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大豊에 멍들고, 쌀값에 울다

<농촌현장르포> 2001년 가을 農心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5-03-11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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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창지대의 農心이 술렁이고 있다. 불패의 신화를 이어왔던 쌀값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11월 ‘무서운 경쟁자’ 중국의 WTO가입, 2005년 1월 쌀시장 완전개방 등. 농민 앞에는 끝없는 풍랑이 기다리고 있다. 바야흐로 ‘農者天下之大本’이 기로에 선 것이다.
    2001년 대한민국 쌀농사는 그야말로 대풍이다. 전체 수확량은 정부 목표량을 무려 200만섬 이상 초과한 3800만섬에 이를 전망이다. 하지만 황금 들녘 어디에서도 좀처럼 풍년가를 들을 수가 없다.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하락하고 있는 데다가 2001년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90kg 이하까지 떨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엔 사상 최초로 보리값이 쌀값을 앞지르는 ‘대이변’도 발생했다. 이젠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라 ‘보리만도 못한 쌀’ 신세가 된 셈이다.

    이런 가운데 쌀증산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농림부 발표는 농민들의 성난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쌀농사는 대한민국 농가소득의 51%를 차지하며, 쌀값의 변동은 농민들의 정서에 곧바로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쌀값 추락과 쌀정책의 전환이 동시에 진행된 것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급기야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고, 볏가마에 불을 질렀다. 이 또한 건국 이래 최초의 사건이다. 쌀 한톨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농민들이 곡식까지 불태우는 비극을 연출한 것이다.

    10월6일 오전 충청도 제1의 곡창지대인 당진을 찾았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쌀 수확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농림부가 발간한 ‘2000년 작물통계’에는 당진의 10a(300평) 당 생산량이 583kg으로 나와 있다. 이런 결과는 당진 지역의 기후조건과 관련이 깊다. 당진은 평야지대인데다 일조량이 많고 해풍이 벼의 생육에 적당한 만큼만 불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당진농협 앞에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 아침밥을 먹읍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것은 쌀 소비촉진을 위해 농협중앙회가 벌이고 있는 캠페인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밥만 챙겨 먹어도 쌀 재고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진군청과 당진농협이 만든 팸플릿에는 ‘아침밥의 효과’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아침을 먹는 학생은 그렇지 못한 학생보다 숙제를 더 잘하고, 부모가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공부한다’는 ‘코미디’ 같은 분석까지 실려 있다.

    농림부와 농협이 공동으로 제작한 포스터의 문구도 눈길을 끈다.



    “우리 가족 건강의 마술사. 역시 밥입니다. 아침밥을 잘 먹으면 학습능력이 높아진다. 비만방지에 도움이 된다. 긍정적이고 명랑한 기분을 갖게 된다. 필수영양소의 균형적인 섭취가 가능하다.”

    “밥이 좋아요. 이 아이의 밝은 웃음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건강한 것은 밥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서른살이 넘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2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1970년대 말 쌀 소비량이 급증하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권장하는 면사무소 직원들과 미질이 좋은 쌀을 재배하려는 농민들 사이에 적지 않은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와 마을 어귀의 담벼락에는 어김없이 혼분식을 장려하는 포스터가 등장했다. 또한 쌀밥만 먹을 경우 각기병 등에 걸릴 수 있으니 건강에 좋은 보리밥을 먹으라는 얘기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아침밥을 먹읍시다”

    그래서일까? 쌀밥의 우수성과 아침밥의 효과를 강조하는 포스터를 바라보는 농민의 시선은 시큰둥했다.

    “언제는 혼분식이 좋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 쌀밥이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해유.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을 보슈. 밥 먹는 사람보다 빵과 유유를 먹거나 굶는 사람이 더 많아유. 그러니 쌀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유.”

