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정치논리로 망친 북한 농업

  • 이민복 < 전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 > leembo@netsgo.com

    입력2005-03-07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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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 식량지원은 하되 북한 농업이 왜 무너졌는가를 알고 지원해야 한다. 집체농 체제인 북한이 개인농 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서둘지 말고 요구해야 한다. 감자증산, 보라콩사건, 옥당·옥쌀사건 등 북한은 철저히 수령에게 짓눌린 농업을 함으로써 식량 위기를 맞았다. 이제는 토지의 산성화가 너무 심해져 농업을 개선할래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일본의 교도(共同)통신 특파원은 북한이 1천년에 한번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뭄 끝에 엄청난 폭우 재해가 겹쳤다. 세계식량계획(WFP)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올해 북한의 곡물 수확은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은 내년에 김정일(1942년 2월16일생)과 김일성(1912년 4월15일생)의 60회, 90회 탄생 행사를 치러야 하는 데 행사가 원만히 진행될 것 같지 않아 고민이라고 한다.

    ‘북한 탁안지역의 협동농장 책임자 차두혁씨는 “모가 말라죽어 모내기를 세 번이나 했지만, 계획량의 3분의1도 심지 못했다. 겉곡(나락, 즉 도정을 하지 않은 쌀. 나락 무게에 0.72를 곱하면 도정한 쌀 무게가 된다) 생산량이 1ha당 0.5t에 불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한국은 1ha의 논에서 도정한 쌀을 5t 이상 생산한다. 나락으로 따지면 약 7t을 수확하는 셈이다). 주요 곡물인 옥수수 농사는 아예 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10월1일 연합뉴스).

    이러한 보도는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일했던 필자가 보기에 상당히 확실한 정보로 보인다. 필자는 올해 봄부터 북한 농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필자는 한국에 온 후 건강 유지와 취미생활을 위해 주말농장을 마련했는데, 이 농장은 북한과 거의 같은 기후대를 보이는 38선 부근에 있다. 그런데 올해 봄부터 초여름까지 가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땅속으로 20㎝ 정도를 파고 들어가도 흙먼지만 폴폴 날렸다.

    직접 파종을 할 수 없어, 따로 마련한 좁은 면적에 물을 줘가며 모를 키운 다음, 양수기로 물을 퍼올려 가며 이 모를 한 포기씩 옮겨심었다. 가뭄이 점점 더 심해지자 한국 언론은 농촌에 양수기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한국은 양수기뿐만 아니라 전기와 기름이 풍부해 극심한 가뭄에도 버티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수확철을 맞은 지금은 쌀이 과잉 생산됐다며 매우 걱정하는 분위기다.

    북한은 어떠한가. 양수설비의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양수설비가 있다고 해도 전기와 기름이 부족해 돌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럴 경우 북한은 통상적으로 학생과 주민 그리고 군인을 동원해 손 노동으로 물을 퍼 나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아무리 노력동원을 펼쳐도 원초적인 배고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열성이 나오지 않는다.



    농업 사정이 가장 좋았다는 1970년대 말 북한은 1ha(1정보) 당 최고 8∼10t의 나락을 생산했다. 그런데 이것이 0.5t으로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수령 탄생일만큼은 배급을 준다는 곳이 북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황으로는 과연 내년의 수령 탄생일에 배급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북측이 중단시켰던 남북장관급회의가 북측의 요구로 다시 열렸다. 북측에서 회담을 제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량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물론 북측은 식량지원이 본 회의의 의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측의 식량지원 요청은 당면한 핵심요구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북한은 일본에서 50만t의 쌀을 지원받았지만, 한국의 식량지원을 갈구해야만 하는 처지다. 굳이 식량난이 아니더라도 북한은 ‘식량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받아내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한국 야당의 태도 변화다. ‘북한 퍼주기’를 비판하던 야당이 오히려 30만t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은 30만t이 적다며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연기시켜 버렸다. 애초 햅쌀로 70만t을 기대했는데, 한국이 재고미로 30만t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연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10월14일자 동아일보 보도).

