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인간 오사마 빈 라덴! 감춰진 진실

11월 세계 동시출간 CNN기자의 역저 ‘Holy War’(聖戰) 긴급입수 발췌

  • 이윤섭 < 전문번역가 >

    입력2005-03-21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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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사나이’ 오사마 빈 라덴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신동아’는 오는 11월, 세계 동시 출간될 CNN 기자 피터 베르겐의 평전 ‘Holy War(聖戰)’의 영문 원고를 입수했다. 명상출판사가 출간 준비중인 이 책에는 이제껏 공개되지 않은 빈 라덴의 사생활과 사상적 궤적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 책과 최근 출간된 미의회 대테러리즘 특별팀장 요제프 보단스키의 저서 ‘오사마 빈 라덴’(명상출판사)의 주요 내용을 함께 소개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조상은 대대로 예멘의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살았다. 하드라마우트는 산악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땅으로, 일년 내내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하드라마우트 주민들은 주로 무역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주해 거부를 이룬 사람도 적지 않다. 빈 라덴 가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부호임에도 생활이 검소하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는다.

    짐꾼에서 거부가 된 아버지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 무하마드 빈 라덴은 1930년경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제다 항구의 짐꾼으로 일하다 1931년 건설회사를 차렸는데 많은 하청을 따 단시일 내에 큰 성공을 거뒀다. 1950년대, 무하마드 빈 라덴은 왕궁 건설 프로젝트를 땄고 뛰어난 건축실력으로 사우디 국왕 알 사우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사우디 왕족 중 특히 알 사우드의 동생인 파이잘과 친했다. 1964년 알 사우드와 파이잘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알 사우드 국왕은 물러나고 파이잘이 국왕이 됐다. 이 과정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은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공으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됐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엄격했던 부모의 이혼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 3월10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오사마는 아랍어로 ‘젊은 사자’란 뜻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50명의 자녀를 보았는데 오사마 빈 라덴은 17번째 아들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종종 자식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혼동을 일으켰다. 시리아 사람인 오사마의 모친은 딸도 여럿 낳았으나 아들은 오사마가 유일했다.



    오사마의 모친은 나중에 무하마드 빈 라덴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아들과의 연락은 계속돼, 1990년대 초반 오사마가 수단에 머무를 때도 아들을 찾았으며, 2001년 초 손자인 오사마의 아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도 참석했다.

    빈 라덴 가문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다. 또한 이슬람 3대 성지인 예루살렘, 메카, 메디나의 이슬람 사원 재건축을 맡아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자식들을 엄격히 훈육했다. 오사마 역시 어린 시절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오사마가 10세이던 1967년, 그의 부친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유산은 주식 형태로 자손들에게 분배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보다 열살 많은 장남인 살림 빈 라덴이 가문의 사업을 꾸려갔다.

    살림은 어린 시절 영국에서 교육 받았고, 영국 귀족가문 출신인 캐롤라인 카레이(Caroline Carey)와 결혼했다. 사업관계로 미국 텍사스를 자주 방문했던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Orlando)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살림은 기타를 잘 쳤으며 자가용 비행기를 스스로 몰고 다니기 좋아하는 파일럿이었다. 그는 가문의 기업을 국제적 재벌로 키웠다. 빈 라덴 가문은 건설뿐 아니라 발전소 건설, 석유 탐사, 광업, 통신업에도 진출했다. 살림은 1998년 미국 텍사스에서 소형 비행기를 몰다 추락 사고로 죽었다. 수년 후 캐롤라인 카레이는 아랍의 관습대로 살림의 동생인 할리드와 결혼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청소년기에 방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것이다. 1975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레바논은 중동의 ‘파리(Paris)’로 불렸다. 중동 지역의 부유층은 레바논으로 자주 휴가를 갔다. 엄격한 금욕 생활을 강요받던 아랍인들이 이곳의 나이트클럽, 카지노, 술집 등 향락업소를 자주 출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레바논을 여행할 때 몇 번 향락업소에 출입했으나 호기심 차원 이상의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1971년 여름, 14세의 빈 라덴은 두 형과 함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어 연수를 받았다. 이때 가깝게 지냈던 한 스페인 여성은 빈 라덴에 대해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이 여성은 빈 라덴이 록 음악이나 패션에는 관심이 없었고 런던 풍경을 싫어했다고 전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빈 라덴은 시리아인 어머니의 인척인 아가씨와 결혼한다(빈 라덴은 이후 3명의 처를 더 얻었다). 그리고 곧 제다에 있는 명문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 입학해 1981년 경제학 및 행정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빈 라덴은 대학에 다닐 때 이슬람주의자 조직의 하나인 무슬림형제단을 알게 되고 뛰어난 이슬람 학자들인 압둘라 아잠, 무하마드 쿠트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 두 사람이 빈 라덴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압둘라 아잠은 이후, 참된 의미의 국제 지하드 네트워크를 최초로 조직하며 명성을 떨쳤다. 저명한 이슬람주의 학자인 무하마드 쿠트브는 사이드 쿠트브의 형제다. 사이드 쿠트브는 지하드 운동 핵심 교재인 ‘사인포스트(Signpost)’의 저자. 1966년 사이드가 이집트에서 처형되자 무하마드 쿠트브가 죽은 형제의 일을 떠맡은 것이다.