    당진농협 2층엔 2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당진 쌀 소비대책상황실’과 ‘쌀 자급대책 종합상황실’이 그것이다. 한쪽은 쌀을 많이 팔자는 것이고, 다른 쪽은 많이 생산하자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배치되는 측면도 있다. 정부와 농민의 요구를 모두 반영해야 하는 농협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

    농협중앙회 당진군지부 이재근 차장은 “재고가 늘고 정부의 기능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쌀값 하락은 시간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농협 RPC(Rice Processing Complexes, 미곡종합처리장)가 눈뜨고 적자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농협은 손해보지 않으려 하고, 농민은 제값을 받으려고 하니까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차장의 말처럼 농협 RPC는 전국적으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195개 농협 RPC 가운데 105개(53.8%)가 11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당진군도 8개 RPC에서 총 9억5200만원의 손해를 봤다. 이것은 쌀값의 ‘계절진폭’이 사라지면서 농협 RPC가 이윤을 남기지 못한 채 쌀을 출하한 탓이다. 농협 RPC로서는 빚을 얻어 쌀을 수매했기 때문에 시세차익 여부와 관계없이 이자를 물어야 했던 것이다.

    이차장에 따르면 당진군 농협 RPC의 2001년 적자폭은 무려 22억7900만원에 달할 전망이다. 2000년의 경우 신용수익으로 RPC 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2001년에도 적자가 쌓이면 경영 자체가 힘들다는 주장이다. 이런 까닭에 산물벼(조곡) 수매값을 낮추고, 나중에 가격이 오를 경우 추가로 보상하는 제도를 검토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당진농민회는 9월20일 RPC조합장을 감금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촬영중인 당진경찰서 정보과 형사의 비디오 카메라를 부수기도 했다. 농민들은 40kg 산물벼의 생산원가를 5만2000원으로 보고, “농협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0월6일 오전 11시,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한농연) 당진군지국 사무실에 농민단체 간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현재 농촌에는 수십개의 농민단체가 있는데, 쌀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체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한농연이다. 한농연은 1987년 농민후계자를 중심으로 창립된 조직으로, 1990년 재야단체로 출범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쌀문제에 대해서는 전농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1990년대 중반 농림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고 탄생한 ‘쌀전업농중앙회’가 있는데, 여기에 속한 농민들도 개인 성향에 따라 전농이나 한농연에 가입한 경우가 많다.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유”

    이종현 당진군 농민회장, 김충완 당진군 한농연회장, 정상영 부회장, 차기청 경종분과위원장 등은 먼저 농협중앙회가 전국의 농협 RPC에 보낸 공문부터 비판했다. 10월 5일자로 전송된 문서에는 “산지가격이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수매가격 결정을 연기하거나 ‘선금지급 사후차액 정산제’를 도입할 것. 시가가 아닌 비정상적인 가격으로 결정하여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의결에 참여한 임원진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음. 비정상적 가격결정 조합에 대해서는 농협중앙회가 지원할 때 감안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농민을 위한다는 농협이 어떻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농민이 죽으면 농협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유. 농민들 편을 들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쌀값을 떨어뜨리려고 아예 작정을 했잖아유. 생각 같아서는 농협중앙회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유.”

    농협에 대한 한바탕의 성토가 끝난 뒤 이종현 농민회장이 정부의 농업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쌀이 무너지면 농촌 자체가 사라지는 거유. 쌀값이 떨어지니까 논값도 똥값이 되고 있슈. 결국 농민은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유. 그렇게 개방과 자유화가 좋으면 논도 농업진흥지역(과거의 절대농지, 농지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한 제도)에서 풀어달라 이 말이유. 우리도 논바닥에 골프장 만들고 공장 지어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어유.”

    김충완 한농연 회장이 이회장의 말을 받았다.

    “쌀값이 16만8000원 할 때도 자살하는 농민들이 나왔슈. 지금 15만2000원 얘기가 나오니까 다들 제 정신이 아니유.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죽는 거는 마찬가지잖아유. 이런 정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어유.”

    농림부 집계로는 올해 쌀 수확량이 지난해에 비해 지역별로 3∼5%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당진군은 곡창지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난해보다 작황이 떨어졌다. 태풍도 없었고, 일조량도 많았는데 당진지역이 유독 수확량이 처지는 것은 벼의 생육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시점에 비가 내리지 않은 탓이다. 이런 까닭에 당진군 농민들의 위기의식은 다른 지역보다 심한 형편이다.

