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종교와 세속생활의 지침 이슬람교의 여섯가지 믿음

  • 정수일

    입력2005-03-22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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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교의 경전 ‘꾸르안’에는 알라가 인류에게 보낸 예언자가 총 12만4000명이라고 쓰여 있다. 꾸르안은 이 수많은 예언자 중 25명을 선별하여 거명하고 그 중에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 등 6명만이 경전을 가진 예언자라고 지목했다. 이 6명의 예언자 가운데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 4명을 알라가 직접 파견한 사람으로 우대한다. 그리고 이 4명 중에서도 무함마드를 마지막 예언자로 가장 우대한다.
    종교와 세속생활의 지침 이슬람교의 여섯가지 믿음
    때가 때이니 만큼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이슬람에 관해 무언가 꼭 묻곤 한다. 무슬림의 일상에서 ‘지하드(聖戰)’에 이르기까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이슬람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이 시점에서 보통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정치적 동기나 역사적 관계를 들어 그 이유를 이러저러하게 풀이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해명은 될 수 없다.

    의식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철학적 원리다. 신앙인에게 의식은 곧 종교적 믿음(신앙)이다. 따라서 신앙인들의 행동거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종교적 믿음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에서 그들의 가치관(도덕관, 인생관, 세계관 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적 믿음과 인간의 가치관 양자가 이슬람에서만큼 직결(直結)되고 밀착된 종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고유의 특징이다.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만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양식이며, ‘인간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조화로운 전체’이고, 종교와 세속 쌍방을 모두 아우르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이슬람의 합일성과 포괄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올바르게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합일성과 포괄성의 근저에는 돈독한 종교적 믿음, 즉 신앙이 있다.

    신앙이란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성스러운 것을 믿고 의지하며 무조건 거기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은 다분히 심적 현상으로서 종교적 의무를 포함한 제반 활동을 규제한다. 이러한 심적 현상으로서의 신앙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사항을 조문화(條文化)하여 신앙의 원리를 밝힌 것을 교리(敎理)라고 한다. 그러므로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리부터 알아봐야 한다.

    단순 명료한 이슬람 교리



    불교나 기독교의 교리에 비해 이슬람교의 교리는 ‘단순’하다고 할 만큼 비교적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교 교리는 6가지 종교적 신앙(이만)과 5가지 종교적 의무(이바다)를 기본내용으로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슬람교의 6신(信)5행(行)이다. 5행은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라고 하여 5주(柱, 루큰)라고도 한다. 그리고 모든 신앙생활의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선행(善行, 이흐싼)을 교리로 보기도 한다.

    이슬람교 교리의 근본은 ‘신은 오로지 알라뿐이고, 무함마드는 알라가 보낸 사람이다’는 두 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이를테면 알라의 유일성(唯一性, 타우히드)과 무함마드는 알라가 보낸 사람, 즉 성사(聖使, 라술 라)라는 원리가 교리의 근본을 이루며, 모든 신행(信行)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는 무슬림의 사유와 행동 및 가치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6신이란 알라(하느님)와 천사(天使), 경전, 예언자, 최후심판, 정명(定命)에 대한 여섯 가지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 경전 ‘꾸르안’에는 앞의 다섯 가지 믿음에 관해서는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으나(4:136), 정명에 관해서는 명문화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경전의 저변에 정명관이 깔려있다는 이유로 정통교파인 쑨니파는 정명까지 포함시켜 6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쉬아파는 정명이 6신의 하나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정명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 강조한다. 이 6신을 보편적인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크게 신관(神觀)과 성관(聖觀), 내세관(來世觀), 정명관(定命觀)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신관의 요체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이슬람적 관점이다. 신(神)이란 종교의 대상으로서 초인간적, 또는 초자연적 위력을 가진 추상적인 정신실체를 말하는데, 이슬람교에서의 이러한 정신실체는 바로 유일신 알라다. 알라 외에 신과 유사한 정신실체로 진(영혼)이 있지만 이슬람교 신관에서의 근본은 알라의 유일성이다.

    물론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에서도 신의 유일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철두철미하고 그 개념이 더욱더 명확하다. 그러면 알라의 유일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이 알라에 의해 창조되고 알라는 만물의 주인이며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알라에게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봐서는 다른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의 창조성이나 전지전능함과 별반 차이가 없다.

