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쌀을 살려야 민족이 산다

  • 윤석원 <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 sukwon@cau.ac.kr

    입력2005-03-11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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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은 우리 민족과 영욕을 함께 해왔다. 쌀농사는 경제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이고 우리의 文化이다. 개방시대를 맞아 품질이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해 우리의 文化를 이어나가야 한다.
    쌀은 우리 민족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해왔다. 주식이어서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쌀농사는 단순한 경제행위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쌀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했으며, 환경에 순응하며 반만년을 살아왔다.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가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왔어도 쌀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하더라도 민족의 뿌리가 변하지 않듯이 쌀 또한 우리와 함께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척박한 땅 만주와 연해주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밭이 아니라 논을 먼저 개간하고 쌀농사를 시작했다. 그만큼 쌀농사는 우리 민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쌀은 민족의 아픔과도 함께 했다. 일제에는 산미증식(産米增殖)운동에 따라서 우리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일본에 공출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갑오 동학혁명도 사실은 쌀을 둘러싼 가진 자들의 착취에 항거한 농민봉기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쌀농사가 개방화의 물결이 몰아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위기적 상황에 몰리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자에 의한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 농업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야 겨우 우리 손으로 지은 쌀로 한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안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쌀농사의 위기이며, 이는 곧바로 한국 농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농가경제는 날로 악화하고 있다. 농가 한 가구당 부채가 2000만원에 달하고 있는데 농가소득은 가구당 2300만원에 불과하다. 부채를 갚아나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농가교역조건도 1995년을 100으로 할 때 2000년에는 86으로 떨어졌다. 농산물의 가격수준이 농가가 구입하는 투입재(농약, 비료, 소비재 등) 가격수준의 86% 정도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식생활은 날로 서구적이 되어 쌀 소비가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가구당 연간 쌀 소비량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2000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93.6kg은 1975년의 74% 수준에 불과하다. 쌀 소비의 연평균 감소율을 보면 1980년대는 연평균 1.0%, 1990년대는 연평균 2.6%로서 근년에 올수록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올해(2001년)는 90kg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쌀 소비량의 감소추세는 음식문화의 다양화와 식생활 패턴의 변화 등에 기인한 것으로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의 결과로 정부수매물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출하되는 물량을 흡수해줄 민간유통주체(미곡종합처리장, 임도정공장, 산지수집상 등)가 계절가격진폭이 없음으로 인해서 경영에 애로를 겪고 있다. 계절가격진폭이란 수확기의 가격과 단경기(端境期, 쌀 출하가 줄어드는 5,6월경) 가격차이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7~8%는 되어야 보관비나 이자를 감당할 수 있다. 이 계절가격진폭이 없으면 민간유통주체들이 수확기에 쌀을 매입할 유인이 없어 문제가 된다.