    차기청 한농연 경종분과위원장은 “결국 정부가 잡아주지 않으면 농민들은 쓰러질 수밖에 없어유. 농민들은 빚으로 농사를 짓잖아유. 농토의 70%는 이미 담보로 넘어가 있어유. 연말까지 못 갚으면 신용불량자가 돼버리니까 빨리 팔아서 빚부터 갚아아 하는 거지유. 밑지는 줄 알면서 팔아치우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기막힌 일이에유”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토론은 대안 쪽으로 넘어갔다. 2004년 WTO(세계무역기구) 재협상을 앞두고 쌀시장 추가개방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내 쌀값이 국제시가보다 월등하게 비싼 상황에서 계속해서 추곡수매가를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정부는 WTO 협정에 따라 해마다 추곡수매가 보조금을 평균 750억원씩 줄여나가야 한다. 결국 수매량을 줄이든 수매가를 낮추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종현 회장은 올해 정부가 처음으로 시행한 ‘논농업직불제’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논농업직불제’는 김성훈 농림부장관 시절 경제부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입한 제도로 1ha(3000평) 이상 논농사를 짓는 농가에 한해 1ha당 25만원을 지급하는 것이다. 정부는 ‘논농업직불제’가 쌀값을 2.5% 정도 보전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농민단체에서는 “금액을 대폭 올리지 않을 경우 유명무실하다”고 반박한다. 이회장 역시 논농업직불제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1ha당 50만원 이상은 돼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당진지역에서 미질이 가장 우수한 쌀은 합덕읍과 우강면에서 생산된다. 기자가 합덕RPC를 찾았을 때는 수매가 한창이었다. 예전 같으면 쌀 가마니를 쌓아놓고 막걸리잔을 주고받으며 돈을 세는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이젠 입금과 출금이 모두 전산으로 이루어진다. 농민들은 전표를 받아들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고 있었다. 하루에 400t을 도정하는 합덕RPC에는 물량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쌀값 폭락을 우려하는 농민들이 앞을 다투어 수매에 참여하고 있었다.

    합덕 RPC 방선영 소장은 “소화하기 힘들 만큼의 물량이 쏟아지고 있다. 일단 5만2000원(조곡 40kg)에 수매를 시작했는데, 판로가 막혀 걱정이다. 오늘도 세 군데서 거래를 끊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팔려는 물량은 많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단순한 경제논리로 봐도 쌀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10월6일 현재 당진 지역의 쌀값은 1년 전에 비해 1만2000∼1만5000원 낮은 시세에 거래되고 있었다.

    김성환씨(48)는 당진군 쌀전업농연합회장이다. 그는 영산강 간척지와 충남 서산에서 농사를 짓다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 김씨의 벼농사 규모는 임대농지를 포함해 3만5000평에 달한다. 그는 충청도 농민들이 9월17일 대전역에서 집회를 열고 쌀가마니를 불태우던 날 삭발대열에 동참했다. 지금껏 농사를 지으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머리를 깎았는데, 소값 파동 이후 이번이 두번째라고 한다.

    “저는 한국의 농업정책을 믿지 않아유. 지난 30년간 농사를 지어보니까 정부가 하지 말라는 대로 하면 돈을 벌겠더라구유. 주변을 살펴보면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한 사람은 다 망했슈. 저도 농림부에 근무하는 친구 얘기 듣고 소를 팔았다가 수년간 모은 돈을 몽땅 날린 적이 있어유.”

    김씨는 앞으로 쌀값이 떨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기로 했다. 소비자를 상대로 직접 영업을 뛰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씨는 “쌀이 아무리 비싸도 1가마(80kg 알곡)에 20만원이잖아유. 1년에 5가마면 1가구가 먹고 살아유. 좋은 쌀이라면 1년에 100만원 정도는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해유”라고 말했다.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는 농사일이 싫어서 공고에 진학했다가 중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옛날 농민들이 집안에서 가장 머리가 나쁜 자식에게 농사를 맡기는 바람에 농촌이 낙후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은 가장 똑똑한 자식에게 농사를 물려주고 싶다고. 하지만 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줄지는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농민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었겠슈? 불가능한 얘기잖아유. 그러면 국민들도 잔칫날 국수 대신 밥을 먹어야지유. 풍요로운 가을에 막걸리 한잔이라도 웃으면서 마셔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웃음을 볼 수가 없어유. 아무나 붙잡고 시비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유. 나야 그런대로 버틴다고 하지만, 일흔살이 넘은 노인들은 정말 인생이 허무할 거예유. 정부가 그런 분들을 생각해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야 해유. 그냥 밀어붙이다가는 정말 난리가 날 거예유.”

