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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수준의 석굴암 10대제자상

  •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세계 최고수준의 석굴암 10대제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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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생의 성불(成佛)이다. 즉 모든 사람이 해탈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보살의 서원(誓願)은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대승(大乘; 큰 수레)에 태워 함께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승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소수의 출가자(出家者)가 수행 득도하여 해탈을 얻는 데 최종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해탈을 얻는 데 그 최종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승경전의 출현 과정 최종 단계에서는 재가불자(在家佛子; 세속에 사는 불교 신도)가 성불하여 설법하는 내용의 경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승사상을 마무리짓는 경전으로 출현한 것이 이른바 ‘유마경(維摩經)’이다.

이 ‘유마경’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시기가 삼국시대 오(吳)의 건흥(建興) 2년(253)이니, 이 경전이 인도에서 편찬된 것은 대승불교의 극성기이던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 경전을 최초로 번역한 이는 대월지(大越氏, 越氏를 月氏 또는 月支로 표기하기도 함) 우바새(優婆塞; up-asaka, 淸信士, 재가 남자 불교 신도) 지겸(支謙)이라 한다. 그가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상·하 2권으로 번역한 것이다.



지겸은 대월지의 혈통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 조부 법도(法度)가 그 나라 사람 수백 명을 거느리고 후한 영제(靈帝) 때(168∼189년) 한나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승불교가 일어났던 쿠샨제국의 간다라 지방이 그의 고향인 것이다.

지겸은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서 10세 때 이미 중국 글을 터득하고 13세 때에는 인도 문자를 모두 배워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한다. 수많은 책을 널리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특히 불교 경전에 통달했고 각종 예술에도 정통했다. 몸이 가늘고 길며 빛이 검었고 눈은 흰빛이 많고 눈동자는 노랬으나,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그를 꾀주머니라고 불렀다.

그는 후한 헌제(獻帝, 재위 190∼220년) 말년 경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같은 고향사람 수십 명과 함께 남쪽 오나라로 피난해 오나라 대제(大帝) 손권(孫權, 재위 222∼252년)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고 동궁(東宮; 태자)을 보도(輔導; 도와서 이끌어 감, 즉 가르침)하는 직책을 맡는다.

이때 이미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나 인도 문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일반 사람들이 불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겸은 중요한 불교경전들을 모아다 번역하기 시작했다. 오나라 대제(大帝) 황무(黃武) 원년(222)부터 후관후(候官侯) 건흥 2년(253)에 걸치는 31년의 긴 세월이었다. 그 사이 ‘유마힐경’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법구경(法句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129부(部)를 번역해냈다 하는데, 그중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것이 바로 ‘유마힐경’ 상·하 2권이다.

그러나 아직 불보살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 거사성불(居士成佛; 재가신도가 부처가 됨)이라는 대승불교의 고차원적인 신행(信行) 단계를 대중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오산으로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유마힐경’은 빛을 보지 못한 채 20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다음, 대역경사(大譯經師)인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년)이 후진(後秦) 홍시(弘始) 8년(406)에 이를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상·중·하 3권으로 다시 번역한 뒤에야 서서히 이해되어 나간다.

이런 사실은 북위 헌문제(獻文帝, 454∼476년)가 그 재위 기간(465∼471년)에 생모인 원황후(元皇后) 이(李)씨로 추존된 이귀인(李貴人, ?∼456년)을 위해 조성했으리라 생각되는 운강석굴 제7동 주실(主室) 남벽 제1층의 입구 좌우 감실에 새겨진 (도판 1)과 (도판 2)의 대담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 을 한데 합쳐 완벽한 를 이루어내게 되니, 480년 경에 조성되었으리라 생각되는 헌문제 굴인 운강석굴 제6동 남벽 하층 중앙부의 (도판 3)가 바로 그것이다. 석가삼존 형식으로 그 상 양식을 완성해 놓은 모양이다.

아마 불교와 도교에 심취해서 불과 18세에 5세밖에 안된 황태자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승려와 도사를 불러 그 심오한 뜻을 얘기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는 헌문제가 ‘유마경’에 심취했기 때문에 이런 를 출현시켰을 것이다.

사실 헌문제는 부황인 문성제(文成帝, 440∼465년)가 돌아갔을 때 12세의 소년이었다. 그래서 문성제의 정비(正妃)인 문명(文明)태후 풍씨(馮氏, 442∼490년)가 섭정이 되었는데, 그녀는 정치적 야망이 커서 헌문제가 장성하자 그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손자인 젖먹이 어린아이를 보위에 올려놓고 계속 섭정을 했다. 이 때문에 헌문제는 불교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유마경’에 심취하고 까지 그려내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유마경’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헌문제가 심취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법력이 높은 유마거사

세계 최고수준의 석굴암 10대제자상
‘유마경’은 지겸이 ‘불설유마힐경’ 상·하 2권으로 번역해낸 이후에 도합 7종의 번역이 있었다 하나 현존하는 것은 3종뿐이다. 지겸의 ‘불설유마힐경’과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 상·중·하 3권 및 당나라 현장(玄, 602∼664년)이 고종 영휘(永徽) 원년(650)에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 그것이다. 3종류의 경전이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분량이 많을수록 설명이 장황할 뿐이다.