    쌀 계절가격진폭을 보면 1998년에 13.4%, 1999년에 7.9%, 2000년에 3.0%, 그리고 2001년에는 1.3%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최근에 계절가격진폭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재고량의 증가에 기인하며, 특히 민간부문의 재고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8년에는 17만섬이던 민간 재고가 1999년에는 20만섬, 2000년에는 60만섬, 그리고 2001년에는 178만섬으로 급증하고 있다. 쌀을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출하하지 않고 단경기까지 보관하거나 유통업체에 수탁할 수 있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농민들은 수확기에 집중되는 자금수요 때문에 출하량의 약 70~80%를 수확기에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수확기 쌀 집중출하로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곧바로 농가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아직까지도 쌀 소득이 농가소득의 52%를 차지하고 있고, 전남·전북·충남 등 논농업 위주인 지역의 농가는 쌀 소득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쌀값 폭락은 한국 농업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는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다. 올해 수확기 쌀 가격이 지난해 보다 80kg 한 가마당 10% 정도(약 1만5000원)만 하락한다 하더라도 쌀 소득감소액은 약 7000억원에 달하게 되고, 15% 정도(약 2만원) 하락한다면 쌀 소득감소액은 1조원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이후에는 관세화에 의한 개방이든, 의무수입물량(MMA)의 확대에 의한 개방이든, 외국산 쌀의 시중유통을 피할 수 없다. 값싼 수입쌀이 들어오게 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렇게 되면 생산기반이 급속히 위축될 우려가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쌀의 자급률은 계속 하락하여 2010년경 70~80%대로 낮아질 것으로 예측한다. 국제 쌀 가격, 특히 자포니카쌀 가격은 급등할 우려가 있으며, 이는 곧 우리의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국면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쌀, 시장기능에만 맡겨서는 안돼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쌀문제를 시장기능에만 의존하여 해결할 수 없다. 이는 쌀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이유는 첫째, 쌀의 중요한 생산요소인 농지(토지)는 정부의 각종 규제와 통제를 받고 있는데 그 생산물인 쌀을 시장기능에만 맡긴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쌀이 과잉 공급돼 가격이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시장원리이고, 또 그로 인해 농가소득이 감소하는 것도 시장원리다. 이 때문에 쌀값 하락에 대해 일각에선 “농민 스스로가 생산량을 조정하든가 시장기능에 맡기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쌀 문제를 말 그대로 시장경제원리에 맡기겠다면 생산요소인 농지에 대한 각종 규제도 풀어야 이치에 맞는다. 정부가 시장원리와 달리 농지를 인위적으로 묶어둠으로써 쌀 공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규제를 푼다면 농지를 당장 다른 용도로 전환해 쌀 공급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쌀값 폭락에 대한 걱정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난개발과 투기를 조장해 최악의 경우 농토가 거의 사라질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둘째, 우리 민족이 주식으로 하고 있는 쌀이 자포니카 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쌀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주식인 동글동글하고 윤기가 흐르는 ‘자포니카 형’이고, 다른 하나는 길쭉길쭉하고 푸석푸석한 ‘인디카 형(안남미)’이다. 지구상에서 자포니카 형의 쌀을 생산하여 주식으로 삼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전세계 쌀 교역량의 95% 이상이 인디카 형이다.

    우리 국민이 소비하는 쌀은 대략 연 500만t에 달한다. 만약 우리의 쌀농사 생산기반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외국(미국·호주·중국 등)에서 수입해올 수 있는 자포니카 쌀은 많아야 300만t 정도에 불과하다. 자포니카 쌀이 아닌 인디카 쌀이 주식이라면 쌀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간단할 수 있다. 국제시장에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포니카 쌀은 그렇지 못하다. 부족하다고 언제든지 국제시장에서 사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쌀은 공공재다

    셋째, 우리의 쌀 생산농가는 영세한 소농(小農) 구조여서 시장출하량의 70~80%를 가을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판매해 현금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산농민들이 가을에 쌀을 수확하여 가격조건이나 금리, 미질의 변화 등을 고려해 다음해 수확기까지 적당한 시기에 판매하는 구조라면 수확기 가격폭락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하다.

    넷째, 쌀은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공재는 수익성보다는 공공의 복지나 효용증대를 목적으로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공급하는 재화다. 도로나 교량, 공원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쌀 공급의 주체가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개별 농가라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수익이 없어도 제공될 수 있는 것이 공공재인데 반하여 쌀의 공급자는 그렇지 못하다.