    전라북도는 대한민국 최대의 곡창지대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끼고 김제와 만경지역에 펼쳐져 있는 호남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징게 멩게 너른들(‘김제 만경 넓은 들’의 전북 사투리)’이다. 지난해 김제지역에서 생산된 쌀은 무려 12만6794톤에 이른다.

    김제지역에서는 9월말부터 농민들이 농협을 점거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는데, 10월6일 오후 수매가격이 최종 타결됐다. 7개 RPC가 정부수매가 2등 수준인 5만7760원(40kg)에 산물벼를 사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농협RPC가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다.

    농협과 농민의 충돌

    싸움은 9월24일 전라북도에서 RPC를 운영하는 조합장들이 모여 이른바 ‘수탁판매제’ 도입을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수탁판매제는 RPC가 정부수매가의 80∼90%(40kg 기준, 4만8360원∼5만4180원)로 산물벼를 사들여 선도금을 주고 이듬해 농민이 원하는 시기에 쌀을 팔아 추가로 정산한다는 내용이다.

    농민의 처지에서 이것은 매우 우려가 되는 제도였다. 무엇보다 RPC가 싼 값에 쌀을 사들일 경우 그 자체가 쌀값 하락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반적으로 정미소나 양곡매입상들은 농협의 수매가격에 맞추어 쌀을 매입하기 때문에 ‘수탁수매제’를 채택하면, 쌀값 하락이 공식화된다는 것이 농민들의 지적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의식한 전북지역 RPC들이 수매가를 결정하지 못하는 사이 김제지역이 먼저 수매가를 공개했다. 40kg 조곡을 4만3640원에서 5만원에 사들이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농민들은 지역별로 규탄대회를 열고 조합을 점거하는 투쟁에 나섰다.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던 곳은 공덕면. 이곳은 김제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매가를 책정해 더욱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추석연휴 동안 계속 천막농성을 벌이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협 사무실에 돼지와 닭을 들여보내고 수백개의 계란을 던지는 시위까지 벌였다. 이 때문에 공덕면 농협은 사흘이나 정상업무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욕을 치렀다.

    기자는 10월7일 공덕면 농성현장을 찾았는데, 쓰레기로 뒤덮인 사무실에서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일요일에 출근해 청소를 감독하고 있던 최양희 상임이사는 “답답한 일이다. 농협이 농민의 힘에 밀려 타협하고 말았다. 힘들어도 끝까지 버텼어야 농협이 살 수 있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농협이 망하게 생겼다. 시장의 현실을 무시한 농민들의 밀어붙이기에 화가 치민다”며 정부와 농민을 싸잡아 비판했다.

    조경희(34)씨는 김제농민회 정책실장이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시절 전라북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조실장은 정부와 언론이 의도적으로 쌀값 하락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실장은 “산지가격은 언론보도와 루머에 많이 좌우된다. 자꾸 신문에 쌀값이 떨어질 거라는 기사가 실리니까 농민들은 ‘홍수출하’를 하고 그것이 쌀값의 추가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제지역 농민들은 올해 모내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쌀값이 더 떨어질까봐 손해를 무릅쓰고 무작정 벼를 내다팔고 있다는 것이다.

    조실장은 RPC가 추산한 예상적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해엔 태풍과 병충해 등의 영향으로 도정율이 낮았지만, 올해는 작황이 좋기 때문에 RPC가 부가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산물벼 매입자금의 이율도 지난해 5%에서 3%로 낮아졌기 때문에 금융부담이 줄었다는 것이다. 조실장은 “사정이 작년보다 좋아졌는데도 RPC가 쌀값을 계속 낮추려 하는 것은 그 동안의 손실을 농민의 희생으로 만회하려는 음모”라고 비판했다.

    ‘경기미’를 둘러싼 갈등

    쌀은 전국 어디에서나 재배하는 농작물이다. 그래서 쌀값이 움직이면 농민 전체가 술렁거린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쌀값에 반응하는 정도는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한 예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기미’를 바라보는 전라도 농민들의 피해의식을 들 수 있다. 전라도 농민들은 ‘경기미’ 얘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는다. 경기미가 호남미보다 비싸게 팔릴 뿐 아니라 전라도의 쌀이 쥐도 새도 모르게 ‘경기미’로 뒤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민들은 ‘경기미’인 줄 알고 사먹지만, 실제로는 ‘경기미’가 아니라 전라도 쌀이지라. 호남 농민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쌀을 경기도로 몰래 팔아먹지 말아야 한당께.”

