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고약하게 아름다운 낯설어서 짜릿한

소설가 구효서의 홍상수論

  • 입력2005-04-22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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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밖의 일상과 관념, 삶에 대한 태도까지 고민케 하는 홍상수표 영화의 강력한 마력. 왜 성가시고 재미없는 그의 영화가 내겐 ‘서정의 관문’인가.
    홍상수 감독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다 알다시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의 입봉 작품이다. 그리고 그 영화의 이른바 원작자가 나 구효서다. 그러니 안 만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내 소설 중 세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홍감독의 입봉작품이 내게도 첫 영상데뷔 작품인 셈이었다. 그래서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운은 그럭저럭 길었던 것 같다.

    계약 문제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가 아니라 동아수출공사 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수준에서 원작료를 딱 잘라 일시불로 지불하겠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강남 동아극장 몇 층인가의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 홍감독이 있었다. 화이트 브라운의 캡을 거의 콧등까지 푹 눌러쓴, 앳된 얼굴에다 조금은 귀티까지 나는 청년이었다. 나도 나이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였다.

    껄끄러운 영화, 그런데 왜 재미있지?

    아주 작고 좁은 방이었다. 영화사 사무실이라면 으레 이런 저런 포스터와 팸플릿 따위로 울긋불긋할 줄 알았던 나에게 그 방은 너무 초라하게 보여 과연 저 사람이 영화를 만들 줄이나 알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무실은 곁에 따로 있었다. 그 널찍한 곳으로 가서 서류에 도장을 찍고 돈을 받았다. 계약은 감독과 하는 게 아니었다. 홍감독은 마치 그곳에서 일하는 신참 사환처럼 말없이 기웃거릴 뿐이었다.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왕 내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으니 명색 원작자로서 무슨 말인가를 한마디쯤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쭈뼛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뭐라고 한마디 묻거나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저어, 내 소설은 말입니다…”

    그때 강림(降臨) 모티프에 대해서 말한 것 같다. 선녀와 나무꾼의 예를 들어가며, 내 소설에 너무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이중구조에 대해 잠깐 설명한 것 같다. 정말이지 그런 따위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불쑥 나와 버리기가 뭣해서 한 말이었는데 이 젊은이는 아주 흐릿하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고의적으로 곡해했다. 계약은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겠습니까, 라는 의미일 거라고.

    그것이 그와의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 말을 존중해서였을까. 그는 시사회에도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도 야속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도 그 영화가 개봉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다 본 위인이니까. 나도 시사회라는 곳을 종종 다니지만 내가 원작자인 영화라고 해서 부리나케 혹은 일부러 찾아가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 영화는 내가 보고 싶거나 봐야 할 여러 영화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그의 영화였다는 말이다.

    조금은 엉뚱한 듯한 제목으로 바뀌어 버린 그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내 소설과 같았을 뿐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느낀 첫 소감은 어째서 나에게 그토록 많은 원작료라는 걸 지불했는가였다.

    그가 어째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서 가라는 듯이 흐릿하게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는지를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영화의 앞뒤에 원작자로서의 내 이름이 뜨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하고 괴이쩍고 난감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고약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무지 시치미만 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버릇은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느닷없이 이응경이 죽는 것 하며, 죽은 사람이 방에서 걸어나와 자기 영정 앞을 천연스레 지나다니는 이유에 대해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담배를 사러 간다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게 만들지를 않나, 보던 신문을 거실 바닥에 나란히 펼쳐놓고 태연히 창문을 여는 것으로 라스트 신을 삼지를 않나… 어쩌자고 영화를 저토록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래.

    그의 두 번째 영화인 ‘강원도의 힘’을 보고 나서야 첫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강원도…’에서도 여전히 산길에 버려진 고기를 끝내 클로즈업해주지 않는다거나, 후진하는 티코 자동차에 여주인공이 한참 동안 가려져 있는 대로 내버려두거나 했지만 갑갑하지는 않았다. 왜 그의 카메라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나는 그의 첫 영화를 보고 두 번째 영화가 나올 때까지 줄곧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뭔가가 다시 시작된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관 안에서 일련의 갈등과 위기와 해소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을 나와 길을 걷고 밥을 먹으며 사는 동안 비었던, 혹은 궁금했던 점들이 하나하나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영화 밖의 삶과 일상과 관념과 의식에까지 개입해 들어온다는 얘기인데, 즉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방식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만든다는 얘기인데, 어찌 그를 두고 고약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문’이 되는 영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라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정도가 비디오 가게에 어쩌다 나와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좀 좋았는지 그의 ‘10계’ 십부작이라든가 타르코프스키의 ‘향수’, ‘희생’ 정도는 본 터여서 지겹게 움직이지 않는 화면이라든가 주위의 소음을 다 담아내는 식의 음향에 대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친 두 친구가 속초 공항 밖 벤치에 앉아 하릴없이 ‘저 산에 사람을 넣으면 몇 명쯤 들어갈까?’ ‘십만?’ ‘십만은 더 들어가지 않을까?’ ‘착착 쌓아 넣으면 백만은 들어가겠지?’ ‘그럼 저런 산 오십 개면 우리나라 인구가 다 들어가겠네.’ 따위의 대사에 남다른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같이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홍상수는 더 오랫동안 경이원지(敬而遠之)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전후관계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없고, 시간을 비틀거나 마구 흐뜨리고, 관객이 궁금해하는 대상물은 아예 비춰주지도 않는데다가,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구질구질한 공간·소리·배경, 그리고 대사와 앵글과 등장인물들의 생김새까지!

    그런데도 누가 제일 괜찮은 감독 같냐고 사람들한테 물으면 단연 홍상수! 라고 대답한다. 누구 소설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대개 오정희나 김승옥을 꼽는 것처럼. 그러나 오정희와 김승옥은 책을 팔아 먹고 살지 못한다. 방송개편 시기에 맞추어 거리에 나가 시민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나 쇼 같은 거 말고요, 다큐멘터리 같은 교양프로를 좀 늘려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청률은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나 쇼가 단연 수위를 차지한다.

    산다는 게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일찌감치 설파한 분도 계시지만, 사람의 일평생은 아무래도 무언가에 끝없이 휘둘리며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서 뭔가에, 어떻게 휘둘리며 살고 있으며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길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 문학과 영화도 존재한다. 그런 문학과 영화는 나 자신이 영문도 모르고 욕망하는 쾌락과 기쁨을 선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귀찮고 성가시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성가심도 존재와 내면에 대한 성찰 속에서는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콜롬비아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 만들었다 해서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영화를 봤다. 아무리 마르케스의 아들이 만든 것이라 해도 이전에 내가 본 홍상수의 영화들이 없었다면 내가 마르케스와 그 가족을 이만큼 좋아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이처럼 홍상수의 영화는 세상의 많고 다양한 영화를 좀더 애정있게 볼 수 있는 방식과 정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오랫동안, 좀더 고약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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