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한국 대표적 지식인의 사상적 원류 ② 중도주의자

  •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 kimhoki@yonsei.ac.kr

    입력2005-03-10 1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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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도주의는 단순히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중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제3의 길’을 말한다. 한상진, 김우창, 정운찬, 최장집 교수 등은 그런 의미에서 ‘중도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기획을 연재하면서 가장 탈(脫)이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고도로 이념지향적인 사회가 바로 한국이 아닐까 하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인이 사회에 관계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런 관계는 그 나라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 및 시민사회 내의 이른바 독자그룹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프랑스와 미국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프랑스가 일종의 ‘지식 사무라이들’이 담론을 주도하는 경우라면, 미국은 실용적 지식인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나라다. 그리고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도 메이지유신 이래 특유의 지식인 사회가 형성되어 왔다.

    본론에 앞서 이렇게 사설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소 모호한 ‘중도주의’라는 이념이야말로 현재 한국 지식사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조사는 없으나,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이념에 대한 의식조사를 한다면,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중도주의에 자신을 포함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이념은 위험한 것이며, 직접 드러내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중도주의적 자기정체성을 갖는 지식인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한편에서 중도주의란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절충하는 이념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회주의로 매도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중도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중도주의란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중간에 놓여 있는 이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간’이란 단순히 가운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것은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결합시키려는 이른바 ‘제3의 길’을 말한다. 최근 서구에서 쓰는 ‘적극적 중도(Active middle)’나 ‘급진적 중도(Radical middle)’는 바로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소박한 절충주의를 넘어 생산적 종합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과거 ‘제3의 길’ 프로그램이나 구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최근의 ‘제3의 길’이 이런 생산적 종합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중도주의 역시 탈이념을 표방하는 막연한 중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중도주의임을 밝혀둔다.

    중도주의란 무엇인가

    국내에서 중도주의의 역사는 일천한 수준이다. 이념적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과 김규식, 그리고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했던 조봉암 같은 중도주의의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에 비해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중도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주요 흐름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은 아무래도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6월 민주항쟁으로 열린 정치공간 속에서 ‘민주-반민주’의 구도가 서서히 ‘진보-중도-보수’로 변화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민주적 조합주의를 비롯해 서구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국내 지식인들의 활발한 논의는 중도주의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인들이 중도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까. 중도주의가 여전히 모호한 만큼 중도주의 지식인을 분류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중도주의는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까지, 그리고 자유주의에서 케인스주의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이에 필자는 자유주의, 민주적 조합주의, 케인스주의, 최근 ‘제3의 길’로서의 신사회민주주의 등을 우리사회에서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이념으로 보고, 이런 이념에 기초해 지적 활동을 벌여온 네 명의 지식인을 선정했다. 필자의 독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주변 사회학 전공 교수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참조했음을 밝혀 둔다.

    한상진 교수는 현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러 주요 직책, 즉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등을 지냈거나 현재 맡고 있다. 한국지식인의 이념성향을 분석한 일본 가나가와대 윤건차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최장집 교수, 한상진 교수, 황태연 교수(동국대)를 꼽았지만, 현재 겉으로 드러나는 영향력에서는 한교수가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교수는 아태평화재단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비교적 뚜렷해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사회학 전공자로서 한교수의 변신은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80년대까지 적어도 후학들에게는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교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이나 푸코의 사회이론은 진보적 경향의 흐름이었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교수의 학문적 성향이 한국 사회학의 주류인 보수주의와 친화성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눈카마스, 이제는 그만’

    한교수는 1945년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났다. 197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에는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1979년 미국 남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이후 한교수는 귀국하지 않고 독일 빌레펠트대로 가서 1981년까지 연구교수를 지냈다. 그러다 1981년 귀국해 모교 사회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까지 그가 발표한 책은 적지 않은데,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1987), ‘한국사회와 관료적 권위주의’(1988), ‘중민 이론의 탐색’(1991) 등이 주요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는 ‘한국, 제3의 길을 찾아서’(1992), ‘눈카마스, 이제는 그만’(1992) 등의 시사평론집을 출간했으며, ‘제3세계 정치체제와 관료적 권위주의’(1984)에서 최근 ‘현대사회와 인권’(1998)에 이르기까지 사회학계의 관심을 불러모은 책들을 펴냈다.

