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면서도 유엔을 통해 구호식량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난민들을 위한 인도적 차원이고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강대국의 선의이자 전쟁을 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화정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정말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적대시한다면 식량을 비롯한 모든 물품의 반입금지 조치를 취할 것이다.
쌀값 지지정책은 쌀농가의 소득보전을 위한 보조금 정책이다. 그래서 쌀이라는 상품만은 특별히 국회에서 수매가격을 결정하는데, 아마도 상품가격을 국회에서 결정하는 예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가 쌀 가격을 지지한다는 말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으로는 쌀을 파는 농가가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너무 적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가격보다 높게 가격을 책정하고 유통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쌀농가라는 특정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에 정부가 개입해, 쌀 가격을 높게 고정시킴으로써 소득재분배를 하는 행위다.
그러나 정부가 지지해주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의 쌀 수요량은(비록 소량일지라도) 줄어든다. 반면에 쌀 농가의 공급량은 늘어나므로 초과공급량만큼의 쌀을 정부나 정부가 지원하는 민간(예를 들어 종합미곡처리장)이 수매해야 한다. 이렇게 사들인 쌀을 수매하고 보관하기 위해 정부는 따로 예산을 편성한다.
현재 한국의 쌀값은 국제가격보다 3배 정도 높다. 쌀농가는 쌀 생산에 대한 유인(誘因)을 제공받아 생산을 늘리고 있는데, 국내에서 쌀 소비는 늘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남는 쌀을 수출하려고 하니 국제 가격보다 높아 수출할 방법도 없다. 이러하니 더욱 재고가 쌓이게 되고 정부는 더 많은 보관 비용을 지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쌀 가격지지 정책으로 이득을 보는 집단은 쌀 농가다. 반면 손해를 보는 집단은 쌀 소비 가계와 일반 조세 납부자다.
이런 구조에서 소득은 일반 쌀 소비자와 조세 납부자로부터 쌀 농가로 재분배된다. 결국 쌀 가격지지 정책이 오늘의 쌀문제를 일으킨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가격지지 정책의 문제점
쌀문제 해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격지지 정책의 실질적인 효과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쌀농가가 가격지지 정책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가소비 이외에 정부 수매용으로 내놓을 수 있는 쌀의 양이 상당한 정도가 되어야 한다.
는 경작 면적별 농가 분포를 정리한 것인데, 이 표를 살펴보면 한국의 쌀 농가는 대부분 경지면적이 작은 영세농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0.5ha(1ha는 약 3000평) 미만을 경작하고 있는 농가가 1990년과 1999년에 각각 40.4%와 46%였고, 1ha 미만을 경작하는 농가가 각각 74.3%와 75.7%에 달한다.
이 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0.3ha 미만을 경작하는 쌀농가 비율은 연차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나, 0.7∼1.5 ha를 경작하는 농가 비율은 감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0 ha 이상을 경작하는 농가 비율은 약간 증가하고 있으며, 기타 경작 면적을 가진 농가의 비율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소규모 경작면적을 가진 농가 비율이 증가하고, 중규모 경작면적을 가진 농가 비율은 감소하고 있으며 대규모 경작면적을 가진 농가 비율은 약간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쌀 생산 농가수는 연차적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쌀 가격지지 정책의 실질적 효과를 계산해 보기로 하자. 1ha에서 얻어지는 쌀 소출량은 약 5t인데, 이를 80kg 쌀 한 가마로 계산하면 62.5가마다(추곡으로 수매하는 벼 110kg은 쌀 80kg에 해당). 2000년의 추곡 수매가는 한 가마 당 약 16만원이었다. 논 0.5ha에서 쌀 31가마를 얻을 수 있는데, 이것으로 인한 총수입 금액은 496만원에 불과하다. 1ha를 경작하는 농가는 약 1000만원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쌀농사를 짓는 데 들어간 자기 인건비와 비료값, 품삯 등을 제하면 순 이윤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영세 쌀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이 0.5ha라고 하면, 이 농가에서 나오는 쌀은 2500kg(약 31.3가마)이다. 여기에서 4인 가족 농가가 연간 소비하는 쌀 560kg(139.9kg × 4인 = 559.6kg)을 빼고 나면 1940kg이 남는다. 이는 약 24가마에 해당한다.
국내 쌀값이 국제 쌀값의 3배인 것은 쌀 한 가마의 가격 16만원 중에서 3분의 2인 10만원이 보조금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따지면 0.5ha의 논을 가진 농가에 돌아가는 총 보조금은 240만원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쌀을 생산하는 농가의 75%가 0.5ha의 아주 작은 경작면적을 가졌다. 이렇게 작은 경작면적을 가진 농가를 가격지지 정책을 펼쳐가며 계속 보호해야 하는가? 정부의 가격지지 정책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많다.
