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YS·JP의 보수신당 띄우기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5-01-10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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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김종필 두 김씨가 만나고 있다. ‘YS·JP신당설’도 구체화 하고 있다. 정계개편의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있다. 과연 두 김씨는 정치권 변화를 촉발할 ‘화학적 결합’을 이룰 것인가. 정가가 숨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10월12일 김영삼(金泳三·YS) 전대통령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했다. 당당하게 구치소 정문을 열어 젖히고 경내에 들어선 김 전대통령은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방상훈(方相勳) 조선일보 사장, 조희준(趙希埈) 전 국민일보 회장 등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차례로 면회했다. 한 시간 가량 세 명의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만난 뒤 구치소를 나온 김 전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으면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안택수(安澤秀) 의원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하야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기자의 질문에 김 전대통령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늦은 감이 있어. 좀더 일찍 했어야지.”

    김대통령을 향한 YS의 독설(毒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YS는 현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및 대주주 구속을 ‘언론탄압’이라고 규정했고, ‘핍박의 당사자’들인 구속된 언론사 대주주들을 면회하고 나온 뒤라 DJ에 대해 고운 얘기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이날 YS의 한마디는 듣는 이에게 평소와 다른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최근 그를 둘러싼 정치환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 그 이유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전직대통령 김영삼’에서 ‘정치인 김영삼’으로 그의 처지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YS는 요즘 김종필(金鍾泌·JP) 자민련총재를 만나고 있다. 언론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은 9월24일과 10월7일의 두 차례.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실제 횟수보다 몇 배로 부풀려져 정가에 파문을 낳고 있다. 두 사람의 잇따른 회동에서 비롯된 ‘YS·JP신당설’은 곧 다가올 대선 정국에서 정계개편의 진앙(震央)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게 나오고 있다. 과연 YS와 JP의 만남은 어떤 정치적 파문을 그릴까.

    YS, JP 두 김씨와 두루 친밀한 전직장관 K씨. 그는 정가에 두 김씨가 화해하고 의기투합하는 과정에서 양 진영을 오가며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K씨는 “나에 대한 소문은 과장돼 있다”면서도 두 김씨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형성돼 가고 있다는 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K씨는 “한때 영원히 다시 뭉칠 것 같지 않던 두 김씨를 만나도록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YS도 JP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거죠. JP의 경우 공동정부를 구성할 때 ‘집권 후 1년 안에 내각제 개헌’을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김대통령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JP는 김대통령이 단순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국회에 내각제 개헌안을 상정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일을 흐지부지 끝내 버렸죠. 그러나 상황이 이 정도였다면 JP도 굳이 민주당과의 공조를 깨지 않았을 겁니다.”

    K씨는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 벌어진 대북정책의 전개과정에서 JP가 철저히 소외된 것이 두 사람이 갈라선 결정적 이유였다고 말했다.

    “명색이 공동정권의 2인자였던 JP였지만 정책결정과정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특히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고 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8·15방북단 사건이 터졌고 참다못한 JP가 책임자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한 겁니다. 민주당과의 갈등은 8·15방북단 사건 이후 불거졌지만 사실 JP는 지난 봄, DJ와 마음속의 결별을 한 것으로 압니다.”

    YS, JP의 6년만의 화해

    K씨는 YS도 JP와 비슷한 소외감을 현정권으로부터 느껴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 취임 초반에 전직대통령을 초청하는 청와대 행사가 있었죠. YS는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참석을 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대선 중에, 그리고 DJ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DJ와 YS 사이에는 두 사람만이 아는 모종의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DJ가 그 약속을 안지키자 YS가 화가 났던 겁니다. 김대통령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후로도 DJ에게 독설을 퍼붓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처럼 DJ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거부감과 함께 두 김씨는 또 하나의 정치현실에 인식을 같이 한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여야의 대선후보 가운데 두 김씨가 보기에 ‘국운을 맡겨도 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후보들은 물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에 대해서도 두 김씨는 미덥지 않게 생각한다.

    K씨는 “YS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박종웅 의원이 언론탄압에 항의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이총재가 그다지 관심을 보여주지 않은 점에 화를 냈다”고 말했다.