    필자는 학부시절부터 한교수를 지켜보았는데, 매우 경이로운 학자라는 인상을 품어왔다. 이 경이로움은 이중적인 것인데, 그 하나가 서구 사회이론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런 사회이론의 한국적 적용을 부단히 모색해 왔다는 점이다. 서양학문을 다루는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구 사회이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비해, 한교수는 최근 동양사상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서구 이론의 한국적 수용을 줄기차게 모색해왔다. 이런 한교수의 성향은 서구 학문의 일방적 추종으로 볼 것이 아니라 비서구 사회에 살고 있는 사회과학자의 성실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교수의 지적 이력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학창시절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교수는 서울대 재학시 학생운동에 관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석사학위 논문도 학생운동에 관한 것이었으며, 운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그의 사회학적 지향을 실현가능한 이념의 모색으로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함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의 개인적 체험이 그의 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유신독재 체제가 등장하기 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면서 저도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굉장히 많은 걸 면역시켜 줬다고 생각해요. 저는 체험을 통해 항상 주변과 가장자리에서 무엇인가 일어나서 움직이는 힘 못지않게, 사회의 중간에 있는 집단들이 특히 우리사회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것이 어떤 곤혹인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개인적 체험이 한교수에게는 적잖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시사평론집 제목이기도 한 ‘눈카마스’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만’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남미 군사정권의 반민주적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렬한 옹호는 한교수 사회학의 기본 저류(底流)다. 진보주의나 보수주의에 대비되는 중도주의의 주요 이념 가운데 하나가 자유주의라면, 이 글에서 다뤄지는 중도주의 사회과학자 가운데 한교수는 가장 자유주의에 가까운 이론가라 할 수 있다.

    중민론, 그리고 ‘제3의 길’

    한국 사회학계에서 한교수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소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이다. 아르헨티나 정치학자 오도넬이 제시한 관료적 권위주의론의 기본 가정은, 기존의 민중정치가 사회불안을 조성하기 때문에 산업화가 심화되기 위해서는 민간 기술관료와 국내자본가, 국제자본가 세력이 쿠데타 동맹을 형성해 권위주의 체제를 성립시킨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 모델에 입각해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을 한국식 관료적 권위주의의 성립으로 분석해 학계 안팎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한교수는 한완상 교수(현 교육부총리·당시 서울대 교수),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와 중산층 논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중도주의 지식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인데, 한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교수는 이른바 중민론을 제창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중심의 변혁론과는 다른 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다. 중민론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다. 즉, 한국사회는 정당의 대표성과 신뢰성이 약하고 대의정치를 특징짓는 게임의 규칙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권과 사회운동의 역할분담 및 다양한 세력들 간의 민주적 연대가 매우 중요하다. 중민이라는 이름의 중산층은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개혁성향이 높기 때문에 민주주의 개혁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민론은 그 시각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아는 한 사회과학계에서 그 반향이 크지 않았다. 그것은 중민론이 기반한 중도주의 이념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우리 학문의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 학문은 절충주의보다는 확실한 견해를 선호하며, 특히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중산층을 중시하는 한교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한교수는 왕성한 학문적 활동에도 다소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교수의 매력은 이런 외로움을 이겨내면서 놀라운 열정으로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이론의 한국적 적합성을 탐구해 왔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서유럽 ‘제3의 길’에 대한 소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교수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주목할 것의 하나는 서구 사회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수용인데, 푸코 이외에도 하버마스와 기든스 이론을 국내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이 최근 다시 주목받은 이유는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와 그의 사부(師父)인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사회민주주의 갱신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제창했기 때문이다.