    참 대단한 자존심이다. 아무튼 한국의 쌀 지원이 성사된다면 북한은 일본이 지원해준 50만t을 합쳐 80만t의 쌀을 확보하게 된다. 80만t은 북한으로서는 굉장한 양이다. 겉곡(나락)으로 식량을 계산하는 북한식으로 고쳐보면 이는 110만t이 된다(북한 겉곡 도정비율은 약 70%다).

    惡의 정권을 연명시킬 것인가

    북한은 쌀을 옥수수보다 두 배 이상 가치가 높은 식량으로 본다. 따라서 이를 옥수수로 환산하면 200여 만t이 된다. 이 양은 북한의 곡창지대인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생산하는 옥수수의 양과 비슷하다. 이러한 처지다보니 북한은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기보다는 외교로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 이제 북한은 ‘외교 농사’로 연명해 가는 것이 본능처럼 돼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30만t의 비료를 북한에 지원하였다. 북한에서는 1t의 비료로 10t의 겉곡을 생산한다고 보기 때문에 30만t의 비료는 300만t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지원량이다. 지난해에도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하였건만, 북한은 이전보다 더 많은 100만t의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농업 형편상 북한의 식량사정이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질 수가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한국이 북한과 공존공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고민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밑 빠진 독’ 같은 북한을 지원하자니, ‘악(惡)의 정권’을 연명해 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쌀 지원의 투명성을 전제하지만 북한체제를 안다면 실효성이 없는 정책이다. 북한은 주민에게 직접 전달된 쌀일지라도 다시 회수해, 얼마든지 군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 북한 땅으로 넘어간 식량은, 고양이에게 고기를 맡겨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지원은 하되 조급할 필요는 없다.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이 없으면 존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조급한 것은 북한이다. 우리는 대북 식량지원을 하되 시종일관 원칙은 견지해야 한다. 원칙은 상호주의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으로 보내는 쌀 푸대에 한국 동포들이 보냈다는 표시를 하고, 이러한 쌀이 북한 주민에게 직접 전달되었다는 확인 절차를 받아내야 한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 지원량을 늘리고 거절하면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마저도 상호주의로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능동적 상호주의’로 부를 수 있겠다.

    따라서 야당의 대북 쌀 30만t 지원 선언은 매우 조급했다는 판단이다. 야당은 한국의 쌀 재고량 처리와 10월25일 벌어지는 재·보궐선거, 그리고 내년 말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야당의 속셈을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에 30만t의 쌀을 지원받는다 해도 야당은 표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북한에 식량지원을 할 때는 절대로 우리가 조급해서 안된다.