    “경기도 사람들이 호남평야의 자랑인 ‘일미벼’와 ‘남평벼’를 실어가니까, 전라도엔 쭉정이만 남지라. 그래서 전라도 쌀이 나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랑께.”

    ‘경기미’는 본래 경기도 이천시와 여주군에서 생산되는 쌀을 말한다. 하지만 쌀시장에서는 경기도 지역의 추청벼(속칭 아끼바리)를 통틀어 ‘경기미’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경기미는 임금에게 진상했고, 밥맛이 좋아 ‘상품(上品)’ 취급을 받아왔다.

    문제는 ‘경기미’의 생산량이다. 이천과 여주지역의 수확량만 따지면 서울시민이 2개월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기미는 4계절 꾸준히 공급된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쌀이 ‘경기미’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단서일 것이다.

    10월7일 오후. 추수가 한창인 김제시 봉남면을 찾았다. 농민들의 시위로 중앙 유리창이 파손된 봉남농협 입구에는 각종 지역단체에서 내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정부는 현실을 무시한 쌀산업 발전 종합대책을 즉각 철회하라”

    “쌀농사 포기하면 우리 먹거리 식민지 된다”

    “우리 농민 다 죽는다. 농림부장관 수입하라”

    봉남농협의 한 직원은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바람에 농협이 농민들과 충돌하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내년까지 쌀값을 13만5000원까지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수매가를 올릴 때는 정부가 생색을 내더니, 이제 값을 내려야 하니까 농협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봉남면 들녁에는 곳곳에서 콤바인 엔진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새참’을 준비하지 못해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시켰다는 장사홍씨(68)도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부지런히 나락을 자루에 옮겨담았다. 24마지기(4800평) 벼농사를 짓는 장씨의 올해 예상수입은 800만원. 생활비를 빼면 아들의 학비를 보태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벌이는 틀렸고, 내가 죽을 때까지 마음 편히 농사지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라. 요즘엔 그것마저 못할 것 같아 두려워라. 조상 대대로 땅 파먹고 살아왔는데, 내 대에서 그치면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만나겠어라. 그게 제일 답답하지라.”

    김길성씨(61)는 쌀전업농 전라북도연합회장으로 김제시 금구면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경지면적 6만6000평, 예상 수확량 1700가마에 이르는 대규모 기업농이다. 마당에는 이양기 트랙터 콤바인 경운기 건조기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김씨는 UR(우루과이라운드)협정 체결 이후 농어촌진흥공사로부터 평당 1만원에 땅을 대거 매입했는데, 기계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가족 4사람이면 일손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김씨는 1999년 해마다 땅을 교대로 놀리는 ‘유휴지 경작방식’을 도입해 전국농어촌진흥대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 쌀이 비싼 거는 사실인께 인차 미질 중심으로 가야겠지라. 농민들도 정신 바짝 차리고 외국쌀과 맞설 준비를 해야겠제. 나는 올해 논바닥에 농약과 비료를 하나도 안 뿌렸어라. 서울 사람들은 아무리 비싸도 무공해라면 사먹는다니까, 직거래로 팔면 걱정없어라.”

    김씨는 농민들이 정부와 농협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도 반대했다. 어떤 경우든 폭력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젊은 친구가 찾아와서 ‘회장님은 농사가 많으니까 2필지(1200평)만 트랙터로 갈아엎으세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못난 놈. 너 같은 놈은 농사를 지을 자격이 없다’고 야단쳐서 돌려보냈어라. 정부가 농민을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아까운 쌀을 갈아엎는 놈들이 어디 있어라. 데모도 점잖게 해야지 고속도로 막고 쌀가마니를 태우면 어쩌자는 거야? 정부도 그런 일에는 강력하게 맞서야 된당께.”

    전라남도 나주시는 인접한 해남군 간척지가 개발되기 전까지 남도땅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나주지역의 쌀값은 전남지역의 표준이 된다는 점에서 해마다 관심을 모으곤 했다.

