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고속도로주유원의 일기

제37회 1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 황호민

    입력2005-03-23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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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휴를 맞아 동해안 등 전국 유원지에 최대의 피서인파…. 전국 고속도로,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

    아련히 들리는 뉴스멘트가 남의 일처럼 귓가에 날아들었다. 정신없이 주유기 손잡이를 옮기는 중에 이마의 땀방울이 모여, 턱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톡 떨어졌다. 땀을 훔치려 고개를 드는 순간, 휴게소 광장을 가득 메운 차량과 구름 같은 인파….

    게다가 아직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차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고속도로가 붐빌 때 유난히 바쁜 사람 중 하나가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고달픈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뛰어다니다가 녹초가 돼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일어설 줄 모르는 주유원들에게 휴일이나 피서철이 주는 뉘앙스란 일반인이 갖는 그것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여름은 경제사정도 어려워졌고 날씨도 예년보다 서늘한 편이라 피서인파가 줄겠거니 기대한 주유원들의 소박한 꿈은, 기가 막히게 날을 잡은 ‘피서철 특별 비상근무’가 시작된 첫날 사정없이 깨졌다. 기름을 넣기 편리하게 차를 잘 대주기만 해도 일하기가 훨씬 수월할 터인데, 운전자가 일단 주유소에 들어서면 주유원이 굽신굽신하며 다 해줄 줄 알고 있어 제멋대로 차를 세우는 통에 유도하기도 꽤 힘이 든다. 주유중에 운전석에서 내려 꼼꼼히 지켜보는 야무진 운전자는 극소수이고, 대부분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고개만 쏙 내밀거나 백미러를 통해 확인하고 요금 계산을 한다. 그나마도 뒤에 차가 밀려있건 말건 느릿느릿 행동하므로 우리는 더 안달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 주유원이 눈치챌 사이도 없이 차에서 빠져나가 화장실에 가서 한참만에 돌아오면 그 사이 우리는 허둥지둥 그 사람을 찾아다니거나, 볼이 부어 있는 다음 차 운전자에게 제 잘못인 양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하고 후진했다가 앞으로 빼도록 부탁한다. 다 정리되면 화장실 갔던 운전자가 의기양양해서 나타나니 얄밉게 보일 수밖에 없다.



    “화장실 가시려면 주유 마치고 한쪽에 댄 다음 가셔야지요. 다음 차가 밀리지 않습니까?”라고 책망하면, “오줌 마려서 싸겠다는디 어디 그럴 틈이 있남유? 이건 완전히 생리적 현상이유, 생리적 현상!”이라고 능청을 떨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유순서가 어긋나 뒤차가 먼저 끝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몇 분을 기다리지 못해 수선을 피우는 통에 주유원과 근방의 사람들은 짜증날 수밖에 없다. 그렇듯 차량이 많아지면 더욱 바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가 죽기보다 담담해지는 주유원의 미묘한 표정은 경력이 주는 달인의 징표가 아닐까?

    실제로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근무하는 사람 중엔 유독 노년층이 많다. 우리 주유소도 사오십대가 대부분이다. 가끔씩 새파랗게 젊은 애도 들어오지만 며칠 하다가 배겨내지 못하고 나간 자리에 또 다른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어느 고속도로 주유소엔 아예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들만 일한다고 한다. 일이 고된 것은 둘째 치고 여기저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연륜이 가미된 무던함이 필요한 것이다.

    에어컨 바람에 더위는 까맣게 잊다가 가끔 운동 삼아 한 바퀴 주유소를 돌아보고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것저것 거침없이 지시하는 사무실 사람에게 주유원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재떨이 좀 비워주세요”

    “오늘 본사에서 감사 나올지도 모르니까 유리창 닦고, 화장실 좀 청소하세요.”

    “차가 뜸할 때 대기실에서 잡담만 하지 말고 주유소 바닥에 수퍼타이물을 풀어 박박 문지르세요.”

    “고속도로 주유소 평가에서 아주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분발하시고 손님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세요.”

    사무실 사람은 나이 든 주유원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애쓴다. 하물며 자기 돈 내고 기름 팔아주는 손님의 태도는 어떻겠는가?

    “여기 재떨이 좀 비워주세요.”

    주유중 운전석에서 거침없이 내게 들이민 재떨이를 허리 굽혀 받아들어 재를 털어내고 건네주며 바라보니 운전자는 검정 선글라스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보이는 민소매 차림의 아가씨다. 앳된 얼굴로 담배를 노련하게 피우고 있었다.

    “주유소에서 담배 피면 안 되는데요, 손님.”

    이런 당연한 주문도 주유원은 오히려 눈치를 보면서 해야 할 판국이다. 그래도 그 아가씬 눈살을 한번 찌푸렸을 뿐 금방 비벼꺼서 별일 없었지만 얼마 전에는 덩치가 인왕산만한 남자손님에게 그 말을 했더니 담뱃불은 끄지도 않은 채,“그럼 그만둬, 이 자식아” 하고 버럭 소리치며 기름도 넣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망연자실한 표정도 잠깐, 공교롭게도 그 광경을 목격한 총무가 나를 부르더니 어떻게 했길래 손님이 왔다가 그냥 갔냐, 그런 식으로 일하면 같이 일 못한다는 둥 온갖 말을 퍼부으며 핏대를 올렸다.

    일당 3만원

    저녁 여덟시 야간조와 교대하는 시간에 근무를 끝낸 조는 홀가분함보다 걱정이 앞선다. 교대와 동시에 그날 판매량을 결산하게 되는데 게이지에 나타난 주유량과 판매 금액을 똑같이 맞추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근무한 주유원이 물어내야 하고 남을 경우에는 역시 똑같이 나누어 ‘담뱃값’이라며 호주머니에 넣는다. 돈 제대로 받으면 모자랄 리 없으리라고 추측하겠지만 실제로 딱 들어맞기가 쉽지 않다. 휴가철이나 명절 등 차가 밀리는 날에는 주간에만 판매금액이 2000만원에 이른다. 주유원 두세 명이 큰 돈을 셈하다 보면 잔돈 거슬러줄 때, 수표 바꿀 때, 카드 결제할 때…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가능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초보자나 아르바이트생이 끼일 때 잘못되어 5, 6만원의 차이가 날 경우가 있는데 역시 그 책임은 고스란히 주유원의 몫이다.

    그래서 가끔씩 수고한다며 거스름돈을 받아가지 않는 손님에게나 아예 팁으로 얼마간 내밀고 가는 손님에게는 유난히 정중한 인사를 올리게 된다.