    1979년은 이슬람 세계에 대격변이 일어난 해다. 2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 팔레비 국왕은 해외망명을 떠나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 되었다.

    3월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체결해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경악했다. 이 평화협정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이슬람 형제인 팔레스타인을 포기한 ‘배교자’로 인식되었다.

    11월에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했다. 먼저 이란 대학생들이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난입해 미국 외교관들을 간첩 혐의로 구금했다. 11월20일에는 무장한 이슬람주의자 수백 명이 성지 메카의 이슬람사원을 점거했다. 사우디의 왕실수비대는 2주 동안 사원을 외곽 포위했을 뿐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이집트 특수부대가 와서 진압에 성공한다.

    12월 말에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 사건으로 이슬람권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이 이슬람교 국가를 무력 점령한 사실보다 이슬람교도를 더 놀라고 흥분케 할 일은 없었다.

    소련이 무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즉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분노의 함성이 일었다. 1980년 1월27일, 35개 이슬람교 국가 외무부 장관이 모여 특별회담을 가졌다. 이 모임은 ‘아프가니스탄 국민에 대한 소련의 무력 침공’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모든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조건 즉각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소련이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결코 승인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군이 침공한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80년 1월, 빈 라덴은 파키스탄으로 가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라비니와 압둘 사이아프를 만났다. 빈 라덴은 이전 성지 순례중 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우디로 돌아온 그는 가족에게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모으자고 제의했고 파키스탄에도 자주 가 모금 활동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군에 대항해 이슬람 세계가 벌인 투쟁은 1930년대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닮은 점이 많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전세계에서 몰려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싸웠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실한 무슬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군과 맞섰다. 빈 라덴은 모금 활동과 참전할 이슬람 전사 모집 운동에 열중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이슬람교 국가에는 무자헤딘 훈련캠프가 세워졌다. 미국의 CIA도 비밀리에 이슬람 전사들의 대소 항전을 도왔다.

    스타가 된 빈 라덴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과 아프간 무자헤딘의 관계는 좀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부 언론은 미국이 이들을 키웠으며 빈 라덴도 미국의 자금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금지원과 무기공급은 파키스탄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구체적인 지원은 파키스탄 소관이었다. CIA도 빈 라덴의 명성을 듣고 그에 대한 신상 파일을 작성하기는 했다. 그러나 빈 라덴과 미국과의 접촉은 없었다. 빈 라덴 자신이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사우디 정부도 그에게 대규모 지원을 했으므로 미국 자금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이미 빈 라덴은 “소련 다음에는 미국과 투쟁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빈 라덴은 직접 대소 항전에 참전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아프간에 온 전사들은 1만6000명이 넘었다. 빈 라덴은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빈 라덴의 전우인 어떤 사람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사로서의 빈 라덴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었다. 그는 항상 최선두에 서서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스스로 왕궁 같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내려와 아프가니스탄 농민,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참호를 팠다. 그것이 바로 민중과 같이 하는 ‘빈 라덴의 방식’이었다.”