    가장 엄격한 알라의 유일성

    그러나 알라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른 유일신교의 신과는 자못 다른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슬람교에서 유대교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나님 같은 다른 교의 유일신을 배척하거나 차별시하지는 않는다. 다 같은 유일신인 만큼 숭배하라고 권한다(29:46).

    비록 알라는 시종 불변의 정신실체로서 존재해 왔지만, 그 속성(본질)에 대한 무슬림들의 이해는 이슬람교의 확산에 따라 심화되어 왔다. 원래 알라는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 메카 꾸라이쉬 부족의 주신인 창조신의 이름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이슬람 초기, 즉 메카시대에 알라의 속성은 비교적 단순해 창조성이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으나, 메디나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추상화되었다. 이 두 시대를 거친 무함마드의 생존시에는 그가 신자들에게 “다만 알라의 은총만을 생각하고 그 실체에 관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그러할 힘이 없다.”(‘성훈’)고 못박음으로써 알라의 속성에 관한 논의는 무모한 짓, 불경한 일로 일절 불허되었다. 그러나 8세기 초 이슬람신학(일르물 칼람)이 도입되면서 알라의 속성이나 본질에 관한 논의가 허용되고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알라의 속성에 관한 이슬람적 신관이 확립되었다.

    알라의 첫째 속성은 독존성(獨存性)이다. 알라는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고, 부모처자도 없으며, 동료도 없고 남녀성별도 가리지 않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다. 알라는 색도 형태도 모양도 없고, 웃음도 눈물도 없으며, 잠도 망각도 없고, 음식도 불필요하며, 말도 없고, 병도 나지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외계의 영향도 받지 않는 무형(無形)의 존재다. 따라서 어떠한 공물(供物)이나 제물(祭物)이 필요없는 비우상(非偶像)의 존재다. 여기에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의 경우 신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聖靈) 등 3개 위격(位格)을 가진 일체(一體)라는 3위일체설을 주장하고, 이 설이 385년의 니케아공의회에서 선포되고 451년의 칼케든총회에서 추인되었던 것이다. 보다시피 기독교의 3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속성과 이슬람교에서의 독존적인 알라의 속성은 엄연히 구별된다.

    알라의 둘째 속성은 무한성(無限性)이다. 알라의 무한성은 영원성(永遠性)과 편재성(遍在性)에서 나타나고 있다. 알라는 시·공간적 제한 없이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절대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알라는 모든 사물과 모든 곳에 항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알라는 특정 인간에게만 선별적으로 편재(偏在)하지 않으며 모든 민족, 모든 계층과 ‘목에 있는 혈관보다도 더 가까이에 함께 있다’(50:16).

    이러한 무한성 때문에 인간은 알라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현세에서 인간들 사이에 생겨나는 잠깐의 차이(예: 재산의 차이)나 차별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알라의 무한성에 비하면 한 순간이나 무위(無爲)에 불과하며, 모두가 똑같이 알라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과대망상증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알라의 셋째 속성은 창조성(創造性)이다. 창조성은 알라가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전지전능하다는 절대적인 권능에서 나타나고 있다. 알라는 천지만물의 창조주며, 만물은 알라에 의한 피조물이다. 알라는 6일 안에 우주를 창조(7:54)하고 흙으로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인간은 ‘대지 위에 설치된 알라의 대리인’(2:30)에 불과하다. 알라는 인간의 생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울음과 웃음까지도 관리하며 천지의 열쇠를 쥐고 있다.

    알라는 우주만물의 법칙을 제정하고 그 실현을 관장하는 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달로 여행하는 등 과학기술의 성과는 인간이 알라가 제정하고 관장하는 인력운동(引力運動)과 공기저항, 에너지 같은 제반 과학법칙을 알고 그대로 운영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알라의 창조와 권능은 ‘구약성서’ 제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설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꾸르안’에서는 우주계나 자연계의 창조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이야기하나,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그리고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슬람 경전은 인간이 한 방울의 정액으로 만들어진 후 모태 내에서 혈육으로 성장해 출생하는 과정을 여실히 밝히고 있다.

