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신동아적(的)’ 시각으로 교육문제 풀어가기

  • 정혜신 (정신과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입력2005-03-21 1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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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은 안 보고 월간지만 보고 산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신문이나 시사잡지들을 강박적(?)으로 읽어오던 나는 작년 어느날, 내 습관에 천근만큼의 피로를 느껴 모든 신문을 당분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루라도 신문을 보지 못하면 왠지 모를 초조감이 생기곤 했으니 ‘신문중독증’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신문 없이 야만인(?) 같은 시간들을 얼마간 보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멍청이가 되지도 않았고, 사회와 유리되어 생기는 특별한 부작용도 없었다. 오히려 ‘일간지’식의 빠른 호흡에서 벗어나 ‘월간지’식의 긴 호흡을 찬찬히 경험하는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같은 사안이라도 일간지와 월간지는 그 담는 내용에 차이를 보인다. 일간지가 사건의 현상(現象)에 집중한다면 월간지는 현상보다는 본질에 무게를 둔다. 월간지가 일간지보다 긴 호흡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장점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일간지적(的)인 삶’과 ‘월간지적인 삶’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의도적 노력을 하지않는 이상 우리네 일상은 본질에 비해 현상에 기울어진다는 점에서 ‘일간지적 삶’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100년 정도의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는 교육문제는 일간지적인 삶의 호흡을 절대로 피해야 하는 분야일 것이다. 2001년 6월호 신동아에 게재된 ‘대안학교·대안교육’ 기사는 우리 교육의 미래를 실험하고 있는 대안학교를 통해서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월간지적 기사’였다.



    최근 논의가 활발한 ‘대안교육’의 개념 규정과 대표적인 대안학교들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곳에서 헌신하는 진보적인 교사와 행복한 학생들의 얘기가 마치 외국의 사례처럼 펼쳐졌다.

    물론 그 꿈같은 사례들은 고통스러운 우리의 교육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기사에 따르면 매년 실업계 고등학생 3만5000여 명, 인문계 고등학생 1만5000여 명이 학교를 떠난다고 한다. 마지못해 학교를 다니는 잠재적 탈락자까지 합친다면 10만 명의 아이들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이미 학교를 떠난 셈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30%를 넘어섰으니 ‘교실 붕괴’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최근에는 ‘교무실 붕괴’라는 말도 등장했는데, 교사 중에 교직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이다. 학교의 두 주체인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학교라는 체제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월간지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벤처’라 할 만한 대안교육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대안학교들이 허용하는 자율을 위험하게 보는 시각은 대안학교가 우리의 병든 교육시스템에 실질적인 대안이 되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더 늘이고 있다.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자율성은 실제론 서구의 일반학교 수준보다 못하다고 한다. 그런 자율성을 우리는 과격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항체는 왜 이리도 민감하게 작동하는가.

    경남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는 이념지향적 대안학교의 대표주자다. 4·19기념 교내마라톤 대회에서 학생들은 1등이 아니라 19등을 하려고 노력한다. 4·19기념이니 19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영산 성지고는 무학년 무학급제에 문화구성과, 생명사랑과, 영어사회과, 봉사활동과, 학습네트워크과 등 11개의 대학식 과(科)가 존재한다.

    마음에 요란함은 없었는가, 감사하는 생활을 했는가, 남에게 유익을 줬는가 등의 전혀 ‘생소한’ 기준에 따라 잘못한 일이 있었으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마음에 파란을 일으킨 대상이 있었다면 지금 심경은 어떠한지 등을 ‘마음일기장’에 담는 화랑고, 원경고의 풍경은 우리가 잊고 있던 ‘교육의 본질’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이런 풍경들은 기존교육의 틀에 익숙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동시에 가슴 설레는 희망을 갖게 한다. ‘제 가슴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정체를 알지 못해 떠도는’ 아이들과 ‘그 실체없는 바람의 끝자락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선생님들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삶에 대한 실감나는 자각과 통찰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안교육의 효시가 된 영국의 서머힐은 대안교육의 철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영국 교육당국과 몇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오랫동안 서머힐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부와 투쟁했고, 마침내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 대안교육적 철학을 제도권에서도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대표주자격인 ‘간디학교’도 현재의 제도권 교육을 고수하는 정부당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다. 삶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라면 누구나 지불해야 하는 일정한 수업료 같은 것일까.

    학교의 교육방식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간디학교의 한 학생은 “만족이라는 표현보다는 감사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라고 했다. 어른끼리의 관념적인 다툼을 잠시 중단하고 교육 소비자인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면에서 아이들이란 ‘월간지적 삶’에 충실한, 현상보다는 본질에 충실한 그런 시간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육문제에 있어서 어른들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동아적’인, 즉 ‘월간지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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