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김영삼(金泳三·YS) 전대통령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했다. 당당하게 구치소 정문을 열어 젖히고 경내에 들어선 김 전대통령은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방상훈(方相勳) 조선일보 사장, 조희준(趙希埈) 전 국민일보 회장 등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차례로 면회했다. 한 시간 가량 세 명의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만난 뒤 구치소를 나온 김 전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으면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안택수(安澤秀) 의원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하야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기자의 질문에 김 전대통령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늦은 감이 있어. 좀더 일찍 했어야지.”
김대통령을 향한 YS의 독설(毒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YS는 현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및 대주주 구속을 ‘언론탄압’이라고 규정했고, ‘핍박의 당사자’들인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면회하고 나온 뒤라 DJ에 대해 고운 얘기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이날 YS의 한마디는 듣는 이에게 평소와 다른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최근 그를 둘러싼 정치환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 그 이유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전직대통령 김영삼’에서 ‘정치인 김영삼’으로 그의 처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YS는 요즘 김종필(金鍾泌·JP) 자민련총재를 만나고 있다. 언론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은 9월24일과 10월7일의 두 차례.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실제 횟수보다 몇 배로 부풀려져 정가에 파문을 낳고 있다. 두 사람의 잇따른 회동에서 비롯된 ‘YS·JP신당설’은 곧 다가올 대선 정국에서 정계개편의 진앙(震央)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게 나오고 있다. 과연 YS와 JP의 만남은 어떤 정치적 파문을 그릴까.
YS, JP 두 김씨와 두루 친밀한 전직장관 K씨. 그는 정가에 두 김씨가 화해하고 의기투합하는 과정에서 양 진영을 오가며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K씨는 “나에 대한 소문은 과장돼 있다”면서도 두 김씨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형성돼 가고 있다는 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K씨는 “한때 영원히 다시 뭉칠 것 같지 않던 두 김씨를 만나도록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YS도 JP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거죠. JP의 경우 공동정부를 구성할 때 ‘집권 후 1년 안에 내각제 개헌’을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김대통령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JP는 김대통령이 단순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국회에 내각제 개헌안을 상정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일을 흐지부지 끝내 버렸죠. 그러나 상황이 이 정도였다면 JP도 굳이 민주당과의 공조를 깨지 않았을 겁니다.”
K씨는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 벌어진 대북정책의 전개과정에서 JP가 철저히 소외된 것이 두 사람이 갈라선 결정적 이유였다고 말했다.
“명색이 공동정권의 2인자였던 JP였지만 정책결정과정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특히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고 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8·15방북단 사건이 터졌고 참다못한 JP가 책임자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한 겁니다. 민주당과의 갈등은 8·15방북단 사건 이후 불거졌지만 사실 JP는 지난 봄, DJ와 마음속의 결별을 한 것으로 압니다.”
YS, JP의 6년만의 화해
K씨는 YS도 JP와 비슷한 소외감을 현정권으로부터 느껴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 취임 초반에 전직대통령을 초청하는 청와대 행사가 있었죠. YS는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참석을 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대선 중에, 그리고 DJ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DJ와 YS 사이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DJ가 그 약속을 안지키자 YS가 화가 났던 겁니다. 김대통령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후로도 DJ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처럼 DJ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거부감과 함께 두 김씨는 또 하나의 정치현실에 인식을 같이 한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여야의 대선후보 가운데 두 김씨가 보기에 ‘국운을 맡겨도 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후보들은 물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에 대해서도 두 김씨는 미덥지 않게 생각한다.
K씨는 “YS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박종웅 의원이 언론탄압에 항의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이총재가 그다지 관심을 보여주지 않은 점에 화를 냈다”고 말했다.
JP 역시 이총재와는 어딘가 코드가 맞지 않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줬다. 9월11일 YS와 JP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이 뒤늦게 허겁지겁 JP에게 만나자고 손을 뻗쳐온 사실에 대해 자민련 관계자들은 쓴웃음을 짓는다. 이처럼 자신들의 신의를 저버린 DJ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대안이 될만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공통된 현실인식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하기에 앞서 풀어야 할 악연이 있었다. 1995년 초 문민정부 초기, YS 직계인 민주계 인사들에 의해 JP가 쫓겨나다시피 민자당을 떠난 사건이 그것이다.
1995년 JP는 민자당 대표였다. 당시 당내에서 그와 갈등을 빚은 인물은 최형우(崔炯佑)씨를 비롯한 민주계 인사들이었다. 민주계 인사들은 그해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표최고위원 대신 ‘3인 부총재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JP의 2선 퇴진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JP와 공화계 인사들이 반발하면서 양측의 다툼은 시작됐다.
결국 JP가 측근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떠났고 그해 3월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독자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JP가 떠난 뒤 민자당 내에서는 부총재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총재 제도 신설이 JP를 몰아내기 위한 주장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6년 반도 더 지난 과거지사지만 당시 JP가 느꼈던 배신감은 대단했다고 한다. 15대 대선 때 정치이념에서도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DJ와 손을 잡고 DJP연합정권을 창출하게 된 뿌리에도 사실은 1995년 민자당과의 악연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 의견이다.
이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악연의 굴레를 최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걷어냈다고 한다. 앞서의 K씨는 “YS가 이 부분에 대해 JP에게 ‘정치 도의상 미안하게 됐다’며 사과를 했고 JP도 이해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95년 사건에 관한 한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해묵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K씨는 “특히 10월7일의 두 번째 만남은 묵은 감정 없이 그야말로 두 사람이 완벽하게 의기투합한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두 사람이 정당을 함께 하자는 논의를 나눌 정도로 친밀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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