    끝으로 알라의 속성은 자비성(慈悲性)이다. 알라의 자비성은 인간에 대한 알라의 사랑과 은총에 바탕하고 있다. 흔히 이슬람을 ‘호전적’인 종교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알라의 ‘무자비성’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꾸르안’은 알라가 인간을 포함해 우주만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천지간의 모든 것을 인간의 소유로 제공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알라의 최대 은총이며 자비이므로 인간은 마땅히 알라에게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감사를 무시하는 것을 최대의 죄악으로 간주한다. 아랍어에서 감사하지 않는 자라는 뜻의 ‘카피르’가 곧 ‘불신자’나 ‘배교자’를 지칭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알라의 자비에 관한 찬양이 ‘꾸르안’ 전편에 관통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114장 중 제9장을 제외한 모든 장은 ‘인자하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서사(誓詞, 태쓰미야)로 시작된다. 알라의 속성을 반영하여 붙인 알라에 대한 경칭(敬稱) 99가지 중 그 대부분은 ‘자비로운’, ‘인자한’, ‘선량한’, ‘관대한’, ‘공정한’, ‘지혜로운’ 등 자비성과 관련된 말들이다.

    알라와 더불어 이슬람교에서 신적인 존재로서 정령(精靈), 즉 ‘진’이라는 것이 있다. 그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적지 않게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령이란 인간의 영혼 외에 동식물의 체내나 그밖의 모든 사물에 그것과는 독립된 존재로서, 잠정적으로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영혼을 말한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타일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이 외계의 사물에 적용된 것’이 정령이라는 간명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아무튼 정령은 알라나 여호와, 하나님 같은 신들처럼 명확한 개성을 갖고 있지 않은 종교적 대상을 가리킨다. 원시적 종교나 민간신앙에서는 정령의 개념이 지배적이고 그 숭배가 성행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보다시피 정령은 길흉화복(吉凶禍福)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져 그것을 두려워하고 위무(慰撫)하기 위해 굿과 같은 여러가지 의례행사를 치른다. 정령숭배는 조상숭배나 자연숭배, 샤머니즘과도 관련이 있고, 현대 종교의 기층부와도 관계가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정령은 하나의 종교적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꾸르안’의 제72장은 장 제목이 아예 ‘진장’(28절)으로 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메카를 비롯한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유사한 진이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였는데, 사막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주로 악역을 담당했으며, 복술가들은 진으로부터 점복(占卜)의 힘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슬람이 출현한 이후에는 진에 대한 이해와 그 역할이 달라졌다. 진도 알라에 의한 피조물이기는 하나, 인간처럼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로 되어 있으며 형태나 성별은 없다. 진은 알라의 통일적인 지배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는데, 알라에게 복종하는 무리와 불복하는 무리의 두 갈래가 있다. 알라에 복종하는 무리 중에는 알라의 계시를 전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진도 있다.

    이와 더불어 ‘꾸르안’에는 알라에 불복하고 이슬람을 외면하는 진을 ‘샤이퇀’(사탄)이라고 지칭한다. 샤이퇀에 관한 기술은 상당히 부정적이고 엄혹하다. 샤이퇀은 인간과 함께 최후의 날에 알라로부터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 왜냐하면 샤이퇀은 인간을 유혹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반항하도록 하며 인간에게 못된 주술을 가르쳐 인간을 오도하기 때문이다.

    진 중에서 알라에 불복하는 샤이퇀과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존재를 일컫는 ‘사탄’(악마)은 동의어다.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킨다는 샤이퇀(사탄)의 악역은 두 종교에서 공통적이다. 단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원죄를 저지르게 한 장본인이 사탄이란 점에서 사탄의 악역을 원초적으로 규탄하고 더 강조한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알라(하나님)가 자신을 적대시하고 못된 짓을 하는 샤이퇀(사탄)과 그 유혹을 애당초 제거하지 않고 방치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샤이퇀(사탄)은 인간을 부단히 유혹하는데, 그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알라(하나님)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극복과정은 알라에 대한 인간의 공덕(功德)을 쌓는 과정이므로 유혹을 방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신학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너무나 사변적인 이야기다. 이런 경우 무슬림들의 관용어를 빌면 “알라만이 알 일이다!”

    종교철학에서 성관(聖觀)이란 신과 인간을 종교적으로 연결해주는 고리나 매개물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말한다. 이슬람교의 6신 중에서 성관(聖觀)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천사와 경전, 예언자의 3가지에 대한 믿음이다.