    JP 역시 이총재와는 어딘가 코드가 맞지 않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줬다. 9월11일 YS와 JP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이 뒤늦게 허겁지겁 JP에게 만나자고 손을 뻗쳐온 사실에 대해 자민련 관계자들은 쓴웃음을 짓는다. 이처럼 자신들의 신의를 저버린 DJ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대안이 될만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공통된 현실인식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하기에 앞서 풀어야 할 악연이 있었다. 1995년 초 문민정부 초기, YS 직계인 민주계 인사들에 의해 JP가 쫓겨나다시피 민자당을 떠난 사건이 그것이다.

    1995년 JP는 민자당 대표였다. 당시 당내에서 그와 갈등을 빚은 인물은 최형우(崔炯佑)씨를 비롯한 민주계 인사들이었다. 민주계 인사들은 그해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표최고위원 대신 ‘3인 부총재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JP의 2선 퇴진을 공공연히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JP와 공화계 인사들이 반발하면서 양측의 다툼은 시작됐다.

    결국 JP가 측근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떠났고 그해 3월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독자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JP가 떠난 뒤 민자당 내에서는 부총재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부총재 제도 신설이 JP를 몰아내기 위한 주장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6년 반도 더 지난 과거지사지만 당시 JP가 느꼈던 배신감은 대단했다고 한다. 15대 대선 때 정치이념에서도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DJ와 손을 잡고 DJP연합정권을 창출하게 된 뿌리에도 사실은 1995년 민자당과의 악연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 의견이다.

    이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악연의 굴레를 최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걷어냈다고 한다. 앞서의 K씨는 “YS가 이 부분에 대해 JP에게 ‘정치 도의상 미안하게 됐다’며 사과를 했고 JP도 이해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95년 사건에 관한 한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해묵은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K씨는 “특히 10월7일의 두 번째 만남은 묵은 감정 없이 그야말로 두 사람이 완벽하게 의기투합한 만남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두 사람이 정당을 함께 하자는 논의를 나눌 정도로 친밀해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자민련의 한 관계자는 두 김씨 사이에 연대 움직임이 구체화된 시점과 관련,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사실상 DJP공조가 깨진 직후, 즉 9월3일 직후 당내 여기저기서 YS와의 적극적 연대를 모색하자는 내용의 보고서가 김종필 총재에게 올라갔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도 있었지만 JP 자신도 오래 전부터 숙고했던 듯, 신속하게 당의 방침이 YS와의 연대로 정해졌다”고 말했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자 청구동(JP의 자택이 있는 곳)의 ‘밀사’가 상도동을 찾았다. 앞서의 K씨는 이 무렵 JP의 명을 받고 상도동을 찾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두 김씨가 처음 만나는 날을 9월12일로 정했다. 12일 만남은 그 전날 발생한 미국테러사건으로 9월24일로 연기됐지만 첫 만남의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두 김씨는 이미 정국인식에서 상당부분 의견의 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이 9월24일 두 사람의 첫만남 때 JP가 YS에게 “한번 읽어보시라”고 건네줬다는 노란봉투 속의 문건이다. ‘노란봉투’에 대해서는 지금도 정치권의 해석이 분분하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정치인들 사이의 중요한 만남이 있을 때면 노란색 서류봉투가 곧잘 등장하는데, 특히 3김씨가 이 서류봉투를 애용한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1992년 민자당 대권주자를 꿈꾸던 YS가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며 내놓았다는 노란색 서류봉투가 그 대표적 사례. 뒤에 밝혀지지만 그 서류봉투에는 안기부의 YS 사찰기록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YS가 대통령이 된 뒤인 1997년 1월21일, 청와대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여야영수회담이 열렸다. 참석자는 김영삼 대통령 외에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그리고 이홍구(李洪九) 신한국당 대표 등 4명이었다.

    1996년 연말 신한국당이 여당 단독으로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을 처리하면서 극심한 여야 대치정국이 전개됐는데, 이날의 영수회담은 여야간 대치정국을 마무리짓기 위한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날 청와대를 방문한 김대중, 김종필 두 총재의 손에는 약속이나 한 듯 노란 봉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 봉투 속에는 야당의 두 김씨가 YS에게 건의하는 정치적 요구가 담겨 있었다. 이날의 영수회담은 서먹서먹한 가운데 막을 내렸는데 DJ는 비교적 YS와 대화를 나눴지만 JP는 YS와의 악연 탓에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듣기만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회동을 마치고 YS에게 각자의 노란봉투를 건네주고 청와대를 나왔다.