    1989년 2월, 거의 10년 만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은 나지불라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카불에 세우고 돌아갔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권, 여러 이슬람 정파의 세력다툼으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환경도 급변했다. 1977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지하 울 하크 장군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전사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그는 1988년 8월 의문의 비행기 폭발사고로 죽었다. 곧이어 친미 성향의 베나지르 부토가 집권했다.

    1989년 말, 빈 라덴은 영웅이 되어 사우디로 돌아왔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을 아프간 성전의 이상적인 모델로 받들었다. 빈 라덴은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원 집회에 초대돼 연설했다. 그의 격정적 연설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는 공식적으로만 25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지하조직이 복사 배포한 테이프 수도 엄청났다.

    빈 라덴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아프간 성전은 이교도 초강대국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온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연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 가문의 사업체가 외국정부와 민간기업에게서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우디 왕가에 대한 애증

    사우디에 돌아온 빈 라덴은 자신이 주장해온 이슬람적 생활방식을 실천했다. 호화 저택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침대도 없이 마루에서 잠을 잤다. 이때 그의 집을 방문한 이집트 언론인 에삼 데라즈는 빈 라덴이 마루 귀퉁이를 사무실로 삼고 가족들 또한 마루 한켠에서 생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에삼 데라즈도 방문 기간 내내 침대가 아닌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1990년 8월2일,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하루 만에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침공으로 빈 라덴이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음이 입증됐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 대중 연설을 통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파드 국왕에게 사우디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우디 왕가는 겁에 질려 전전긍긍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군은 이라크군의 상대가 못 됐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을 비롯해 쿠웨이트 난민이 물밀듯 밀려오자 사우디는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빈 라덴은 즉시 국방부장관인 술탄 왕자를 만나 이라크의 침공에 대비한 그의 계획을 전했다. 10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계획서에서 그는 빈 라덴 가문의 건설회사 중장비를 동원해 신속히 방어 요새를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취약한 사우디군을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사우디 이슬람전사’들로 보강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노장들이었다. 빈 라덴은 이들을 쿠웨이트에 침투시켜 민중 지하드를 전개하자는 의견도 덧붙였다.

    빈 라덴은 이 같은 계획을 사우디 정보부장인 투르키 왕자에게도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아낼 수 있다면 사우디도 이라크를 격퇴할 수 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인 이라크 병사들도 지하드에는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빈 라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군 등 ‘이교도’의 군대가 사우디의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경고했다. 외국군의 사우디 주둔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우디 국민의 정서상 도저히 정서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의 침략이 우려되는 위기상황에서 빈 라덴은,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는 사우디 왕가의 매우 충성스런 신하였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파드 국왕은 결국 미군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빈 라덴을 비롯한 많은 사우디의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사우디 왕실은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결국 메카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회의에서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격퇴할 때까지만 외국군 주둔을 용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빈 라덴은 사우디에 계속 머물며 중간 노선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이라크를 비난하고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신성모독을 내세워 외국군의 사우디 영토 내 주둔을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 상품 불매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우리가 미국 상품을 사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공범자가 된다. 미국기업들은 아랍 세계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미국 정부에 세금으로 낸다. 미국 정부는 그 돈으로 이스라엘에 매년 30억달러를 원조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고 빈 라덴은 역설했다.

    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은 ‘외국 군대를 신성한 땅에 끌어들인 사우디 왕가는 성지 수호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빈 라덴은 여전히 사우디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이었다. 사우디 정부가 미군을 끌어들인 것은 공포 때문이며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물러나면 다시 이슬람의 길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이러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1991년, 이라크군이 퇴각한 후에도 미군 주둔은 계속됐다. 빈 라덴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지닌 그는 이제 사우디 왕가에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비판을 멈추라고 압력을 가했다. 처음에는 빈 라덴 가문의 기업들과 맺은 공사를 모두 파기하겠다고 협박했다.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빈 라덴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집안의 모든 사업체를 파산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신변마저 위태로워진 빈 라덴은 1991년 여름, 가족을 데리고 수단으로 망명했다. 수단은 1989년 이슬람교도인 바쉬르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같이 이슬람 성직자가 통치하는 국가를 지향했다. 수단의 종교지도자 하산 알 투라비는 ‘수단의 호메이니’였다. 때문에 전 이슬람세계에서의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정한 빈 라덴에게 수단은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다.