가난 대물림과 부채탕감
정부가 보조금이라는 ‘유인’을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영세 쌀농가로 하여금 쌀을 계속 생산하게 한 것은, 어찌 보면 쌀은 주곡이기 때문에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영세 쌀농가에게 ‘가난을 대물림’해준 측면이 없지 않다.
쌀이 특수상품이 아닌 일반 상품으로 취급되었더라면 직업전환이 가능한 나이의 농민이 채산성이 없는 쌀농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그만큼 농촌의 구조조정은 빨라졌을 것이고, 국가 전체의 자원배분도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을 경우 다른 직업으로의 전환이 용이하지 않은 고령 농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가격지지 정책이 결국은 소규모 영세 농민들의 직업전환 의지를 무디게 한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가계유지도 어려운 영세농민들은 소득증대를 위한 다른 영농사업도 제대로 펼치지 못해 결국 농가부채라는 또다른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농협을 통해 만기가 돌아오면 정책자금과 영농자금을 저리로 다시 융자해주고, 이때 발생하는 금리 차이를 정부가 보조하는 방식으로 부채를 탕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부채탕감은 열심히 일하여 이미 부채를 상환한 농가의 소득을 그렇지 않은 농가에 재분배해주는 것이며, 일반 납세자의 돈을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결국 농업정책이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지 않는 한, 쌀문제를 비롯한 농가 부채탕감 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다.
최근 쌀문제, 특히 쌀 재고량 증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정부 정책은, 농정 당국자들도 인정하다시피 그야말로 고육책이다. 정부는 정부 수매 예정량의 일부를 농협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종합미곡처리장이 인수하는 계획을 내놓고 있으나,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또 가격지지 정책은 쌀농가에 대한 보조금 정책인데, 2004년부터 쌀시장이 추가적으로 개방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일본 정부가 종래의 농업보조금 정책을 폐지하고 시장원리에 입각한 농정을 펼치겠다고 천명한 것은, 농업도 변화하는 국내외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쌀문제에 대해 한국이 가야 할 길도 일본과 크게 다를 수 없다. 국내외 환경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비교우위에 따른 국제분업에 입각해 비교우위 산업에 집중하고, 비교열위 산업 제품은 수입해서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경쟁력은 문을 열어야 올라간다
그러나 자유무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농산물 시장개방은 적지않은 마찰을 빚고 있다. 중상주의 시대처럼 자유무역은 마치 국부를 유출하는 원흉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간단한 원리지만 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 향후 쌀을 비롯한 농산물 교역에 보탬이 될 것이다.
국내 경제주체 간의 교환과 마찬가지로 국가간에도 다른 국가보다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한 물건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교역에 참가한 모든 나라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즉, 비교우위에 입각한 국가간 분업으로 양국 모두 이득을 얻어 더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상대국이 보호무역을 하더라도 자국이 자유무역을 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 중국과의 마늘분쟁에서 보았던 것처럼, 국가 전체적으로는 자유무역이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만, 내부적으로는 소득재분배 문제를 야기한다. 즉 쌀을 수입하면 한국시장에서 쌀값이 떨어져 쌀 소비자는 이득을 보지만 쌀 생산자는 손해를 본다.
반대로 쌀 수출국에서는 수출로 인해 쌀값이 올라갈 것이므로 소비자는 손해를 보고 생산자는 이득을 보는 반대현상이 발생한다.
자유무역이 국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의 하나임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자유무역이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내부적인 소득재분배 때문이다. 그러나 쌀을 비롯해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정부가 펼치는 보조금 정책과 수입금지·관세 장벽·수입할당제 등은 자유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만 감소시킬 뿐, 농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비교우위나 비교열위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비교열위도 비교우위가 될 수 있다. 이미 한국은 공업분야에서 비교열위에 있던 것이 비교우위로 돌아선 경우를 수없이 경험하였다. 국가간에 비교우위가 이동하는 것은 경제발전 단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를 들면, 1970~1980년대에 한국은 미국의 저소득층이 사용하는 상품을 주로 수출했지만, 지금은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비교열위의 작물은 버리고 비교우위의 작물을 개발하고 생산해야 한다.
목화와 밀이 경쟁력을 상실해 국내 생산이 중단되었을 때, 농촌경제와 관련 산업에 미칠 파장이 크게 우려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농촌경제가 크게 위축되지도 않았고, 이 두 작물이 원료가 되는 상품 소비에 별다른 애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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