    일반 국도변 주유소와 마찬가지로 이곳 주유원에게도 시간제로 급여가 지급되는데 차이가 있다면 용역회사가 고용한 체계이므로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이 적용되고 급여통장으로 자동입금된다는 점이다. 시간당 2400원으로 책정해 하루 열두 시간 일하면 3만여 원 받는 셈인데, 마감할 때 5만~6만원을 변상하게 되면 영락없이 ‘돈 물어주려고 취직한 꼴’이 되어버린다. 그런 우리의 가여운 처지와는 반대로 고용하는 업체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적으로 손실을 보전할 수 있으므로 용역회사를 선호한다. 노동조건이나 안전사고 등에 책임이 없고, 반대로 근무가 불성실하면 통보하여 용역회사가 처리하도록 하니 보통 편리한 경영방식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은 없고 권한만 주니 부리는 사람이 마음껏 거드름을 피울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일반회사에서 비정규직 직원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가 큰 이슈로 떠오르는 요즈음, 그보다도 훨씬 못한 조건에서 숨죽이고 있는 용역회사의 근로자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튼 우리 주유원들은 능구렁이가 다 되어 여러가지 악조건들을 두루뭉실하게 헤쳐나가고 있다. 종일 기름냄새에 머리가 아프고 살갗이 따가울지라도 일과 후에 몇 푼의 ‘담뱃값’을 손에 쥐고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우리에겐 순수함과 작은 성취에 여유로울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다. 그와는 반대로 5000원 이상의 돈을 나누어 물게 되면 볼이 잔뜩 부어 속상해하며 같이 근무한 사람끼리도 서로 ‘네 탓’아니냐는 미묘한 눈길을 보내게 된다.

    밤에 당당해지는 주유원

    가을로 접어들면서 소슬한 바람과 들녘의 풍요로움이 깃들어 중부고속도로 오창주유소 역시 오봉산 산자락이 검어지면서 고고한 추야(秋夜)를 맞았다. 부잣집 상차림 뺨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주유소로 내려온 나는 몸이 꽤 가뿐한 상태다. 얼마 전부터 저녁 여덟시에서 다음날 아침 여덟시까지 야근을 하고 있는데 주간에 비하여 차량이 훨씬 적을 뿐 아니라 자정이 넘으면 교대로 두 시간씩 눈을 붙일 수 있어 동료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 야근 배치는한 주유원이 갑작스럽게 그만두어 시간표가 바뀌는 바람에 주어졌으므로 내심 기분이 만점이었다. 실질적인 본사인 고속도로 관리공단이 제공하는 숙식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하다. 우리와 똑같은 급여를 받는 주방아주머니가 풍족한 찬거리로 기량을 뽐내고 주유원 중 유일하게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잠자리를 제공받은 나는 과할 정도의 널찍한 방을 쓰고 있는데다 다른 시설도 좋아 지내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다. 고속도로 주유소의 숙식 수준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주유소의 운영업체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난 그런 곳에 있었다.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작한 야근은 상쾌한 바람결과 함께 점점 깊은 밤을 향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주유원이 겪는 독특한 경험은 주간보다 야간에 많은데 그것은 밤이 주는 여유와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짧은 가시거리 때문이리라. 또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사람을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려놓아 겸손하거나 당당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한낮에 주위에 차도 많고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일부 손님이 자기 모습을 과시하려는 듯 큰소리 펑펑 치기도 하지만 일대일 상대를 하는 밤엔 그런 모습이 아주 뜸하다. 반면 숨죽이고 일에만 몰두하는 주유원도 밤에는 행동이 훨씬 당당해진다. 한번은 새파랗게 젊은 운전자가 먹고난 음식 쓰레기를 비닐봉투에 넣어 쓰레기통에 툭 던졌는데 건성으로 하여 제대로 들어가기는커녕 비닐봉투가 터지면서 음식물 찌꺼기가 주유소 바닥에 널브러졌다. 젊은 사람이 어디 할 짓이냐고 호통치니 그는 재빨리 내려와 쓰레기를 주워담았다. 주유를 마치고 젊은이가 수고하시라고 공손히 인사하고 떠날 때, 김형은 한쪽 손만 번쩍 들어서 흔들며, “이, 수고!” 하며 답례했다.

    서민들의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열정도 야근 때 훨씬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깊고도 깊은 밤에 수없이 상대하는 농수산물 수송 차량에서 생활의 고단함과 근면함을 함께 느낀다.

    “와! 파가 무척 싱싱하네요.”

    “맛도 되게 좋아라. 필요하다믄 한뭉텡이 주고 싶은디….”

    “말로라도 고맙습니다. 난 여기 이층이 숙소이고 집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당장은 필요없구만요.”

    “그러자. 남자가 객지에서 혼자 살라믄 외로울 때도 많을 건디 괜찮겄소?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으야 할건디.”

    파 한단 한단을 기가 막히게 쌓아 적재함이 미어지도록 실은 소형트럭 운전자가 기름 넣는 내게 무척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양반이… 어디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귀 안 먹었으니 작게 말하쇼, 라고 하려다가 엄연히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내가 어찌 손님에게 불평하랴 싶어 꾹 참았다. 아니, 언성을 높이는 대신 오히려 그의 장단에 맞추느라 넌지시 물었다.

    “올해 농사 꽤 괜찮지요?”

    “죽것당께요. 이건 완전히 인건비 까먹는 거라.”

    “그래도 파금이 많이 올랐다고 하데요.”

    “그것도 잠간여라. 파뿐 아니라 농작물 가격 어느 것이고 조금 올랐다 싶으면 시상 난리랑께요. 물가 비상대책 어쩌고저쩌고 창고물량 무제한 방출 어쩌고저쩌고….”

    전라도 고창에서 밤 아홉시에 출발했으니 무려 4시간을 운전석에서 꼼짝하지 못한 내 또래 농군의 푸념이 안쓰러웠고 그래서 하기 쉬운 말로 좀 쉬었다 가라고 권했다가 공연히 면박만 당했다.

    “성(형), 나 되게 바뻐라. 경매시간에 늦으면 책임질거라?”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되묻는 그의 말에 난 슬그머니 말꽁무니를 뺐다. 어둠 속에 다시 서울로 차를 몰아야 하는 그는 막 떠나려다가 뭘 잊은 듯 고개를 쏙 내밀고 이어 흰 비닐봉투에 담긴 삶은 달걀을 억지로 떠넘겼다.

    “서울 가면서 먹으라고 집사람이 싸준 것인디, 손이 커서 되게 많이 삶았어라. 요새는 여자 세상이고 남자는 완전히 돈버는 기계랑께요. 주유하다가 출출하면 드셔라. 참, 소금은 오다가 어디서 분실했응께 알아서 하더라고 잉.”

    유달리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농부의 표정이 고단하지만 아주 행복해 보였다.

