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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그룹 박순석 회장 미스터리

‘사업가’인가, ‘도박꾼’인가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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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업가’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3류 로비꾼’까지.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그의 행적과 사업수완, 로비행태를 추적했다.
“꼭 할 얘기가 있다, (검찰이) 나를 집어넣기 위해 짜깁기 수사를 했다”, “(내가 잡힌 것은) 금품하고 관련있다”, “이용호 사건 때문에 내가 당했다”, “나를 찾아오라. 적어도 특종이 2개는 나올 것이다”….

수십억원대의 내기골프를 치고 도박장을 개설한 혐의로 구속된 신안그룹 박순석(朴順石·60) 회장은 긴급체포된 지 사흘 후인 9월26일 수원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법무부 직원들이 거세게 제지해 더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맺힌 사연이 많은 듯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정치권 실세가 박순석 회장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풍문이 이미 오래전부터 나돈 데다, 박회장이 G&G그룹 이용호 회장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렇듯 할 말이 많은 그가 어떤 ‘폭탄선언’을 터뜨리고 나설지 주목된다. 과연 그가 입을 열면 ‘이용호 게이트’ 바람에 이어 ‘박순석 게이트’라는 태풍이 정치권을 또 한번 볼썽사납게 들쑤셔 놓을 것인가. ‘몸통’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찰이 서둘러 그를 단순 도박혐의로 구속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그의 입에 쏠리는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열릴 듯하던 박회장의 입은 그후 무슨 곡절 때문인지 굳게 닫혀버렸다. 그는 수감중인 수원구치소에서 매일 오전 신안그룹 관계자와 변호사를 접견하지만, 이들을 통해 어떤 대외용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고 있다.

열리려다 닫힌 입



신안그룹 관계자는 “박회장이 처음엔 울분을 참지 못했지만 요즘은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고 전한다. 처음엔 검찰이 적용한 혐의도 완강하게 부인했으나 최근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골프였지만 그걸 굳이 도박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다 내가 부덕한 소치다”며 한 발 물러선 기색이다.

박회장이 기자들에게 던진 말에 대해 그의 변호인인 임한흠 변호사는 “갑작스레 체포된 상황에 격분해서 몇마디 소리치긴 했지만 그런 심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야 있겠냐”며 ‘불씨’를 주워담았다. 또한 박회장과 신안그룹의 내밀한 사정은 가족이나 최측근 인사 몇사람만 알고 있을 터인데 이들도 말을 극히 아끼고 있다는 것이다.

신안그룹은 최근 몇 년간 급성장을 거듭하며 준(準)재벌로 부상했지만, 그 성장배경이나 박회장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박회장은 ‘좋은 일’로 언론에 나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을 만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1992년에 ‘순석장학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50억원이 넘는 장학금을 내놓았지만 이 사실을 적극 홍보한 적도 없다는 것. 이런 성향은 현정권에서 ‘잘 나가는 호남 기업인’으로 알려져서 득볼 게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래서 박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업가’ ‘직원들 반찬까지 챙겨주는 자상한 경영인’으로 알려졌는가 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저질 로비꾼’ ‘거친 성격에 사생활이 문란한 난봉꾼’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박순석 회장은 1941년 전남 신안군의 비금도에서 태어났다. 비금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와 직선거리로 15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박회장은 6·25 직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 막노동과 배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13세 때 고향을 떠났지만, 훗날 자신이 세운 기업에 ‘신안’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애향심이 각별했다.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박회장은 공부 욕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10대 시절에는 야학을 뛰어다니며 중등과정을 익혔고, 경영인이 된 후에는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과 고려대 컴퓨터과학기술대학원 ICP과정 등을 이수했다. 이들 과정을 이수할 때도 그저 인맥관리 차원에서 오간 게 아니라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강의를 들을 만큼 열성을 보였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후 회사에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하고 직원들에게 최신형 컴퓨터를 지급하는 등 정보화 마인드에 눈 뜨기도 했다.

아파트 건설붐으로 떼돈 벌어

박회장은 동대문에서 철근 도매업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발품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닌 덕분에 건축업자들로부터 신용을 쌓아 착실하게 돈을 모았다고 한다. 철근을 팔면서 건축업자를 상대하다보니 이런저런 개발정보를 귀동냥으로 얻어들었고, 현장에 배달 갔다가 어깨너머로 건축지식을 배우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직접 연립주택을 한 채 지어 분양한 게 건축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한 채를 분양해 돈이 들어오면 두 채를 짓고, 그걸 분양해 다시 다섯 채를 짓는 식으로 공사규모를 차츰 불려갔다. 서울 묵동, 경기도 안양 등의 변두리 지역을 집중 공략했는데, 1970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건설붐과 맞물려 주택신축 수요가 급증하면서 집은 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러다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집장사’ 규모를 넘어 ‘건설업체’의 틀이 갖춰졌다. 이 무렵부터는 대형 건설업체로부터 도급을 받아 아파트를 지었는데, 꼼꼼한 시공으로 신뢰를 얻었다.

박회장은 1980년에 그룹의 모태인 신안종합건설을 세우고 주택, 항만, 고속도로, 지하철 등 다양한 건설사업에 뛰어들면서 서울올림픽 특수, 주택 200만호 건설 특수 등의 달콤한 ‘꿀맛’을 즐겼다. 특히 안산에 3000세대의 아파트를 지으며 큰돈을 벌었고, 일산 중동 군포 등 신도시 개발에 잇따라 뛰어들면서 일감은 계속 넘쳐났다.

박회장이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건축지식은 웬만한 기술사나 건축사를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하자가 발생하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된다”며 완벽한 마무리를 독려했고, 건축공해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 비산먼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요즘처럼 공사현장 주변에 펜스를 둘러치고 시공하는 등 건축공정을 현대화하는 데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이는 업계 안팎에서 신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박회장은 하청업체에게 대물을 떠안겨 원성을 사는 일이 많았다는 얘기도 있다. 건설업체들은 완공한 주택이 안 팔리면 하청업체에게 공사대금 대신 미분양 주택을 떠넘기는 관행이 있는데, 신안은 공사를 맡기는 단계에서부터 공사대금의 상당 부분을 대물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계약했다는 것. 이 경우 발주업체는 건축부지만 있으면 현금부담 없이 집을 지을 수 있지만, 하청업체는 공사 후 대물로 받은 주택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신안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지은 아파트는 미분양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대물을 떠넘길 일이 거의 없었다”고 부인했다. 하청업체에게 어음 대신 현금으로 공사대금을 지급하고 공사대금을 깎는 경우는 더러 있었으나, 이는 하청업체로서도 어느 정도 원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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