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2000년 흥행 Best10으로 본 한국영화의 경쟁력

  • 김의찬< 영화평론가 >

    입력2005-04-22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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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경비구역JSA’ ‘반칙왕’ ‘비천무’….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2000년 최고 히트작들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이 영화들은 어떤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는가.
    ‘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요즘이다. 칸영화제 등 각종 세계 영화제 진출, 일본·중국 등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미국까지 넘나드는 해외시장 개척, 튼실한 작품의 질을 담보하는 젊은 작가군의 등장. 분명 상승세다.

    ‘공동경비구역JSA’가 ‘쉬리’의 신화를 깨고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일본 영화산업이 1960년대에 상업적 측면에서 정점에 도달한 뒤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그려온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영화의 질적·상업적 수준은 ‘기묘하다’는 단어를 써도 좋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무엇이 한국영화라는 토지를 이처럼 비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최근 한국영화는 어떤 양상을 보이며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

    스타 기용, 장르영화로 승부

    영화진흥위원회가 결산한 2000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정상은 단연 ‘공동경비구역JSA’. 이 영화는 작년 한 해 동안만 서울 관객 244만 명 동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수립하며 국내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 뒤를 ‘반칙왕’(81만 명)과 ‘비천무’(73만 명), ‘단적비연수’(63만 명), ‘리베라메’(54만 명)가 따르고 있다.

    이 영화들은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쉬리’에서 정점에 달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근본적인 차별성을 보여주기보다 일종의 변형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량공세 측면에서는 아직 많이 처진다. 그러나 영화의 ‘볼거리’를 강조하면서 능란한 스타 시스템 구사를 보여주는 최근 경향은 ‘비천무’ ‘단적비연수’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나름의 관객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아울러 위에 언급한 다섯 편의 영화는 모두 무협, 액션, 스릴러 등 장르영화의 틀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나름의 팬을 거느린 스타를 영화의 ‘간판’으로 내세워 안정적 흥행을 꾀한다. 이와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양상은 평단에서 ‘드라마의 부재’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2001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소 주춤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제작 패턴이 한국영화 산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흥행 순위 6~10위는 ‘가위’(34만 명), ‘동감’(32만 명), ‘거짓말’(32만 명), ‘박하사탕’(31만 명), ‘시월애’(25만 명) 등의 영화가 차지했다.

    이 작품들은 최근 경향 그대로 ‘현재’에 대한 영화적 관심을 노출하고 있다. 과거 인물과 현재 인물이 특정 통신수단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한 인물의 현재로부터 과거 행적으로 거슬러 오르는 기법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영화가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현재, 혹은 미래 지향의 문제의식을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성공했다는 것, 그를 통해 흥행 결산에서 수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영화인들이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같은 작품, 다시 말해 현대성에 연연하기보다 과거에 고착돼 있는 고전 작품들은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 평단에서 주목받았다.

    이런 유의 작품에 대한 서구 관객의 호기심은 역설적으로 최근 한국영화의 ‘현재’에 대한 집착이 과다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한국영화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산업적 이해득실로 인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이는 분명 불행한 일일 것이다.

    똑 떨어지는 기획영화 ‘…JSA’

    ‘공동경비구역JSA’의 엄청난 성공은 분명 ‘사건’이었다. 송강호와 이병헌, 이영애라는 스타를 총동원한 작품이지만 관객을 이처럼 기록적으로 불러 모으리라곤 제작자조차 예상치 못했다.

    영화에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적극 도입돼 있다. 판문점 북측 초소에서 총격사건으로 북한 초소병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남측 초소병이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당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이를 위해 파견된 중립국 스위스 정보단 소속 한국계 여소령 소피 장은 의외의 사실을 밝혀낸다. 민족의 동질성 앞에 총을 버린 군인들이 어깨 겯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음을.

    ‘…JSA’는 똑 떨어지는 기획영화다. 내러티브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 특히 국내 관객이라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하며 캐스팅 역시 적절했다.

    영화엔 유머가 짙게 배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남북한 병사의 우정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상쇄하며 흥행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소재나 주제 자체가 워낙 묵직한 편이라 요소요소에 웃음이라는 장치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평단에서 지적하듯 ‘…JSA’는 치밀한 완성도를 과시하는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미스터리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다소 허술하고, 결말 역시 연출자의 감정 과잉의 결과인 듯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민족적 휴머니즘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갈등을 풀어나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쉬리’가 로맨스를 바탕으로 분단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였다면 ‘…JSA’는 민족의 형제애를 우위에 놓아 더 이상의 분단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함을 역설한다. 영화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현실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괴력을 발휘해 흥행가도를 질주했다.