    10월8일 오전 9시. 전라남도 나주농민회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11시부터 ‘특별한’ 기자회견이 열리기 때문이다. 나주지역에서는 RPC 수매가 결정을 앞두고 농민회장이 직접 조합장을 찾아다니며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 4개 농협RPC와 농민회가 시가수매를 거부하기로 최종 합의한 것이다. 박원기 나주농민회장과 농협 조합장이 합의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농협RPC에서 잠정적으로 결정했던 40kg당 5만원을 철회하고, 추후 정부의 특단 대책이 없는 한 시가수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며, 이러한 내용을 농민회와 함께 조합원들에게 선전, 설득하기로 한다.”

    농협RPC가 농민회의 수매거부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한마디로 고육지책이다. 정부의 지침대로 시가수매를 하면 농민들의 집단반발이 확실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엔 적자와 농협중앙회의 문책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공을 정부로 넘긴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RPC를 책임지고 있는 조합장들이 정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나주농민회 구정철 사무국장은 10월 현재 990만섬에 달하는 쌀 재고량이 결코 많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사무국장은 “990만섬 가운데 172만6000섬은 MMA물량(UR협정에 따라 매년 외국에서 수입하는 쌀)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순수 재고로 보기 힘들다. 또 앞으로 북한에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물량이 200만섬 이상이다. 그걸 빼면 600여 만섬인데, FAO (식량농업기구)는 한국의 적정 재고로 600만섬을 권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전 11시30분. 나주시 다시농협 2층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수매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명의 농민들이 조합으로 몰려왔다. 조합장과 농민회장이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문을 검토하는 사이 나이가 지긋한 두 농민의 넋두리가 들려왔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가 정치를 못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가을에 땅을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땅을 팔아도 빚을 다 못 갚아부러. 농민은 다 죽게 돼부렀어.”

    “10년 전에 공무원 때려치울 때 우리 부부의 월급을 따져보니까 60마지기 농사면 타산이 맞겠더라고. 그런데 이젠 100마지기를 지어도 대학생 한 명 가르치기가 힘들어. 죽을둥 말둥 뼈빠지게 일해도 빚만 늘어부러.”

    농민표 줄었다고 무시하나

    기자회견은 농민회와 조합의 연대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구정철 사무국장은 “조합장님들을 농민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앞으로 농민회, 농협, 농민단체가 힘을 모아 대정부 투쟁을 벌여나가야 쌀을 지켜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재명 동강조합장도 “우리는 농협중앙회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다. 농민들에게 시가대로 쌀을 내놓으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수매를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8일 오후 나주시 동강면 버스정류소 옆 가건물 안에서는 이동화(36) 쌀전업농 전남도연합회 사무국장이 후배 김영남(36·나주농민회 회원)씨와 걱정스럽게 쌀값 하락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사무국장은 “1년 사이 산물벼 가격이 2만6000원이나 떨어졌다”며 “전남지역 농민들의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올 농사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돼부렀습니다. 나락을 만져보면 남 주기가 아까울 정도인데 본전도 안된다니까 속이 터지는 거라. 더러워서 다 갈아엎고 싶다는 농민들이 쌔여부렀오. 하지만 빚은 갚아야 하니까 어쩔 수 있습니까? 저도 사실 개인 도정업자에게 일부를 싸게 넘겨부렀오. 수매거부 운동을 벌이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스럽지만….”

    전라남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이런 까닭에 김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활동하던 시절, 전남지역의 농민들은 대정부 투쟁에서 야당과 보조를 잘 맞추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한마디로 전남지역이 ‘친여성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영남씨는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건 사실이지만, 잊어버린지 오래 돼부렀오. 그 자리에 올라가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동화씨와 김영남씨의 대화는 어느덧 농업정책의 문제점으로 넘어갔다. 먼저 이씨가 농림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정부는 자꾸 애매하게 말을 흘리지 말고 확실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증산정책을 포기하고 미질 중심으로 갈 거면 제대로 평가해서 좋은 쌀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죠. 지금처럼 아무 쌀이나 마구잡이로 사들여서 뒤섞어 팔면 죽도 밥도 안돼요. RPC도 그래요. 어차피 RPC가 쌀값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가 계속 지원을 해줘야지, 알아서 먹고 살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부가 최소가격만 정해주면, 쌀값은 누가 뭐라 해도 떨어지지 않을텐데, 그걸 못하겠다고 이 난리를 꾸미고 있으니….”

