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을 방문한 일본의 교도(共同)통신 특파원은 북한이 1천년에 한번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뭄 끝에 엄청난 폭우 재해가 겹쳤다. 세계식량계획(WFP)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올해 북한의 곡물 수확은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은 내년에 김정일(1942년 2월16일생)과 김일성(1912년 4월15일생)의 60회, 90회 탄생 행사를 치러야 하는 데 행사가 원만히 진행될 것 같지 않아 고민이라고 한다.
‘북한 탁안지역의 협동농장 책임자 차두혁씨는 “모가 말라죽어 모내기를 세 번이나 했지만, 계획량의 3분의1도 심지 못했다. 겉곡(나락, 즉 도정을 하지 않은 쌀. 나락 무게에 0.72를 곱하면 도정한 쌀 무게가 된다) 생산량이 1ha당 0.5t에 불과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한국은 1ha의 논에서 도정한 쌀을 5t 이상 생산한다. 나락으로 따지면 약 7t을 수확하는 셈이다). 주요 곡물인 옥수수 농사는 아예 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10월1일 연합뉴스).
이러한 보도는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일했던 필자가 보기에 상당히 확실한 정보로 보인다. 필자는 올해 봄부터 북한 농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필자는 한국에 온 후 건강 유지와 취미생활을 위해 주말농장을 마련했는데, 이 농장은 북한과 거의 같은 기후대를 보이는 38선 부근에 있다. 그런데 올해 봄부터 초여름까지 가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땅속으로 20㎝ 정도를 파고 들어가도 흙먼지만 폴폴 날렸다.
직접 파종을 할 수 없어, 따로 마련한 좁은 면적에 물을 줘가며 모를 키운 다음, 양수기로 물을 퍼올려 가며 이 모를 한 포기씩 옮겨심었다. 가뭄이 점점 더 심해지자 한국 언론은 농촌에 양수기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한국은 양수기뿐만 아니라 전기와 기름이 풍부해 극심한 가뭄에도 버티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수확철을 맞은 지금은 쌀이 과잉 생산됐다며 매우 걱정하는 분위기다.
북한은 어떠한가. 양수설비의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양수설비가 있다고 해도 전기와 기름이 부족해 돌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럴 경우 북한은 통상적으로 학생과 주민 그리고 군인을 동원해 손 노동으로 물을 퍼 나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아무리 노력동원을 펼쳐도 원초적인 배고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열성이 나오지 않는다.
농업 사정이 가장 좋았다는 1970년대 말 북한은 1ha(1정보) 당 최고 8∼10t의 나락을 생산했다. 그런데 이것이 0.5t으로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수령 탄생일만큼은 배급을 준다는 곳이 북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황으로는 과연 내년의 수령 탄생일에 배급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북측이 중단시켰던 남북장관급회의가 북측의 요구로 다시 열렸다. 북측에서 회담을 제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량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물론 북측은 식량지원이 본 회의의 의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측의 식량지원 요청은 당면한 핵심요구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북한은 일본에서 50만t의 쌀을 지원받았지만, 한국의 식량지원을 갈구해야만 하는 처지다. 굳이 식량난이 아니더라도 북한은 ‘식량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받아내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한국 야당의 태도 변화다. ‘북한 퍼주기’를 비판하던 야당이 오히려 30만t의 쌀을 북한에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은 30만t이 적다며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연기시켜 버렸다. 애초 햅쌀로 70만t을 기대했는데, 한국이 재고미로 30만t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연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10월14일자 동아일보 보도).
참 대단한 자존심이다. 아무튼 한국의 쌀 지원이 성사된다면 북한은 일본이 지원해준 50만t을 합쳐 80만t의 쌀을 확보하게 된다. 80만t은 북한으로서는 굉장한 양이다. 겉곡(나락)으로 식량을 계산하는 북한식으로 고쳐보면 이는 110만t이 된다(북한 겉곡 도정비율은 약 70%다).
