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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전쟁의 국제사’ 펴낸 美외교사학자 윌리엄 스툭 교수

“한반도 통일과정에 강대국 개입 어려워졌다”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한국전쟁의 국제사’ 펴낸 美외교사학자 윌리엄 스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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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은 미국의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의 국내 정치와 세계 전략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내년에 출판될 나의 저서를 보면 한국전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제목으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은 미국 민주주의를 퇴보시켰습니다. 1945년부터 1950년 초까지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다소 부주의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고, 전쟁이 터지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즉 미국 의회는 한국을 보호할 만한 미국 병력에 대한 예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터진 뒤에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한국전을 계기로 유럽에서도 미군 병력이 증강되었습니다. 이같은 군사력 증강은 차세대 안정의 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한국전이 일어날 당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유럽지역에서도 군사적 불균형이 심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몇 년 더 계속되었더라면 소련이 유럽을 군사 공격했을 가능성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의 전쟁에 적극 대응하고, 또 서유럽국가에도 힘을 실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유럽에서 NATO를 창설하고, 상징적인 의미로 NATO 초대 사령관에 아이젠하워 장군을 임명했습니다. 이같은 미국의 개입이 유럽의 군사적 불균형을 없애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요약하자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전을 사전에 방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단 사후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또 한국전이 세계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예방했습니다.

또 한국전이 터진 이후 미국의 대응을 보면 미국의 정치문화가 국제정치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내부의 수많은 의견을 항상 수렴하고 협상하는 다원주의 정치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전과 관련하여 미국은 이런 다원주의 정치문화를 국제사회에 적용했습니다. 1950년 말에 중공군이 개입했을 때, 한국전 확산 여부를 놓고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국과 중립국들의 입장은 한국전을 제한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협상과 타협을 통해 모든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사례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1950년대 초반 서독의 재무장 논쟁입니다. 당시 미국은 이를 찬성하고 유럽국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서유럽국과 협상했고, 결국 1955년 서독은 재무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유럽국을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이 이런 방식으로 세계 분쟁을 풀고 있다고 보십니까? 현재의 테러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과 연결해서 대답해 주십시오.

“국제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이런 방식은 미국이 자국의 테러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에도 연결됩니다. 현재 미국이 테러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연합세력을 구성해서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세계적인 문제가 터질 때 독자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은 강력하게 맞서더라도, 이에 대한 세계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미국의 모든 행동이 항상 전국가의 지지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 미국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타협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전 당시에도 이런 방식을 취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국전과 같은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 내부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전 당시는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최고조로 올라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Red Scare(미국 정부가 정부, 영화계, 교육계, 학계 등 사회전반에서 공산주의 동조자를 근절하려는 운동을 벌인 것)’단계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 헌법에 명시된 시민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되지 못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말해 북한의 남침과 중공군 개입으로 미국 내에서 ‘Red Scare’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변하거나 권위주의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전 당시에도 공산주의 신문인 ‘NewYork Daily Worker’는 계속 발행되었습니다. 또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라는 제목으로 수정주의자인 스톤씨가 쓴 책도 출간되었습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에는 크게 손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현재 미국 내에서는 테러와 무관한 아랍계 시민을 미국 시민이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때도 미국 내에서 일본계 미국인이 공격받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인은 아랍계 미국인의 기본적 권리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귀국하면 이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안보 때문에 비민주적 사태 방관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라는 존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미 외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만약에 미국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한국이 이 정도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946년 미 국무부의 한 문서를 보더라도 한국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미국의 시도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기에 이것이 통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국은 때때로 한국에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으나 통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1950년 5월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민주선거를 실시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1960년에는 이승만에게 사임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당시의 미공보원 자료를 보면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많습니다. 이 역시 먹히지 않았습니다. 또 한국의 비민주적인 사태를 막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개입 못한 사례도 많았습니다. 1961년에는 5·16을, 1970년대 초에는 유신개헌을 저지하지 못했고, 1980년에는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지하지 못하고 전두환을 수용해서 받아들였습니다. 1987년에 미국은 막후에서 전두환에게 민주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여기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50년 전에는 안보가 민주화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안보가 바로 서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위협은 지금보다 훨씬 컸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두었습니다. 그 실례로 과거 주한미국대사관공보원(USIS)에는 한국의 젊은 정치 지도자들을 몇 주 내지 몇 달 동안 미국으로 초청해 미국의 정치제도를 교육하는 리더십 프로그램(Leadership Program)이 있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도 1960년대에 이 프로그램에 참석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미국은 항상 장기적으로 민주화가 최종 목표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민주화보다는 안보를 중요하게 여긴 때도 있었습니다.

1980년 광주가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광주의 망월동 묘역을 방문했습니다. 미국이 1980년에 좀더 영웅적인 역할을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87년에 한국이 스스로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은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독자적인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했습니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 국민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무력 진압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또 이 시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역할은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개입여부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미국 입장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는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까지 미국은 전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해관계를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주둔하고 있었고, 이란에는 폭동이 일어나 미국의 인질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냉전 역사상 인권 옹호에 가장 공을 들였던 카터 행정부가 재선 운동을 벌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국제적인 상황과 미국내 사정을 모두 고려해야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부주의로 12·12사태 막지 못해

1979년 12·12 사태를 미국이 민주적인 방향으로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미국이 한국군과 비공식 채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랬더라면 12·12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고, 전두환씨가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단 전두환씨가 군부를 장악한 뒤에는 미국이 이를 저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뒤, 전두환씨는 호랑이등에 올라 탄 형국이었습니다. 떨어지면 죽거나 망명해야 하고, 아니면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과 1987년 상황은 다릅니다. 두 시기를 견주어보면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1987년에 미국은 냉전에서 이미 이기고 있었고, 북한도 쇠퇴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점은 1980년에도 민주화 열기가 있었지만, 전두환의 군부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이 학생이나 일부 노조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에는 전국민이 민주화를 원했습니다. 중산층도 거리에 나가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또 1980년 당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 얼마나 안보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여기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1975년에 김일성이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을 만나 남침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북한의 김일성이 당시 남침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1979년과 1980년 당시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남한의 안보를 위협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도 주한미군 철수를 연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1980년 당시 미국이 안보를 중시한 것은 합법적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내 언론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습니다.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특정 정보만 제공했고, 미국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었습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군사력을 마지막 보루로만 사용하라고 촉구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가 26사단을 광주 일대에 투입할 수 있도록 승인한 것은 제26사단이 특수부대보다 당시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사태를 방치하는 것보다 사상자 수도 훨신 줄일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상자 수가 더 늘어났습니다만 미국은 절대로 사전에 전두환의 광주 무력 진압을 승인하지는 않았습니다.

1981년에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을 한국의 지도자로 승인하면서 아시아 지도자 중 최초로 백악관으로 초청한 것은 사실 김대중씨를 살리기 위한 협상의 하나였습니다. 만약 전두환 대통령의 백악관 방문이 없었다면 김대중씨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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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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