    천사, 경전, 예언자는 신과 인간의 매개체

    천사(angel)란 종교에서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한편, 인간의 기원(祈願)을 신에게 전하는 영적 존재를 말한다. 천사는 독존적이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신과 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연계하기 위한 인간의 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불교나 기독교에서도 천사의 존재를 인정한다. 불교의 정토(淨土)에는 자유로이 비행하는 천인(天人)과 염라왕(閻羅王)의 천사 등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천사를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능력이 뛰어난 영(靈)이라고 정의하면서 최초의 천사는 모두 한결같이 거룩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었는데, 시련기에 루스페르를 비롯한 일부 천사들이 신을 배반함으로써 결국 선천사(善天使)와 악천사(惡天使)의 2군으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의 천사도 불교나 기독교의 천사와 모습이 비슷하나, 그 이해가 한결 구체적인 성싶다. 이슬람 초기에는 무함마드가 천사를 거치지 않고 알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왔으나, 후기에는 유대교의 천사관을 받아들여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은 것으로 최종 인식되었다.

    그러면서 천사의 속성이 명백히 밝혀졌다. 천사는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는, 알라에 의한 피조물로서 빛으로 만들어지나 신성은 없다. 무형의 영체(靈體)로서 남녀 구별이 없고, 노소 차별이 없으며, 식음도 하지 않고, 정욕이나 희로애락을 모른다. 날개를 달고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알라는 인간보다 먼저 천사를 창조했다.

    천사의 역할은 우선, 알라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다. 알라에 복종하고 알라를 위해 봉사하는 천사는 항시 알라의 옥좌 곁에 대기하면서 알라의 계시를 한자도 빠짐없이, 한자도 틀림없이 무함마드에게 전한다. 다음으로 지상의 인간생활을 관장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천지지변을 일으키고 인간의 활동에 간여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행동을 일일이 기록했다가 최후심판의 날에 결산한다. 일례로 624년 3월 무함마드가 이끈 메디나군과 메카군 사이에 벌어진 바드라전투 때 알라는 3000명의 천사들을 보내 무함마드군을 도와 전승토록 했다고 한다(3:121~125).

    성인에도 등급이 있어

    ‘꾸르안’에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10명의 천사들을 거명하고 그들 중 주요한 4명의 역할에 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가브리엘은 수좌(首座)천사로서 모든 천사들을 관장하며 예수나 무함마드 같은 예언자들에게 알라의 계시를 전달한다. 마카일은 유대인 보호자로서 물을 관리한다. 이스라일은 생사를 관장하는 천사로서 우주를 관찰하고 의식(衣食)을 공급한다. 머리는 천상에 대고 발은 대지를 밟고 있는 이스라필은 거인으로서 비바람을 관장하고 부활의 날에 나팔을 불며 세계 말일(末日)의 도래를 선포한다.

    나머지 6명의 천사는 천국이나 지옥의 문을 지키고 인간의 오른쪽과 왼쪽 어깨에서 선행과 악행을 기록하며 죽기 전의 종교신앙을 캐묻는 등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그밖에 알라의 신좌(神座)를 보위하는 8명의 천사와 지옥을 지배하는 16명의 천사도 따로 있다. 천사들 중에서 가장 악랄한 천사는 이브리쓰인데, 그는 알라의 명령을 거역하고, 인간을 적대시하며, 인간을 범죄의 길로 유혹한다. 그리하여 알라의 저주를 받으며 최후심판의 날 알라는 그를 지옥으로 보낼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성관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경전과 예언자 일반에 대한 믿음이다. 대소를 막론하고 어느 종교건 타종교의 경전이나 창시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자신의 경전에 명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집과 배타로만 치닫는 오늘의 종교 현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슬람교만은 모든 경전과 예언자의 보편성을 인정함으로써 타종교의 경전이나 창시자들에 대한 믿음을 셋째와 넷째의 신앙(이만)으로 명문 규정하고 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종교 창시자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선지자)들이 설교한 경전은 비록 ‘꾸르안’에 비하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민족들에게 내려진 알라의 계시이기 때문에 경전으로 믿고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84; 17:88). ‘꾸르안’에는 알라의 계시로 내려진 경전이 무려 114부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모세의 5서와 다비드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꾸르안’ 등 4부를 꼽는다. 이 4부 중에서도 ‘꾸르안’을 더 이상 없는, 천상의 원형 그대로의, 완결된 최후의 경전으로 지정한다. 1400여 년 전에 ‘꾸르안’이 나온 이후 경전다운 경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에 대한 무슬림 신학자들의 증거 제시다.