    다섯째, 농업의 기본가치와 다원적 기능(Multifunctionality) 때문이다. 농업 특히 논농업은 식량의 안정적 공급과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안전한 식료품의 개발, 자연환경의 보전, 그리고 전통문화의 보전, 아름다운 강산과 경관의 유지, 산하에 그윽한 맑은 공기, 깨끗한 물, 홍수조절,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한 애국심 고취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농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90조원에 이를 것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러한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현재 WTO 농업위원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가장 큰 이슈이며, EU·일본·우리나라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국제곡물시장은 실질적으로 곡물 메이저가 장악하고 있어 이들의 횡포를 막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5대 곡물메이저인 카길, 아처다니엘스 미들랜드(ADM), 루이 드레퓌스, 분게, 앙드레는 세계 곡물교역량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통분야 시장점유율도 총 저장능력에서 75%, 수출취급능력에서 56%, 밀 제분에서 69% 등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곡물 메이저들은 언제든지 수출금지, 가격담합 인상 등 불공정 무역을 자행할 수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세계 곡물시장이 WTO 등 국제기구의 규범에 따라 유지되기보다 이들 메이저들에 의해 혼란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쌀을 취급하는 곡물기업에는 미국의 쌀경작자협회(RGA)와 코넬 등이 있다. 1980년 냉해로 인해 우리나라의 쌀 생산이 크게 감소하자 RGA와 코넬은 가격을 3배 가량이나 올려서 판매했고, 1991년 일본의 쌀생산이 냉해로 감소하자 RGA는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쌀 수입을 못하게 미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쌀 가격을 2배로 올려서 일본에 판매한 적도 있다.

    또 수입국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수출국으로부터 농산물을 수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곡물 수출국들은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할 경우 자국내 식량확보와 물가안정을 위해 쌀 등 곡물의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 WTO가 출범한 이후에도 1995년 태국의 쌀 수출금지조치, 1995년 헝가리의 옥수수, 밀 보리 수출금지, 1996년 유럽연합의 밀과 밀가루에 대한 수출세 부과, 1996년 체코의 밀과 귀리 수출금지 등 수출제한조치가 취해졌다. 미국은 ‘1996년 농업법’에, 유럽연합은 1999년 3월 채택된 ‘아젠다 2000’에 “필요한 경우 곡물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국제무역경찰을 자처하는 WTO도 이러한 수출제한조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농업협정문 제12조(수출금지 및 제한에 관한 규율)는 수출제한조치를 취하는 국가에 대해 식량수입국의 식량안보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거나 필요한 경우 수입국과 협의할 것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쌀정책은 경지정리의 확대와 용수관리 등 생산기반조성사업에 역점을 두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쌀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요(소비)보다는 공급(생산)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5년 WTO 체제가 출범한 이후 개방화에 대응하여 쌀산업을 육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부정책의 기조는 ‘규모의 확대를 통한 가격경쟁력 제고’와 ‘민간유통조직의 활성화’로 요약할 수 있다.

    쌀 경쟁력강화를 위한 영농 규모화 사업은 규모의 확대와 전업농 육성을 통해 생산비를 47% 절감하기 위한 정책으로 1995년에서 2000년까지 약 6년 동안 1조 4215억원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2000년 현재 생산비 절감 효과는 3300억원에 불과하며 이는 80kg 가마당 3400원(5.5%) 절감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0.5ha 미만의 영세농이 1990년에 전체농가의 27.3%인 48만3000가구였는데, 1999년에는 48만7000가구(전체농가의 35.2%)로 늘어났다. 이는 규모확대를 통한 생산비 절감에는 한계가 있으며, 결국 가격경쟁력제고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UR협상의 결과로 쌀 수매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쌀의 민간유통기능 활성화를 위해 수확후 관리·가공 등의 기술개발을 통한 고품질 쌀의 생산과 산지유통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1991년 충남 당진 합덕농협과 경북 의성 안계농협에 미곡종합처리장(RPC)을 설치했다. 2000년 현재 전국에 324개의 미곡종합처리장이 설치되었다.

    쌀, 정부대책 무엇이 문제인가

    미곡종합처리장은 산지유통량의 약 60~70%를 처리하는 산지유통의 핵심주체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민간유통주체들인 미곡종합처리장이 심각한 경영상의 애로를 겪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계절가격진폭이 최근에 올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유통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계절가격진폭을 유지해야 하는데 정부는 이에 실패했다.