    한교수는 세계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든스의 ‘제3의 길’을 박찬욱 교수(서울대)와 함께 번역하고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제3의 길’의 목표가 기존의 좌파와 우파를 모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에 있는 한, 한교수의 사회학과 일맥상통한다. 더욱이 ‘제3의 길’은 ‘제1의 길’(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제2의 길’(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론’과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한국 중산층의 이중성

    한교수는 일찍이 그의 사회평론집 제목을 ‘한국, 제3의 길을 찾아서’라 붙인 바 있다. 한교수가 염두에 두었던 길이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라는 점에서 기든스의 ‘제3의 길’과 다소 다르지만,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장점을 적극 결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교수는 한국식 중도주의 사회학자의 전형이다. 그가 겪어온 삶과 사상적 여정은 보수적 사회학자의 길 내지 진보적 사회학자의 길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을 보여준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양 학문으로서의 사회학과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한국현실간의 끝없는 긴장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긴장이라 할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난 20년간 한교수는 언제나 진지하게 대면해 왔다. 한교수는 동년배 사회학자 가운데 하버마스와 푸코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이론에 가장 정통해 있으면서, 또한 현실 정치에 가장 깊게 발을 들여놓은 사회학자다. 아마도 이것은 1940년대에 태어난 이 땅의 사회학자가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이런 긴장을 잘 견뎌왔다고 해서 한교수의 사회학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주장처럼 과연 한국의 중산층이 그렇게 개혁지향적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히려 한국 중산층은 개혁지향적이면서도 보수지향적인 양면성을 보여왔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지향적인 성격이 더 두드러지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또 비서구사회 절충주의 지식인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과연 서구의 이론과 동양의 현실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중국의 이택후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의식을 짓눌렀던 이 질문에 대해 한교수는 여전히 대답을 유보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우리 후학의 몫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김우창 교수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 김우창 교수와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을 중도주의 지식인으로 분류해도 되느냐?”고 묻자 김교수는 웃으면서 “내가 중도주의에 속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필자가 김교수를 만나지 않은 이유는 다소 엉뚱하다. 김교수는 필자를 모르겠지만, 필자는 오랜 독자로서 그에 대해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1979년 대학교 1학년 때 종로 2가 양우당 책방에서 제목이 왠지 멋있게 생각되어 샀던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사회 분위기가 우울했던 유신정권 시절 감수성이 예민했던 열아홉살의 필자는 김교수의 책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책에서 다룬 한용운, 윤동주, 김수영, 신동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삶은 말 그대로 궁핍한 시대를 견뎌냈던 고독한 정신의 광채였으며, 지식인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필자는 김우창 교수 하면 이 책이 먼저 떠오르고, 김교수가 자신의 학문을 이런 정신사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정신주의가 이성주의와 동일한 의미라면, 필자가 보기에 김교수는 진정한 정신주의자, 또는 고독한 이성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인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따라서 그만큼 소중하다 할 것이다.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김우창 교수는 1937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 1954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1958년 졸업했다.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김교수는 1961년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서울대 등에서 가르치다 1968년 다시 하버드대에 유학, 1975년 문학을 전공, 철학과 경제사를 부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4년부터 고려대 영문학과에 자리를 잡았으며, 현재는 고려대 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그는 1965년 ‘청맥’지에 ‘엘리어트의 예’로 등단한 뒤, 1976년부터 ‘세계의 문학’을 편집하며,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 ‘지상의 척도’(1981), ‘문학의 비평’(1984), ‘시인의 보석’(1992) 등의 저작들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한국 문학평론을 대표하는 저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 책들은 백낙청(서울대), 염무웅(영남대)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파’ 그룹이나 김병익, 김현 선생 등을 중심으로 한 ‘문지파’ 그룹과 구별되는, 김우창 교수 특유의 ‘이성주의 문학론’(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을 대변한다.