    경전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나 민족들의 예언자(나비, prophet))에 대해서도 이슬람은 포용적이다. 종교의 창시자들을 비롯해 여러 민족이 배출한 예언자들은 모두 알라가 서로 다른 시기에 인간에게 파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믿고 존중해야 한다(16:36)는 것이 이슬람의 예언자관이다. 그런데 예언자들이 담당 수행하는 역할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저마다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꾸르안’에는 알라가 인류에게 보낸 예언자가 총 12만4000명이라면서 그중 25명을 선별하여 거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6명(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만이 경전을 가진 예언자라고 지목했으며, 다시 그중 뒤 4명만을 알라가 직접 파견한 사람(라술라, 성사 聖使)으로 우대시한다. 또 이 4명 중에서도 무함마드를 마지막 예언자로 가장 우대한다. 예언자들도 역할에 따라 이렇게 지위와 등급이 다르다. 중국의 이슬람연구자들은 예언자 일반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면서 성인들을 반열화하여 지성(至聖, 무함마드), 대성(大聖, 아담,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 6인), 흠성(欽聖, 313명), 열성(列聖, 그외 성인들)의 4등급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슬람의 예언자관에서 주목되는 것은 예언자 일반과 성사(라술라)를 구별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언자(선지자)는 예수 이전에 나타나서 예수의 강림과 그밖의 하나님의 뜻을 예언(선지)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그 해석이 좀 다르다. 예언자란 절대신 알라의 계시를 인류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으로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에 비해 알라가 인간에게 파견한 사람, 즉 성사는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일 외에, 그의 복음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며 그 실천을 인도하는 임무까지 부여받은 선택된 사람이다. 대표적인 성사가 곧 모세와 예수, 무함마드다. 따라서 모든 성사는 예언자이나 모든 예언자는 성사가 될 수 없다.

    이슬람교의 6신 가운데 다섯째는 내세(來世, 아히라)에 대한 믿음이다. ‘꾸르안’에는 내세를 말일(알 요우물 아히르)로 표현하고 있다. 말일이란 개념에는 부활(요우물 끼얌)과 최후심판(까돠)의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두 가지를 각각 다른 믿음으로 해석하여 이슬람교의 신앙을 6신이 아닌 7신으로 하자는 주장이 있으나, 말일에 부활하여 최후심판을 받게 되므로 두 가지를 말일 개념으로 묶어 하나의 믿음으로 하자는 것이 중론이다.

    이슬람교의 세계관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2세(二世, 현세와 내세)관이다. 오늘의 불교는 3세(전세, 금세, 내세)관이나, 초기 불교는 2세관인 듯하다. 제자 바카가 인간이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가 하고 묻자 부처님은 타던 불이 꺼지면 그 불이 동으로 갔는지 서로 갔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질문답지 못한 질문’이라고 일축한 일례는 이를 시사해준다. 모든 보편종교는 나름의 내세관을 제시하고 있다. 내세관이 출현하게 된 원인은 현세에서의 인생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해 보자는 데 있다. 종교에서 인과응보관계로 현세의 인생문제를 내세와 직결시켜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내세관은 주요한 신앙의 하나로 굳어졌다. 그런데 인생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견해, 즉 인생관은 종교마다 같지 않다. 그것은 내세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인생관의 출발점은 인간의 원초적 출현과 관련된 문제다. 이슬람교는 알라의 창조에 따라 인간이 출현한 다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출생으로 생이 이어진다고 믿는다. 즉 알라가 인간의 조상인 아담을 흙으로 빚어 만든 다음 형태를 만들어 입김을 불어넣고 영혼을 주어 인간을 창조했다.

