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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적지 순례기

국가 大事때 땀 흘리는 表忠碑의 비밀

  • 유종현 <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

국가 大事때 땀 흘리는 表忠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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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당시 불교를 비하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사회적 배경 때문에 사당의 유지가 매우 어려워 일시 퇴락했으나, 1714년(숙종 40년) 유림의 의견을 수렴해 밀양부사 김창석이 청원해 중건했다. 그후 1721년에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의 상소로 향사의 재물을 하사받았으며 1738년(영조 14년)에는 사명대사의 5세 법손 남붕(南鵬) 스님의 청원으로 왕의 윤허를 얻어 임금이 내렸다는 뜻인 사액사당(賜額祠堂)을 중건했다. 영조는 표충사당을 영취산 삼강봉에 중건하라고 분부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명대사의 선사인 서산대사와 동문인 기허(騎虛, 자는 靈圭)대사와 함께 3대사를 합형(合亨)하고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지어 홍제당(弘濟堂)이라 했다.

기허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때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으나 불행히도 금산싸움에서 전사했다. 영규대사는 대단히 용맹했던 승의군의 장수다. 그의 전사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 승려들이 고향인 계룡산 갑사에 영정을 모시고 훌륭한 호국정신을 오늘날까지 기리고 있다.

1742년에는 사명대사의 영당비문과 표충사의 사적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이 곧 ‘땀나는 비’로 이름난 표충비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홍제당을 지키던 많은 승려들이 뿔뿔이 흩어져 건물은 폐허가 됐다. 일설에는 빈대가 극성을 부려 불태웠다고도 한다. 결국 1839년(현종 5년)에는 백하난야의 표충사는 현재의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표충사로 이전하게 됐다.

사명대사가 손수 현판을 걸었던 백하난야는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폐허가 되고 사당 안에는 잡초만 무성했는데, 그후 영정사(지금의 표충사)의 스님이 당시 돈으로 백량을 받고 팔아버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존하던 사명대사의 유물과 3대사의 영정 등은 새 표충사로 옮겨지고 울창했던 노송숲과 절터 그리고 사명대사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도 함께 팔렸다고 한다. 특히 그 은행나무는 300여 년을 자란 거목으로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나무가 베어진 뒤에는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자생했으나 그것마저 일제시대 벌목꾼에 의해 도벌되고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순례단이 찾은 백하난야는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재건돼 있었다. 수년전 재건된 이곳의 절 이름은 영취산 대법사(大法寺)다. 다만 사원 언덕에 사명대사가 심었다는 모과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커다란 열매들을 맺고 있을 뿐이다. 대법사 주지인 지혜(智慧)스님은 우리 일행을 맞아 그 옛날 사명대사와 백하난야에 얽힌 갖가지 일화를 소상히 말해 주었다.



1839년(헌종 5년) 사명대사의 8대 법손 월파당 천유화상이 왕의 윤허를 얻어 영취산 백하난야에 있던 표충사당을 이곳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재약산 영정사(靈井寺)로 옮기고 왕의 사액(賜額)으로 표충서원(書院)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절은 당초 서기 653년(신라 진덕여왕 7년)에 원효대사가 나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명산을 찾던 중 천황산정에 올라 남쪽 계곡의 대나무숲에 오색 구름이 이는 것을 보고 터를 잡았다 하며 절 이름을 죽림사(竹林寺 또는 竹園精舍)라고 했다.

이후 서기 829년(신라 흥덕왕 4년)에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黃面禪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이곳에 봉안하고 머물고 있었다. 때마침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흥덕왕은 황면선사에게 치료를 부탁해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은 친히 황면선사를 찾아 공을 칭송했는데 선사가 겸손하게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맑은 물이 모두 약초요 약수”라고 하자 왕이 감탄해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켜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순례단 일행이 표충사에 당도한 것은 오후 5시가 지나서다. 흐린 날씨에 계곡이 깊고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진 탓으로 일찍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수염 기른 장수의 위풍

표충사라는 커다란 현판이 눈길을 끄는 입구를 들어서니 바로 눈앞에 사명대사의 유물관이 있고 왼쪽으로는 표충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3월과 9월)에 추모제향 행사가 열린다. 이 추모제는 승려와 유생이 한자리에 모여 전통 제례의식으로 치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조에서 조선조로 이어지면서 불교 대신 유교를 숭상함으로써 승려 신분을 천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를 유생 서원에 모시고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올린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이와 같은 예외가 적용된 절로는 해남 대흥사(大興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 두 곳이 더 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에 대해 철폐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표충서원만은 온전했다. 때문에 표충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사찰 안에 유림서원이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 됐다.