    정부가 발표한 올해 ‘수확기 쌀 가격안정 및 수급안정대책(8·29)’과 ‘중장기 양곡정책 방향(9·4)’, 그리고 ‘보완대책(9·28)’을 보면 2004년 이후의 개방을 전제로 한 대책치고는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난번 단기 대책에서는 올해 수확기 상황을 염려하여 4조원을 긴급 투입하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공표했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300억원의 보조와 3000억원 정도의 융자금(3% 이자)이 전부다. 나머지는 올해 가을에 어차피 투입하게 되어 있던 자금이거나 농협 및 민간 미곡종합처리장의 자금이다. 더군다나 쌀 가격이 하락할 경우 농민의 소득보전조치는 전혀 없다. 그것도 최근에서야 내년도 논농업직불제 예산으로 지난해의 2105억원보다 573억원 많은 2678억원을 책정했을 뿐이다.

    특히 단기 대책에서 올해 쌀 가격을 지난해 수확기 수준인 15만8000원(80㎏)선으로 유지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재고량 수준과 대책의 미흡함 등을 감안할 때 실현불가능한 약속이다. 차라리 쌀 가격의 하락을 기정사실화하고 가격하락에 따른 농민들의 소득보전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했어야 했다.

    중장기 대책에서도 양질미 정책으로의 전환, 다양한 직불제 도입, 공공비축제 도입 등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확정된 대책이 아니라 연구 검토하겠다는 사항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농민들로 하여금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농민들을 분노케 한 요인이 되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지적하면 첫째, 직접지불제를 통한 농가 소득보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다. 추곡수매가를 동결하고, 2004년 이후 약정수매제를 폐지하며, 시가매입 시가방출의 공공비축제를 도입하고, 2004년 이후의 개방에 대비하여 쌀 가격의 하향안정을 기정사실화하는 등 시장기능을 확대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정책기조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쌀 생산기반을 최대한 유지하겠다면 직불제에 의한 소득보전대책을 시급하게 확대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도 미작경영안정제와 소득안정직불제 등 다양한 직접지불제는 2004년까지는 모두 ‘연구’ ‘검토’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행 논농업직불제도 2003년에 그 효과를 ‘심층분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올해부터 3~4년간은 현행 직불제만을 운용하고 새로운 직불제는 도입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시장기능에 맡길 것만을 생각하고, 소득보전조치는 2004년 이후에나 상황을 보아가며 시행하겠다는 것이니 너무나 한가한 발상이다. 무엇보다도 검토하고 연구할 사항을 무슨 ‘대책’이라고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연구하고 검토가 끝난 대책을 정책으로 발표해야 한다. 연구 검토는 항상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민간유통기구와 산지 쌀 유통 인프라에 대한 정책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UR협상의 결과로 앞으로 쌀 유통과정에서 정부의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민간유통기구(미곡종합처리장, 임도정공장, 산지상인 등)의 역할과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을 건전하게 육성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양정(糧政)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리고 수확 후 물벼산물 수집체계를 조기 구축하기 위해 수송, 건조, 저장시설 등 유통인프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함에도 이번 대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쌀을 살리겠다는 합의가 필요

    셋째, 내년(2002년) 상황에 대한 대책이 없다. 내년이면 쌀 재고량은 올해의 989만섬 수준에서 1300만섬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거기다가 농협중앙회가 수매한 400만 섬을 더하면 총 1700만섬에 달해 내년에도 가격이 오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도 올해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재고를 어떻게 할 것이며, 계절가격진폭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쌀 산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쌀농사를 살리겠다는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의 형성이다. 이를 전제로 정부는 쌀산업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올해 수확기와 내년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올해 가격을 지난해 수확기 가격수준인 15만8000원선으로 유지하겠다는 정부의 지난번 발표를 취소하고, 쌀 가격이 지난해보다 약간은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솔직하게 공표해야 한다. 올해 수확기 쌀 가격을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우며, 이러한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동아일보 10월10일자 보도에 따르면 전남의 경우 지난해보다 10% 가까이 떨어진 14만2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 수확기 가격을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할 경우 내년 쌀 가격이 올해 수확기 가격보다 오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재고가 누적되어 있고, 더군다나 농협중앙회가 400만섬이나 보유하고 있어 언제 시장에 방출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해 쌀 가격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지난해 수준을 유지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년에 계절가격진폭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며 농민과 유통주체 모두에 이익이 될 수 있다.