    김교수 저작들이 여타의 문학평론가들과는 달리 사회과학 전공자들에게도 크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문학평론을 넘어 사회비평으로 자신의 발언을 확장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1992), ‘법 없는 길’(1992), 그리고 ‘정치와 삶의 세계’(2000)등은 바로 이런 사회 에세이를 대표하는 저작들로 동시대 사회문제에 대한 폭넓고 섬세한 진단과 처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고려대의 젊은 교수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전공을 불문하고 김교수의 학문에 심취해 학부부터 그를 따르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에도 이른바 ‘김우창 사단’이 없다는 것을 보면, 그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이례적인 학자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김교수의 지적 여정을 간단히 압축한다면 그것은 ‘이성적 사회’를 향한 열망이다. 이 이성이야말로 그의 문학비평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다. 김교수에 따르면 소외, 공동체 파괴, 환경오염 등과 같은 현대사회의 부정적 결과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 생활세계 식민화의 결과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이성을 배제한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성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의 만남

    필자는 처음부터 인문학을 대표하는 중도주의자를 한 명 고른다면 그 사람은 의당 김우창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서구적 전통에서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이념은 자유주의이며, 이런 자유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왔던 대표적인 지식인이 김교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 사회에서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의 하나가 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의 빈곤’이라 할 수 있는데, 우파와 좌파 사이의 치열한 이념 대립 속에서 정작 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언제나 과소평가되어 왔다. 더욱이 자유주의를 자유만 일방적으로 특권화하려는 사이비 자유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유주의 하면 곧바로 개인주의 내지 무정부주의를 연상하는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물론 김교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자유주의 전통에 앞서 이성주의를 결합시키고 그 실현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른바 ‘이성적 자유주의자’다. 일찍이 1970년대 후반 김교수는, ‘인간역사의 방향은 민주주의이며 비민주적 통치체제는 미신과 신화 그리고 다른 권위적 상징들의 제도적인 조작에 기초해 있을 뿐’이라는 서늘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 사고가 당시의 민중민족문학론이나 운동권의 체제비판 논리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운동의 기반이 된 좌파적 이념과 그의 이성적 자유주의 이념이 일치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김교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와 그의 스승인 미학자 아도르노다. 아마도 하버마스와 아도르노 사이의 어디쯤인가에 김교수의 사상적 거처가 있을 것 같다.

    김교수가 이런 이성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1960년대 미국 유학생활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1959년에 시작된 그의 유학생활은 1961년에서 1967년 사이 국내 활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68년부터 1975년까지 길게 이어졌다. 미국 현대사에서 1960년대는 매우 이례적인 시기로 반전운동을 비롯해 인권, 평화, 여성운동이 활발했으며, 또 서유럽에서는 ‘68운동’ 이후 ‘뉴레프트(New Left)’ 사상의 영향력이 두드러진 때였다. 짐작건대 김교수 또한 이런 사상적 흐름으로부터 상당한 세례를 받으면서 이를 자신의 사상으로 재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교수가 목도한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우리 사회는 국가와 공동체만을 중시할 뿐 개인의 자율성이란 한낱 수사에 불과하다. 정보사회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공동체적 연고주의와 편가르기가 횡행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런 사회에 대한 일차적인 처방은 이념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보다 계몽적 이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하여 민주적 공동체와 조화로울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을 뿌리내리는 것에 있다는 게 김교수의 지론이다.

    지식인의 고독

    하지만 이런 사상은 자유주의의 빈곤이라는 한국적 상황 속에서 지식인의 고독을 자처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김교수의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에도 적어도 필자에게 김교수의 이미지는 ‘고독한 이성주의자’로 비친다. 그러나 동시에 김교수는 ‘강한 자유주의자’이다.

    이런 이성적 자유주의의 근본에 있는 사유의 힘은 사실 쉽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우창 교수에 관해 최장집 교수가 들려주는 한 일화는 이런 김교수의 힘이 그의 성실성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최교수에게 역시 그곳에서 논문을 쓰던 김용옥 교수(전 고려대)가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때 김교수는 “형, 김우창이라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 와 있는데, 집에 가보면 날마다 책을 한 권씩 읽어요. 놀라운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김우창 말고 이런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하며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최장집 교수는 “사고의 패러다임과 감성의 구조가 상이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우창 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철학적 인간학자”라고 평가한다.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김교수의 글을 직접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찬사에 공감할 것이다.