    수단에서 빈 라덴의 역할은 다양했다. 그는 수단의 외자 유치통이자 이슬람 전사를 키우는 무자헤딘 지도자였다. 고속도로를 닦고 농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수단 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검소했다. 그의 초청으로 수단을 방문한 빈 라덴의 친구이자 사우디 억만장자 할레드 알 파우히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집과 생활수준을 본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집에는 냉장고, 에어컨도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없었다.”

    라덴, 미국을 비웃다

    빈 라덴은 수단의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위상은 단순한 망명자가 아닌 전 이슬람권을 상대로 이슬람주의 운동을 벌이는 인물이었다. 국제적인 사업망 구축은 이를 위한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는 이슬람 세계 내 친미 정권이 아니라 미국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의 첫번째 대결은 소말리아에서 벌어졌다.

    1992년 12월, 2만8000여 명의 미군이 기아 상태의 소말리아 국민을 구호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아에 상륙했다. 소말리아는 부족간 내전으로 황폐해져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수단·에티오피아·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권에 속한다. 수단에 기반을 둔 빈 라덴의 지하드 조직 ‘알 카에다’는, 미군의 소말리아 진입을 이슬람세계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만 일대에 이어 동아프리카조차 장악하려는 속셈이라 판단한 것이다. 알 카에다의 파트와(이슬람 칙령) 위원회는 소말리아의 미군을 공격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12월 말 미군이 투숙한 예멘의 한 호텔에 폭탄 공격이 있었다. 이들 미군은 소말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미군은 미국을 적대시하는 소말리아의 여러 부족과 교전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부족 지도자인 모하메드 아이디드를 제거해야 평화가 정착되리라 보고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대가는 값비쌌다. 1993년 초, 빈 라덴의 군 조직 사령관인 아부 하프스는 소말리아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도 제공했다. 1993년 10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이틀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아이디드를 잡으려다 18명의 전사자를 냈다. 뿐만 아니라 로켓 발사기로 날아온 수류탄에 블랙호크 헬리콥터 여러 대가 격추당했다. 헬리콥터 격추는 소말리아 부족 병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일주일도 안 돼 미국 정부는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미군의 소말리아 철수에 빈 라덴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빈 라덴은 그의 부대가 참전한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98년, 파키스탄 언론인에게 그의 측근 하미드 미르를 소개하면서 “소말리아에서 내 부대를 지휘한 사령관으로 미군 헬리콥터 1대를 격추했다”고 말한 것이다. 1999년 알 자지라TV와의 인터뷰에서는 “소말리아에서의 전투를 통해 우리는 그들(미군)의 나약함을 알았다. 겨우 18명이 전사하자 캄캄한 밤에 달아났다”고도 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1995년 11월13일 리야드의 군사훈련센터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19일에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이집트대사관에 폭탄 트럭이 돌진해 19명이 죽고 6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빈 라덴의 활동으로 여긴 미국, 사우디는 이집트와 더불어 빈 라덴을 추방하라고 수단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특히 사우디는 추방 대가로 수단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의했다. 빈 라덴은 수단 정부와 협상해 1년의 준비끝에, 1996년 5월 3명의 처 등 가족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했다. 미리 아프가니스탄에 간 조직원들은 이미 이슬람전사 훈련소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빈 라덴은 발칸 이슬람 전사단과 아랍 이슬람 전사단을 조직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 철수후 각 이슬람 정파간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었다. 그 가운데 1995년, 빈 라덴과 파키스탄 정보부가 양성한 이슬람주의자 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5%를 장악하였다. 탈레반 지도부는 빈 라덴이 이슬람 전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한 때에 동고동락한 사이다. 빈 라덴이 입국하자 탈레반의 한 고위 인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빈 라덴을 환영했다.

