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1000원짜리 제품으로 1000억 수출한 巨商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3-07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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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원짜리 물건으로 세상을 정복한 사람이 있다. 한일맨파워 박정부 사장은 품질에 대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을 1000원짜리 제품으로 사로잡은 사람이다. 수출액 1000억원이 넘는 거상(巨商) 박사장의 독특한 상도(商道)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다.
    미국 뉴욕 테러사태가 전쟁으로 번지면서 세계경제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이 여파로 기업들은 너나없이 인원 감축이다, 기구축소다 해서 몸 사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세계적 불황 앞에 (주)한일맨파워 박정부(朴正夫·57) 사장은 제2의 도약을 위해 최근 기구확대와 함께 한일합작 자회사를 설립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올해로 회사 설립 14년째를 맞은 한일맨파워는 생활잡화로 대일 수출 외길을 달려온 유통업체. 이 회사는 400원 안팎의 저렴한 생활잡화를 생산, 일본 최대 저가 유통업체인 다이소산업의 ‘100엔숍’에 전량 수출한다. 어떤 물건이고 ‘100엔’, 한화로 1000원에 파는 이곳 매장에서 ‘Made in Korea’ 제품은 인기있는 상품으로 꼽힌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국내 소비자들의 인식과는 달리 실속형 소비를 하는 일본인들에게 이곳 매장이 인기를 끌면서 한일맨파워의 매출도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 한일맨파워는 1000원짜리 물건을 팔아 86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고가제품도 아닌 단돈 1000원짜리 제품으로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데 대해 주위에선 “도대체 얼마나 많이 팔길래 그렇게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느냐”며 의아해했다.

    그 답은 박정부 사장의 굳은살 박힌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찾아야 한다. 박사장은 한 해 200여 일을 해외에서 보낸다. 좋은 상품이 있는 곳이면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아간다. 이런 그의 양손엔 항상 30㎏이 넘는 견본품 가방이 들려 있다.

    현재 한국맨파워는 국내 300여 업체와 중국을 비롯, 동남아지역과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유럽지역 그리고 미주 중동지역까지 해외 25개국 100여 업체의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생산업체가 가장 많은 중국의 경우는 지사를 두고 현지서 관리한다.



    이들 업체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주방용품을 비롯한 목욕용품, 화장용품, 사무용품, 문구제품, 팬시제품, 인테리어제품 그리고 각종 생활잡화 등이다. 이 많은 제품은 모두 박사장의 손끝을 거쳐간다. 제품개발에서부터 생산과정, 그리고 포장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동안 이렇게 개발한 제품 종류만도 3만여 가지. 박사장은 이 많은 제품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다.

    국내 300여 업체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경기도 기흥에 있는 물류센터로 집결돼 컨테이너에 실려 부산으로 옮겨진 후 일본으로 수송된다. 이렇게 선적되는 물량이 월 2500만 개로, 하루 40피트짜리 컨테이너 4대분.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현지에서 바로 일본으로 보내진다.

    일본에 도착한 물건들은 전국 2300여개 ‘다이소 100엔숍’ 매장에서 판매된다. 2000평의 대형 매장을 갖추고 6만여 가지에 달하는 일상 생활용품들을 판매하는 이 매장 어디서나 ‘Made in Korea’제품을 찾을 수 있다. 박사장은 “다이소 매장을 이용하는 일본인이면 적어도 ‘Made in Korea’ 제품 한두 가지는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다이소 ‘100엔숍’에서 한국제품은 인기가 높다.

    30㎏이 넘는 샘플 가방

    모두들 고가 브랜드로 고부가가치 창출을 목표로 할 때 박사장은 저가상품으로 대량판매에 타깃을 맞췄다. 고가상품의 경우 마진은 높지만 소량판매로 매출 신장률이 낮은 반면, 저가제품은 누구나 손쉽게 구매할 수 있어 비록 마진은 작지만 대량판매될 때 그 수익은 엄청날 것이라는 그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매년 50% 이상의 수출신장을 이룩했고, 회사 설립 10년째를 맞은 1997년에는 전년에 비해 무려 3배의 매출신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해 한일맨파워는 240억원의 매출을 올려 1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4800만달러어치를 수출, 3000만불 수출탑을 받았고, 이듬해엔 수출 실적 8600만달러로 7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불과 3년 사이 매출이 6배 신장된 것. 말 그대로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 것이다. 이런 놀라운 결실을 거둘 거라곤 박사장 자신도 예측 못했단다.