    가족분조 관리제의 허구

    또 북한에 대해 식량지원을 할 때는 북한 스스로가 식량을 조달할 수 있도록 농업구조를 개선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북한은 이러한 요구를 내정간섭이라며 발끈할 것이다. 북한이 내정간섭이라며 발끈한다면 이는 ‘받는 입장에서 뺨치는’격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도의(道義)가 없는 것은 북한이지 한국은 아니라고 인식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북한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식량난으로 인해 죽느냐 사느냐하는 기로에 서있기 때문인지, 최근 북한 농업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은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인공위성’을 발사하며 사회주의 강성대국(1999년 신년사)을 선포하였다. 이는 외교적 카드임과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쌀은 공산주의다”라며 식량문제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은 농업의 사유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난 북한은 거꾸로 당적·국가적 지도원칙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을 전제로 북한은 농업구조를 개선하고, 감자증산을 장려하며, 적지적작(適地適作)·적기적작(適期適作)의 원칙을 확대하고 있다. 이모작의 확대와 종자개량, 토지정리 및 개량사업 등도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김일성 시대부터 제시된 과제라 그다지 놀라운 변화가 아니다. 과거와 색다른 변화는 감자농사 혁명을 추진하는 것과 ‘분조’라는 작업단위를 ‘가족’이라는 더 작은 단위로 옮겼다는 점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인농 추세로 가고 있으나, 북한은 더 높은 집단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대표적인 계기는 1986년 김일성이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이룩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노작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노작은 모든 경영형태를 집단화의 최고단계인 전인민적 소유제(전면 국영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당시 북한과학원 지질학연구소 박철 실장은 중국이 실시한 농업개혁보다 낮은 단계의 농업개혁안을 제시했다. 박실장이 제시한 개혁안은 중국에서 실시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집단농 상태에 개인 도급제를 도입하자는 ‘농업개혁제안’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노작은 박철 실장의 제안을 투쟁의 표본으로 설정했다(이른바 박철 사건). 개인농제도를 도입하자는 박철의 주장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1993∼1994년 대량 아사사태를 겪으며, 북한은 뭔가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가 바로 가족단위의 ‘분조관리제’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라는 말은 식량난이 극심하던 1996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는 다음과 같은 우점(장점)을 갖고 있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는 기존의 작업 말단 단위 성원(10~20명)보다 적은 10명 이하의 가족이나 친척으로 구성된다. 가족간의 단결력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강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늘어날 수 있다. 과거의 분조들은 10년 평균 수확량을 근거로 생산물을 분배했으나 가족 단위 분조제는 3년 평균 수확량을 근거로 처분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결코 개인농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가족단위로 이뤄진 집단농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 비해 확실히 발전적이다.

    그러나 가족 단위 분조관리제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 첫째는 농사를 짓기 위한 물질적 생산조건이 너무나 메말라 있다는 점이다. 기름과 전력이 부족해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는 운영이 마비돼 있고, 비료와 농약 등 농자재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 제도는 또 가족 단위 분조 사이의 불균형을 맞출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일할 사람이 적은 가족이나 병자나 불구자가 있는 가족은 자포자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은 먹는 문제가 기본이기 때문에 분조 관리제를 도입하면 농민들은 노동자에 비해 훨씬 유리해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인 한, 유리하다고 해서 농민들이 더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자기 배만 부르면 그 이상은 일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 단위 분조제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다.

    북한은 당과 국가가 정치적인 의지를 갖고 중국과 같은 농업개혁을 추진해야 농업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는 강원대의 김경량 교수는 “북한 농민은 물론이고 농업 간부들에게 ‘북한 농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북한 농업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일부 시험적인 변화거나 북한당국이 정략적으로 퍼뜨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외부 세계에서는 너무 크게 알려진 것이다. 북한 농업의 변화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진정으로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농업개혁을 펼쳐야 한다.

    김정일 정권이 출범한 후 식량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감자증산 정책이다. 김일성 시대에 제시된 식량문제 해결안은 옥수수를 주작으로 재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밭곡식의 왕은 강냉이’라는 구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밭곡식의 왕은 감자’로 바뀌었다. 곧 북한에서는 감자가 쌀과 옥수수에 이어 제3의 주식이 될 전망이다.

    1999년 3월10일자 ‘노동신문’은 감자 재배면적이 1998년에 비해 4만3000 정보나 더 넓어졌다고 보도했다. 북한 농업성의 계획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북한의 감자 재배면적은 약 8만6000 정보다. 그런데 최근 FAO/WFP 공동조사단이 발표한 특별보고서를 보면, 1999년 북한의 감자 재배면적은 17만 정보로 증가했다. 반대로 옥수수 재배면적 62만9000 정보(1998년)는 49만6000 정보(1999년)로 대폭 감소했다.