    그후 인간이 인간을 낳는 과정을 거쳐 인간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32:7~9). 이것은 기독교의 창세설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비해 불교는 생의 근원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생사윤회설(生死輪回說)과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로 생의 출현과 지속을 설명한다. 즉 일체 생물은 부단한 윤회 중에서 생성하며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인생관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속성은 원래부터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이다. 기독교는 성악설(性惡說)을, 불교는 고행설(苦行說)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성악설에 의하면, 인간의 원조인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신의 뜻을 위반한 죄를 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죄과를 씻기 위해서는 속죄를 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속죄(신과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됐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원죄를 범한 인간을 구제하려면 죄를 지었다고 증오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종교적 이념을 기독교가 중시하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인생관

    불교에서는 인생의 속성을 두카(Dukkha), 즉 고행으로 보고 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불교의 4대성체(四大聖諦, 진리)는 인생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심은 두카관이다. 따라서 ‘번갯불처럼 잠깐인’ 이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빨리 마무리하고 무고경계(無苦境界)인 열반(涅槃)으로 가야 한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생은 고통이니 그것을 덜자면 인간을 측은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불교의 종교적 이념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성선설에 입각한 이슬람교는 인생을 달리 본다. 한마디로 인생을 낙천적으로, 관용적으로 본다. 이슬람의 인생관은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성훈(聖訓, 하디스)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순수 결백하게 태어난다.” “불행과 시련은 모두 자신의 과오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알라는 이러한 과오를 다 용서한다.” “선행(善行)은 신앙의 반(半)이다.” “오래 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최상(最上)의 인간이다.” “좋은 일을 하는 자, 오래 삶으로써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죽음을 원하지 말라. 범죄자도 죽음을 원하지 말라. 그것은 오래 삶으로써 회개하여 알라의 용서를 받을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진실로 신자는 오래 살수록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현세는 내세로 가는 경작지에 지나지 않으니, 내세에서 받을 상을 저축하기 위해 현세에서 좋은 일을 하라. 노력은 알라의 명령이며, 알라가 명한 것은 노력 분투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등등.

    이슬람의 생사관을 요약하면, 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현세에서의 선행과 생을 오래 즐길 것을 권장하며, 원죄가 아닌 후천성에서 오는 죄나 과오를 자진 회개하고 알라의 용서를 빌며, 헛된 죽음을 말라는 것이다. 바울이 제창하고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신국론’에서 확립한 기독교의 원죄설과 그로부터 파생한 기독교의 생사관과는 자못 다른 양상이다.

    이슬람교의 내세관

    이슬람에서의 인간의 죄성(罪性)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즉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나 불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죄나 불의는 알라 앞에서 참회하면 알라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움으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온갖 해악으로부터 알라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관용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원래가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수나 죄, 불의 같은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써 용서할 수 있다는 이슬람의 종교적 이념에서다.

    이슬람교의 내세관을 이루는 다른 한 내용은, 말일과 더불어 도래하는 최후심판에 관한 문제다. 말일이나 최후심판에 대한 믿음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이들 두 종교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말일(혹은 종말일)에 이르러 각 영혼이 다시 이전의 육신과 합해져서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상정되는데, 이것을 최후심판이라고 한다. ‘꾸르안’은 말일과 최후심판의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말일에 나팔소리가 울리면서 천지이변이 일어나 하늘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지며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는 사람들과 진(정령)이 재판석에 소집된다. 그러면 각자의 행위에 관해 천사가 증언하고, 그 행위를 저울에 달아 칭찬 받은 자에게는 행위 기록이 오른손에, 영겁(永劫)의 형벌을 받은 자에게는 행위 기록이 왼손에 주어진다. 저울축의 경중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는데, 오른손 쪽이 무거운 사람이 생전에 신앙심이 돈독하고 선행을 많이 베푼 자다.

    말일이 언제 오는가의 질문에 무함마드는 “신념이 사라졌을 때 말일을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알라만이 아는 일로서, 예정된 때에 순간적으로 갑자기 온다고 한다. 불교나 유교 같은 동방종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는 인정하나 육체의 재생이나 최후심판은 믿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의 내세관에서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은, 부활론이다. 경전 ‘꾸르안’의 제75장은 ‘부활의 장’으로서 부활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부활론도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취한 것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비슷하나 이슬람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부활이란 최후의 심판이 있기 직전에 모든 영혼이 이전에 죽었던 육체와 다시 결합하여 살아난다는 뜻이다. 부활하면서 선인(善人)은 영혼과 육체가 같이 천당(잣나, 피르다우쓰)에 가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반면에, 악인(惡人)은 지옥(자핫남, 자힘)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고 한다.