    김우창 교수의 발언 가운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중략)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행복한 교환으로 바꾸고 자연과 사람의 갈등을 창조와 교감으로 바꾸는 데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복한 교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사회의 진정한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이자 또한 자율과 책임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에서 김교수는 시인 김수영이 남긴 다음과 같은 구절,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는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 말을 김교수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즉, “우리들의 이성이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 대한 김교수의 진정한 메시지일 것이다.

    정운찬 교수는 1948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66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1970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그는 한국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교수들에게 사회생활 경험은 이런저런 영향을 끼치는데, 정교수에게 한국은행 경험은 자신의 주전공이라 할 수 있는 화폐와 금융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프린스턴대학에서 화폐와 금융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교수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생활을 거쳐 1978년 모교로 돌아온 후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에 다루는 지식인 가운데 필자에게 가장 낯선 사람이 정교수다. 정교수의 명성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와 직접 대면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에 특별히 정교수를 인터뷰했는데,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선, 정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 즉 글과 사람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식인이다. 편안하면서도 속으로 단단할 것 같은 정교수의 인상은 그의 글과 큰 차이가 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좋은 의미에서의 단호한 케인스주의자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좋은 의미란 시장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형평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민주주의 지향을 뜻한다.

    국내에 돌아온 이후 20여 년간의 지적 활동을 돌이켜보면, 적어도 정교수는 1980년대까지 강의와 연구에 충실한 전형적인 교수였다. 정교수가 우리 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 데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1986년 서울대교수 시국선언문이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1980년대 전반을 조용히 보내다가 1986년 군사독재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1986년 동료 김영식 교수(화학과), 이성규 교수(동양사학과)와 함께 시국선언문을 준비했다. 최종적으로 50명 가까운 교수가 동참한 이 시국선언이 결과적으로는 아카데미 영역에 머물러 있던 그를 사회현실의 광장으로 이끌어냈다.

    물론 그렇다고 정교수가 진보주의 교수들처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교수는 전문적인 학문 연구를 진행하면서 칼럼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서구사회의 ‘비판적 지식인’에 가깝게 활동해왔다.

    그 결과물을 보면, ‘경제통계학’(1985), ‘금융개혁론’(1991), ‘중앙은행론’(1995), ‘거시경제론’(1996), ‘예금보호론’(1999), ‘화폐와 금융시장’(2000) 등의 연구서와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1997),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1999) 등의 칼럼집이다. 이 가운데 두 권의 평론집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는 IMF 관리경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쉬우면서도 예리하게 분석했다.

    정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지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케인스와 조순 교수(전 서울시장)다. 우선 조순 교수는 그의 학부시절부터 인간적으로, 지적으로 가까웠다. 1978년 그가 모교에 돌아온 것도, 1980년대 후반부터 신문에 활발하게 칼럼을 기고하게 된 것도 모두 조순 교수의 영향이 컸다. 그가 신문에 글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때 조순 교수는 “칼럼을 잡문으로 생각하는 게 더 문제”라며 “잡문으로 쓰면 잡문이 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쓰면 결코 잡문이 될 수 없다”고 격려했다 한다. 조순 교수와 정운찬 교수의 관계는 마치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사제관계를 보듯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미시적 케인스주의자’라 부르고 있듯이 케인스가 정교수의 사상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주지하듯이 케인스주의는 완전고용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이익을 조정하는 정책 프로그램으로, 전후 서유럽의 ‘황금시대’를 가져온 원동력이다. 물론 이 케인스주의 경제이론이 1970년대 이후 위기에 빠졌지만, 최근 서유럽 사민당들의 재집권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영향력이 큰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시적 케인스주의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케인스주의라면 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시장이 실패하거나 경기가 부진할 때 정부가 나서서 수요확대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런 거시적 케인스주의에 비해 미시적, 구조적 혹은 개혁적 케인스주의는 우리나라처럼 아직까지 시장이 원활하지 못한 경우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장을 형성, 경제가 원활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교수의 미시적 케인스주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다르고, 신자유주의와도 다른 중도주의 경제이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DJ노믹스에 대한 평가