    ‘밭곡식의 왕 감자’

    감자를 주식원으로 삼겠다는 정책 변화는 “옥수수 농사에만 매달려서는 긴장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김정일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1999년 2월8일 보도). 그러나 감자증산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판단과 다르게, 감자농사는 많은 문제점들이 안고 있다. 감자농사의 장점은 옥수수 농사에 비해 질소비료를 적게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자농사는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대부분의 북한 토지는 30년 전에 이미 산성으로 변해버렸는데, 산성 토지에서의 감자 농사는 기대할 것이 없다. 둘째, 감자 재배에는 질소비료는 적게 드나, 칼리비료가 많이 든다. 그러나 북한은 칼리비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북한의 밭은 대부분 경사지에 만들어져, 칼리 성분이 씻겨나갔는데 칼리비료마저 부족한 것이다. 칼리비료 부족을 대체하기 위해 아궁이 재나 탄재를 뿌리고 있지만 그 양도 한정돼 있다.

    셋째, 파괴적인 병충해의 위협이다. 감자 역병과 위루스병, 특히 무당벌레로 인한 피해가 감자 농사를 망칠 만큼 심하다. 옥수수 농사는 비교적 농약 소모가 적지만, 감자는 농약 없이 지을 수 없다. 넷째, 감자는 수확하기가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땅속의 감자는 기계로 수확해야 하는데, 대부분 북한 밭에는 돌이 많다. 때문에 기계를 넣지 못하고 손노동으로 수확하니 옥수수 수확보다 훨씬 더 많은 품이 들어간다.

    다섯째, 감자는 부피가 크고 물기가 많아 옥수수보다 운반과 보관이 어렵다. 물기가 많은 만큼 겨울철에는 얼기 쉽고, 언 다음에는 바로 썩어버린다. 여섯째, 식량으로서의 가치는 옥수수의 4분의 1내지는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감자는 먹어도 빨리 배가 꺼지고, 그래서 더 먹게 되는 식품이다. 질보다는 양이 먼저인 북한에서 이러한 농산물은 적당치 않다.

    일곱째, 감자 생산적지(適地)가 적다. 북한에서 감자 적지는 북부내륙 고산지대인데 이곳에는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너무 적다. 그렇다고 저지대 경작지에 감자 를 심으면, 옥수수를 심었을 때보다 굶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기후가 따뜻한 저지대에서는 이모작 앞 재배로 감자 농사가 가능하나 한 벌 농사도 힘들어하는 형편에 이모작 농사를 한다는 것은 무리다.

    굴지의 감자 생산지라고 하는 장진·부전고원에 1984년 ‘3대 혁명 소조원’으로 파견되었던 내 친구의 말은 북한의 농토가 산성이 돼 감자를 생산하기에 매우 열악한 상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곳의 한 작업 분조장이 감자농사를 포기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유는 감자 종자를 봄에 심지 않고 보관했다가 가을에 수확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분조장이 그렇게 한 이유는 수년간 감자를 심어봤더니 감자 종자량만큼도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자를 보관했다가 가을에 바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감자생산을 식량문제 해결 대안으로 내놓게 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최대의 감자 산지인 양강도 대홍단군을 현지지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현지지도를 받아들여 1999년 1월3일자 ‘노동신문’은 ‘감자농사 혁명의 포성’이란 제목으로 ‘감자는 흰쌀과 같으며, 조선인민은 흰쌀과 동시에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인민이 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은 감자 농사가 한낱 정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로 인해 왜곡된 북한 농업

    북한 농업은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된 역사를 밟아왔다. 40여 년 전 김일성은 “가까운 앞날에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을 쓰고 산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빨리 이밥을 먹으려면 논뿐 아니라 밭에도 벼를 심으라”고 지시하였다(1960년대 초반). 이 지시는 수령을 맹신하는 농학자(김남신 밭벼 연구사)의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정치적 욕심이 들어간 허망한 지시는 금방 그 부작용을 드러냈다.

    밭벼 농사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잡초제거와 물 주기가 난제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밭벼농사는 풀밭농사로 변해버린다. 밭벼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간의 시험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수령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실시되었다. 그로 인해 이밥을 먹기는커녕 잡곡도 제대로 못먹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고도 밭벼농사를 취소하지 못하다가 3~4년 흐른 뒤 슬그머니 취소되었다. 수령은 어쩌지 못하고 밭벼 연구사만 내쫓고 말았다.

