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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쌀의 운명

쌀을 살려야 민족이 산다

  • 윤석원 <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 sukwon@cau.ac.kr

쌀을 살려야 민족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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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은 우리 민족과 영욕을 함께 해왔다. 쌀농사는 경제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이고 우리의 文化이다. 개방시대를 맞아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해 우리의 文化를 이어나가야 한다.
쌀은 우리 민족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해왔다. 주식이어서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쌀농사는 단순한 경제행위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쌀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했으며, 환경에 순응하며 반만년을 살아왔다.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가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왔어도 쌀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하더라도 민족의 뿌리가 변하지 않듯이 쌀 또한 우리와 함께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척박한 땅 만주와 연해주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밭이 아니라 논을 먼저 개간하고 쌀농사를 시작했다. 그만큼 쌀농사는 우리 민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쌀은 민족의 아픔과도 함께 했다. 일제에는 산미증식(産米增殖)운동에 따라서 우리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일본에 공출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갑오 동학혁명도 사실은 쌀을 둘러싼 가진 자들의 착취에 항거한 농민봉기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쌀농사가 개방화의 물결이 몰아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위기적 상황에 몰리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자에 의한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 농업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우리 손으로 지은 쌀로 한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안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쌀농사의 위기이며, 이는 곧바로 한국 농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농가경제는 날로 악화하고 있다. 농가 한 가구당 부채가 2000만원에 달하고 있는데 농가소득은 가구당 2300만원에 불과하다. 부채를 갚아나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농가교역조건도 1995년을 100으로 할 때 2000년에는 86으로 떨어졌다. 농산물의 가격수준이 농가가 구입하는 투입재(농약, 비료, 소비재 등) 가격수준의 86% 정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식생활은 날로 서구적이 되어 쌀 소비가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가구당 연간 쌀 소비량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2000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93.6kg은 1975년의 74% 수준에 불과하다. 쌀 소비의 연평균 감소율을 보면 1980년대는 연평균 1.0%, 1990년대는 연평균 2.6%로서 근년에 올수록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올해(2001년)는 90kg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쌀 소비량의 감소추세는 음식문화의 다양화와 식생활 패턴의 변화 등에 기인한 것으로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의 결과로 정부수매물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출하되는 물량을 흡수해줄 민간유통주체(미곡종합처리장, 임도정공장, 산지수집상 등)가 계절가격진폭이 없음으로 인해서 경영에 애로를 겪고 있다. 계절가격진폭이란 수확기의 가격과 단경기(端境期, 쌀 출하가 줄어드는 5,6월경) 가격차이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7~8%는 되어야 보관비나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 이 계절가격진폭이 없으면 민간유통주체들이 수확기에 쌀을 매입할 유인이 없어 문제가 된다.

쌀 계절가격진폭을 보면 1998년에 13.4%, 1999년에 7.9%, 2000년에 3.0%, 그리고 2001년에는 1.3%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최근에 계절가격진폭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재고량의 증가에 기인하며, 특히 민간부문의 재고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8년에는 17만섬이던 민간 재고가 1999년에는 20만섬, 2000년에는 60만섬, 그리고 2001년에는 178만섬으로 급증하고 있다. 쌀을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출하하지 않고 단경기까지 보관하거나 유통업체에 수탁할 수 있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농민들은 수확기에 집중되는 자금수요 때문에 출하량의 약 70~80%를 수확기에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수확기 쌀 집중출하로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곧바로 농가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아직까지도 쌀 소득이 농가소득의 52%를 차지하고 있고, 전남·전북·충남 등 논농업 위주인 지역의 농가는 쌀 소득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쌀값 폭락은 한국 농업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는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다. 올해 수확기 쌀 가격이 지난해 보다 80kg 한 가마당 10% 정도(약 1만5000원)만 하락한다 하더라도 쌀 소득감소액은 약 7000억원에 달하게 되고, 15% 정도(약 2만원) 하락한다면 쌀 소득감소액은 1조원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이후에는 관세화에 의한 개방이든, 의무수입물량(MMA)의 확대에 의한 개방이든, 외국산 쌀의 시중유통을 피할 수 없다. 값싼 수입쌀이 들어오게 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렇게 되면 생산기반이 급속히 위축될 우려가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쌀의 자급률은 계속 하락하여 2010년경 70~80%대로 낮아질 것으로 예측한다. 국제 쌀 가격, 특히 자포니카쌀 가격은 급등할 우려가 있으며, 이는 곧 우리의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국면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쌀, 시장기능에만 맡겨서는 안돼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쌀문제를 시장기능에만 의존하여 해결할 수 없다. 이는 쌀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이유는 첫째, 쌀의 중요한 생산요소인 농지(토지)는 정부의 각종 규제와 통제를 받고 있는데 그 생산물인 쌀을 시장기능에만 맡긴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쌀이 과잉 공급돼 가격이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시장원리이고, 또 그로 인해 농가소득이 감소하는 것도 시장원리다. 이 때문에 쌀값 하락에 대해 일각에선 “농민 스스로가 생산량을 조정하든가 시장기능에 맡기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쌀 문제를 말 그대로 시장경제원리에 맡기겠다면 생산요소인 농지에 대한 각종 규제도 풀어야 이치에 맞는다. 정부가 시장원리와 달리 농지를 인위적으로 묶어둠으로써 쌀 공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규제를 푼다면 농지를 당장 다른 용도로 전환해 쌀 공급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쌀값 폭락에 대한 걱정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난개발과 투기를 조장해 최악의 경우 농토가 거의 사라질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둘째, 우리 민족이 주식으로 하고 있는 쌀이 자포니카 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쌀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주식인 동글동글하고 윤기가 흐르는 ‘자포니카 형’이고, 다른 하나는 길쭉길쭉하고 푸석푸석한 ‘인디카 형(안남미)’이다. 지구상에서 자포니카 형의 쌀을 생산하여 주식으로 삼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전세계 쌀 교역량의 95% 이상이 인디카 형이다.

우리 국민이 소비하는 쌀은 대략 연 500만t에 달한다. 만약 우리의 쌀농사 생산기반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외국(미국·호주·중국 등)에서 수입해올 수 있는 자포니카 쌀은 많아야 300만t 정도에 불과하다. 자포니카 쌀이 아닌 인디카 쌀이 주식이라면 쌀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간단할 수 있다. 국제시장에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포니카 쌀은 그렇지 못하다. 부족하다고 언제든지 국제시장에서 사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쌀은 공공재다

셋째, 우리의 쌀 생산농가는 영세한 소농(小農) 구조여서 시장출하량의 70~80%를 가을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판매해 현금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산농민들이 가을에 쌀을 수확하여 가격조건이나 금리, 미질의 변화 등을 고려해 다음해 수확기까지 적당한 시기에 판매하는 구조라면 수확기 가격폭락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하다.

넷째, 쌀은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공재는 수익성보다는 공공의 복지나 효용증대를 목적으로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공급하는 재화다. 도로나 교량, 공원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쌀 공급의 주체가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개별 농가라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수익이 없어도 제공될 수 있는 것이 공공재인데 반하여 쌀의 공급자는 그렇지 못하다.

다섯째, 농업의 기본가치와 다원적 기능(Multifunctionality) 때문이다. 농업 특히 논농업은 식량의 안정적 공급과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안전한 식료품의 개발, 자연환경의 보전, 그리고 전통문화의 보전, 아름다운 강산과 경관의 유지, 산하에 그윽한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홍수조절,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한 애국심 고취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농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90조원에 이를 것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러한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현재 WTO 농업위원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이며, EU·일본·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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