표충사는 실제로 사명대사와 함께 3대사를 모시고 있다. 표충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명대사의 영정(유형문화재 268호)이 가운데 걸려 있고 그 좌편에 서산대사, 우편에 영규대사의 영정이 엄숙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안내하는 젊은 스님은 이 절의 주지인 혜오(慧悟) 스님을 대신해 잘 설명해 줬다. 보통 스님의 영정은 삭발뿐 아니라 수염도 없는 것이 정상인데 오직 사명대사의 영정만은 예외로 삭발은 했으나 수염은 길게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다. 이는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이끈 장수로서의 위풍을 나타내기 위해 평소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영정을 그릴 때 그 모습을 살린 것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이 영정에서 사명대사의 기상이 칼날같이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는 국보 제75호로 지정된 청동함 은향완(靑銅含 銀香)이 있다. 이는 고려(1177년) 때 제작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려 향로일 뿐 아니라 새겨진 곡선과 문양은 고려 공예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밖에도 선조가 하사했다는 동제수저, 화엽형은도금잔, 금란가사와 장삼(중요 민속자료 제29호), 사명대사가 평소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불상, 사명집책판(유형문화재 제273호) 등 일상생활에 쓰던 유품들이 있었다. 또한 순례단 일행의 눈길을 끈 것은 선조가 하사했다는 긴칼(패도, 佩刀)과 여러가지 종류의 사령문서(司令文書)다. 즉 1594년 사명대사가 평양성 탈환 및 도원수 권율 장군과 함께 의령에서 무공을 세운 공을 치하하는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은 왕의 사령문서와 1604년 일본에 강화정사로 다녀온 공을 인정받아 희의대부행룡양위대호군(囍義大夫行龍衛大護軍)에 올라 선조로부터 어마(御馬)를 하사받은 후 내려진 사령문서의 원본이 진열돼 있다.

박대통령 지시로 동상건립

표충사에도 여러 차례 수난이 있었다. 조선시대 두 차례에 걸쳐 해인사측이 사명대사의 사당 이전을 요구하는 사건이 있었고, 일제 말기인 1926년 4월에는 절 전체가 불타버렸다. 당시 동아일보(4월 25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웅각, 산령각, 진영각이 소실되고 불상과 보물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표충신좌(表忠神座)와 시향축문(時享祝文), 제영(題影) 그리고 사명대사의 유물목록을 다시 조성·정비했다고 한다. 또한 1953년에는 도둑이 들어 유물을 도난당하는 등 불행이 겹쳤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물관에 사명대사의 귀한 사료와 유품이 일부나마 보관되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남루는 낙동강 지류인 남천강(南川江, 일명 밀양강) 기슭의 절벽 위에 세워진 경치 좋은 누각이다. 이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누각으로 당시 밀양부사가 다스리는 고을 원님의 객사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이었다.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됐으며 밀양의 상징이기도 한 이곳에는 아랑각(阿娘閣)이 있는데 아랑이 처녀의 순결을 지켰다는 전설이 아직도 세간에 구전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순시하다 영남루 뒷산자락에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동상을 건립하도록 명해 이곳도 사명대사의 유적지가 된 셈이다. 동상의 높이는 약 2.5m고 받침구조물의 높이가 3∼4m다. 건립 당시에는 주변의 나무들이 키가 작은데다 산중허리에 자리해 제법 커보였으나 지금은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녹이 슬고 초라한 모습이다. 한글 종서로 ‘유정 사명대사 상’이라고 쓴 동판은 박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동상 바로 옆에는 사명대사의 유물과 기타 밀양지방의 민속공예품 등을 전시하는 민속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시에서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사명대사의 친척인 임용담(任龍潭)이 1620년에 지은 문집이 보존돼 있는데 그속에 사명대사의 친필본 한 점이 들어 있었다.

