수가 서독으로 갔다. 파독광원 중에 계약 기간 3년을 채우고는 귀국하는 대신 제3국행을 택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의 제1 희망 행선지는 미국이었으나 비자 얻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캐나다로도 많이 왔다. 최종적으로 캐나다에 온 파독광원들이 최소 300명쯤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셋째 부류는 남미로 갔던 이민자들이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인들이 남미의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볼리비아 등지로 대거 이민했다. 이들은 대개 농업이민자 자격으로 떠났으나 현지에서 분양받은 땅이 농사짓기 어려운 미개간지인지라 이내 도시로 나왔고, 이중 상당수가 미국 혹은 캐나다로 옮겨 자리잡았다.

    이들 초기 이민자들을 핵으로 그 친척들이 캐나다로 이주해 왔다. 현재 캐나다는 연고초청에 의한 이민을 직계 존비속으로 제한하고, 초청자의 의무(피초청자의 경제적 자립 보장 등)를 까다롭게 해 가급적 그 수를 줄이려하지만 당시에는 “호적등본에 이름이 함께 오른 사람이면 다 부를 수 있다”고 까지 말할 정도로 연고초청의 문호가 넓었다.

    이들 세 부류 이외에 뒷날(1979∼1982년) 매니토바 주 위니펙의 봉제업체들이 한국의 근로자(주로 여성) 약 400명을 초청한 것도 이 나라 한국교민 수가 증가하는 데 큰 변수가 됐다.

    초기 이민과 그들의 연고초청에 의한 이민이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다가 그 뒤 약 10년간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은 소강상태를 맞았다. 이는 당시의 한국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이민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이곳 교민사회에 알려져 있다. 3공 정부가 유신 이후 반체제운동의 보루인 재외교민사회를 더 부풀리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상황이 바뀌고 캐나다의 이민제도 중에 경제이민이라는 범주가 신설(1986년)된 것을 계기로 1987년부터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이 다시 활성화됐다.

    경제이민이란 캐나다 노동시장에 꼭 필요한 인력이 아니라도 이 나라에 와 자영업을 하거나 일정 기간 돈을 묻어둬 결과적으로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이 나라 연방정부가 신설한 이민 유형이다.

    캐나다 정부는 해마다 20만 명 안팎(1990년대 기준)의 신규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새 이민자가 끊임없이 와야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구조여서 앞으로도 이민의 문호를 갑자기 좁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여성의 출산율은 평균 1.6명으로 거의 고정돼 있어 만약 신규이민의 유입을 차단하면 인구가 줄어들게 되므로 경제 문제를 떠나서도 이민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 해마다 20만명 이민 받아

    게다가 급진전하고 있는 인구의 노령화 현상을 중화시켜야 하고, 또 해마다 고급두뇌가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충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이민의 영입은 캐나다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이 늘어가는 데 따른 사회적 저항 때문에 무작정 이민의 수를 늘릴 수도 없다.

    한국은 매년 이 나라에 신규로 이민 오는 인원의 국적별 랭킹에서 10위 안에 든 적이 없었으나 1998년 처음으로 8위, 1999년에는 5위를 차지했다. 1999년에 중국·인도·파키스탄·필리핀 순으로 1∼4위를 기록했다. 2000년에도 총 7602명의 한국인이 이민 와 역시 5위를 차지했다.

    캐나다 이민법은 이민자의 유형을 크게 ▲숙련기술인력(skilled worker) ▲경제이민(business class) ▲기타(가족초청·난민 등)로 나누고 있다. 1999년에 이 나라로 온 한국인 신규이민자는 동반가족을 포함해 모두 7212명이며 이중에 숙련기술인이 54.1%인 3901명, 경제이민이 37.4%인 2700명, 기타가 8.5%인 611명인 것으로 이 나라 이민부는 집계했다. 경제이민만 놓고 보면 1999년 이 범주의 이 나라 총 이민자(1만3010명) 중 한국인이 20.8%로 1위를 차지했고, 타이완·중국·홍콩·이란 등이 그 뒤를 따른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한국인의 캐나다 이민상(像)을 상정한다면 땅 좁고 인구 많은 한국에서 이루기 어려운 꿈을 캐나다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오지의 천연자원개발, 관광개발, 농업진흥 같은 일선에 나서거나 그 이론을 제공하는 일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캐나다의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낸다고 볼 수는 없으나, 2세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한국에서 적당한 사람이 새로 올 경우 우수한 품성이 빛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영어(또는 프랑스어)실력과 캐나다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가급적 젊으며, 진취적 기상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 본인의 삶도 풍성해지고, 캐나다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인력이 빠져나가는 손실도 있겠지만 인구 압력이 줄고 해외에 교두보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고국에도 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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