    그렇다면 정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정교수는 우선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를 비교한다. 그가 보기에 김영삼 정부에서는 형평에 대한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들은 이런 형평의 문제에 맞추어졌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의 비판은 초점이 바뀌었다. 그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는 국가경제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했고, 형평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효율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성장잠재력을 키워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경제활동의 투명도를 높여야 한다”는 그의 발언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셈이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 정교수는 조심스러웠다. 김대중 정부가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정책적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정교수는 경제부문에 있어 김대중 정부가 외환 유동성 위기는 극복했지만 다른 한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의 위기는 여전하다고 본다.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는 관료와 재벌문제를 꼽는데, 집권 초반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에도 관료와 재벌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개혁이 진행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한국경제의 장래에 대한 정교수의 비관적 전망이다. 그에 따르면 중복투자로 인한 시설의 비효율, 금융권의 부실채권 등이 여전히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정교수는 지금이야말로 미시적 케인스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어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할 시기라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에 대해 비전공자인 필자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지난 3년간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을 돌이켜볼 때 이런 진단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MF 관리경제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재벌문제에서부터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가 풀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교수의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정성인(홍익대), 김상조(한성대), 김종욱(캐나다 앨버타대) 교수 등이 있다. 정성인 교수와 김상조 교수도 정운찬 교수처럼 개혁적 케인스주의에 가까운 경제학자들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김상조 교수는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이 점에서 정교수 자신은 사회단체에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있으나 그의 정책적 대안은 다방면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교수의 이런 태도야말로 학문적 순수성과 정치적 개입 사이의 긴장을 지혜롭게 유지하는, 지식인의 전형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화 시대의 케인스주의

    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적어도 정교수는 현실과 이상,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적절히 결합시키고 있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성장과 형평을 결합하되, 정부의 역할을 여전히 중요시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정교수의 처방과 대안은 오늘날 서유럽 신사회민주주의 정책 프로그램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중도주의 경제학으로 볼 수 있다.

    정교수의 장점은 일종의 균형감각이다. 그 균형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 현실에 내재한 문제들을 실현가능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려는 데 있다. 이 점은 분명 중도주의가 갖는, 진보주의 및 보수주의에 대비되는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에 대한 규범적 지향을 지닌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최근 전지구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는 세계화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금융자본의 세계화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 규모가 크지 않은 국가의 경우 자본의 세계화가 놓은 이른바 ‘세계화의 덫’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물론 정교수가 이를 모르는 바도 아니고, 이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초국적 케인스주의’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과연 이런 상황에 케인스주의가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누가 세계화시대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사회적 형평에 관심을 둔 모든 사회과학자들의 숙제인 동시에 정교수의 고민이기도 하다.

    필자가 최장집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대학원에 다닐 때다. 당시 필자는 산업사회연구회(현 산업사회학회) 국가분과에서 몇몇 대학원생들과 함께 국가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새로 부임한 최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몇몇 선배들과 당시 서울 잠실의 최교수 집을 찾았다. 당시 최교수는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막힘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최교수는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최교수를 간간이 보았지만 깊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1997년 ‘참여사회’에 ‘우리 시대 사상가를 찾아서’를 연재할 때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교수에 대해서 필자는 한국의 페르난도 카르도소(대통령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로서의)에 가깝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현재 브라질 대통령인 카르도소는 대통령이 되기 전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사회과학자였으며, 라틴아메리카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서구적 사회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조화시킨 인물이다.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의 현대사를 이끌어 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최교수가 지향하는 중도주의 정치학의 근간이다.

