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라면 모르지만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노래방에서는 줄기차게 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가 불린다. 특히 그의 노래는 더러 저음 부분이 모창됐지만, 저음에서 급격히 고음으로 치솟는 ‘멀티 옥타브’라서 실은 완창이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시 최고가수였던 최희준도 배호의 환상적 음역과 음색을 내심 크게 두려워했으며, 만약 그가 더 살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도 그의 사후 곧바로 이어진 독점적 라이벌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수 가운데 가장 먼저 금테안경을 끼고 언제나 단정한 싱글차림이었던 배호는 얼핏 말붙이기가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소탈하고, 장난기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9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이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를 흉내내자 배호는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의 툭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 문주란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당시 ‘안경 낀 사람은 깐깐하다’는 속설과 달리 그는 이것저것 가리는 법이 없었으며, 식사도 닥치는 대로 잘 먹는 그야말로 ‘천골’이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호주머니에서 ‘소화제’를 꺼내 마치 디저트인 양 먹곤 했다. ‘하루 세 차례 소화제 복용’은 예외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건강한 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배호는 1970년 12월 광주 태평시네마 공연에서 급기야 무대에 서기도 전에 쓰러졌다. 무대에는 10대 가수가 다 등장했으나 배호는 분장실에서 신음소리로 “노래할 수가 없다”며 누워버렸다. 사회자 이대성과 최성일은 객석에 양해를 구했으나 관객들은 막무가내로 “우린 배호를 보러왔다! 안 나오면 돈 물어내라!”며 아우성쳤다.
객석의 상황을 전해들은 배호는 “그럼 무대에 나가야지요” 하며 최성일씨에게 “좀 부축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배호는 최성일의 등에 업힌 채, 이대성이 들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관객들의 코끝이 찡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무렵 배호의 인기가 어땠는지는 이른바 ‘땅콩세례’가 잘 말해준다. 어디서나 그랬지만 극장손님 중에는 술집 아가씨가 많았으며 그들은 공연 구경을 와서 스타가 등장하면 상습적으로 땅콩을 무대로 던졌다. 어떤 가수는 그 땅콩에 눈을 정통으로 맞아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배호가 등장하면 마치 소나기가 퍼붓듯 땅콩이 무대 위로 뿌려졌다. 공연 뒤 빗자루로 쓸어보면 땅콩이 대두 한 말이나 됐다는 것이다. 요즘은 관객들이 꽃을 던지지만, 당시 쇼 스타를 위한 팡파르는 땅콩이었다.
병든 배호는 오랫동안 땅콩 쇼의 환호를 누리지 못했다. 1971년 경기도 문산의 사흘 공연 중 마지막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배호는 끝내 무대에 서지 못했고, 서울로 급송되어 세브란스병원에 3개월간 입원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무리하게 용산 성남극장 무대에 나서는 바람에 건강은 더 악화되었고, 사경을 헤매며 대기실에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그럼에도 배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불굴의 집념으로 마이크만 잡으면 ‘기침 한번 없이, 음 하나 흔들림 없이’ 열창했다. 그의 마지막 공연에서 피날레 곡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지막 잎새’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7일 그는 병원에서 서울 삼양동 자택으로 옮기는 도중 차에서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31세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고, 사인은 과로로 인한 신장염이었다.
배호는 정말 ‘신은 천재를 시기해 일찍 저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올해로 정확히 30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계의 어떤 추모 움직임도 없다. 가요사에 획을 그은 그를 생각할 때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배호가 활약하던 시기의 10대 가수는 여자 이미자 최숙자 이금희 현미 문주란 조미미, 남자는 배호를 비롯해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이 단골이었다. 명단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가요는 트로트와 서양 재즈(스탠더드 팝)풍 가요가 겨루는 형국이었다. 여가수 가운데 후자를 대변했던 인물이 현미였다. 그가 우리 가요발전에 주춧돌 구실을 한 ‘미8군 무대’의 무용수 겸 싱어였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로는 격조가 높았던 ‘밤 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의 노래가 미8군 무대에서 공력을 다진 소산이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여걸’ 현미와 문주란
춤도 서양식으로 잘 추고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누구 못지않았기에 현미는 다른 가수들이나 악단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래서 가수가 악단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단이 현미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곧잘 오만함이 아닌 호탕함으로 나타났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누구든 상대하기가 편했고 웃음소리도 ‘호호호’가 아닌 ‘껄껄껄’이었다.
