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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노래 ‘芙蓉山’시인 박기동

  • 윤필립 < 在호주 시인 > phillipsyd@hanmail.net

빨치산의 노래 ‘芙蓉山’시인 박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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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전남 벌교에 살던 박기동 시인의 하나뿐인 여동생 박영애(당시 24)씨가 결혼 2년 만에 폐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놓고 말았다. 슬하에 자식 하나 없었다. 친정 부모는 먼저 간 여식의 장례를 차마 지켜볼 수 없었고, 시가 쪽에서도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한 생명을 영영 떠나보내는 장례식치고는 너무나 쓸쓸했다.

연꽃 형상을 하고 있는 벌교 뒷산, 부용산 산자락에 여동생을 묻고 유난히 하늘색이 푸른 부용산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박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에 허청거리며 다음과 같은 제망매가(祭亡妹歌) 한 편을 썼다.

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회오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부용산’ 1절 전문)

두번째 인터뷰를 위해서 한인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스트라스필드 광장에서 만난 박시인에게 1947년 얘기를 청했다.

“누이동생 영애는 주위에서 천사같다고 했을 만큼 착하고 예쁜 처자였습니다. 내가 순천사범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마땅히 병간을 해줄 사람도 없어 내가 자주 병원에 들렀지요. 여린 손으로 그 짧은 삶의 끝자락을 쥐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해 가을에 영애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시의 초안을 잡아놓고 나중에 좀더 손질해서 발표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는 딱히 나 개인의 누이가 세상을 떠난 허무감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내 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든 사연도 자세하게 기억이 나세요?

“그럼요. 이 노래 때문에 좌경시인으로 몰려 한평생을 떠돌아야 했는데…. 1948년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 당시는 6년제였다) 국어교사로 있을 때 학생 중에 김정희라는 영특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늘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도 잘 했고, 문학에도 소질을 타고난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폐결핵에 걸려 열여섯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학교에 안성현이라는 음악선생이 있었는데 아끼는 제자를 잃은 슬픔을 노래로 만들고 싶어서 내 시 ‘부용산’에다 곡을 붙였어요.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해서 당시의 시대상하고 맞아떨어졌는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노래가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데요.

“나도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빨치산들은 이데올로기가 담긴 노래만 부르는 줄 알았는데….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씨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산으로 간 빨치산들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과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을 것’이라고요. 실제로 남부군의 일원이었던 어떤 분은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는 노래를 불렀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당국에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해서 오해를 풀 수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 사정을 얘기하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지요. 그러나 너무나 가혹한 시절의 연속이어서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노래가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면서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시인의 눈빛이 갑자기 흐려지는 것 같았다. 지난날의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나무 아래를 한동안 서성거렸다.

안성현과의 만남

1947년, 박기동 시인이 순천사범학교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남조선교육자협의회(일명 교협)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전교조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박기동 시인 등 6명의 교사가 교협에 가입한다는 서명을 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좌익성향이 꽤 강한 김선생이라는 사람이 적극 권유해 나머지 5명은 교육자들의 권익옹호를 요구한다는 차원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가입한 것인데, 이것이 세칭 ‘교협사건’으로 불거지고 말았다. 전원 순천경찰서에 잡혀가서 4개월 동안 구금됐다.

박시인의 일생이 사상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게다가 김구 선생이 북한을 방문할 때 그가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라는 헌시(獻詩)를 써보낸 일이 당국의 미움을 사게 돼 어디론가로 끌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영영 벗을 수 없는 좌경시인의 굴레를 쓰게 됐다.

구금생활을 마친 그는 6개월 정직처분을 받았다. 그때 시인인 항도여중의 조희관 교장이 그를 국어교사로 초빙했다. 항도여중을 명문학교로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치던 조교장은 경향 각지의 우수한 선생들을 수소문해서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일대에 평판이 자자한 음악선생 안성현이었다.