    휴게소의 넓디넓은 주차장에 이 밤도 변함없이 빼곡히 들어선 차로 빈 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개구리 같고 어찌 보면 메뚜기 몸통 같기도 한 차가 늘어서 숨을 돌리고 있다. 승용차보다 화물차가 많아지는 현상은 밤이 깊어질수록 뚜렷한데 그 모습이 꼭 수송부대 집결한 듯 가지런하다. 여기서 서울까지 시간 반 소요되는 걸 알기 때문에 여섯시 이전에 도착할 계획으로 그쯤에서 한두 시간 눈을 붙일 요량인 것이다. 아침 여섯시까지 적용되는 대형차량의 고속도로 통행료 심야할인 혜택을 받으려는 심산이다. 운전자는 휴게소 매점에서 간단한 참을 먹고 운전석이나 의자 뒤의 좁은 공간에서 눈을 붙인다. 여섯시까지 서울에 도착하려면 늦잠을 자지 말아야 하므로 주유소로 찾아와 우리에게 몇시까지 깨워달라고 부탁하는 운전자들도 있다. 이들은 한밤에도 깨어 있는 주유원이 아주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차량번호까지 메모해 두며 그 약속을 지키려 하지만 느닷없이 차가 밀리거나 동료와 사전 통보가 안되어 못 지키는 수도 있는데 여지껏 운전자가 쫓아와 왜 깨우지 않았냐고 불만을 터뜨린 적은 한번도 없다.

    차가 뜸한 시간에 대기실에서 트럭이 모인 광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종종 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는 걸 볼 수 있다. 일행은 일행인데 부부는 아닌 듯한 둘 사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다정하게 거닐다가 휴게소 앞이나 가로등 아래 환한 곳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멀어져 있다.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가지만 늘 궁금하다.

    야근은 보통 일주일 주기로 하게 되는데 마지막날 비번이 되어 휴무다. 야간조로서는 설레는 마음과 이틀 후에 훨씬 일이 많은 주간근무를 서야 하는 부담이 섞이게 된다. 또 나 같은 경우 한달에 네번 있는 휴무를 비번날 다음으로 잡아 모처럼 휴가기분을 내어 고향에 다녀온다. 그래서 오늘 같은 야간근무 마지막날은 각별한 기분에 젖게 된다.

    휘발유값 떼먹은 신사

    북새통이던 한낮의 고속도로도 어둠이 깊은 새벽 두세시 경에는 차량이 띄엄띄엄 있어 한적한 느낌을 준다.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다가오는 졸음을 쫓느라 나중에 해도 될 신용카드 전표를 정리하는 중에 소리없이 검은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부리나케 뛰어나가 운전자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주문량을 물었더니 점잖게 손가락을 세우며 가득 넣으라고 하였다. 중후한 겉모습에 걸맞게 연료통 용량도 큰 모양이었다. 5만5000원의 휘발유 요금이 나오자 운전자는 지갑을 찾으면서 영수증을 끊어달라고 하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굽신하고 영수증을 떼러 달려갔다. 늘 있는 일이라 기계적인 수순으로 신속하게 끝내려 했는데 그 밤에는 그렇지 못했다. 영수증을 끊는 그 짧은 시간을 틈타 고급 승용차는 순식간에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내뺐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뒤를 쫓았다. 다른 쪽에서 서울로 향하던 레저차량이 쏜살같이 내달리는 검정색 승용차와 소리치며 쫓아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급브레이크 잡는 소리가 ‘끼이익’ 하고 허공에 퍼졌다. 쌩쌩 차가 내달리는 고속도로 본선의 갓길까지 내달렸다가 한점 불빛만 남기며 사라져가는 검정색 승용차의 꽁무늬만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온갖 착잡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되돌아오는 나의 다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캄캄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 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수고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름값 떼먹고 달아난 운전자는 밉살스러울 정도가 아니었다. 일당 2만8800원인 나는 내일 당장 빠듯한 용돈을 쪼개 5만5000원을 변상해야 한다. 그래도 난 입술을 질끈 깨물며 침착하려 노력하였다. 오히려 함께 사는 사회에서 믿지 못할 일상의 단면을 깨달았고, 아울러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에서 겨우 이따위 사건이, 해찰하지 않고 앞길을 다지는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고 되뇌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결연한 의지와 상관없이 오창벌을 휩쓰는 세찬 바람결에 까칠해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날이 밝아 근무교대를 하면서 간밤의 사고가 알려지자 사무실에서는 “별놈이 다 있네…” 하고는 그만이었다. 나의 변상은 당연시하고,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료는 고속도로에 있다보면 한번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법이라고 위로하였다. 그래도 바른 소리 잘 하는 이씨 아저씨가 사무실로 들어가 몇 푼 벌지도 못하고 물어내야 하는 돈이 액수가 크니 사무실에서 조금 보조해 주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총무가 하던 말을 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이 잘못됐으면 당연히 근무자가 책임지는 것 아니에요? 또 나쁜 맘을 품고 돈을 빼돌린 다음 차가 도망쳤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비하여 야간에 관리자가 사무실이나 숙소에 상주하며 주유상황을 체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은 밤이 되면 모두 빠져나가 주유원만 남기고 자기들 임무까지 떠넘기는 판이다. 그날 이후 주유기 맨 앞쪽에는 주먹만한 돌멩이가 몇 개씩 놓여 있다. 나 못지않게 속이 상한 동료 하나가 또 기름값을 떼먹고 달아나는 차가 있으면 돌을 던져 유리창이라도 박살내자고 갖다놓은 것이다. 달리는 차량에 돌을 던진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천만하랴만은 실행 여부를 떠나 거친 일을 하지만 순박함을 잃지 않은 주유원을 그렇게까지 모질게 만드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사은품 받으려는 행렬

    기름값을 떼먹고 줄행랑친 운전자를 대신하여 그만큼의 돈을 물어내고 주유원끼리의 성토가 있고… 그러면서 아무일도 없었는 듯이 평소로 돌아오나 싶더니 어느새 소슬해진 바람을 타고 추석이 성큼 다가왔다. 뒤꼍에서 내다뵈는 들녘의 벼 베는 모습이 마냥 평화로울 때 주유원들은 만날 때마다 “며칠간 죽어났다”고 입을 모으며 긴장하였다.

    때 맞춰 정유회사 사은행사까지 겹쳐 선물을 나누어주는 일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명절에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이 얼마나 많은지는 주유소에서 치르는 사은품 행사의 광경에서 알 수 있다. 사은품인 각티슈가 50개들이로 포장되어 대형트럭으로 운반될 정도다. 행사중 사은품을 받아가려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보면 어디고 사람 사는 모습이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주유원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분배에 차이가 난다.

    예상대로 명절 연휴 첫날부터 귀성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요즈음엔 서울과 지방이 따로 없어서 상행선이나 하행선의 붐비는 정도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가을이라지만 아직 햇살이 따갑고 운동량이 많다보니 자연 나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젊은이, 땀 닦고 이 아이스크림 좀 들어요.”