1970년 현미를 간판스타로 내세운 파월장병 위문공연 때의 일이다. 월남의 사이공, 나트랑, 다낭 지역을 순회한 대규모 공연에서 어느 날 현미가 숙소에 돌아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소지품이 없어졌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액세서리 등 귀중품과 현금은 그대로 있는데 팬티만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었다(현미는 남들보다 팬티를 많이 갖고 다녔다고 한다).
현미는 “아니 지저분한 팬티를 대체 뭐 하러 훔쳐갔지?” 하며 흥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실된 팬티는 그 연대의 장병들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유를 캐보니 ‘전쟁터에서는 여자의 팬티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공연에 참가했던 여자단원들이 빨래를 해서 널어두기만 하면 유독 속옷만 도둑을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여자라면 더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현미의 반응은 ‘껄껄껄’이었다. 정말 현미는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장군감’이었을 인물이다.
배호가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매력적 저음의 가수 문주란도 현미에 못지않은 ‘여자 얼굴을 한 남자’였다. 우선 남자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선생님’이나 ‘오빠’가 아니라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형’이었다. 현미야 그래도 당당한(?) 몸집이었지만 문주란은 155㎝ 남짓한 왜소한 체구였기에 처음 대하는 사람들의 ‘문화충격’은 더했다. 당장 나오는 소리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였다. 사실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문주란을 옆에 놔두고도 “아직 문주란씨 안 왔어요?”라고 묻는 일이 허다했다.
문주란은 지나칠 정도로 남자다웠다. 스피드와 스릴 광(狂)이었다는 사실이 그 일면을 말해준다. 여가수 중 가장 먼저 자가운전을 한 그는 핸들만 잡으면 동승한 사람이 후회할 만큼 난폭한 운전으로 일관했다. 커브 길을 돌 때 삑 하는 마찰음을 스릴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이 탄 사람은 생명선이 끊기는 듯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를 몰았으니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1985년 ‘홀리데이 인 서울’ 공연에서는 급기야 얼굴을 완전히 ‘짜깁기’한 상태로 무대에 나섰다. 사회자 최성일씨가 물으니 문주란은 넉살좋게도 “자가용의 차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82바늘이나 꿰맸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난폭 운전 때문이었다. 최성일씨는 그때 문주란을 이렇게 놀렸다. “얼굴 평수가 작았기에 망정이지 더 큰 얼굴이었다면 꿰맨 바늘 수가 더 많았겠지!”
‘눈물을 감추고’ ‘미련도 후회도 없다’와 같은 히트곡을 남긴 위키리는 현미나 문주란과 정반대였다. 현미와 같은 미8군 무대 출신으로 훤칠한 키에 늘 정장 차림이었던 그는 언제나 신사의 품위와 격조를 유지했다(나중에 KBS ‘전국노래자랑’ MC로 맹활약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신사’ 위키리, ‘악동’ 김상국
1974년 강원도 황지 공연 때 그는 탄광지역에 유난히 즐비했던 요정으로부터 거의 매일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들이 김샐 만큼 그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신사다운 매너를 지켰다.
덩달아 따라간 사람들은 호스티스들과 질탕 놀이를 즐기는데도 막상 주빈(主賓)인 그는 한치도 짓궂거나 추잡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 술자리가 일찍 끝나버리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신사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코미디언을 웃기는 가수’로서 ‘쇼 무대의 명물’로 통했던 가수 김상국은 위키리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반대로 ‘악동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도를 넘어선 짓궂은 행동으로 사람을 골탕먹였지만, 때로는 ‘기행’으로 배꼽을 잡게 했다. 쇼 무대 사회자들은 지금도 주저없이 “김상국이야말로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람을 즐겁게 한 진정한 의미의 엔터테이너였다”고 말한다.
그는 공연단원들 앞에서 놀다가 신이 나면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의 신체까지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술 더 떠 여자단원 숙소에 슬그머니 다가가 방문을 슬쩍 열고 자신의 ‘물건’만 불쑥 집어넣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들이 대경실색하여 “어머나! 이게 뭐야?” 하며 괴성을 내질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1년 서울 시민회관 공연에서 나타난 그의 악동기질은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히 화장실이 있음에도 그는 무대 뒤에서 실례를 했다. 당시 시민회관 무대감독이던 배영달씨는 격노해 그를 다그쳤으나 김상국은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는 거요” 하며 전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결국 김상국이 사과를 해서 말다툼은 끝났지만, 예의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김상국은 또 무대 뒤에서 소변을 봤고, 배영달씨도 마침내 두손 들고 포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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