    농업 최고사령관 김일성 주석의 실패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70년대 초 옥수수연구사들의 노력으로 옥수수 생산량이 약 130% 늘었다. 주민들은 “이제 옥수수밥이 남아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공을 표 내려는 지시를 내렸다. 옥수수로 사탕 같은 옥당과 이밥 같은 옥쌀을 만들어 인민에게 공급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수령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각 도마다 가공공장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건설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근 30년 간 조업을 중지하고 있다. 아무리 옥수수를 많이 생산해도, 북한은 옥당과 옥쌀을 먹을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옥당과 옥쌀을 만들 만큼의 옥수수가 생산되지도 않는다.

    김일성은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농사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의 별장 근처에는 반드시 주석 전용 농장이 있다. 그가 한여름에 가는 백두산 별장에는 고지대 작물을 재배하는 전용 농장이 있다. 1990년 김일성은 전용 농장을 돌아보다가 탐스럽게 자란 ‘보라콩’을 보고, 고지대 간부들을 불러 강령적인 교시를 내린다. “보라콩은 습지에 약해 고지대에 전면 재배는 안된다”는 실무일꾼의 의견을, 고성(高聲)을 질러가며 묵살하고, 고지대 주작인 감자와 맥류 대신 심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주석은 전국 어린이들의 간식을 보라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라콩 재배는 실패하고 감자와 맥류의 생산만 줄어들어 주민들의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북한 농업은 정치논리 때문에 더욱 황폐해졌다.

    옥수수 연구원인 필자가 평가하건대 북한의 벼 품종은 남한과 비슷하나, 옥수수는 북한이 오히려 앞서 있다고 본다. 북한의 옥수수 연구가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은 주식이라는 절대적인 필요성 때문에 연구역량이 수백 수천 배 크기 때문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수원19호 옥수수 정도의 품종을 북한은 이미 1970년대 초에 개발해 전국적으로 재배하였다.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순권 옥수수박사는 “슈퍼옥수수가 개발되었고, 이 옥수수는 북한 신품종 옥수수보다 5배 이상이나 수확량이 많다”고 밝혔다(통일정보신문 1999년 12월8일). 북한을 돕자는 뜻은 좋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북한 옥수수 돕기 운동을 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 농업을 돕는다고 하면서 양치기 소년이 되어서는 정말 곤란하다.

    북한이 옥수수 농사를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종자가 아니라 종자의 양이다 그리고 종자보다 더 필요한 것은 요구하는 비료를 비롯한 농자재다.

    북한이 농업개선의 사례로 떠드는 토지개량과 정리사업도 역시 새로운 방침이 아니다. 이 사업은 오래전부터 실시해왔으며 1976년 당 5기 12차 전원회의에서 자연개조 5대 방침 중의 하나로 명시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토지는 날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 북한 토지는 비료를 지원한다고 해도 그 효과가 날 수 없을 정도로 산성화가 심각하다. 화학비료를 주면 오히려 산성화가 심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산성화가 심해진 것은 단일작물을 연속 재배했기 때문이다. 윤작과 휴경재배가 지력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것은 북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 같은 식량사정 때문에 단작 연작재배를 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주체농법으로서의 집약농법이다.

    집약농법은 땅이 혹사되는 것 이상으로 농업투자를 강화하여 보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북한은 이러한 농업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농업개선 운동이 실패한 것이다.

    김정일 정권이 어떠한 시도를 하더라도 북한 농업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북한 농업은 본질적인 개선을 시도해야 일어설 수가 있다. 북한이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북한은 하루 빨리 농민이 농사의 주인이 되도록 사유화를 실시해야 한다. 이러한 농업개혁과 함께 경제 전반의 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북한 농업을 변할 수 없다.

    한국은 이러한 점을 명시하고 북한과 접촉하고 식량과 농업 기자재를 지원해야 한다. 북한과 접촉하되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진정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주고 싶고 관계를 개선 남북이 공존공영하고 싶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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