    2004년 이후 쌀 시장이 어떤 형태로든 개방되면 쌀 가격은 큰 폭으로 인하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부는 지금부터 쌀 가격이 서서히 낮아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농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 대신 정부는 이에 따른 소득보전 장치를 확실하게 도입하여 최소한 올해 수준의 소득을 앞으로도 보전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농민들이 생산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첫째, 품질이 우수하고 환경친화적인 안전한 쌀이 생산될 수 있도록 양질미 정책으로 양정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개방에 대비하여 가격보다는 품질제고를 통한 경쟁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매등급기준의 상향조정, 종자공급체계의 전환, 양질미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설정 등의 조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밖에도 고품질미 생산을 위한 브랜드 쌀 개발을 위해 계약재배를 확대해야 한다. 처음에는 소량이더라도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미질관리를 철저히 하며, 마케팅전략도 치밀하게 세워 명성을 얻도록 정부와 지방정부는 생산자와 유통주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고품질의 브랜드 쌀 개발 없이는 앞으로 시장에서 존립하기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良質美정책으로 전환을

    둘째, WTO 체제에서도 가능한 직접지불제도의 확대를 통한 소득보전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 실정에 맞는 다양한 직접지불제도를 시급히 도입할 필요가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영체별 소득안정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휴경이나 윤작에 의한 생산 제한정책도 조심스럽게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남북의 식량문제를 함께 고려하는 대승적 식량정책이 필요하다. 현재 쌀이 남아돈다고는 하지만 통일에 대비하고, 북한의 식량문제까지 고려한다면 결코 과잉이라고 볼 수 없다. 순수하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북협력기금 등을 활용해 제도적으로 해마다 일정량을 북한에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넷째, 정부는 민간유통조직의 활성화를 위해서 계절가격진폭을 최소한 58%선으로 유지하는 데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한다. 계절가격진폭만 있으면 정부가 특별히 유통주체들을 위해 할 일은 없다. 그리고 산지 쌀 유통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물벼 상태로 산물을 수집할 수 있는 수송수단이나 건조·저장시설의 확충을 지원해야 한다.

    다섯째, 소비확대를 위한 수요관리정책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 식생활의 변화와 서구화로 쌀의 소비가 매년 감소하고 있는데 이를 되돌리기란 그렇게 쉬워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쌀 가공식품을 개발하여 소비를 늘려야 한다. 국내산 쌀을 원료로 이용할 수 있는 쌀 가공식품이 개발되어야 한다. 또한 생산자와 정부는 미질이 우수하고 밥맛이 뛰어난 품종을 육성하여 브랜드화함으로써 소비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소비자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켜줄 수 있어야 쌀 소비를 조금이나마 늘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통주체들, 특히 미곡종합처리장은 기능성 쌀 개발에 진력해야 한다. 최근 일본의 쌀 소비량이 약간 늘었는데 그 이유가 주먹밥 등 가공상품의 개발과 기능성 쌀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과 군인에게 양질의 쌀을 급식하여 쌀밥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미래의 쌀 소비 고객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고품질 브랜드 쌀의 수출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쌀맛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일본에서는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단백질 함유량이 6%미만이고, 정립률이 90%이상인 쌀을 계약재배 방식으로 생산하여 일본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볼 만하다. 단백질 6%미만 쌀의 재배를 위해서는 질소질 비료 시비량이 적어야 하므로, 농가와 계약재배하여 상징적으로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우리 쌀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볼 만하다.

    이상으로 우리의 쌀산업이 왜 위기이며, 왜 시장기능에만 맡길 수 없고, 왜 쌀 문제의 해결이 간단치 않은가를 살펴보았다. 또 정부정책의 문제점, 그리고 국제곡물시장구조의 문제점 등을 논의해 보고 쌀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쌀산업은 우리 민족과 함께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대책은 이러한 철학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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