    “오, 셰이크(이슬람 종교지도자를 지칭하는 말)시여! 우리 땅은 아프간인의 땅이 아니라 신의 땅이며 우리의 성전은 아프간인의 성전이 아니라 모든 무슬림의 성전입니다. 전 아프간 지역에서 당신이 지도한 순교자들이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무덤이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밟은 흙마저 축복합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해발 8200피트(2499.36m)에 위치한 그의 사령부는 지구 어느 곳과도 교신 가능한 통신장비, 발전기, 컴퓨터, 막대한 정보량을 저장한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 등을 갖추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주 후 빈 라덴의 활동 폭이 오히려 커졌다. 1991년 구소련 붕괴후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에서도 이슬람이 부활했다. 빈 라덴은 발칸반도에서 학살되는 무슬림을 구원하려 이슬람 전사단을 파견하였다.

    빈 라덴의 조직은 이전의 이슬람 테러 조직과 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전세계에 뻗어 있는 그의 사업체가 조직의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테러조직과 사업체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기업의 효율성이 테러 목적으로 전용되었을 때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만큼은 입증이 되었다. 또한 무엇이 빈 라덴의 조직인지를 가리기도 쉽지 않다. 빈 라덴은 세계 이슬람주의 조직을 후원·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빈 라덴은 이슬람주의 조직 전체를 대표한다. 이란 정보부, 파키스탄 정보부 등 여러 이슬람교 국가의 정보조직이 그를 돕고 있으며 이슬람권 국가의 고위관리 가운데도 많은 협조자를 두고 있다.

    알 카에다는 빈 라덴과 밀접한 관계다. 알 카에다는 생화학무기, 핵 폭탄을 입수하려 많은 애를 썼다. 수단의 하르툼에 화학무기 생산공장을 세우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 보유 여부는 확언할 수 없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빈 라덴의 가장 큰 업적은, 그가 없더라도 이슬람주의 조직이 계속 유지·활동할 수 있도록 세계적인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나라에 이슬람 전사 훈련소를 세웠고 전세계적인 금융망을 조직했다. 자신의 재산이든 이슬람주의 운동자금이든, 빈 라덴의 자금관리 시스템은 몇 개의 핵심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첫번째 지역은 암스테르담, 앙비르, 룩셈부르크를 연결하는 ‘트라이앵글’이다.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에서 들어오는 기부금과 기타 자금들을 이곳에서 세탁한다. 개인이나 사우디 기업체가 기부하는 자금은 두 개의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오는데, 각각 쿠웨이트와 카타르의 기업인이 관리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자금은 현지 은행이나 런던에 있는 구좌로 보내지고 다시 트라이앵글 지역에 있는 여러 구좌로 이동한 다음 최종적으로 룩셈부르크에 있는 회사들로 들어간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중심에 룩셈부르크의 한 회사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사우디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의 기업가들 이름으로 되어 있는 이 회사는 아시아·아프리카·남미에 걸쳐 투자·부동산·해운·무역·건설업 등에 종사하는 각종 회사들과 제휴하고 있다. 두번째 지역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본부를 둔 아시아 지역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입된 돈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로 모여든다.

    최근 전자상거래가 증가하면서 금융거래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한 빈 라덴은 새로운 금융시스템을 구축했다. 유럽의 금융시스템에 기반한 이 새로운 시스템도, 역시 아프리카와 남미에 걸쳐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돈을 세탁하는 방식이다. 빈 라덴의 자금은 세계에 퍼져 있는 기업 네트워크를 거치는 사이에 꼬리를 감추고 만다.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시스템에서 자금이 전세계를 거쳐 이동하지만 정작 빈 라덴 본인의 이름이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이 자금들이 최종적으로 들어가는 곳 역시 트라이앵글 지역의 회사들이다.

    이러한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이는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선 빈 라덴의 개인 재산과 이슬람주의 운동자금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빈 라덴 자신이 그의 모든 것을 이슬람 성전에 바치고 있기 때문에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할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개인 펀드는 자식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5000만달러에서 1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돈은 런던, 모나코, 카리브해 국가의 은행구좌에 있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이슬람주의 네트워크의 총자산은 서방세계에 있는 것만 해도 약 6억달러에 달한다. 수단·예멘·소말리아 등지의 은행에도 10억달러가 넘는 자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쿠웨이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기부하는 금액이 2억달러,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로부터 들어오는 돈이 4억달러이고, 탈레반이 마약 유통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도 8000만달러에 이른다.