    한 승용차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내 모습을 안스러이 여겨 아이스크림을 줄 때는 코끝이 찡했다. 고객을 친절하게 맞느라 목청껏 인사하며 굽신거린다 해도 손님과 마음과 통하지 않으면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우리 주유원에겐 워낙 감독의 눈이 많아 이를 따질 겨를이 없다. 단순기능직이란 인식과 저급한 대우와 피동적인 직업의식이 합해져 모든 이의 발이 된 차량에 원동력을 제공해 주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우리 일에 떳떳하지 못하다. 그런 의식으로 위축돼 있는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넨 어른의 말씀은 경각심을 주기에 앞서 고맙기 한량 없었다. 주유소에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는 배려야말로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정을 느끼게 하는 인품의 하나라고 믿는다. 운전석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쓰레기를 버리거나 재떨이 비우는 일조차 명령조로 말하는 운전자에겐 주유원의 인격은 대수롭지 않다. 쌔고 쌘 주유소에 자기가 들어갔다 하면 칙사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

    차수리 소개비로 부수입

    “주유를 마쳤습니다. 아이스크림 잘 먹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노신사에게 건네는 나의 인사말이 전에 없이 정중하다. 그 분 역시 과분할 정도로 고개 숙여 답례하고 헤어졌는데 그 일 하나로 연휴 첫날의 고달픈 작업이 내내 상큼하게 이루어졌다.

    “여보세요. 혹시 근처에 차 펑크 때우는 곳 없어요?”

    근무교대시각이 가까워질 무렵 회사원 차림의 청년이 기웃거리며 내곁에 다가와 물었다. 강원도 강릉까지 가는 중에 갑자기 차에 이상이 생겼다며 꽤 당황한 표정이다. 그의 낙담한 표정과는 달리 그런 부탁을 받은 주유원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된다. 주유원 대기실 벽면에 빼곡하게 붙은 스티커엔 펑크 수리센터 연락처가 수두룩하다. 국도와 달라서 카센터를 찾기 어려운 터라 전화하여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취급하는 수리차량에게 연락해 준다. 반갑기는 그쪽도 마찬가지여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오창 인터체인지를 돌아와야 하건만 채 3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해 금방 수리해 준다. 그럴 경우 소개비 몫으로 3만원 중 만원을 떼어주는데 공시가격처럼 여겨져 누구 하나 군소리하지 않는다. 견인차를 불러줄 경우 2만원, 배터리 등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 큰 수리에는 3만원까지 부수입으로 챙긴다. 여기저기에 돈 물어내는 것이 만만찮은 판에 차수리에서 받는 소개비는 주유원의 가장 확실한 원조다. 또 항상 여기저기서 시달리는 주유원이 수리센터 사람에게만큼은 큰소리 펑펑 치며 기고만장해지는 모습도 재미있다.

    “우리한테 잘 보여. 안 그러면 전화고 뭐고 없는 줄 알아!… 다음에 올 때는 순대 좀 사오게.”

    아니꼬울 수 있는 우리의 말에 카센터 직원은 변함없이 고분고분하다.

    한번은 펑크 수리차를 타고 십리쯤 떨어진 고속도로 갓길까지 따라갔는데 그 수고스러움이 보통이 아니었다. 갓길에 아슬아슬하게 비켜있는 차 밑으로 들어가 바퀴를 떼어내고 스페어 타이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는데 좁은 공간이라 나사를 푸는 일부터 상당한 전문성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쌩쌩 내달리는 차를 지척에 두고 작업하려니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실제로 얼마 전 진천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큰 사고가 나 카센터 직원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시중에서보다 비싼, 아니 비쌀 수밖에 없는 수리비를 두고 바가지를 썼다고 억울해 하기보다 한번쯤 고속도로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한다.

    수리를 끝내고 내친 김에 그와 근처의 통동저수지로 갔다. 휴무인 나에 비해 언제라도 연락이 오면 뛰어가야 하는 그는 운전중에도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산중 오지에 그런 저수지가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통도저수지는 파랗게 보이는 맑은 물에 태고의 신비를 지닌 듯하였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빙어를 얼마간 사서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 빙어회를 맛보려는 참에 느닷없이 울려대는 그의 휴대폰이 우리의 호사를 방해했다.

    증평 인터체인지에서 하행선 쪽으로 5분 거리 떨어진 곳에 있는 차를 수리해 달라는 것이다. 빙어회를 눈앞에 두고 떠나야 하는 맘이 섭섭했지만 내 어찌 그의 돈벌이를 방해할 수 있을까? 펑크 사나이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부엌에 대고 소리쳤다.

    “아줌니, 내년에 와서 먹을테니 요리해놔요. 나, 가요.”

    “월급은 얼마나 받아?”

    차에 오르면서 도대체 고속도로에서 고장난 차를 누가 어떻게 알고 연락해 주느냐고 물었더니 수시로 오고가는 도로공사 소속의 고객지원단 차량이 연락해 준다고 하였다. 소개비는 생각지도 않는 그쪽은 연락만 해주고 뒤를 맡긴 채 또 고속도로를 순시한다고 한다. 그는 자기들이 있어서 고속도로가 항상 깨끗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기름을 넣어주지 않으면 모두 꼼짝 못한다고 했더니 과연 그렇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명절 연휴가 끝나면 주유원은 미뤘던 휴무를 즐기려 서두른다. 우리의 휴일은 주말과 공휴일과 명절이나 피서철에는 금지되며 평일로 잡되 하루 한명씩만 허용하므로 휴무계획표를 짜는 날이면 이해관계가 얽혀 낯을 붉히는 경우도 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고 남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둥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해도 너무 한다는 둥 고성이 오고가기도 한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갑작스런 일이 생기면 휴무일을 서로 바꾸어주므로 월말쯤 되어서는 휴무 일정표에 공표 가위표가 여기저기 뒤섞여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다. 평일만 휴무일로 잡을 수 있다보니 주말이나 공휴일의 의미가 여느 사람과 많이 다르다. 동료 하나가 이 직업을 가지면서 친구도 친척도 다 멀어졌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는데 점점 그 말에 동감하고 있다.

    난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 비번과 이어진 휴무 아니면 고향에 내려갈 엄두를 못 내고 대신 바깥에서 잠시 바람을 쏘일 뿐이다. 나의 외출지는 코앞에 있는 청주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서울일 때가 많다. 주유소에서 청주로 나가려면 한참 걸어나가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지만 주유소에서 멈춘 차는 대부분 수도권으로 가기 때문에 서울 가기는 아주 쉽다. 난 차를 얻어탈 때마다 인심 좋은 우리네 운전자의 진면목을 본다. 주유원 신분을 밝혔지만 초면이라 어색할텐데 여간해서 동승을 거절하지 않는다.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로 차에 올라 미리 준비한 담배 두 갑을 사례로 내놓는데 그럴 때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서 더욱 친근함을 느낀다. 그래도 신세를 져야 할 차를 고를 때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고급승용차는 어쩐지 기가 죽어 접근하지 못하고 주로 화물차 운전자에게 다가가 부탁한다. 그런 식으로 자주 서울에 가다보니 미사리에는 꽃시장이 있고 장안동은 차 고치는 곳으로 유명하며 낙원상가는 피아노로 명성을 날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보게, 주유소에서 월급은 얼마나 받어?”

