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 미스터리

‘사업가’인가, ‘도박꾼’인가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5-02-21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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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업가’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3류 로비꾼’까지.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그의 행적과 사업수완, 로비행태를 추적했다.
    “꼭 할 얘기가 있다, (검찰이) 나를 집어넣기 위해 짜깁기 수사를 했다”, “(내가 잡힌 것은) 금품하고 관련있다”, “이용호 사건 때문에 내가 당했다”, “나를 찾아오라. 적어도 특종이 2개는 나올 것이다”….

    수십억원대의 내기골프를 치고 도박장을 개설한 혐의로 구속된 신안그룹 박순석(朴順石·60) 회장은 긴급체포된 지 사흘 후인 9월26일 수원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법무부 직원들이 거세게 제지해 더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맺힌 사연이 많은 듯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정치권 실세가 박순석 회장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풍문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돈 데다, 박회장이 G&G그룹 이용호 회장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렇듯 할 말이 많은 그가 어떤 ‘폭탄선언’을 터뜨리고 나설지 주목된다. 과연 그가 입을 열면 ‘이용호 게이트’ 바람에 이어 ‘박순석 게이트’라는 태풍이 정치권을 또 한번 볼썽사납게 들쑤셔 놓을 것인가. ‘몸통’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찰이 서둘러 그를 단순 도박혐의로 구속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그의 입에 쏠리는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열릴 듯하던 박회장의 입은 그후 무슨 곡절 때문인지 굳게 닫혀버렸다. 그는 수감중인 수원구치소에서 매일 오전 신안그룹 관계자와 변호사를 접견하지만, 이들을 통해 어떤 대외용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고 있다.

    열리려다 닫힌 입



    신안그룹 관계자는 “박회장이 처음엔 울분을 참지 못했지만 요즘은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고 전한다. 처음엔 검찰이 적용한 혐의도 완강하게 부인했으나 최근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골프였지만 그걸 굳이 도박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다 내가 부덕한 소치다”며 한 발 물러선 기색이다.

    박회장이 기자들에게 던진 말에 대해 그의 변호인인 임한흠 변호사는 “갑작스레 체포된 상황에 격분해서 몇마디 소리치긴 했지만 그런 심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야 있겠냐”며 ‘불씨’를 주워담았다. 또한 박회장과 신안그룹의 내밀한 사정은 가족이나 최측근 인사 몇사람만 알고 있을 터인데 이들도 말을 극히 아끼고 있다는 것이다.

    신안그룹은 최근 몇 년간 급성장을 거듭하며 준(準)재벌로 부상했지만, 그 성장배경이나 박회장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박회장은 ‘좋은 일’로 언론에 나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을 만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1992년에 ‘순석장학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50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내놓았지만 이 사실을 적극 홍보한 적도 없다는 것. 이런 성향은 현정권에서 ‘잘 나가는 호남 기업인’으로 알려져서 득볼 게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래서 박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업가’ ‘직원들 반찬까지 챙겨주는 자상한 경영인’으로 알려졌는가 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저질 로비꾼’ ‘거친 성격에 사생활이 문란한 난봉꾼’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박순석 회장은 1941년 전남 신안군의 비금도에서 태어났다. 비금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와 직선거리로 15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박회장은 6·25 직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 막노동과 배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3세 때 고향을 떠났지만, 훗날 자신이 세운 기업에 ‘신안’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애향심이 각별했다.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박회장은 공부 욕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10대 시절에는 야학을 뛰어다니며 중등과정을 익혔고, 경영인이 된 후에는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과 고려대 컴퓨터과학기술대학원 ICP과정 등을 이수했다. 이들 과정을 이수할 때도 그저 인맥관리 차원에서 오간 게 아니라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강의를 들을 만큼 열성을 보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후 회사에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하고 직원들에게 최신형 컴퓨터를 지급하는 등 정보화 마인드에 눈 뜨기도 했다.

    아파트 건설붐으로 떼돈 벌어

    박회장은 동대문에서 철근 도매업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발품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닌 덕분에 건축업자들로부터 신용을 쌓아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고 한다. 철근을 팔면서 건축업자를 상대하다보니 이런저런 개발정보를 귀동냥으로 얻어들었고, 현장에 배달 갔다가 어깨너머로 건축지식을 배우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직접 연립주택을 한 채 지어 분양한 게 건축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한 채를 분양해 돈이 들어오면 두 채를 짓고, 그걸 분양해 다시 다섯 채를 짓는 식으로 공사규모를 차츰 불려갔다. 서울 묵동, 경기도 안양 등의 변두리 지역을 집중 공략했는데, 1970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건설붐과 맞물려 주택신축 수요가 급증하면서 집은 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러다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집장사’ 규모를 넘어 ‘건설업체’의 틀이 갖춰졌다. 이 무렵부터는 대형 건설업체로부터 도급을 받아 아파트를 지었는데, 꼼꼼한 시공으로 신뢰를 얻었다.