    경전 ‘꾸르안’에는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와 천당의 정경을 아주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신을 경외한 선남선녀, 신을 섬긴 자,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자, 마음이 관대한 자, 신을 위해 고뇌하고 박해를 받은 자, 신을 위한 성전(聖戰)에서 순교한 자, 이를테면 ‘칭찬을 받은 자’들만이 천상의 낙원이자 평화의 집인 천당에 들어가 영주하게 된다.

    그들은 흐르는 강물가에서 신을 찬미하면서 비단으로 꾸민 잠자리에 들고 진수성찬을 즐기며 눈빛이 고운 소녀와 순결한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열락(悅樂)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천당은 8층 하늘의 7층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악담이나 거짓말이란 전혀 없고 다만 축하의 말만 있을 뿐이다. 천당의 맨 위에 알라의 보좌가 설치돼 있다. 기독교의 천당과 흡사하나 더 호화롭다.

    깨달음과 무아(無我)를 최상의 이상으로 추구하는 불교에 굳이 천당 개념을 도입한다면, 그것은 극락정토(極樂淨土)인 열반(涅槃, 니르바나)에 해당될 것이다. ‘인생의 욕망의 불꽃을 꺼버린다’라는 뜻의 니르바나란 어떤 것인가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부처는 “바람처럼 만질 수도 잡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그러나 그것(바람)을 알고 확신하는 것과 같다”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덧붙여 우리의 생각과 느낌, 의지, 육체의 모든 제한을 넘어선 상태가 바로 니르바나로서, 그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해석했다. 요컨대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속적인 원인과 결과의 생성과정에서 벗어나 세상의 욕정과 근심에서 해방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상태가 바로 이슬람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의 정경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성싶다.

    경전 ‘꾸르안’에는 천당과 함께 지옥에 관한 기술도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최후심판일에 모든 사자는 부활하여 알라의 심문을 받는다. 심문 후에 지옥 위의 천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머리칼처럼 가늘고 칼날처럼 예리한 가교(架橋)를 통과해야 하는데, 생전에 선행을 한 자는 무사히 통과하나 악행을 범한 자는 통과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로는 탐욕을 부린 자, 불신의 무리들, 알라 이외의 신을 숭배한 자 등이 있다.

    지옥의 정경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7층의 7개 문을 거쳐 들어가면 암흑 속에서 독풍(毒風)이 불고 끓는 물이 흐른다. 불옷에 불이불을 쓰고 자니 살이 불에 한겹한겹 타들어 간다. 마시는 것은 끓는 물과 고름이고 먹는 음식은 가시 돋친 독열매다.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쇠채찍으로 얻어맞는 등 이를데없이 잔혹한 형벌이 가해진다. 그밖에 지옥과 천당 사이에 죄악을 범한 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알라의 용서를 기원할 수 있는 ‘고정되지 않은 병풍(屛風)’, 즉 연옥(煉獄, 아아라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천국에 가기 전에 영혼상의 경미한 죄악을 정화하는 연옥이 있다고 하는 카톨릭의 연옥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도 인과응보관에 기초한 유사한 지옥관이 있다. 현세에서 불법을 지키면 내세에서 이상적인 전생(轉生)을 하고, 위법하면 축생(畜生)이나 아귀(餓鬼)가 되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6신에서 마지막 것이 정명(定命, 까다르)에 대한 믿음이다. 정명(혹은 숙명, 宿命)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존재를 포함해 우주의 삼라만상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모든 사상(事象)의 진행에 인간의 의지와 지력(知力)이 무력하다는 것이다. 정명관은 크고 작은 모든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아마 초인적인 절대적 존재에 의한 정명이야말로 종교적 신앙을 가능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이슬람 경전에 보면 기타 다섯 가지 믿음은 명백히 제시되고 있으나, 정명만은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다. 그러나 후일 알라의 권능이나 절대력을 약화시키려는 불신자들의 반항이 거세지자 정명은 계시로 명문화되었다. 경전 ‘꾸르안’(17:13, 78:29, 3:145)에 명시된 이슬람교의 정명관을 종합해 보면, 인간 행위의 최종 목표는 경전의 가르침 속에서 알라가 정해준 운명대로 삶을 영위하고, 우주의 모든 현상이 알라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며, 어떤 것이라도 알라의 지배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인간은 알라에 대한 순종의 삶을 감수해야 평정을 얻고 사회의 평화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정명관은 알라의 권능과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논의가 심화되면서 모든 사상(事象)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으로서 요지부동이라는 절대적 정명과 이에 반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사상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문제가 치열한 논쟁거리로 대두되었다. 이슬람에서는 8세기 중엽에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개념이나 추리, 논리 등 일련의 철학이론이 도입되어 비로소 이슬람신학이 출현했다. 그 과정에서 경문 해석이나 알라의 속성과 본질, 알라의 인격성, 조물주와 속세와의 관계, 정명과 인간의 자유의지 등 여러가지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입장과 견해에 따라 몇 개의 신학파가 출현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파는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와하니(~699)에 의해 출현한 정명파(定命派, 까다리야파)다. 최초의 신학파의 하나인 이 파는 알라는 인간의 죄행과 무관하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죄악을 알라의 정명에 전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의지의 소유자로서 선악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행과 악행은 인간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는 인간이 책임을 져야지 알라가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정명관은 중용사상