    한번은 하남시로 빠지는 가구운반 차량을 얻어탔는데 소파 제작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운전자가 물었다.

    “건강보험 되고, 국민연금 되고 한 80 받아요”라고 말했더니 그러냐면서 뭔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파 만드는 일이 힘들어 여간해서 버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의자를 만들어 겉에 헝겁을 뒤집어씌운 꼴이라 대수롭지 않을 것 같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10년 따라다녀도 제대로 못 배우는 기술이 소파 만드는 기술이라고 말할 때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면서 은근히 기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주유에 목 매다느니 차라리 자기한테 와서 기술을 배우라 하였다. 고급기술자는 “200도 받고 300도 받지만 초보자는 70부터 쳐준다”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100만원 정도 생각해 본다고 말하며 언제 생각나면 전화하라고 명함까지 주었다. 소파 만드는 기술만 기술이고 주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에게서 서운함도 느꼈지만 스카우트를 제의한 점에 묘한 친근감도 가지게 되었다.

    훌쩍 떠나는 서울여행중에 받게 된 갑작스런 스카우트 제의가 그 자체로 유쾌함을 안겨주었다. 그와 헤어져 경복궁에 다녀오는 등 지금껏 서울의 꽤 여러 곳을 다녀왔다. 북한산, 잠실 야구장, 남산, 국회도서관…. 저녁 늦게 자장면 한 그릇 먹고 나의 주유소로 돌아올 때는 고속버스 기사의 기분에 따라 도착시간이 시간 반이나 차이난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청주행 고속버스를 타게 되는데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므로 바로 내가 근무하는 오창 상행선 주유소와 마주한 하행선 휴게소를 지나게 된다.

    “원래는 안되는데…”라고 말하며 잠시 휴게소 진입로에 차를 세워주면 그날은 아주 운이 좋은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세워드려요”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면 할 수 없이 청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간 다음 시내버스로 오창까지 가서 증평행 시내버스를 갈아타 겨우 우리 주유소에 이른다. 원칙을 고수하느라 단호하게 거절했을 뿐이니 미운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나의 숙소를 코앞에 두고 지나쳐야 할 때는 무척 약이 오른다. 그런 경로로 주유소에 다다르면 막 야근을 시작한 동료가 주유원 대기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뭐 안 사왔어?” 하는 말로 나를 맞는다. 가을의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겨울채비를 하는 풍경이 하나둘 나타난다. 정유회사에서 주유원 수에 맞춰 방한복을 보급하면 모두 제 몸에 맞는 옷을 찾기에 바쁘다. 하지만 두툼한 운동화는 각자 준비해야 하는데 신발 고르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보온도 문제지만 눈비에 얼어붙은 주유소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비싼 것은 바뀔 염려도 있고 여러가지로 불편해 꺼린다. 주유소 건축의 특성상 바닥에 떨어진 기름을 모아 흡착포로 걸러 폐기하므로 바닥은 전체적으로 경사졌으며 굵은 철근 심이 박인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거기다가 겉은 조밀한 모르타르가 발라져 있기 때문에 미끄러지기 쉽고 그때의 충격은 유달리 셀 수밖에 없다. 일하다 보면 종종 쿵 넘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또 호박 떨어졌구만” 하고 웃어넘기지만 본인은 정말 눈앞에 별이 어른거릴 정도다. 함께 주유원 생활을 하다가 얼마전 그만둔 이형은 막 주유 일이 손에 익을 무렵 바닥에서 미끄러져 디스펜서에 부딪혔는데 그 일로 허리가 ‘쇼크 먹었다’면서 열흘 넘게 침을 맞았다. 그런 이유로 운동화 선택이 중요하며 누군가가 어느 시장에서, 어느 백화점 앞에서 샀다고 새 신을 자랑하면 모두 목을 주욱 빼고 기웃거린다.

    장의차 주유하면 재수 좋아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다는 그 지역에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풍경은 지금까지의 통계를 깡그리 일축하는 듯하였다. 검은 하늘을 온통 하얀 눈으로 채울 것 같은 백설의 잔치! 캐노피가 넓게 설치되어 있지만 높이가 상당하여 바람에 실린 눈발이 사정없이 우리의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거기다가 줄기차게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 행렬… 하지만 주유원의 손길은 마치 기계의 움직임처럼 재빠르고 실수가 없다. 차량 한 대 주유가 끝날 때까지 옆에 붙어있을 겨를이 없으므로 차량 연료통에 주유기 손잡이를 끼워서 작동시키고, 볼 것 없이 다른 차로 이동한다. 그러면 다른 동료가 와서 마무리짓고, 한 사람이 카드기 체크하면 다른 사람은 첨가제나 워셔액을 주입하고…. 주유부터 요금계산까지 모두가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통합적으로 취급한다. 차가 밀리면 밀릴수록 고속도로 주유원의 몸놀림은 현란해진다. 한번은 대학에 다니는 아르바이트생이 왔는데 전에 일해본 주유소보다 꼭 다섯 배 힘들다며 혀를 내둘렀다.

    가끔 연료통에 끼운 손잡이가 제대로 걸리지 않아 빠질 때가 있는데 센서가 말썽일 경우 바닥에 떨어져도 멈추지 않고 기름이 좌악 쏟아진다. 그러면 우리는 기겁을 하여 작동을 멈추고 기름이 쏟아진 바닥에 쓰다버린 면장갑을 잔뜩 가져와 기름이 쏟아진 바닥을 대충 닦아내고 다음에 물청소를 한참 해야 한다. 청소하기도 힘들지만 그를 본 운전자가 기름 죄다 흘려보냈다고 수선을 피우면 또 얼마간 깎아줘야 한다. 난 가끔 주유중에 일어난 실수에 대한 손실을 꼭 보전하려고 하지 말고 슬쩍 눈감아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주유원으로서의 이기심일까?

    분주한 몸놀림에도 성탄절 전야의 차량행렬은 줄어들 줄 몰랐다. 들어오는 차마다 크리스마스를 맞는 설렘에 웃음꽃 일색이지만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얼른 교대시간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찢어진 운동화 사이로 눈녹은 물이 새어들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질꺽질꺽 소리가 났다. 그나마도 얼어붙었는지 소리가 나지 않더니 동상에 걸린 듯 따갑다가 무감각해진 정도였다. 갈아신을 신발도 변변찮고 바쁜 동료를 놓아두고 한참 빠져있기도 미안했다.