    반면 김씨는 쌀값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경제학적 요인을 거론했다.

    “농촌 인구가 계속 줄어드니까 정치적 비중도 떨어지는 거예요. 만일 농민표가 대통령을 결정한다면 이렇게 막 대하진 않을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덴마크는 50년 거치 100년 상환 같은 영농자금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2년 거치 3년 상환이에요. 그러니 빚이 또 빚을 만드는 거죠. 중국에 반도체 팔아먹으려고 마늘농사를 다 망쳤으면, 반도체로 돈 번 기업이 마늘농가에 보상금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쏟아부은 돈의 10%만 투자해도 농민이 지금처럼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주시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동강RPC는 조용했다. 조합과 농민회가 수매거부를 선언한 탓이다. 김재명 동강농협 조합장은 “예전 같으면 지금쯤 우리 면에서 20대 이상의 콤바인이 작업할텐데, 아침에 확인해 보니까 4대만 탈곡을 하더라고요. 저장할 곳이 없어 누렇게 익은 벼들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는 농민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밥값이 껌값이라예”

    경상남도는 농업보다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남동임해공업지역은 1960∼70년대 경제개발의 중추를 맡았으며, 마산·창원공단은 우리나라 최대의 제조업 생산기지다. 경남지역의 쌀농사는 주로 서부쪽에 집중돼 있다.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이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채소에 주력하는 반면, 서쪽은 벼농사가 많다.

    경남지역의 농민조직은 진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농민단체들이 도청소재지에 도지역 본부를 두는 것과 달리 전농 경남지부는 진주농민회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 9월15일 창원에서 열린 영남농민대회엔 모두 33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500여 명이 진주지역 농민이었다. 쌀문제가 진주지역에서 얼마나 민감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10월8일 밤. 진주시 금산면 진주농민회 사무실엔 서너 명의 상근자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화제는 정부의 농업정책이었다. 경상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한 젊은이는 쌀문제를 계급갈등 차원에서 파악했다. 그는 “정부가 반민중적 행태를 보이는데 보수 언론은 기득권층과 결합해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 결국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9일 아침. 진주지역의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이런 날은 추수가 어렵다. 진주시 지수면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정관화씨(57)도 일손을 놓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정씨는 논농사 45마지기(9000평, 본인 소유 1400평)를 짓고 있는데,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정씨처럼 개인 농토가 영세한 농민이 많다. 그는 쌀전업농 진주시연합회장도 맡고 있다.

    김씨는 9월25일 진주시에서 열렸던 농림부의 ‘쌀문제 설명회’부터 떠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날 농림부에서 사무관이 내려와 쌀재고 증가와 수입개방의 불가피성 등을 얘기했는데, 교육내용이 농민들의 정서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똥인지 오줌인지도 모르고 떠들더라고예. 화가 난 농민들이 대책을 물으니까 아무 소리도 못하는 거라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폼을 잡는지…. 아무리 농민이 무식하다지만 농림부가 이렇게 농민을 무시해서야 되겠능교?”

    정씨의 불만은 끝없이 터져나왔다.

    “우리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쌀 한 말을 지고 20리를 걸어가서 시장에 나가면, 과자 사고 신발까지 사들고 왔어예. 그런데 지금은 택도 없어예. 밥 한 공기가 껌 값만도 못한 거라예. 일요일에 예식장 한번 나가려면 쌀 한 가마니 팔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니까예.”

    정씨가 열변을 토하는 사이 이웃에 사는 허성태(53)씨가 찾아왔다. 그는 진주시 지수면 쌀전업농회장이다. 허씨도 쌀 얘기가 나오자 답답한 심정부터 풀어냈다.

    “문제는 지금부터라예. 우리야 자식들 대학까지 보냈으니까 한시름 놓았지만, 지금 초등학생 자녀를 둔 농민들이 큰 일이지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예. 돈도 돈이지만, 희망이 없는데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능교.”