    내각제 개헌이 목표

    아무튼 정치적 비중이 높은 만남이 있을 때면 노란봉투는 그 회동의 긴박감을 높여주는 ‘소품’으로 종종 등장하곤 했다. 9월24일 등장한 노란봉투에 대해서도 정가에서는 “봉투에 담긴 문건 내용보다는 노란봉투가 오감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에 정치적 긴박감을 더하려는 일종의 ‘시각효과’일 가능성도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정말 노란봉투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JP의 측근인사인 변웅전(邊雄田) 총재비서실장은 “그 봉투 안에는 정치관련 얘기보다는 남북관계 등에 대한 내용이 더 많은 것으로 안다”고 ‘정치문건설’을 부인했다. 또 다른 자민련 관계자는 “당내 공식 비공식 조직에서 올라간 정국전망에 관한 문건들과 JP 나름의 해석이 담긴 문건이 합쳐져 노란 봉투에 봉해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문건이기는 하지만 한두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정가 소식통은 “노란 봉투에는 이제는 ‘부도수표’가 되고 만 DJ와 JP 사이에 오간 각종 합의서 등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이런 문건을 통해 JP가 DJ를 떠나 새로운 정치 파트너로 YS를 택한 이유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노란봉투의 내용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JP가 진단하는 정국전망과, 두 사람이 힘을 모아 궁극적으로는 내각제개헌을 추진하자는 의견이 실려 있으리라는 것이 상당수 정가 소식통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YS의 손으로 넘어간 노란봉투의 내용물을 열람한 사람도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통 YS는 혼자 서재에 있는 시간에 중요한 문건을 열람한다고 한다. 제아무리 가까운 비서라도 YS의 서재에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필요한 지시사항이 있으면 YS가 해당 비서를 개별적으로 호출해 지시하기 때문에 비서들 사이에서도 다른 비서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한다.

    이렇게 몸에 밴 보안의식을 고려한다면 JP가 전달한 문건도 철저한 보안 속에 YS 혼자서만 열람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도동 대변인인 박종웅 의원도 YS가 말해주는 내용에 한해 알고 있을 뿐, 문건의 전모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게 상도동 주변의 대체적 의견이다.

    아무튼 9월24일 노란봉투가 전달된 뒤 10월7일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는 점은 사실상 YS가 JP가 전달한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는 신호라는 게 두 진영 관계자들의 공통된 관측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연대, 나아가 신당창당은 과연 어디까지 현실화될까. 그렇다면 한국 정치권에 던져질 파장은 어느 정도일까.

    YS, JP에게 줄 선물 마땅찮아

    앞서의 K씨를 비롯한 원로그룹 인사들은 두 사람의 연대가 앞으로 한국의 정치지형을 바꾸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관측은 특히 JP 측근과 자민련 내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는 “두 분의 연대는 JP와 자민련뿐 아니라 YS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반드시 연대는 성사될 것이고 정치권의 큰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YS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추종세력을 확보한 정치세력의 지도자이며 이념적으로도 김종필 총재와 잘 맞아 두 사람의 연대는 급속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정치권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JP가 왜 YS를 파트너로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전·노 두 전직대통령들은 정치자금과 5·18 사법처리과정에서 사실상 정치적 생명력을 상실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김영삼 전대통령은 다릅니다. YS는 퇴임 후에도 뭔가 하려고 꾸준히 움직이는 분입니다. JP와 손잡고 가기에 적합한 전직대통령이란 말입니다.”

    이 관계자는 또 “연대의 효과를 극대화할 JP 나름의 구상이 갖춰졌으며 지방선거 때면 폭발적인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변웅전 총재비서실장도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며 “JP·YS연대는 앞으로도 주목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YS 측근 가운데서는 ‘상도동 대변인’인 박종웅 의원이 두 김씨의 연대를 의미있게 해석하는 인물이다. 지난 10일 YS는 전날 자민련 전당대회에서 명예총재였던 JP가 총재직에 복귀한 것에 대해 박의원을 통해 “잘된 일이며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논평을 언론에 전하게 했다.