    아내와 딸 감춘 ‘노총각’

    주유원의 도움으로 자동차가 동력을 얻고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는 것을 볼 때 눈내리는 하얀 밤을 즐겁게 만드는 우리도 밝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믿는다. 그래도 기쁘기만한 행렬인지 알았더니 검정테를 두른 단조로운 색상의 차가 들이닥쳤다. 고개 들어보니 장의버스였다. 차 안에는 상복 입은 사람과 조문 온 사람 대부분 천장을 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다가도 자매인 듯한 아가씨 둘이 눈이 퉁퉁 부어 부둥켜안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 모습이 날 숙연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얄미운 나는 내심 기분좋은 예감에 흥겨워하였다. 장의차를 보면 재수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 운전자의 사고가 어느덧 나에게도 스며든 것이다. 언젠가 주유를 하다가 광장에서 바람에 날려온 만원짜리 지폐를 주운 날도 아침 일찍 장의차를 보았다. 도대체 죽은 자의 행렬과 기분 좋은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무슨 구실로라도 재미를 얻으려는 세상사람의 재치가 드러나 보인다.

    수많은 차가 우리 주유소를 거쳐 가지만 워낙 넓은 지역에서 모여들었다가 전국으로 퍼지는 판이니 특별하게 낯을 익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까 고속도로 주유소에서는 단골손님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주유에 이력이 난 고속도로 주유원이 막상 국도변 주유소에서 일하면 거래처 관리니 세차 같은 서비스 부분에서 큰 곤욕을 치른다고 한다. 하여간 크리스마스에도 쉬지 못하고 주유에 열중하고 있는데 우연히도 낯익은 차 2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형님, 30ℓ만 넣어유. 그나저나 장가 안 가요? 남자는 혼자 못 산다니까….”

    박스로 된 적재함에 무슨 햄과 소시지 선전문구가 쓰인 2t 트럭의 운전석에서 양군(君)이 예의 환한 미소로 물었다. 특별한 할인혜택이나 서비스를 해주는 것도 아닌데 이틀에 한 번꼴로 기름을 넣고 가므로 어느덧 흉허물없이 지내게 됐다. 가끔 그가 화물칸에서 꼬치나 맛살을 한 봉투 꺼내주면 우리는 횡재한 듯 표정이 환해지며 고마움의 표시로 사은품 남은 것을 건네주기도 한다. 몇 안 되는 우리 주유소 단골손님 양군은 나를 대할 때마다 결혼을 독촉하며 결혼생활의 이점을 늘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때가 아니야” 하고 넘어가지만 속으론 여간 켕기지 않는다. 나는 66년 병오년 말띠생 30대 노총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둘이나 있다.

    양군의 소시지 차 옆에 캡으로 씌운 1t 화물차의 아줌마 운전자도 단골이다. 청주 근교에서 큰 보신탕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개고기를 직접 고르고 운반하는 억척 아줌마다. 우리는 ‘개장사 아줌마’로 부르며 그 차가 들어오면 경계하게 된다. 항상 연료통 가득 찰랑찰랑하게 넣기를 주문하므로 꾸부정한 자세로 오래 있어야 하고, 바짝 다가와 우리 작업을 지켜보기 때문에 긴장하기 마련이다. 여장부의 말은 그렇게 해야 서울까지 물건 싣고 겨우 다녀온다는 것이다. 중간에 또 한번 기름을 넣게 되면 시간을 많이 뺏긴다며 여기서도 주유가 끝나자마자 “한가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며 급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사은행사 도우미들의 프로근성

    그러고보면 남들 다 깔깔거리며 크리스마스를 즐길 때 우리 주유원만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판단도 수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오랜만의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또다른 무리의 사람이 있어 오히려 균형잡힌 일상이 되지 않는가 싶다. 근로의 성취감을 아는 사람에게 웃음꽃 피우며 즐기는 휴일의 여유는 대수롭지 않다.

    새 세기를 맞는 밀레니엄의 해라고 엄청 떠들어댔으나 실제로는 소리없이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왔다. 연말연시의 차량 흐름으로 내내 분주했던 우리는 빨리 조용해지고 평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보통 때만 같아라” 하는 우리의 넋두리가 평상의 가치를 깨우치는 듯하였다.

    하지만 기쁜 날 즐거운 날은 왜 그리 많은지, 우리는 얼마 후에 결전을 앞둔 운동선수처럼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야 했다. 설맞이 준비로 휴게소에서건 읍내 거리에서건 기분내기로 부산하였다.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긴장하고 있는 주유원과는 달리 판매량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본사와 정유회사 움직임은 신바람을 타고 빠른 화면처럼 전개되었다. ‘설맞이 고객사은행사’를 벌이려고 우리 주유소에도 정유회사에서 도우미들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설기간 내내 가볍고 흥겨운 기분을 나누어주기 위해 분투해야 할 사람들이 주유소에 모였다. 연휴 내내 함께 일하게 될 도우미들은 이벤트사(社) 소속인데 깔끔한 용모를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고 마이크 사용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숙달되어 있다. 도우미들은 오전 아홉시에 딱 맞추어 나타나 오후 다섯시에 퇴근해 인근 여관에서 합숙한다. 시간에 철저해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다가도 정오가 되면 눈 깜짝할 새에 모든 행동을 접고 한시까지 점심을 즐긴다. 일당으로 치면 우리보다 서너 배 가량의 고수익을 올리지만 구매자의 까다로운 주문도 있고 경제난의 한파 이후 대우가 하향조정되어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연약해 보이나 프로의식이 강해 어떤 상황에서도 민첩한 행동과 적절한 말로 대응하는 적극성은 부러울 정도다.

    우리가 주유를 하는 동안에 그녀들은 당첨확률이 매우 높은 복권을 손님에게 긁게 하여 선물용 세제를 나누어주는 식이다. 주유원이 연료통에 기름을 채워갈 때마다 어김없이 도우미들은 운전자를 상대로 임무에 충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기로 한 주유 아르바이트생이 도착하지 않은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량이 밀리는 형편에 이르자 도우미들은 그 곱디고운 손으로 거침없이 주유기 손잡이를 들고 다니며 우리 일을 도왔다. 분명 오늘 처음 만지는 설비일텐데 금방 배우는 것은 영특해서일까, 임기응변의 기질이 특출해서일까?

    영어 한마디

    장갑에 기름이 묻으면 나중엔 살갗에 직접 배어 오랫동안 자국과 냄새가 남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얇은 면장갑을 한 켤레 더 끼는 요령까지 발휘하였다. 우리가 디스펜서 사이의 좁은 틈을 들락거리며 주유에 여념이 없는 동안에 그때마다 운전석 낮은 창문에 눈높이를 맞추느라 허리 펼 사이가 없다. 그 바쁜 중에도 고향이 어디냐, 영화 좋아하느냐 이런저런 사사로운 얘기를 맘껏 나눌 정도이니 역시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좀 사이를 두고 외양부터 색다른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우린 무슨 저런 차가 있나 궁금해 하였다. 운전석에서 금발의 외국여성이 고개를 내밀고 주유기쪽을 기웃거릴 때 내가 나섰다.