그런데 운강석굴의 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이 저본(底本)이 되었다. 그리고 3본의 ‘유마경’ 중에 지금까지도 중간 분량인 ‘유마힐소설경’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유마힐소설경’을 통해 그 줄거리를 요약해 보겠다.

어느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비야리(毘耶離, vai쳒-ali)성 암라(菴羅, -amra, 망고)나무 과수원에서 대비구(大比丘) 8000인과 보살 3만인과 1만의 범천왕과 1만2000의 제석천과 제천(諸天), 용신(龍神), 야차(夜叉), 건달바(乾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羅伽)와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및 비야리성의 500장자(長者)들과 함께 불국정토(佛國淨土)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야리성 안에는 유마힐(維摩詰, vimalakrti)이라는 장자(長者; 덕망이 높은 어른)가 있었다. 그는 이미 과거세에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 대승법문(大乘法門)을 체득하였으므로 그 법력(法力)이 여러 보살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중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비야리성에 거주하면서 대승법을 얘기하고 그 법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유마힐 거사는 다시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어 문병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몸의 병에 비유하여 불이법문(不二法門; 살고 죽는 것이 둘이 아니고 있고 없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니 부처님 회상(會上; 모임)에서도 유마힐에게 문병할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10대제자(十大弟子)인 사리불(舍利弗, 쳒--ariputra), 대목건련(大目連, mah-amaudgaly-ayana), 대가섭(大迦葉, mah-ak--a쳒yapa), 수보리(須菩提, subht-u),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 p-urnamaitr-aya), 마하가전연(摩訶迦延, mah-akaty-ayana),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우바리(優婆離, up-ali), 라후라(羅羅, r-ahula), 아난(阿難, --ananda)을 차례로 불러 문병갔다 오라고 시키지만 유마거사의 법력이 높아 감당할 수 없다고 모두 사양한다. 다시 미륵보살과 광엄동자(光嚴童子) 및 선덕(善德)장자에게 시켜보지만 이들 역시 유마거사의 법력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한다. 할 수 없이 석가세존의 좌협시보살로 석가 회상의 제일 보처(補處)보살인 문수보살이 응대하기 어려울 줄 알면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령을 받들고 문병하러 유마힐 거사를 찾아간다.

이때 석가모니불 회상에 모인 대중들은 이 두 큰 선각자들의 대화에서는 반드시 신묘한 법이 얘기되리라 생각하고 모두 따라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8000보살과 500성문(聲聞, 大弟子) 및 범왕, 제석, 사천왕 등 수많은 대중이 문수보살을 따라 유마거사 자택으로 문병하러 찾아간다.

유마거사는 아무 것도 없는 빈 방 침상에 홀로 누워 있다가 이들 일행을 맞는데 문수보살이 문병하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 병은 미련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애착에서 생겨났는데 일체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고 있다. 일체 중생이 낫는다면 나도 나을 것이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윤회에 드는데 삶과 죽음이 있다면 병도 있기 마련이다. 병의 근원은 나에게 집착하는 데 있으므로 이를 차단하는 것이 치료의 첩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며 있고 없는 것이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 둘이 아닌 법)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유마거사는 앉을 자리가 없다고 투정하는 사리불에게 동방 수미상(須彌相) 세계의 수미등왕불(須彌燈王佛)로부터 3만2000 개의 사자좌를 빌려다 준다. 8만4000 유순의 크기를 가진 사자좌를 좁은 방안에 넉넉하게 들여 놓지만, 너무 높아서 사리불을 비롯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제자들은 올라가 앉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천녀(天女)가 천화(天華; 하늘 꽃)를 대중들 위에 뿌리자 여러 대보살에게 뿌려진 꽃들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반면 대제자들에게 뿌려진 꽃들은 옷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유마거사는 이런 현상을 보고, 있고 없음이나 살고 죽는데 대한 분별심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서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이를 극복하려면 유(有) 무(無)가 둘이 아니고, 생(生) 사(死)가 둘이 아니며, 병(病) 유()가 둘이 아니고, 인(人; 남) 아(我)가 둘이 아니며, 색(色; 현상) 공(空; 근본)이 둘이 아닌 불이법문을 철저하게 증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자 유마거사는 신통력으로 상방(上方) 중향세계(衆香世界) 향적불(香積佛) 모임에서 점심 공양한 나머지를 화보살(化菩薩)로 하여금 얻어오게 하여 향을 맡게 하는 것으로 모인 대중을 배부르게 먹인다. 그리고 유마거사는 중향세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 위해 화보살을 따라온 900만 보살과 함께 모든 대중을 거느리고 망고나무 과수원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간다.

유마거사가 문병하러 왔던 모든 대중과 향적세계에서 온 보살들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께 나아가 예불하고 공양을 드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향적세계의 향 공양을 받은 다음 유마힐이 말한 것이 최고의 대승법문임을 인정하고 이를 크게 칭찬한다. 그리고 이 경전을 받아 가지고 외우거나 말한 대로 수행하는 공덕은, 일겁(一劫) 동안 삼천 대천세계의 모든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넓이가 4천하에 미치고 높이가 범천에 이르는 칠보탑을 계속 세우는 것보다 더 크다고 가르친다.

이에 제석천을 비롯한 제천과 미륵보살이 이 경전의 수호(守護)와 전승(傳承)을 맹세하고 아난존자는 이를 받아 널리 유포할 대명(大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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