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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의 120년 비사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美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의 120년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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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시기에는 오히려 북한인민군이 이 건물을 보호했다. 1950년 6월 북한인민군이 정동의 대사관저를 점령했고 대사관 직원들은 급하게 피란을 가야만 했다. 당시 존 J. 무치오 주한미국대사(1948∼1952)는 개인물건을 거의 챙기지 못한 채 허둥지둥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북한의 외국인 담당 경찰들이 관저를 봉쇄하고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북한군은 당시 대사관저를 봉쇄하기 전에 집안의 모든 것을 일일이 사진으로 기록에 남겼다. 심지어 대사 가족 앨범까지도 한장 한장 다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한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정동의 미국대사관에 성조기를 다시 게양한 것은 체스티 풀러 대령이 지휘한 미 제1해병연대였다. 그의 부대는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사관과 무치오 대사의 관저에 성조기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의 근세사와 함께 한 하비브하우스가 언제 처음 건축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약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건물의 원래 모습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인 오령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부분이 추가되고 변형되었다. 원래 건물은 건평 40평 정도였으나 1973년 해체 복원될 당시에는 175평에 이르렀다.

서까래에 머리를 부딪힌 앨런공사

하비브하우스는 처음 미국 정부가 사들인 1800년대 말기에는 천장이 지금보다 상당히 낮았다. 당시 워싱턴은 관저의 천장을 높일 수 있도록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공사가 직접 나서서 천장을 높인 얘기는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다. 키가 180㎝가 넘었던 호러스 앨런 공사(1897∼1905)는 천장 서까래에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앨런 공사는 워싱턴 당국에 천장이 낮아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천장을 높여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실내에서는 모자를 쓰지 말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건물의 상태는 앨런 공사가 불평할 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공사관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건물은 여행객이 잠시 머물다 가기에는 좋은 건물이다. 그가 장마철에 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참으로 열악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바닥은 마름모꼴로 삐딱하게 깔려 있으며 기둥은 썩어 들어가고 있고 습하기 그지없는 벽은 옛 민씨 가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벽이 너무 습해 벽지가 젖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니스칠을 해야 하며, 바닥은 땅의 습한 기운이 그대로 올라와 썩어가고 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는 비가 샐 뿐만 아니라 지붕의 흙이 빗물에 녹아 진흙물이 떨어진다. 천장에서 샌 빗물은 그대로 바닥으로 스며든다. … 지붕의 기왓장 위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이들의 먹잇감인 제비들은 기왓장 사이에 집을 짓고 산다. 그 결과 지붕은 더욱 더 구멍이 많아지게 된다.”

비가 새는 공사관

이런 상태인 터라 간간이 공사관을 새로 짓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여기저기 수선하는 선에서 1973년까지는 버텨냈다. 이 건물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 것은 6·25전쟁이다. 직접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포탄이 터지는 진동 때문에 건물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원래 낡은 건물이라 그 피해는 심각했다.

월터 P 매커나기(1959∼1961) 대사 부부는 한밤중에 침실이나 욕실의 문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바람에 놀라 잠을 깨곤 했다고 한다. 이는 지붕이 내려앉는 조짐이었다.

1961년 미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집을 검사한 결과, 안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만 해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 이 대사관저에 머무는 경우가 잦았다. 엔지니어들이 검사하기 얼마전에 방한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생명이 위험했다는 사실에 미대사관 관계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 판정이 나자 관저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되었다. 지붕을 새로 덮고 들보를 강화했다. 1965년 건물의 한 부분에서는 25톤에 이르는 마른 모래가 제거되기도 했다. 당시 대사의 부인은 어느날 아침 침실에 앉아 있다가 천장을 올려다 보고 천장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대사관의 관리팀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었고, 조사 결과 건물 상태가 너무 나빠서 그 침실 출입이 곧바로 금지되었다. 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이 1965년 새해를 맞아 방한하여 그 방에서 잠을 잔 것이 불과 며칠전의 일이다.

하비브 대사의 고집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대사관저를 어떤 형태로든지 전면적으로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정부는 낡은 관저를 보수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지만, 그들은 문화재와 사적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대사관저가 소중한 사적이라고 생각했다.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이 시기인 1965년 방한해서 낡은 미국대사관 관저가 한국의 주요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재건축 논의가 일고 있는 서울의 대사관 관저 외관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자, 각종 벌레에 시달림을 받아온 이 건물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미국이 구입한 이래 100년 정도를 버티던 이 건물을 헐어야만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의 필립 C.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다. 그는 “새로 지어질 대사관저는 전통적인 한국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살려서 짓도록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하비브 대사는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국민들로부터 매우 높은 반대 여론에 부딪힐 것이며, 대사관의 입장도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사관저를 현대 서양식이 아닌 주재국의 전통 건축양식에 따라 짓겠다고 보고하고 이를 밀어붙였다. 국무부 해외공관 담당사무소와 치열한 공방이 일었으나, 결국 하비브 대사가 승리했다.

하비브 대사와 미국대사관측은 한국 최고의 한옥건축가를 초빙했다. 그래서 조자영 건축사무소와 함께 널리 이름이 알려진 신영훈 선생과 당대 최고의 목공인 무형인간문화재 제74호 이광규 선생 등이 관저 건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신영훈 선생은 남대문 복원 작업을 마친 직후였다. 신영훈 선생은 “한국 정부조차 전통양식으로 건물을 짓지 않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미국대사관저 건축은 매우 드물고 특별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6·25전쟁 직후 서울은 잿더미뿐인 폐허가 되었다. 서울을 재건하면서 한국 정부는 과거의 도심 구조와 옛 건물을 밀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만들었다.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통로를 끊어 세운상가를 만든다든지, 청계천을 복개한다든지 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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