    “일을 하면서 마진이나 매출액은 생각지 않았어요. 오직 어떤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것인가만 생각하고 제품개발에 매달렸지요.”

    그는 이 회사가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단다. 예측 가능한 건 꾸준한 제품개발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 이 회사는 1억달러 매출을 내다보고 있다.

    한일맨파워가 급성장한 데는 수입업체인 일본 다이소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저가품 유통업체로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다이소산업은 일본의 ‘100엔’ 균일제품 판매시장의 75%를 점유하고 있으며, 지난해엔 2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박사장은 다이소산업이 이런 높은 매출을 올리는 데는 한일맨파워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티끌모아 태산’ 전략

    “내가 사업을 시작한 초창기만 해도 다이소산업은 그다지 큰 기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1995년에 들어 눈에 띄게 성장했는데, 이때 우리도 다른 ‘100엔숍’과 거래를 끊고 다이소와만 거래하면서 본격적으로 제품을 개발을 했어요. 다이소의 성장에 우리의 이런 노력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좋은 만남’을 더욱 발전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두 회사는 지난 9월14일 합작으로 ‘다이소아성산업’을 설립했다. 다이소산업은 한일맨파워의 자회사인 ‘아성산업’에 34.2%(38억원)의 지분을 투자했다. 다이소아성산업은 일본의 ‘100엔숍’을 본뜬 한국판 ‘100엔숍’ 프랜차이즈점을 본격적으로 개설, 운영할 계획이다.

    박정부 사장은 일본의 ‘100엔숍’과 같은 한국판 ‘100엔숍’을 계획하고 아성산업을 설립, 1992년부터 내수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소비패턴이나 저가품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시기상조임을 깨닫고 때를 기다려왔다. 그러다 1997년 사업장 문을 열었다.

    “균일가 매장은 선진국에서 가능한 사업입니다. 많은 상품을 접해본 사람들이라야 1000원의 가치에 대한 판단기준이 서고 제품도 제대로 평가할 줄 압니다.”

    박정부 사장은 먼저 직영점을 개설했다. 가맹점을 원하는 이들에게 직접 와서 보고 가능성을 판단한 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직영점 1호는 천호동에 개설한 10평짜리 ‘아스코이븐프라자.’ 가격대는 소비자들의 소비패턴이 다양해 일본처럼 한가지로 균일화할 수가 없어 4가지(500원, 1000원, 1500원, 2000원)로 정했다. 처음 매장에 발을 들인 소비자들은 가격이 싼 데 의아해하며 물건을 들고 값을 여러 번 묻는다. 그러다 정말 가격표대로라고 하면 물건을 몇 번 더 살핀 뒤에 산다.

    이렇게 하나둘 팔려나가던 물건들이 IMF가 닥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건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가맹점도 늘어났다.

    현재 아성산업은 전국에 직영점과 체인점을 합해 모두 101개 지점을 두고 있다. 이 101개 지점에서 월 3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다이소산업은 아성산업과 손잡고 일본의 ‘100엔숍’과 같은 본격적인 저가상품 시장을 국내에 정착시킬 계획이다. ‘아스코이븐프라자’라는 상호도 ‘다이소’로 바뀐다. 매장 규모도 기존의 20∼30평에서 100평 규모로 커지며 매장 진열도 일본의 다이소‘100엔숍’처럼 꾸밀 계획이다.

    박사장은 올 연말까지 지점을 125개로 늘리고, 5년내에 전국에 400개 매장을 개설, 월 100억원대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그동안은 한쪽 어깨만 무거웠는데 이젠 양쪽 어깨가 무겁게 됐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박정부 사장,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보따리 장사’로 시작해 10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거상(巨商)이 되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처음 다이소와 거래할 때 “먼저 수출상품을 창고까지 배달해주고, 불량품이 있을 때는 즉시 되가져 가겠다. 물건에는 도착 즉시 판매가 가능토록 포장과 가격표를 부착해 주겠다. 마지막으로 대금은 상품이 팔린 후 받겠다”고 제안했다.