    최교수는 1943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를, 그리고 1969년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이력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1974년 유학을 떠날 때까지인데, 이때 그는 월간 ‘세대’와 청와대 공보비서실에 근무했다. 앞서 정운찬 교수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회과학 연구자의 현실체험은 단기적으로는 불리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대학에 입학한 이래 별다른 체험 없이 학교 안에 머물렀는데, 나이가 들수록 단조로운 경험이 현실사회를 연구하는데 이롭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시카고 대학으로

    1974년 최교수는 서른한살의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공부한 곳은 시카고대학 정치학과로 미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곳이다. 최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시카고대학 정치학과는 슈미터와 세보르스키 같은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다원주의와 코포라티즘,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종속이론, 그람시 정치이론 등을 공부했다고 한다. 시카고대학이 경제학에서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다면, 정치학은 진보적인 색채가 두드러진 셈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슈미터가 코포라티즘의 대표적인 이론가라면, 세보르스키는 사회민주주의에 정통한 이론가다. 또한 두 사람은 타협에 의한 민주화를 지지하는 중도좌파 정치학자이기도 했다. 최교수는 슈미터 교수의 지도 아래 한국 노동운동과 국가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교수는 마흔살이 넘어 귀국했지만, 이후 그의 학문적 활동은 눈부셨다. 그는 1980년대 초반 당시 국내 대학원에서 붐이 일기 시작한 진보주의 사회과학 연구에 불을 지폈으며, 고려대를 넘어 다른 대학의 대학원생들에게 상당한 지적 영향을 끼쳤다.

    최교수의 학문적 활동은 1988년 그의 첫번째 저서 ‘한국 현대정치의 구조와 변화’(1989)에 집약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은 1980년대 우리 사회과학계를 대표하는 저작 중의 하나이자 젊은 진보적 연구자 세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책이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우리말로 쓰여진 가장 뛰어난 이론 논문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으며, ‘과대성장국가의 형성과 정치균열의 전개’는 한국사회에 대한 최교수의 탁월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논문이다. 특히 후자의 한국 현대 정치사에 대한 최교수의 분석은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최교수의 학문적 활동이 언제나 진보학계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후로 진보학계 담론이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급진적이 되면서 최교수의 연구에 대한 관심은 다소 시들해졌다. 이 무렵 최교수는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의 저자인 박명림 박사 등을 지도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1993),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1996)과 같은 중후한 저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두 저작에서 나타나는 최교수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이른바 ‘역사 구조적 접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무어, 슈미터, 그리고 뤼시마이어 등의 이론이 중요한 자원이었다.

    당시 최교수의 정치적 대안은 ‘민주적 조합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노동과 자본의 역사적 타협을 모색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최교수의 정치학은 그의 영향력이 두드러지는 진보주의 정치학계 안에서 볼 때 손호철 교수(서강대)의 연구경향과 다르며, 오히려 임혁백 교수(고려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둘러싼 논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최교수의 삶은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초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이른바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제창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교수의 이론적 중간결산이자 현실적 정책대안이다. 개념을 두고 논란이 벌어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론’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한 이 이론의 기본 아이디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지금 보면 다소 신선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IMF 관리경제의 위기 속에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게는 자신의 이념에 걸맞은 정책 대안이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적어도 중도주의나 진보주의 온건 그룹에게 최교수의 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보수주의가 주도했던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작지 않은 감회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대해 최교수가 발표한 몇 편의 글들을 보면 그는 미국과 유럽의 중도주의적 이론들의 착상들을 풍부히 활용하면서 우리사회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 간의 생산적 균형과 견제를 강조한다.