박시인은 그렇게 안성현 선생을 만나 단짝으로 지냈다. 국어교사와 음악교사의 성향이 비슷한 탓도 있었겠지만 조희관 교장이 두 사람을 유난히 아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빨리 친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향이나 출신학교 같은 개인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박시인은 언젠가 그가 도쿄음악학교를 나왔고 성악을 전공한 테너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안선생은 1년에 두 차례씩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을 발간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던 중 아끼던 김정희 학생이 죽었고 제자를 애도하는 곡을 만들기 위해 박시인의 허락도 없이 그의 습작노트에서 시 ‘부용산’을 택해 곡을 붙였다. 그는 ‘부용산’뿐만 아니라 박시인의 또다른 시 ‘진달래’에도 곡을 붙여 발표했다.

안선생은 박시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부친이 평양에서 고관으로 재직하고 있는데(1948년 당시는 공산정권 수립 전이다) 한번 만나러 가고 싶다. 도쿄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무용가 최승희도 만나보고 싶다”고.

안성현 선생은 보통 키에 눈에 띌 정도의 미남이었다. 성격도 온순하고, 매우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어디에서도 정치성향이나 사상적 경도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철저한 낭만주의자였다. 가족은 광주에 두고 조희관 교장의 집에서 머물 만큼 조교장이 보배처럼 아끼는 선생이었다.

1999년 광주 KBC에서 ‘부용산을 아십니까?’라는 TV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방송국에서 추적한 결과 안성현 선생은 1949년 9월15일에 항도여중을 의원면직한 것으로 돼 있었다. 일설에는 한국전쟁 중 최승희가 남하했을 때 “북쪽은 예술인의 천국이니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고 따라갔다고 한다. 또한 안씨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무용가)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그가 월북한 후 북한국립교향악단의 단장을 지냈다는 소문도 있다.

지금도 안성현 선생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음악밖에 모르는 그가 어떻게 빨치산 활동을 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서정성이 넘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곡을 붙인 로맨티스트였다.

53년 만에 나온 ‘부용산’ 2절

-안성현 선생이 한동안 단짝으로 지낸 사람이기는 하지만, 결국 월북했고 그 결과 박선생의 일생을 신산(辛酸)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부용산’을 작곡할 때 지극히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 노래 때문에 내 인생이 많은 곡절을 겪었지만 그건 나의 운명이지, 안선생을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안선생과 헤어진 후 그의 소식을 접한 적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다만 지난해 10월1일, ‘부용산 시비(詩碑)’ 제막식에서 안선생의 부인을 5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삯바느질을 해가면서 고생스럽게 살아온 그 분도 남편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만약 아직도 살아있다면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빨치산의 노래’라는 굴레를 쓰고 50년 넘게 숨어서만 불러야 했던 ‘부용산’이 몇년 전부터 잔잔한 감동으로 되살아나면서 이 시를 쓴 박기동 시인도 재조명되고 있다. 1997년 ‘민중가수’로 불리는 안치환이 조심스레 구전돼 오던 ‘부용산’을 취입하면서 시를 쓴 지 꼭 50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안치환의 음반에는 ‘부용산’이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다.

이어 1998년 2월14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김성우 에세이 ‘부용산 오리 길에’가 ‘부용산’을 명실공히 햇빛 아래로 나오게 만들었다. 김성우 당시 논설고문은 이 글을 통해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남도지방에서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 노래가 태어난 배경을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정리했다. 그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남도사람들만 부를 게 아니라 전국민이 함께 불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 노래가 1절밖에 없어 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박시인에게 ‘부용산’ 2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절이 나온 지 53년만에 ‘부용산’ 2절이 태어났다.

‘부용산’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연극인 김성옥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김씨는 오랜 세월 이 노래의 탄생배경을 알아보고 악보를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호주까지 건너와서 박기동 시인을 만났다. 그는 지난해 5월29일 목포에서 ‘목포 부용산 음악제’를 열어 목포에서 태어나 명맥을 이어온 이 노래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 처음 발표된 ‘부용산’ 2절은 소프라노 송광선씨가 그 가사만큼이나 가슴 저미게 불러 청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1절을 쓴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2절은 쉽게 써지던가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양했습니다. 더구나 ‘부용산’은 정형시가 아닌 자유시인데, 그걸 어떻게 억지로 꿰어맞출 수가 있겠냐고 김성우씨에게 되묻기도 했지요. 그래도 부탁한 분의 성의를 생각하고 내 운명을 바꿔놓은 시 ‘부용산’ 이후의 내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2절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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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 在호주 시인 > phillipsy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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