    손 하나 까닭하지 않고 판매할 수 있게 해주고, 물건값도 다 판 후에 달라고 하자, 다이소는 흔쾌히 승낙했다. 상대방의 편리와 필요를 채워준 적극적인 배려로 까다롭기로 유명한 다이소와 거래를 튼 것이다. 첫거래를 한 지 6개월 후 1000만원어치의 물건이 팔렸다. 1000만원으로 시작된 거래가 14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1000억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박사장은 다이소와 거래를 시작한 뒤 역시 제대로 된 제품만이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 최고의 제품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좋은 상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갔다.

    그의 생산업체 선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1000원짜리 제품이니 대충해도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업체들은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선정된 업체에 견본품 대로 제품을 만들게 한다. 제작과정 동안 견본품과 똑같은 제품이 나올 때까지 다시 만들게 한다. 이런 까다로운 과정을 견디지 못한 업체들은 제작과정에서 손들고 만다. 이렇게 완벽한 제품 만들기를 되풀이하다보니 제품 하나 나오는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한다. 불량률이 0%여야 한다.

    “제품은 곧 나의 얼굴입니다. 흔히 10만 개에서 한두 개 불량품이 나올 수도 있다 생각하는데 이 상품들은 손님들과 1대 1로 각각 만나게 됩니다. 어쩌다 하나 생긴 불량품이 손님 손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그 제품 전체에 대한 이미지 손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내 신용에 금이 갑니다. 그러니 불량률은 제로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생산업체와 계약을 하기 전 제품에 하나라도 불량이 생기면 전량 반품한다는 서약서를 받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약서를 받는 것은 서로가 잘못 돼 손해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대신 확실한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에겐 제품이 선적되면 일주일 이내로 현금 결제한다. 한번 거래를 한 업체들은 꾸준히 거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면서 견본품만 건네줘도 확실한 제품을 만들어 오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박정부 사장과 협력업체의 장인정신이 오늘의 한일맨파워를 있게 한 것이다.

    박정부 사장은 한번 개발한 제품의 생산에만 매달리지 않고 항상 신상품을 개발해 주문을 받으러 간다. 초창기 그는 매달 50∼100개의 신상품을 들고 거래처를 찾아갔다. 이 상품들은 매장에서 90% 이상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요즘은 월 400∼500개의 신상품을 개발해 가져간다는 박사장은 “많은 제품을 개발하다보니 초창기보다 적중률이 떨어진 편”이라고 했다. 지금 적중률은 30% 정도다.

    이처럼 높은 매출을 올리며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박사장의 노력도 크지만,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이 크게 작용했다. 어느 민족보다 유명브랜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지만 10여 년 이상 경기가 침체되면서 실속 위주로 소비행태가 바뀐 것이다.

    일본의 경제 불황이 기회

    실속형으로 소비행태가 바뀌면서 ‘다이소100엔숍’은 일본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30년 동안 100엔을 유지하며 일본인의 소비문화를 변화시킨 다이소100엔숍은 이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매장이 되었다.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다이소산업이 커지면서 덩달아 수출업체인 한일맨파워도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부 사장이 무역업에 뛰어든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해다. 한양공대를 졸업하던 해인 1973년, 전구 생산업체인 풍우실업에 들어간 그는 16년간을 생산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장으로서 생산관리를 맡았던 그는 1988년 회사가 노사분규로 시끄러워지면서 관리책임자로서 조직생활에 회의를 갖게 됐다. 이때 자신의 사업을 맡아달라는 동생의 부탁을 받고 사표를 썼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동생이 경영하는 ‘한일맨파워’는 일본 기업체와 한국 기업을 연결, 기업연수를 대행하는 업체였다. 그는 동생의 사업체를 맡은 뒤 회사명만 남기고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보유하고 있던 회사주식을 판 돈 일부와 저축해 놓은 돈을 합해 5000만원으로 서울 역삼동에 8평짜리 사무실을 얻고 영업직원 1명과 경리직원 1명을 뽑아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다. 기존의 연수교육에 무역업을 더하기로 했다. 연수사업은 사람을 모아 일본에 있는 동생에게 연결시켜 주기로 하고 주로 무역업에 치중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 팔지 막막했다.