惡의 정권을 연명시킬 것인가
북한은 쌀을 옥수수보다 두 배 이상 가치가 높은 식량으로 본다. 따라서 이를 옥수수로 환산하면 200여 만t이 된다. 이 양은 북한의 곡창지대인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생산하는 옥수수의 양과 비슷하다. 이러한 처지다보니 북한은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기보다는 외교로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 이제 북한은 ‘외교 농사’로 연명해 가는 것이 본능처럼 돼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30만t의 비료를 북한에 지원하였다. 북한에서는 1t의 비료로 10t의 겉곡을 생산한다고 보기 때문에 30만t의 비료는 300만t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지원량이다. 지난해에도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하였건만, 북한은 이전보다 더 많은 100만t의 식량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농업 형편상 북한의 식량사정이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질 수가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한국이 북한과 공존공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고민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밑 빠진 독’ 같은 북한을 지원하자니, ‘악(惡)의 정권’을 연명해 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쌀 지원의 투명성을 전제하지만 북한체제를 안다면 실효성이 없는 정책이다. 북한은 주민에게 직접 전달된 쌀일지라도 다시 회수해, 얼마든지 군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 북한 땅으로 넘어간 식량은, 고양이에게 고기를 맡겨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지원은 하되 조급할 필요는 없다.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이 없으면 존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조급한 것은 북한이다. 우리는 대북 식량지원을 하되 시종일관 원칙은 견지해야 한다. 원칙은 상호주의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으로 보내는 쌀 푸대에 한국 동포들이 보냈다는 표시를 하고, 이러한 쌀이 북한 주민에게 직접 전달되었다는 확인 절차를 받아내야 한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 지원량을 늘리고 거절하면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마저도 상호주의로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능동적 상호주의’로 부를 수 있겠다.
따라서 야당의 대북 쌀 30만t 지원 선언은 매우 조급했다는 판단이다. 야당은 한국의 쌀 재고량 처리와 10월25일 벌어지는 재·보궐선거, 그리고 내년 말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야당의 속셈을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에 30만t의 쌀을 지원받는다 해도 야당은 표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북한에 식량지원을 할 때는 절대로 우리가 조급해서 안된다.
가족분조 관리제의 허구
또 북한에 대해 식량지원을 할 때는 북한 스스로가 식량을 조달할 수 있도록 농업구조를 개선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북한은 이러한 요구를 내정간섭이라며 발끈할 것이다. 북한이 내정간섭이라며 발끈한다면 이는 ‘받는 입장에서 뺨치는’격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도의(道義)가 없는 것은 북한이지 한국은 아니라고 인식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북한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식량난으로 인해 죽느냐 사느냐하는 기로에 서있기 때문인지, 최근 북한 농업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은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인공위성’을 발사하며 사회주의 강성대국(1999년 신년사)을 선포하였다. 이는 외교적 카드임과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쌀은 공산주의다”라며 식량문제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은 농업의 사유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난 북한은 거꾸로 당적·국가적 지도원칙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을 전제로 북한은 농업구조를 개선하고, 감자증산을 장려하며, 적지적작(適地適作)·적기적작(適期適作)의 원칙을 확대하고 있다. 이모작의 확대와 종자개량, 토지정리 및 개량사업 등도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김일성 시대부터 제시된 과제라 그다지 놀라운 변화가 아니다. 과거와 색다른 변화는 감자농사 혁명을 추진하는 것과 ‘분조’라는 작업단위를 ‘가족’이라는 더 작은 단위로 옮겼다는 점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인농 추세로 가고 있으나, 북한은 더 높은 집단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대표적인 계기는 1986년 김일성이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이룩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노작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노작은 모든 경영형태를 집단화의 최고단계인 전인민적 소유제(전면 국영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당시 북한과학원 지질학연구소 박철 실장은 중국이 실시한 농업개혁보다 낮은 단계의 농업개혁안을 제시했다. 박실장이 제시한 개혁안은 중국에서 실시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집단농 상태에 개인 도급제를 도입하자는 ‘농업개혁제안’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노작은 박철 실장의 제안을 투쟁의 표본으로 설정했다(이른바 박철 사건). 개인농제도를 도입하자는 박철의 주장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1993∼1994년 대량 아사사태를 겪으며, 북한은 뭔가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가 바로 가족단위의 ‘분조관리제’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라는 말은 식량난이 극심하던 1996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는 다음과 같은 우점(장점)을 갖고 있다.
가족단위 분조관리제는 기존의 작업 말단 단위 성원(10~20명)보다 적은 10명 이하의 가족이나 친척으로 구성된다. 가족간의 단결력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강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늘어날 수 있다. 과거의 분조들은 10년 평균 수확량을 근거로 생산물을 분배했으나 가족 단위 분조제는 3년 평균 수확량을 근거로 처분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결코 개인농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가족단위로 이뤄진 집단농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 비해 확실히 발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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