    이어 박의원은 ‘YS·JP 신당설’과 관련 자신의 견해를 전달했는데 “두 분이 의견 합치를 본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정치는 살아 있는 생명 같은 것이므로 힘을 합치기로 했다면 신당이든 교섭단체든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두 사람의 연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JP의 충청권에 YS의 정치적 연고지인 부산·경남, 여기에 한때 자민련의 제2 연고지였던 대구·경북지역의 세력이 가세할 경우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합을 따뜻한 시각으로 보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상도동 주변 인사들 가운데서도 “저렇게 두 사람이 오락가락 만나다가 말 것”이라는 비관론이 흘러나오고, 아예 두 사람의 연대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 퇴임후 한때 YS의 비서로 일했던 한 인사는 “JP의 연대제의를 100% 선의로 해석하더라도 이쪽(상도동)에서 줄 선물이 없다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JP가 YS에게 요구하는 것은 YS 한사람의 합류가 아니라 정치세력으로 YS가 신당창당에 힘을 모아달라는 것일 겝니다. 자민련 처지에서 현실적으로 절박한 점은 민주당에서 도로 빼간 의원 4명과 이한동 총리의 공백, 즉 5명의 현역의원입니다. 자민련이 다시 교섭단체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JP에게 잊지 못할 선물이 될텐데 YS에게는 그걸 만들어줄 힘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한나라당에서 YS의 지시로 당을 옮겨 자민련으로 갈 의원이 누가 있습니까. 박종웅 의원 한 사람 뿐입니다. 민주계 의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회창 총재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고, 중부권 의원의 경우 자민련으로 옮기는 것은 당사자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정치적 모험인 것입니다.”

    이 인사는 “결국 두 김씨가 이런 저런 모색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4·13총선 당시 YS의 지시로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을 떠나 민국당에 몸을 담았다가 부산에서 낙선한 김광일 전의원의 실패가 YS의 정치적 영향력의 현단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K씨는 단호하게 이런 전망을 부인한다. “물론 당장 YS의 지시로 한나라당을 떠나 ‘YS·JP신당’으로 건너올 의원들은 없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의 정치구도가 흐트러질 가능성이 있어 자연스럽게 신당이 대안세력으로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K씨는 “대선후보가 난립하고 있는 민주당은 누가 후보가 되든 분열될 가능성이 있고, 한나라당도 이회창 총재의 지도력이 굳건하지 못한 실정”이라며 “정계개편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YS, JP 두 사람은 지금 세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K씨는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세 번째 만남이 이뤄질때면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수도 있다”고 귀뜸했다. 제3의 신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 듯했다. 그는 또 최근 자민련과 상도동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라고 말했다. 특히 JP가 당총재로 일선에 복귀한 이후 단행된 당직개편에 JP의 의중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두 김씨의 지역기반 다지기

    10월11일 자민련은 인사위원회를 열고 당직개편을 단행했다. 사무총장 오장섭(吳長燮) 의원, 정책의장 정우택(鄭宇澤) 의원, 원내총무 김학원(金學元) 의원이 각각 임명됐다. 대변인에 정진석(鄭鎭碩) 의원, 총재 비서실장에 변웅전 전대변인, 당 지도위원회 의장에 이양희(李良熙) 의원이, 내각제추진위 위원장에 이완구(李完九) 의원이 각각 임명됐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자민련의 충청권 젊은 인재들이 전면 배치됐다는 점이다.

    K씨는 “충청권 젊은 의원들을 핵심당직에 배치한 것은 곧 YS와 연대에 앞서 자민련의 텃밭인 충청도의 지지를 확고히 하려는 JP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봐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JP뿐 아니라 YS도 자신의 지역 지지기반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특히 박종웅 의원의 움직임을 유심히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씨의 관측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10월14일 서울 잠실 88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경남향우 한마당큰잔치’. 5000여명이 모인 이날 행사에는 민주당 한광옥(韓光玉) 대표와 한나라당의 하순봉(河舜鳳) 부총재, 김종하(金鍾河) 국회부의장 등 정치권 인사 30여명이 참석했다. 이회창 총재의 부인 한인옥(韓仁玉) 여사도 모습을 나타내는 등 행사는 당초 기대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런데 이날 행사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행사를 주관한 재경 경남도민회 측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YS에게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YS 쪽에서 스스로 참석하겠다고 연락해 왔다고 한다.

    YS는 특유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축사를 했다.

    “1992년 선거 때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경남인 여러분 덕택입니다. 경남인은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위대한 국민입니다.”

    이처럼 JP는 충청에서, YS는 부산·경남에서 서서히 보수신당의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세 번째 만나는 날, 두 김씨가 만들어낼 정치세력의 진면목이 비로소 드러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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