    미국에 선전포고한 사나이

    1996년 말, 빈 라덴은 별도의 종교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이슬람주의자 회의에서 종교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이미 1996년 가을, 그는 장문의 바얀(bayan, 종교지도자가 발표하는 정책 교서)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번째 대미 선전포고다. 걸프전에서 명성을 떨친 CNN의 피터 아넷(Peter Arnett) 기자는 1997년 3월 아프가니스탄 페샤와르의 산악지대에서 빈 라덴과 1시간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사전에 빈 라덴의 생애에 대한 사적인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합의한 까닭에 인터뷰는 그의 정치적 견해와 미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데 바쳐졌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다. …사우디 정부는 미국 정부에 충성함으로써 이슬람에 반역하고 있다. 아라비아반도에서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승리하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내린 계시대로 통치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미국 정부에 지하드를 선포했다.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하는 등 여러가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이 팔레스타인·레바논·이라크에서 벌어진 무슬림 학살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정부는 이 소름끼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포기했다. 미국 정부는 모든 금도를, 그것도 남이 목격하지 못하도록 교묘한 방식으로 깨뜨렸다.

    유대인에 굴종하는 미국 정부의 오만함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점령할 정도로 극에 달했다. 이러한 침략적이고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미국에 지하드를 선포했다. 지하드를 수행해 신의 말씀이 높이 찬양되도록 하고 미국인들을 모든 이슬람교 국가에서 몰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빈 라덴의 말이다.

    1998년, 재정기반이 완벽히 정비되자 미국을 겨냥한 테러 또한 활발해졌다. 1998년 8월7일에는 케냐 주재 미대사관과 탄자니아 주재 미대사관에 폭탄이 동시에 터져 250명이 사망하고 5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했다. 8월20일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훈련캠프에 크루즈 미사일 80발을 발사했다.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받은 후 빈 라덴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국제 테러리즘 지휘통제센터를 마련했다. 타지키스탄 접경 지역에 위치한 이 기지를 파키스탄의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식의 첩보 활동이나 공습으로부터도 안전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이슬람국가 건설이 목표

    20세기 후반에 들어 이슬람권의 반외세 투쟁은 이전과 몇 가지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후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을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테러활동에 주로 하층계급 출신들이 참여했는데 80년대 이후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중·상류층, 빈 라덴 같은 최고 상류층 출신이 많아졌다. 이들은 안락한 환경과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서방 세력의 이슬람권 침투 양상이 변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미국과 유럽 세력, 즉 기독교 세력의 이슬람권 침투는 정치적·군사적인 것이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매스컴을 통한 문화 침투가 활발해졌다. 이슬람 지식인들은 그들의 뿌리인 이슬람 문화가 오염되는 것을 보고 외세의 침투를 실감하게 되었고 자기 정체성에 혼돈을 느꼈다. 세계 매스 미디어를 장악한 미국을 ‘악의 전파자’로 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 물살이 거세질수록 세계 각지에서의 반대운동도 활발해졌다. 고유 문화가 잘 보전되던 이슬람권의 반발 정도는 특히 클 수밖에 없었다. 빈 라덴은 단순한 보복 차원이 아닌 이슬람 세계에 진정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유용한 도구로 테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로 보아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전략적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엄청난 테러에 미국이 전쟁을 대항 수단으로 쓸 것이란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빈 라덴이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이 그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나 처음에 흥분하여 핵무기도 쓰겠다고 발언한 미국 정부도 이내 냉정을 되찾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이 이러한 입장을 공식 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물론 이슬람권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지만 이슬람세계로서는 큰 소득이다. 그 동안 유대계 금융자본가 눈치를 보느라 미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지지 선언을 여러 차례 고려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또한 미국의 아프간 공격은 장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에 따라 이 테러는 자행된 듯하다. 여러 여건으로 볼 때 미국이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해 장기간 아프가니스탄을 공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규모 지상군으로 탈레반 정권 타도가 가능할 지도 의문이며, 가능하다 해도 세계에서 몰려올 이슬람 전사들이 탈레반을 재기시킬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으로 빈 라덴과 그 추종자들은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변도 정책을 수정하고, 미국을 패퇴시켰다는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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