    이렇듯 ‘현실과의 부단한 소통’이라는 대중영화의 ‘기본’을 착실히 구현한 ‘…JSA’에는 ‘충무로’라 약칭되는 한국영화계의 현주소가 정확히 반영돼 있다. 아울러 요즘 붐을 이루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띠고 있으면서도 스펙터클에 의존하기보다 국내 영화 관객층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해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반칙왕’은 유쾌한 영화다. ‘조용한 가족’이라는 ‘엽기코미디’를 통해 한국영화에 부재했던 ‘웃음’의 새 코드를 창안한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주목받는 연출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기발하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조용한 가족’에 비해 김감독은 ‘반칙왕’을 “슬픈 코미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작품의 성격이 잘 요약하는 말이다. ‘반칙왕’은 ‘투캅스’로 대변되는 여타의 사회적 함의를 지닌 작품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소시민 지향의 코미디 영화로 우리 영화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반칙왕’은 ‘반칙’이 만연한 직장, 정확히 말해 은행에 다니는 한 샐러리맨의 비애를 다루고 있다. 소심한 은행원은 걸핏하면 직장 상사에게 헤드록(목조르기)을 당한다. 그가 탈출구로 선택한 곳은 레슬링 도장. 밤이면 반칙 레슬러로 돌변하는 은행원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각의 링에서 도발(반칙)을 일삼으며 기이한 쾌감을 느낀다. 부조리로 가득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자 반칙이고 풍자다. 영화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적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송강호라는 걸출한 연기자의 저력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는 ‘쉬리’와 ‘반칙왕’, ‘…JSA’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섭렵하며 고유한 스타 이미지를 확립했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그의 연기력은 스타 연기자 부재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영화계에 가뭄 끝 단비처럼 소중한 존재다.

    ‘비천무’와 ‘단적비연수’, ‘리베라메’는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 같은 줄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만화가 원작인 ‘비천무’는 무협영화의 틀을 지니고 있지만 멜로적 감성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으며, 판타지 영화의 외양을 띤 ‘단적비연수’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로맨스다. ‘리베라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향을 전제로 한 장르영화란 점에서 특징적이다.

    세 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다. ‘비천무’의 경우 “주연 연기자들의 역량이 형편없다”는 식으로 꼬집은 평자도 있었으며 ‘단적비연수’는 화려한 겉포장에 비해 지지부진한 이야기 구조가 폄하의 대상이 됐다. ‘리베라메’는 할리우드 영화 ‘분노의 역류’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기획작품이란 측면에서 볼 때 다소 진부하다는 평도 들었다.

    전체적으로 이 세 편의 영화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중국 원나라 말엽을 배경으로 몽고 장군의 서녀와 고려 유민의 사랑을 그린 ‘비천무’는 원작의 복잡다단한 구조를 짧은 영화에 억지로 구겨넣는 바람에 산만하고 허술한 내러티브를 갖게 됐다. 만화 ‘비천무’의 팬들이 영화 ‘비천무’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이유이기도 하다. 운명적 사랑을 표현하기엔 배우들의 연기력이 역부족이었던 점도 치명적이었다.

    ‘단적비연수’는 이미숙, 설경구를 비롯한 스타들이 스크린을 채우고 시종일관 카메라의 화려한 움직임이 계속되었으나, 스펙터클의 측면에서는 역설적으로 상당히 단조로운 영화다. ‘은행나무 침대’의 후속편인 ‘단적비연수’는 가상의 시공간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질투, 복수라는 매혹적인 모티프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 만큼 헐거운 짜임새로 인해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작 ‘은행나무 침대’가 한국영화에서전례를 찾기 힘들 만큼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 판타지를 차용한 웅장한 서사 등 연출자의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면, ‘단적비연수’는 훨씬 많은 돈을 들였으면서도 상업영화로서의 장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특수효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리베라메’가 다른 작품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멜로와 판타지의 결합

    미국 영화에서 이른바 블록버스터의 유행은 197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계의 핵심 조류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이 효시가 된 블록버스터 영화는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간단없는 약진을 계속하고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컴퓨터그래픽이나 물량공세에 역점을 둔 스펙터클 위주로 진행되고 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영화인 ‘비천무’와 ‘단적비연수’는 드라마의 응집력이라는 ‘기본기’에서부터 확연히 힘이 달린다. 지나치게 헐거운 까닭이다. 이로 인해 영화들은 작품 보다 마케팅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는 근본적이고도 피치 못할 내적 한계를 지니게 됐다.