    이론적으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의 국가주도 발전론이나 1990년대 이후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장주도 발전론을 모두 극복하고, 이른바 넓은 의미에서의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자유의 원칙과 시민사회에서의 형평의 원칙을 결합하려는 이 이론은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필자가 보기에 결코 만만한 모델이 아니다. 현실적인 가능성을 유보하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만 살펴보자면 이 이론 이외에 어떤 다른 진보적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곧바로 크고작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다수 중도주의 프로그램이 그러하듯이 민주적 시장경제론 역시 좌파와 우파로부터 동시에 비판을 받았는데, 좌파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해, 우파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진보성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들은 찻잔 속의 태풍일 뿐, 최교수에게는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제기한 최교수의 이념을 둘러싼 ‘시비’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와 진보학계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이런 성격의 사건들이 늘 그러했듯이 결과적으로 곤경에 빠진 쪽은 최교수였다.

    논란의 후유증으로 최교수는 결국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사임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문제를 객관화시켜 보면 최교수의 사임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지향을 갖는 중도주의 프로그램의 현실적 좌절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최교수가 계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더라도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제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념과 현실, 학문과 정책의 거리는 가까운 것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이론과 정치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땅의 많은 사회과학 지식인들이 숱한 이론을 만들어왔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정책으로 적용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담론이 언제나 정치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 담론은 ‘정치’인 동시에 ‘상징’인데, 여기서 상징은 그 사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냉정하게 보면 ‘정치’로서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좌절했다. 그러나 ‘상징’으로서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우리 현실을 둘러볼 때 여전히 유효하다.

    최교수는 최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직을 맡으면서 다시 활발한 학문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앞서 필자는 한국 중도주의를 대표하는 네 명의 삶과 사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동일한 중도주의라 하더라도 네 사람 사이에는 지적 배경과 기본이념, 그리고 정책대안 등에서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최장집 교수가 민주적 조합주의에 가깝다면, 한상진 교수는 한국식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으며, 김우창 교수가 이성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면, 정운찬 교수는 미시적 케인스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중도주의의 현재와 미래

    하지만 이런 세밀한 구분은 적어도 진보주의나 보수주의와 대비해 볼 때 근본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크게 보아 이들은 기존의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와는 구별되는 ‘적극적 중도’로서의 이론적 접근과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김우창 교수 또한 자유주의와 이성주의를 결합하여 이성적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중도주의가 갖는 장점은 그것이 진보적 경향의 대안을 모색하되 우리 사회에서 실현가능한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중도주의가 갖는 이런 특징은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최교수와 정교수의 시장에 대한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이들은 시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내재된 경쟁 기제의 효율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시장이 낳는 사회적 불평등을 국가가 적극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교수가 주목하는 ‘제3의 길’도 신혼합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최교수나 정교수의 논리와 큰 차이가 없으며, 특히 중산층 중심의 개혁론은 케인스주의의 사회학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도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이론적 수준과 정치적 맥락에서 따져볼 수 있다. 먼저 이론적 수준에서 중도주의는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현실적 상상력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전략을 평면적 수준에서 절충하는 약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보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중도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낳고 있는 시장과 자본의 통제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모호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프로그램 또한 불투명하다. 또한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중도주의는 우리 현실의 조건을 무시한 채 서구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입해 그대로 적용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이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중도주의가 갖는 약점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중도주의의 미래는 어떨까. 어떤 정치적 기획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의 정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데, 서구의 경우 이것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양당 체제와 연관된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중도주의 지식인 그룹은 이 두 가지 대안 가운데 사회민주주의에 높은 친화성을 보여왔으며, 또 그에 가까운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식 기획 프로그램을 담당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데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거쳐온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지만, 장기간에 걸쳐 구조적인 문제가 돼왔다는 점에서 쉽게 재편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시 말해 이념과 정책을 담당할 수 있는 정당이 없다면, 그 이념이 아무리 현실적이더라도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재 전지구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는 세계화와 정보화 경향은 중도주의가 직·간접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에 오히려 불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사회복지를 감소시킴으로써 ‘풍요 속의 빈곤’을 낳고 동시에 사회적 분할과 배제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민주적 조합주의, ‘제3의 길’, 케인스주의를 포괄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어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중도주의는 과연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황금시대’를 21세기에도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당대의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중도주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소박한 절충주의적 대안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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