순례단이 첫날 묵은 곳은 부곡온천의 가든호텔이다. 부곡의 더운 천연 온천수와 맑은 공기 때문에 전날 강행군한 데 따른 피로가 확 풀렸다. 몸과 정신을 가다듬은 일행은 부곡을 떠나 밀양 하남면 수산(下南面 守山)을 지나 낙동강을 건너 김해평야를 가로질렀다. 구포에서 다시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달려가 통도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반경이다.

때마침 통도사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에서 특별기획으로 티베트 불교전을 열고 있었다. 여러가지 이색적인 티베트 유물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특히 ‘만다라(불교성화)’는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성보박물관의 소장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중앙홀 정면에 크게 걸린 괘불탱(掛佛幀) 그림.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 있는 불교회화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통도사에서는 야단법회를 할 때 괘불탱 성화를 금강계단 법전 옆 광장에 내다건다고 한다. 그밖에도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게 이 절만이 수집해둔 조선조의 성화들이 있는데 크기가 각각 233.5×151㎝의 대형 그림이다.

통도사 승려들의 표충사 점거

일행은 성보박물관을 나와 경내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영취산(靈鷲山) 통도사란 한자 현판이 눈에 띄었다. 이 절은 서기 646년(신라 제27대 선덕여왕15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창건했다고 한다.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까지 통한다 해 통도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보사찰(三寶寺刹)로 통도사(佛寶), 해인사(法寶), 송광사(僧寶)를 꼽는다. 통도사가 법보라는 이유는 여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는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다. 신라 말기 혜린선사(慧璘禪師)가 창건한 전남 승주군에 있는 송광사는 보조국사(普照國師) 등 16국사(國師)를 배출했다는 기록 때문에 승보로 꼽힌다.

경내에 들어선 일행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다가갔다. 안내하는 젊은 스님은 “이 절을 창건한 정신이 곧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고 설명해 줬다. 통도사에는 다른 절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이 없다. 부처님의 진신인 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심으로써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신 대웅전이 없다는 것이다. 일행의 안내를 전담한 젊은 스님은 선오(禪悟)라고 새긴 명함을 건네주면서 동국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찰 중 통도사가 으뜸이라고 자랑했다.

통도사 경내에는 17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관음암, 무량암, 축서암, 반야암, 비로암, 백운암, 극락암, 금수암, 서축암, 자장암, 안양암, 수도암, 보타암, 서운암, 옥련암, 백련암 그리고 사명암이다. 사명대사가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수도하던 시절 통도사에도 여러 번 머물렀기 때문에 사명대사를 모시는 암자가 있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738년(영조 무년) 통도사의 승려 의성(義成)은 당시 사명대사를 모시고 있는 밀양 재약산의 표충사가 잘못된 것이라 보고 평소 3대사가 거주했을 뿐 아니라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인 해인사에 표충사를 두어야 한다고 소지를 올린 바 있다.

그러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783년(정조 7년) 7월에 의성은 30여 명의 승려들을 이끌고 재약산 표충사에 쳐들어가서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 3대사의 영정을 탈취, 여러 날 머물며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조정에서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에 특혜를 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순례단을 태운 버스는 통도사에서 천왕산 북벽 골짜기에 새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준령을 넘었다. 다음 일정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1박하기로 돼 있다. 절에 들어갈 때 저녁에 너무 늦으면 큰 실례라고 한다. 해인사까지는 밀양에서 빨리 달려야 2시간 반이 걸리는 만만찮은 거리다.

일행이 해인사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경이다. 버스는 해인사 본당 입구에서 왼편으로 살짝 비켜 비포장의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거기에는 홍제암(弘濟庵)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1610년 8월16일 67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입적(入寂), 즉 생을 마쳤다. 석장비문과 행적 등 기록에는 사명대사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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