    서부경남은 정치적으로 김영삼 전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김 전대통령의 고향이 거제도인데다 역대 선거에서 YS의 정치적 입김이 가장 잘 통했던 곳이 서부경남이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에서는 김 전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UR협정을 체결하고 쌀시장을 개방했으며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이 모두 김영삼 정부 때였지만, 서부경남 지역의 농민들 중에는 문민정부의 농정에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씨도 그런 경우다.

    “YS 때는 쌀전업농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예. 농협 이자가 3%였고, 농기계도 반값에 살 수 있었으니까예.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이자는 4.5%로 올랐고 농기계 보조금도 끊겼어예. 농민들이 살기가 더 어려워진 거라예.”

    정씨는 쌀이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얼마전 경남지역에서 문제가 됐던 이른바 ‘메뚜기쌀 사건’을 거론했다. 이것은 저농약쌀로 고가에 팔리던 경남 산청의 ‘메뚜기쌀’에 전라남도 담양쌀이 뒤섞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당 조합장과 이사진이 대거 교체된 사건을 말한다. 이를테면 영남판 ‘경기미’ 파동인 셈이다. 문제는 ‘메뚜기쌀’의 경우처럼 호남쌀이 덤핑으로 넘어오면서 해마다 영남지역의 쌀값이 하락하고 있는 점이다. 정씨는 “같은 농민이라지만, 쌀값이 떨어지면 화가 치미는 게 사실이라예”라고 말했다.

    이재식씨는 진주농민회 부회장이며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이장을 맡고 있다. 이씨는 경남지역 농협 RPC가 수매가를 담합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씨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수매가를 결정한 12개 RPC 가운데 10곳이 5만1000원, 2곳이 5만원으로 나와 있었다. 사전에 조율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게 이씨의 지적이다.

    “더 심각한 것은 5만원도 못 받는 농민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예. 좋은 나락인데도 2등을 때려서 4만9000원을 주고 있어예. 5만4000원이 손익분기점인데 4만9000원이면 정말 한푼도 못 건지고 빚만 늘어나는 거라예. 이러니 농민들 눈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는 거지예.”

    경남지역 농민회는 재고쌀의 대북지원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농민단체가 자체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농민회 주도로 서명운동을 벌였고, 1가구 1가마 보내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부 면에서는 벌써 60가마 넘게 걷힌 곳도 있다. 이씨는 “북한돕기는 여야를 떠나 풀어야 할 문제라고 봐예. 한나라당도 이 문제를 갖고 정부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돼예” 하고 말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화가 치밀어 약주를 한잔 걸쳤다는 김학천씨(64)는 이씨의 집으로 들어서며 “언제부터 정부와 싸움을 시작할 거냐?”고 묻는다. 김씨는 10마지기 농사를 짓는다. 전형적인 서부경남 지방의 소농이다.

    “장관이든 누구든 눈앞에 보이면 잡아죽이고 싶은 심정이라예. 정치인들은 제발 싸움질 좀 그만하고 죽어가는 농민들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어예. 텔레비전에 나와서는 농민을 위한다면서, 이렇게 골병들게 만들면 되겠능교.”

    이재식씨도 김씨의 말에 장단을 맞춘다. 역시 김대중 정부를 바라보는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YS는 그래도 농민들 얘기를 들으려고 애는 썼지예. 제대로는 못 했어도….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일방적이라예. 농민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어예.”

    이씨는 올해 쌀값 하락문제를 부실농정 바로잡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앞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쌀값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면 빚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대책을 내놓지 않을 경우 산물벼와 농기계로 농가부채를 상환하겠다는 주장이다. 이씨는 “아마 올겨울에는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농민봉기가 일어날 거라예”라고 말했다. 그는 12월로 잡혀 있는 전국농민대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0월9일 오후. 서부경남 지역에는 앞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이따금씩 울려대던 콤바인 엔진 소리도 모두 끊기고, 아스팔트 위에서 벼를 말리던 농민들도 서둘러 비닐을 덮고 있었다. 나흘간의 곡창지대 민심 취재를 마치고 남해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진입할 무렵 한 농민단체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경기도 안성시에서 수매를 거부당한 농민이 맹독성 제초제인 그라먹손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였다. 그의 나이 예순아홉살. 평생 농사일에만 매달려온 순박한 농부였다. ‘화려한’ 시장논리와 ‘조급한’ 민족논리, 그 어느 쪽도, 쌀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쌀 때문에 죽어간 늙은 농부의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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