    다음으로 중요한 신학파는 정명파의 반숙명론을 계승한 이성주의파(理性主義派, 무아타질라파)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 파는 알라는 만물을 창조한 후에 인간에게 이성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은 이성에 의해 시비와 선악을 이해하고 가려낼 수 있으므로 자기의 뜻(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인간을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하고는 그 행동의 후과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불의이고 어불성설이며 모순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자유의지론과 맥을 같이한다.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자유의지를 신학의 문제로 거론한 교부(敎父)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아담 이래 인간이 원죄를 짊어지고 있는데, 인간에게 자유가 없고 죄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죄인 동시에 죄가 아니다. 아울러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 추궁은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고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중용에 입각한 인과응보로 이상의 두 파에 비해 정명을 특별히 강조하는 파로서 정통파(正統派, 쑤나파)가 있다. 이 파는 인간의 모든 행위(선, 악, 순종, 배신 등)는 알라의 의지와 판단, 정명에 의해 결정되고, 인간이 자유로이 행동할 수는 있지만, 자유는 알라가 결정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알라의 창조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정명은 절대적이고 자유의지는 상대적이라는 관점이다.

    정통파의 이러한 정명관에 대해 자유의지론자들은 경문을 인용해 가면서 논박했다. 그들은 꾸르안에 ‘기여한 것만큼 보상한다’(45:22)는 경문이 있는데, 이것은 그 기여도나 보상도가 사전에 정해진 것(정명)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일례로 행위의 선악 여하나 정도에 따라 최후심판이 결정된다(45:15)는 경문의 내용은 행위의 선악이 정명이 아님을 말하며 정명이라면 구태여 다시 심판할 필요가 없다고 풀이하면서 정명을 부정하고 나섰다. 일리가 있는 논증이다.

    이슬람교의 정명관은 대체로 인과율에 따른 정명관으로서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공통점이 있다. 선인(善人)에게는 선과(善果)가, 악인(惡人)에게는 악과(惡果)가 차려지듯이 인업(因業)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과보(果報)가 있다는 것이 인과응보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행한 것만큼(因) 그 결과(果)를 받는다는 것이 인과율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자연의 법칙인 이 인과율이 곧 이슬람교 정명관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서 ‘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이고, 그 ‘과’는 정명인 것이다. 단, 행동의 규범이나 선악의 내용은 알라가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체적으로 보면 이슬람교의 정명관은 알라의 정명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화시킨 유연한 정명관, 혹은 정명과 자유의지 간의 중도관(中道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한층 숙명론적이다.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인 ‘예정설(정명설)’보다는 ‘구제(救濟)예정설’을 주장한다. 즉 인간의 구제가 완전히 신의 자유로운 은혜의 선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의 판단에 의해 구제가 이루어진다는 숙명론이다.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절대시한다. 즉 원인과 결과의 생성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우며, 이 자유로운 의지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 인과응보설에서의 자유의지론이다.

    중국 전통사상의 경우 정명관에 대한 입장은 파마다 서로 다르다. 도가(道家)는 숙명론을 제창하고, 묵가(墨家)는 이른바 ‘비명설(非命說)’을 내세워 천명(天命), 즉 숙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유가(儒家)는 인위(人爲), 즉 자유의지도 믿고 동시에 명(命), 즉 정명도 인정하는 바, 이슬람교의 정명관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정명관은 숙명과 자유의지의 어느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정명관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중용사상(와싸튀야)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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