    이로 인해 ‘비천무’ 등의 영화는 일정 관객 이상을 확보했음에도 평단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영화의 질적 수준보다 홍보와 마케팅에 비중을 둔 작품은 상업적 성공은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직접 영화를 본 관객 또는 평자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다.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최근 한국영화계의 움직임이 일정한 장르영화를 꾸준히 제작하기보다 시기마다 문화적 흐름이나 유행을 뒤좇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것도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내재한 한계로 꼽을 수 있다. 소규모 장르영화에서 충분하게 연마된 연출자가 몸집이 큰 대작영화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신인감독이 데뷔작으로 대작영화를 연출하는 풍토 역시 최근 한국영화계가 지나친 상업적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가위’와 ‘동감’은 각기 공포영화와 판타지멜로영화다. 친구들끼리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의문의 사건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원혼이 그들을 급습하는 ‘가위’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유행했던 10대 공포영화를 모방·참조한 작품이다. 영화 제작자는 “장르영화라는 점을 감안해 충분히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가위’는 할리우드 영화 외에 일본 공포영화 ‘링’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일련의 초자연적 현상을 호러영화의 문법과 접목시킨 시도도 그러하다. 유지태, 김규리 등 청춘스타가 대거 출연한 ‘가위’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치중하기보다 ‘놀람’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나마 MTV 스타일의 현란함으로 포장된 ‘가위’는 근래 제작된 한국 공포영화 가운데 객석의 호응을 이끌어낸 유일한 영화라 할 만하다. ‘해변으로 가다’, ‘공포택시’ 등 일련의 공포물은 장르영화로서의 기본적 쾌감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가위’는 영화 내내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공포를 지속시킨다.

    ‘동감’은 과거의 여자와 현재의 남자가 무전기를 매개로 대화를 나누는 판타지 멜로영화다. ‘백 투더 퓨처’식의 SF적 상상력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 각기 다른 시간에 속한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소통을 다룬다.

    지난 시절을 향한 가슴속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이른바 90년대 이후 학번 세대들에게 70년대란 시간대가 역사로부터 분리된, 매우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음을 웅변한다. 정치적 이슈와 학생운동은 말 그대로 배경일 뿐. 이 점에서 ‘동감’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을 비롯 1970년대에 제작된 문제작들보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측면에선 퇴행한 느낌마저 준다.

    ‘거짓말’, ‘박하사탕’, ‘시월애’는 감독의 영화다. ‘거짓말’은 ‘우묵배미의 사랑’ 등으로 1980년대 한국 뉴웨이브를 이끌고 ‘나쁜 영화’에 이르러서는 형식적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던 장선우 감독 작품이다. ‘거짓말’은 잦은 정사 장면 등 성표현의 문제로 화제를 낳았고 베니스영화제 진출이라는 성과도 거뒀다.

    ‘나쁜 영화’에 이어 ‘거짓말’에서도 장감독의 성적 표현은 여전히 대담하다. 사도 마조히즘 등 주 소재와 배우들의 전라 연기로 인해 영화계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Y와 J라는 남녀의 가학적 충동과 이들의 육체관계에 내재한 처연한 슬픔을 담고 있는 영화 ‘거짓말’은 감독의 초기작 ‘우묵배미의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인다.

    ‘나쁜 영화’와는 달리 ‘거짓말’은 국내 평단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페미니즘 비평가 진영의 긍정적 태도는 ‘나쁜 영화’ 때와는 180도 다른 것이어서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초록물고기’ 시절부터 한국적 리얼리즘을 탐구하는 작가로 공인받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90년대에서 출발해 197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구성은, 줄거리의 인과성에 관계없이 한 인물의 내면세계를 고요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사실성을 충분히 담보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 희귀한 사례다.

    ‘시대에 관한 슬픈 우화’라는 평을 듣기도 한 ‘박하사탕’은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 삼아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영혼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역구성해 보여줌으로써 이른바 386세대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월애’는 데뷔작 ‘그대 안의 블루’로 페미니즘 비평 진영의 환대를 받았던 이현승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이정재, 전지현이라는 청춘스타를 캐스팅한 이 영화는 ‘동감’과 유사한 판타지 멜로의 틀을 갖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남녀가 우체통을 매개로 사랑을 나누는 것. 영화는 같은 장소, 엇갈린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애달픈 사랑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디테일을 강조하는 이 감독 특유의 감수성으로 인해 ‘시월애’는 다른 판타지 멜로물과 차별된다. 그럼에도 전작에서 보여줬던 스타일 위주의 연출에서 벗어나지 않은 점, 그리고 젊은 세대의 도회적 속성에 대한 찬양에 작품의 방점을 찍은 점으로 인해 구태의연한 멜로물로 평가될 개연성이 충분한 작품이다.

    올해의 한국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작년에 비해 주춤한 듯한 인상이 짙다. 무엇보다 ‘…JSA’나 ‘반칙왕’처럼 이른바 ‘대박 영화’를 아직은 보기 힘들다. ‘천사몽’, ‘광시곡’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영화들이 차례로 실패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조악한 내러티브와 미숙한 연기, 장르영화로서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작품들이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들이다.

    오히려 ‘하루’, ‘불후의 명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 일단의 멜로 영화가 평단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여성 관객층과 소통에 성공해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한국영화는 각종 영화제를 통해 홍상수, 김기덕 등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상업영화의 약진도 아시아권에서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인들은 일본·홍콩의 영화산업 및 연출자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아야 한다. 길고 지속적인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양국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국영화가 장기적으로 발전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는 2~3년간 계속돼 온 한국영화의 상승세가 지속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모쪼록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경제적인, 무엇보다 새롭고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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