    “How are you doing? Wellcome to our gasstation. Nice to meet you.”

    (안녕하세요? 저희 주유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뜻밖에 들려오는 자기 나라 말에 그녀는 놀란 눈빛이었다.

    “How much gasoline do you want?”

    (휘발유 얼마 넣을까요?)

    재차 이어진 나의 물음에 그녀는

    “Full, full! You great!”(가득이요. 당신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손님맞이 인사를 하였을 뿐인데 내 곁의 도우미는 손님이 아닌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운전자는 목적지가 의정부라는 미국인 여성이었는데, 그녀 역시 영어로 제법 말이 통하는 나를 맞아 헤어졌던 오라버니라도 만난 양 핸들을 두드리며 야단이었다. 전국을 강타한 영어열풍이 어떻고저떻고 하는 판인데 종종 외국인과 만나야 하는 고속도로 주유원이 영어로 몇 마디했다기로소니 뭐 특별할까보냐 여기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니 주유중이던 다른 차 안의 손님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외국인이 탄 외제차가 멀어질 때 쭈욱 지켜보던 도우미가 엄지를 들어올리며 “최고예요” 하고 추켜주었을 때는 기분이 참 좋았다.

    “소장 나오라고 해!”

    하지만 주변 모든 상황이 그렇게 유쾌하게만 흐르진 않고 있었다. 주유원과 도우미가 콧등에 매달린 땀방울을 닦을 시간조차 없이 분주한 동안에 사무실 직원은 설날특집 TV영화를 보고 있었고, 총무는 아예 책상에 엎드려 코를 골고 있었다. 주유를 하면서 힐끔 들여다보는 사무실 안의 풍경은 도저히 한솥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나와서 차량유도만 해주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럴 만한 철이 없는 것인가?

    그런가 하면 동료 하나는 저쪽에서 기름값을 가지고 손님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휘발유 2만원어치 넣으라고 했다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만원어치를 더 넣은 것이다. 옥신각신하는가 싶더니 눈에 쌍심지를 세운 운전자가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장 나오라고 해! 당장 고발해 버릴까보다”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나 역시 그러겠지만 동료 역시 주눅이 들어 사무실쪽 눈치를 보며 고분고분해졌다.

    그러고는 손님이 이러시면 나중에 내가 혼난다는 둥, 마감할 때 그만큼 물어내야 한다는 둥 가여운 말로 사정사정하여 가까스로 5000원을 더 받아냈다. 나머지 5000원은 마감할 때 담뱃값이라도 남으면 채워넣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같은 근무조에서 함께 물어내야 한다. 어떤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소란을 피우면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행태가 꼭 우리 주유원에 국한한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쩐지 나 또한 매사에 자신을 가지기는커녕 점점 무기력해지는 느낌이 들어 씁쓸하였다.

    도우미들이 먼저 퇴근하고, 근무교대가 이루어지는 여덟시에 주야간 근무자 다섯 명이 함께 모였다. 인근부락에 사는 동료가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이라며 고기와 부침개를 가져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명절 기분을 냈다. 원래 주야간 교대근무가 이어지고, 하루 한 명꼴로 휴무를 맞기 때문에 다섯 명의 주유원이 함께 모일 기회는 쉬이 잡히지 않는다. 웃고 떠들며 종이컵의 음료수를 기울이다가도 차가 들어온다 싶으면 문가에 앉은 주유원이 마지못해 뛰어나가야 한다. 물론 눈치빠른 주유원은 저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좀 편히 앉아서 음식을 든다.

    화기애애한 주유원끼리는 흉허물없이 지낼 듯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마음 한구석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누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큰 소리로 그걸 들춰내기도 하고, 차수리센터 연락에서 생기는 소개비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유소에 불만이 있어 막 쏟아내면 후에 그 내용이 그대로 소장에게 알려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한번은 동료 하나가 홧김에 “본사에 찔러 여기 주유소를 엎어버리겠다”고 열을 올린 것이 알려져 그는 곤욕을 치렀다.

    그렇게 주유원 관리에는 치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임무에 소홀한 관리직 사람들이 더 밉살스럽다. 유류저장탱크에 넣을 휘발유 양을 잘못 체크하여 오늘 새벽 두 시간 가량 기름을 팔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유량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전날 쉽게 파악되건만 바닥이 드러나도록 TV만 보고 있느라 대목에 고속도로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별의별 일이 다 있는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냉철히 생각하면 별일 없는 것 같은 일상의 흐름이 계속되었다. 야근을 서면서 느끼는 한기에 어깨를 추스리는 정도가 낮아질 만큼 겨울바람의 매서움은 점점 날이 무디어 갔다.

    “어머! 아저씨, 여기 있던 택시 어디에 있는지 모르세요?”

    오랜만에 주유하는 차가 뜸하여 대기실에 앉아 좀 엉덩이를 붙이고 있나 싶었더니 한 아가씨가 다급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쫓아나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손님으로선 어이없고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청주에서 급한 볼일로 곤지암까지 택시를 대절해 가는 중인데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택시가 그대로 떠나버린 것이다. 핸드백도 두고 내린 터라 더욱 어쩔 줄 몰라했다.

    “아가씨,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혹시 차량번호나 운전사 인상 착의라도 생각나는 게 없나요?”

    그녀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울상이었고 나는 그런 일로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는지 숙고하고 있었다. 손님을 휴게소에 떼놓고 달아나버린 운전사가 있는 현실의 비정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을 해코지할 기사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았는데….”

    돈이 든 핸드백을 잃어버리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아가씨가 불쌍하고 답답해 보였다. 그녀는 다행히 하나 건진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가씨에게 대기실로 들어와 바람을 피하라고 했고 아가씨는 사양을 거듭하다가 들어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였다. 갑작스럽게 당한 곤경을 헤쳐나가려 애쓰는 그녀가 안쓰러웠고 마침내 달아난 택시운전사가 표적이 돼 비난의 대상이 됐다. 또 어찌할지 모르는 아가씨의 초조함과는 반대로 나는 머릿속으로 이 밤을 함께 뜬눈으로 지새며 어떤 인연을 만들지 모른다는 소설 같은 줄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캄캄한 밤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나면 주유원 대기실에 함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우리가 연락해 준 차수리의 당사자라면 우리가 잡아두기도 한다. 하지만 한참 여기저기 연락하던 아가씨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곤지암까지 여기서 택시타고 가야겠어요. 진입로에서 오빠가 기다린대요. 택시가 있으려나 모르겠네…”라고 말하는 아가씨의 얼굴에 피곤함이 서려 있다.