    박회장은 1980년에 그룹의 모태인 신안종합건설을 세우고 주택, 항만, 고속도로, 지하철 등 다양한 건설사업에 뛰어들면서 서울올림픽 특수, 주택 200만호 건설 특수 등의 달콤한 ‘꿀맛’을 즐겼다. 특히 안산에 3000세대의 아파트를 지으며 큰돈을 벌었고, 일산 중동 군포 등 신도시 개발에 잇따라 뛰어들면서 일감은 계속 넘쳐났다.

    박회장이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건축지식은 웬만한 기술사나 건축사를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하자가 발생하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된다”며 완벽한 마무리를 독려했고, 건축공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 비산먼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요즘처럼 공사현장 주변에 펜스를 둘러치고 시공하는 등 건축공정을 현대화하는 데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이는 업계 안팎에서 신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박회장은 하청업체에게 대물을 떠안겨 원성을 사는 일이 많았다는 얘기도 있다. 건설업체들은 완공한 주택이 안 팔리면 하청업체에게 공사대금 대신 미분양 주택을 떠넘기는 관행이 있는데, 신안은 공사를 맡기는 단계에서부터 공사대금의 상당 부분을 대물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계약했다는 것. 이 경우 발주업체는 건축부지만 있으면 현금부담 없이 집을 지을 수 있지만, 하청업체는 공사 후 대물로 받은 주택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신안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지은 아파트는 미분양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대물을 떠넘길 일이 거의 없었다”고 부인했다. 하청업체에게 어음 대신 현금으로 공사대금을 지급하고 공사대금을 깎는 경우는 더러 있었으나, 이는 하청업체로서도 어느 정도 원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박회장은 건설업으로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재미를 보기도 했다. 1991년 종합토지세 납부실적(개인)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등에 이어 전국 4위에 올랐을 정도로 많은 땅을 사 모았다. 오늘날 그가 일류 재벌 못지않은 막대한 현금 동원력을 갖게 된 것도 당시 아파트 건설과 부동산 운용으로 엄청난 돈을 끌어 모은 데 힘입었다.

    박회장은 1990년대 들어 금융업으로 눈을 돌려 1996년 신안주택할부금융, 신안팩토링 등을 잇따라 세웠다. 지난해에는 조흥은행 계열의 조흥상호신용금고(현 신안신용금고)를 인수, 이를 중심으로 그린씨앤에프, 신안캐피탈 등을 금융소그룹으로 묶어 금융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채로운 것은 20대의 고졸 여성이 신안의 금융그룹을 사실상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점.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1990년 신안종합건설에 입사한 임채연(29)씨가 그 주인공이다. 박순석 회장은 지난해 1월 임씨를 신안주택할부금융(현 신안팩토링) 대표이사로 전격 발탁한 데 이어 10월에는 신안신용금고 대표이사를 겸하게 하면서 금융소그룹 총괄 대표이사에 앉혔다. 임사장은 대리 시절부터 박회장의 자금을 도맡아 관리하면서 뛰어난 재테크 수완을 보여 박회장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실세가 박회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그가 현정권 출범 이후 골프장과 호텔 등 굵직굵직한 사업장을 잇따라 인수하면서부터. 박회장은 1999년 2월 경기도 안성에 신안CC(27홀)를 개장했고 6월에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그린힐CC(18홀)를 열었다. 이어 지난 1월에는 법정관리를 받고 있던 대농그룹 소유의 경기도 화성 관악CC(36홀·현 리베라CC)를 인수했다.

    신안은 2003년 완공 예정으로 제주에도 27홀 규모의 골프장을 짓고 있어 이 골프장까지 개장하면 박회장은 국내 최다 홀(108홀)을 소유한 골프장 재벌이 된다. 박회장은 1998년에는 정부 소유의 뉴서울CC를 인수하려 했으며, 구속되기 직전까지도 동아건설 계열의 대둔산CC 인수를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와 동시에 서울과 유성의 리베라호텔 인수, 경기도 가평의 레저타운 건립 등도 함께 추진해 주변의 놀라움을 샀다.

    업계에서는 골프장과 호텔 인수에 들어간 자금이 4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의혹의 핵심은 건설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회장이 어떻게 그처럼 막대한 자금을 불과 2∼3년 사이에 조달할 수 있었냐는 것과 현정부 들어 신안의 사업확장 드라이브에 가속도가 붙은 배경이 무엇이었냐는 것.