    “먼저 회사에선 제품생산을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컨테이너 몇 대씩을 내보내곤 했는데 막상 내 사업으로 무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으로 컨테이너 하나를 채워 내보낼까 막막했어요.”

    그는 무역 역시 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동생으로부터 일본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을 소개받아 팔릴 만한 물건들을 주문받아 제품을 구한 뒤 일본에 들여가 팔았다. 잘 팔릴 만한 물건은 견본품을 가져가 주문을 받아오기도 했다. 술집에서 손님들에게 주겠다며 재떨이를 주문하면 재떨이를 만들고 물컵을 주문하면 물컵을 만들어다 주는 식이다.

    이렇게 보따리 장사를 하던 중 백화점에서 주방기구를 파는 사람을 통해 100엔숍과 디스카운트 숍, 슈퍼마켓을 하는 업자들을 소개받았다. 박사장은 이들에게 제품을 창고까지 배달해주고 불량품이 나오면 즉시 되가져가며 일본에 도착 즉시 판매가 가능토록 포장과 가격표를 부착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물건값은 물건이 팔리고 나면 달라는 식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대부분 소량주문이다 보니 생산업체들이 돈이 안된다며 일감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건을 만들어오면 현금으로 결제를 해주겠다며 설득했다. 그러나 어렵게 설득해 제품을 만들어와도 견본품과 다른 경우가 허다했다. 초창기엔 반품 사태도 많이 일어났다.

    다이소 회장의 분노

    1995년, 박사장은 뜻밖의 수난을 겪는다. 어느 100엔숍 업체로부터 수출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난 것이다. 부도액은 모두 2억5000만원이었다. 이 부도어음은 일본쪽 일을 맡은 동생이 책임지고 해결하기로 해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으나 이 일로 충격이 컸다.

    설상가상, 이번엔 연수교육을 맡아하던 직원들이 회사 자료를 모두 빼내 독자적으로 회사를 차리는 일이 벌어졌다.

    “두 번씩이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나니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 직원들의 경우 영업장에서 서로 얼굴을 부딪쳐야 하니 더 괴로웠어요.”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직원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어서야 한다는 각오로 힘을 냈다. 이 무렵 박사장은 무역 쪽도 재정비했다. 다른 거래처들과 서서히 관계를 끊으면서 다이소 100엔숍과는 거래를 확대해갔다. 이렇게 한곳에 거래가 집중되면서 주문량도 늘고 관리도 쉬워졌으며 매출도 늘어났다. 그러나 다이소와의 거래가 늘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한번은 일본 다이소산업에 들어가 테이블 몇 개를 차지하고 그곳 바이어들과 상담을 하는데 갑자기 한 테이블이 뒤집혔어요. 깜짝 놀라서 보니까 야노 다이소 회장이 뭐라고 큰 소리를 치고는 안으로 들어가요. 우리 직원에게 테이블을 정리하라고 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주의를 줬어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야노 회장이 다시 나와서 또 그 테이블을 엎으면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어요. 그날 저녁 야노 회장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요. 그래서 나갔더니 ‘오해는 하지 말라, 사업은 전투고 긴장감 없이 성의없는 상품을 가져오면 박사장도 망하고 나도 망한다. 우리가 롱런하려면 이건 서로가 지켜야 한다. 절대 방심해선 안된다’며 일침을 가하더군요.”

    이후로도 박사장은, 야노 회장의 성에 차지 않은 물건을 가져와서 상담을 하면 그 자리에서 물건에 침을 뱉으며 “이런 제품을 가져와서 다이소와 상담하는 것은 다이소를 능멸하는 것”이라며 집어던지는 것을 보며 ‘절대 방심하면 안된다’며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오직 제품개발에만 매달려 달리느라 박사장은 그동안 내부조직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허점이 최근 곳곳에서 발견돼 그는 요즘 내부 조직정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한일맨파워와 다이소아성산업의 사원은 400명이다. 박정부 사장은 “직원들 각자가 자기 몫을 제대로 감당해 내가 물러나도 굴러갈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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