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억압의 시대, 가문 가슴 적셔준 고은의 시

  • 김용택 (시인)

    입력2005-03-21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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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高銀)의 시 ‘전원시편’ 연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 원시조선과 부여 이래몇천년 세월 살고 죽어이 땅의 선은 오로지 농사꾼이었습니다온갖 악 넘나들었지만이슬 밟고별 밟고한 톨 쌀 내 새끼로 심어서조상으로 거두는 농사꾼이었습니다오 한 겨를 거짓 없음이여몇천년 뒤 오늘일지라도이 땅에서 끝까지내 나라는 농사꾼입니다들 가득히 가을이건대 울음이건대

    -고은 ‘머리노래’ 전문

    우리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역사를 이끌어왔다. 우리가 살아온 저 삶의 굽이굽이는 그 얼마나 가파르고 숨찼던가. 그리고 커다란 역사의 격랑 속에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라는 커다란 물결에 휩쓸려 억울하게 희생되었던가.

    일제 36년이 우리에게 준 엄청난 무게의 짐과, 분단과 전쟁이 준 이루 헤아리기 힘든 고통은 얼마이며, 군부독재가 사회 구석구석에 끼친 회복하기 힘든 이그러지고 삐뚤어진 문화현상들은 또 그 얼마나 우리들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를 동서로 갈라놓은 정치인들의 저 부끄러운 행태는 또 그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피곤에 지치게 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그런 곳에서 그런 고통과 수모를 다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우리 민족이 언제 한번 마음놓고 함께 기뻐 웃으며 손뼉을 쳤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땅을 칠 일이다. 누가 이렇게 역사를 더럽혔는가.

    그 역사의 격랑과 질곡 속에 신동아가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우리 또래의 사람치고 누렇게 색바랜 신동아 한두 권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집에도 신동아는 책꽂이 곳곳에 꽂혀 있다.

    책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나 간에 집집에 이렇게 신동아가 꽂혀 있는 것은 이 잡지가 사회의 계층을 넘어 읽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다 알다시피 신동아는 그때 그때 일어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쟁점과 문제점들을 무게있고 깊이있게 보도하고 다뤄왔다. 그 내용들이 이렇게 저렇게 우리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절실한 현실문제들이었다는 말이다.

    신동아의 문학 ‘예우’

    1984년은 어떤 해인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군부세력이 세상을 숨도 못 쉬게 옥죄고 있을 때다. 정치적 억압으로 사회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음울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시원하게 숨쉴 곳을 찾지 못했고, 문학 또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열병을 앓고 있었다.

    바로 그해, 그러니까 1984년 11월, 신동아는 ‘느닷없이’ 고은의 ‘전원시편’을 연재했다. 사람들은,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고은이 누구인가. 고은이야말로 그때 그 정권이 가장 기피하는 시인이 아니었던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그가 안성에 내려가 있을 때였던 것이다.

    놀라고, 그리고 너무도 반가워 책방으로 달려갔다. 책방까지 가는 길에 온갖 생각들을 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의 시가 우리들의 가문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줄 것인가.

    그 무렵 나는 막 문단에 발을 들여놓아서 고은 같은 유명한 시인의 시는 무조건 찾아 읽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펼쳐든 고은의 시는, 그러나 답답한 우리들의 가슴을 확 뚫어줄 만한 ‘시국해결 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다달이 1년 동안 연재되었던 그의 시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 약간은 쓸쓸하게, 조금은 애틋하게, 조금은 애절하게, 조금은 아쉽게.

    거칠고 험한, 다루기 힘든 굵직한 정치 사회 경제의 현안 문제들 속에서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문학에의 ‘예우’는 신동아를 더욱 잡지다운 잡지로 만들어왔다고 믿는다.

    적어도 신동아는 지금까지 문학작품을 이 사회의 액세서리쯤으로 생각해오지 않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 때, 그때야말로 문학의 힘을 현실감 있게 다룸으로써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 용기와 힘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세상과 함께 골병든 몸을 이끌고 안성의 가을 들판 앞에 서서 썼을 고은의 시 ‘전원시편’의 ‘머리노래’를 읽었을 때 내 가슴속에 일던 그 가을바람이 지금 내 가슴속에 새롭게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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