    이에 대해 신안그룹측은 “공매나 경매에서 대행 은행을 통해 입찰을 받은 것이므로 인수과정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밝혔다. 자금조달 경위에 대해서도 “여기저기에 짓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많기 때문에 분양이 이뤄지면 그때그때 인수자금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현금이 확보됐다”고 설명했다.

    신안의 현금 동원력은 박회장의 독특한 기업경영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철근 도매업을 할 때부터 ‘빚 얻어 장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무차입경영 원칙은 회사 규모가 커진 후에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뿐만 아니라 신안그룹은 계열사가 10여개로 늘어난 지금도 기업공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룹의 모기업인 신안종합건설과 (주)신안은 박회장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개인회사나 다름없다. 박회장은 금융 계열사들의 지분도 절반 이상씩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엄청난 세금을 내야 하는데, 1993년에는 종합소득세 납부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회장은 회사 지분 외에도 신안상호신용금고에 200억원 대의 예금을 갖고 있으며, 신안관광개발 등에 개인 돈 수백억원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등 ‘현찰왕’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박순석 게이트는 없다?

    박회장은 현정권 출범 후 호남 출신의 정치인과 법조인에게 줄을 대려고 여러 차례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평소 여권 실세인 K씨, 여당의 H의원·K의원 등과 친분이 두텁다고 과시하며 다니기도 했다는 것. 이는 ‘박순석 게이트’ 존재설의 또 다른 근거다.

    하지만 “박순석은 무슨 ‘게이트’를 엮을 만큼 노회한 인물이 못된다”는 시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회장이 호남 출신 인사들 사이에 평판이 좋지 않은데다, 이들에게 접근할 때도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일 만큼 얕은 수를 쓰는 바람에 ‘약발’이 잘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여권 실세들이 야당일 때는 눈길을 주지 않다가 정권이 바뀌자 노골적으로 접근을 시도해 빈축을 샀다고 한다.

    박회장과 같은 신안 출신인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은 “고향 사람에게 고리로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박회장을 비난하면서 “내가 야당일 때 후원회를 열면 200만원 정도를 보냈는데, 여당이 되자 후원회를 하지도 않았는데 3000만원을 후원회 계좌로 입금했길래 돌려준 일이 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인사들이 ‘신안비치호텔’을 자주 이용했다며 박회장과의 밀착설을 제기했으나, 신안비치호텔은 신안종합건설과 이름이 비슷한 신안건설산업 우경선(59) 회장이 운영하는 호텔로 박회장과는 무관하다. 우회장은 역시 신안 출신으로 한 최고위원과 절친한 사이.

    또다른 여권 관계자는 “야당시절 DJ가 호남 출신 재력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때 동교동 핵심인사가 박씨를 찾아갔는데, 그는 ‘내가 왜 김대중을 도와야 하느냐’며 매몰차게 문전박대했다”고 전했다.

    박회장과 K씨와의 관계도 비슷한 예. 박회장은 K씨가 고위 공직에 있던 1993년 K씨의 동생을 스카우트해 계열사 사장에 앉혔다. 그러나 K씨가 1995년 말 공직에서 떠나자 이듬해 그의 동생도 신안그룹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DJ정부 들어 K씨가 장관에 임명되자 다시 그에게 접근하려고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다. 신안 출신의 한 부장검사도 “박회장이 워낙 부정적으로 알려져 고향 사람이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평판 때문에 여권 인사들에겐 박회장이 기피인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법조인 출신인 민주당 J의원의 말.

    “얼마전 박회장이 운영하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적이 있다. 처음엔 그 골프장 주인이 누군지 몰랐는데, 우리 팀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박회장이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갔다. 조금 있으려니 박회장이 사람을 보내 ‘운동 끝나고 VIP룸에서 식사를 모시겠다’고 전해왔다.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공연히 그 자리에 갔다가 나중에 무슨 험한 꼴을 당할까 싶어서 18홀까지 가기도 전에 서둘러 골프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신안그룹 관계자는 “박회장이 정치권과는 늘 거리를 두려 했다”고 반박했다.

    “박회장은 출신지역 때문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까봐 정치와 세금에 대해 극도로 예민했다. 정치인 후원회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후원회 초대장이 오면 여야를 불문하고 인사치레로 100만∼300만원을 보냈다. 그것도 행여 뒤탈이 있을까봐 반드시 후원회 계좌로 입금한 후 영수증 처리했다. 한화갑 최고위원의 경우는 지역구가 신안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좀 많은 돈을 보냈을 뿐 다른 목적은 없었다.”

    ‘3류 로비꾼’과 ‘단순 도박꾼’ 사이.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박회장의 ‘입’에 시선이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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