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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흥남대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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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현봉학의 외침은 날개를 단 듯이 펴져 나갔다. 그날 밤 4000명이 아니라 함흥 시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5만여 명이 함흥역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는 미 10군단에서 받은 빨간 딱지를 관공서와 교회에 나눠 줬었는데, 빨간 딱지를 가진 사람만이 함흥역으로 들어와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빨간 딱지가 없는 사람은 미군 헌병들에게 막혀 역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새카맣게 운집한 군중을 보며, 현봉학은 생살여탈권이 자기 손안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고 전율했다.

이때 그는 미군 헌병을 도와 질서를 잡아주고 있던 함흥고보 동창 최승혁을 보았다. 잠시 다른 일을 하던 현봉학은 뒤늦게 ‘그는 빨간 딱지가 없다. 그러나 저 친구만은 기차에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승혁을 찾았다. 그러나 이때 최승혁은 미군 헌병에 밀려 거대한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끝내 그는 기차를 타지 못했다. 이러한 소동을 겪으며 자정에 떠나기로 한 기차는 새벽 2∼3시쯤에야 함흥역을 출발했다. 탑승자는 5000여 명이 넘는 듯, 기차 지붕 위에도 빼곡히 사람이 올라가 있었다.

함흥에서 흥남까지는 30리 남짓한데, 몸이 무거운 기차는 헉헉대며 3시간을 간 후에야 흥남역에서 긴 숨을 토해 놓았다. 그러는 사이 기차를 타지 못한 함흥 시민들은 30리밖에 되지 않는 흥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두고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의 통행은 엄격히 제한된다. 이때 통제를 하는 것은 헌병이다.

평시에 헌병은 군기(軍紀)를 잡고 군에서 일어난 사건을 수사하며 국군의 날 같은 행사 때 질서를 잡는 일 정도만 한다. 그러나 전시가 되면 군용 차량과 병력이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모든 도로를 통제하는 일부터 한다. 또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쳐 오면, 바로 뒤에 포진해 있다가 이들을 즉결처분하기도 한다. 헌병의 이러한 즉결처분권 때문에 병사들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효과를 거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함흥과 흥남을 잇는 도로에도 미군 헌병들이 개미떼처럼 깔려 민간인을 통제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헌병이 없는 논틀 밭틀을 따라 흥남으로 철수했다. 날이 밝자 흥남에는 기차를 타고 온 5000여 명 외에도 시골길을 따라 철수해온 주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 명이 복작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싣고 갈 배가 도착하지 않았다. 어렵게 사지를 뚫고 나온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도 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철수 포기한 친구

이때서야 현봉학은 함흥 운흥리 교회에서 데리고 나오지 못한 친구 박재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현봉학이 운흥리교회를 찾아가 빨간 딱지를 나눠주며 “오늘 밤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박재인은 “마누라가 만삭이다. 오늘 내일 몸을 풀 것 같은데,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 현봉학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인민군이 오면 기독교인인 자네는 죽는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박재인은 “마누라가 기차에서 해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못 간다”고 했다.

그래서 박재인은 함흥에 남았는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현봉학 박사는 ‘1951년 4월 박재인이 북한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흥남에 도착한 미 10군단은 배를 보내달라고 무전을 쳤다. 많은 사람을 태우려면 함포가 탑재된 군함보다는 상륙작전에 쓰이는 LST(전차 상륙용 대형 주정)가 유리하다. 현봉학은 원래 한국 해병대 소속이었으므로, 한국 해군을 향해 LST를 보내달라고 무전을 쳤다. 일주일여를 기다리자 호위함대와 함께 사람을 태우고 갈 배 11척이 흥남항에 도착했다. 세 척은 한국 해군의 LST고, 나머지는 미군 LST와 일본에서 급송된 미국 상선이었다(상선도 물자를 싣는 공간을 비우면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다).

포니 대령의 자비심

흥남항에서 철수를 총지휘한 이는 미 10군단의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 대령이었다. 포니 대령은 흥남항에 모여든 민간인을 태우고 공간에 여유가 있으면 흥남항 부두에 모아 놓은 유류와 탄약 등 전투물자도 실으려 했다. 이때 포니 대령이 전투물자를 실으려고 결심했다면 많은 피란민이 북한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니 대령은 전투물자의 탑재를 포기하고 피란민들을 태우게 하는 자비심을 일으켰다.

11척의 함정은 콩나물 시루처럼 군인과 피란민을 싣고 미 7함대 전투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이중 몇 척은 재빨리 부산항에 사람을 내려 놓고 다시 흥남항으로 와 또 사람을 태워가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은 밀려온 피란민으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흥남에서 온 피란민들까지 보태지자 더욱 복작거렸다.

일부 함정은 포항에 피란민을 내려놓았다. 부두가 없어도 사람을 내려 놓을 수 있는 LST는 거제도의 장생포로 가서 피란민을 상륙시켰다. 거제도는 이렇게 해서 이북 사람들이 발을 딛기 시작했는데, 그 후 북한군 포로수용소까지 생겨, 남쪽 끝에 있지만 유독 월남자가 많은 섬이 되었다(현봉학의 어머니인 申愛均 여사는 1951년 거제도에 ‘일맥원’이라는 고아원을 차리고 이어 대광중학교 분교를 열어, 함경도에서 어렵게 내려온 사람들을 거두었다).

11척의 배가 군인과 피란민을 실어나르는 동안 미 7함대 전투함들은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많은 포탄을 발사해 중공군의 추격을 차단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 원수가 탔던 기함(旗艦)은 ‘마운트 맥킨리’함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이 배에 승함해 흥남 포격을 지켜보았다. 11척의 배가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것은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펼치던 미군 병사들이 전쟁의 마지막날로 학수고대했던 12월24일이었다. 마운트 맥킨리함을 비롯한 전 전투함은 일제히 흥남 부두에 늘어놓은 유류통과 탄약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해, 흥남 부두 전체를 파괴했다.

오랫동안 한국은 흥남대철수를 패배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미군은 흥남에서 많은 병력과 인원을 안전하게 철수시켰기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싸울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이듬해 봄 철수작전을 주도한 알몬드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한국이 흥남대철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45년이 흘러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였다.

이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에야 우리 사회는 ‘흥남대철수가 단순한 패전이 아니고 많은 사람을 사지에서 구해낸 장엄한 행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 우리 사회가 찾아낸 사람이 의업에 종사하고 있던 현봉학 박사였다. 현봉학 박사가 약관 28세 때 민간인 철수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9만8000여 명이라는 많은 민간인은 북한 땅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현박사는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박사는 날 때부터 한국의 쉰들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1922년 그는 함흥에서 영생고녀 교목(校牧)을 지낸 현원국(玄垣國) 목사와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지낸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5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이중 남동생 하나가 6·25전쟁 전에 결핵으로 죽어 4남1녀가 장성했는데, 그의 큰형 영학(永學·80)씨는 이화여대 교수로 오래 봉직한 신학자다. 바로 밑의 동생 시학(時學)씨는 해군 소장으로 예편해 모로코 대사 등을 역임했고, 동생 웅(雄)씨는 ‘피터현’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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