    “이런 곳에서 택시 잡기는 어려워요.” 하여간 우리는 찾아보기로 하고 휴게소를 빠져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피해 당사자인 그녀는 조용한데 비해 오히려 나는 그 몰염치한 운전사를 성토하느라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럴 즈음이었다. 한 영업용 택시가 주유소에 들어서면서 다급히 경적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어 급히 차가 멈추고 허둥지둥 기사가 달려왔다. 그는 무얼 물어볼 것 같았는데 같이 있던 아가씨를 보자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덥썩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도 놀랐지만 반가운 표정이 역력하였다. 바로 아가씨를 태웠던 택시의 기사인데, 한참 운전하다가 돌아보니 뒷자리에 손님이 없고 핸드백만 달랑 놓여있더라는 것이었다. 기겁을 하고 돌아오려니 고속도로 위라 할 수 없이 증평 인터체인지로 빠져 오창 고속도로 진입로로 돌아오느라고 늦었다 하였다. 주유중에 잠깐 차에서 내려 간단한 허리돌리기를 하며 몸을 푸는 동안에 화장실을 찾은 손님을 생각지 못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수심에 찼던 아가씨는 얼굴이 화사해지며 가방이 그대로 놓여있는 뒷자리에 올랐다. 막 차에 오르려던 운전자는 뭘 잊은 듯 내게로 내려오더니 냉수를 청했다.

    기름 뒤집어쓴 찰리 채플린

    “아무래도 물 한 잔 마셔야겠네. 한참 운전하다 뒷자리에 사람은 없고 가방만 있으니 완전히 무엇에 홀린 기분이더구만.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더라니까….”

    안도하면서도 아까 일에 몸서리치는 운전사에게 “모두 잘 되었다”고 좋게 말했지만 조금전까지 돈 가지고 줄행랑친 운전사라며 악담을 퍼부은 터라 내심 무척 미안하였다. 경쾌하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아직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은 사회의 일면을 본 듯하여 내 마음도 푸근해졌다.

    새 봄을 맞이하여 우리 주유소뿐만 아니라 휴게소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현재 고속도로 관리공단 소속인 주유소와 범양상사가 본사인 휴게소가 7월쯤 통합될 것이며 함께 다른 회사로 바뀔 것이란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도 노동조합이 결성돼 있는 휴게소 직원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으나 엄연히 일용직 근로자며 용역회사 소속인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사주가 돼주지 않는 관리공단이 얄밉기도 하지만 보급품이며 숙식제공 등에 인색하지 않아 우리는 지금 그대로 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또 난 개인적으로 고속도로 관리공단이 기름 넣기에 몰두하는 나에게 삶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은은한 희망까지 잃지 않게 해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 격주로 발행하는 관리공단 사보인 ‘새길’지(誌)에 매달 꼬박꼬박 짧지 않은 나의 글을 싣고 이름 석 자를 밝혀준 것이다. 여러모로 우리 주유원들은 그대로 남기를 소망했으나 이미 통합은 상당부분 진척되고 있다. 관리공단 소속에서 새로운 민간업체로 바뀌는 과정에 이른바 구조조정 여파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예상으로 우리는 몹시 위축됐다.

    미모의 김양에 대한 기억

    우리의 사정이야 어떻든 벚꽃놀이니 어린이날 행사니 밀려드는 차량은 더욱 느는 느낌이었다.

    “으, 차거!”

    한참 주유를 하느라고 바쁜데 탱크로리에서 지하저장탱크로 옮기는 작업을 돕던 동료가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얼굴이고 옷이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 웃음이 나오려 했으나 그게 물이 아니고 기름인 것을 알고 빨리 샤워하도록 재촉했다. 기름 주입이 끝날 무렵 탱크로리에 남은 기름을 모으려고 압축공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있는데 거기서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탱크로리가 힘을 너무 줬단 말이야.”

    사람 좋은 그는 그 정도의 푸념만 하고 이층 목욕탕으로 뛰어올라가 샤워하였다. 한참의 샤워를 마치고 아무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윗도리는 작아서 꽉 조이고 바지는 너무 커서 아랍권 사람의 차림 같기도 하고 지팡이를 든 찰리 채플린의 매무새 같기도 했다. 손님들 중에도 가끔씩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우리 세 명의 근무자는 그대로 일하다가 근무교대시각을 맞기 바랐다. 당사자는 아직도 기름이 배인 피부가 따가워서 가만 앉아있기가 더 고역이라 했지만 아마 그건 바쁘게 돌아가는 눈 앞의 정경을 외면하지 못한 핑계였으리라. 나와 또다른 동료는 그가 빠짐으로 해서 우리에게 돌아올 일의 가중도를 셈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열심히 일해 교대시각에 결산해 보니 4000원이 남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기름에 젖어 고생한 친구에게 2000원, 두 사람은 1000원씩 나누어가졌다.

    꼭 담뱃값이 생겨서가 아니지만 이틀에 한 번꼴로 휴게소 안의 담배 판매대를 찾는다. 휴게소에서 담배 파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므로 부득이 거기 직원과도 자주 만난다. 바로 옆에서는 원두커피를 판매하는데 깊고 그윽한 향기가 일품이다. 거기에 매장직원은 무료로 마실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하긴 ‘탈무드’에도 과일 따는 사람이 작업중에 따먹은 과일값은 급료에서 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담배를 사러 그곳에 가면 한울타리 안에서 지내며 안면이 있는 나에게도 선뜻 권하곤 했다. 함께 고생하는 사람끼리의 정이 스며든 커피 향은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특히 내 고향은 논산이고, 그녀의 고향은 예산이라는, 그러니까 충청남도가 고향이라는 알량한 공통점을 들어 유난히 날 환영하던 미모의 김양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상큼하게 남아 있다.

    그녀를 편의점 카운터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내게 “이봐요, 왜 여기 올 때마다 인사하세요?” 하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주유원이 되고부터 누구에게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그녀는 유심히 보아온 것이다. 그 일로 안면이 익으면서 관리공단 사보에 내 글이 실리면 쪼르르르 달려가 보여주었고, 작품평을 해주어 고맙노라며 그림엽서나 문화상품권을 나누어 갖기도 했다.

    이별은 소리없이 이루어진다더니 어느날 갑자기 떠난 그녀이기에 한동안 매사에 기운이 떨어졌다. 어찌어찌하다가 알게 된 그녀의 집 주소로 언젠가 우리 사이의 우정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었다.

    그 달 어버이날 전야는 주유소로서는 보기드문 호황이었지만 야근을 선 나와 다른 주유원 한 명에게는 무척 고생스런 날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주말을 이용해 고향에 다녀오는 자식들 차량으로 명절 못지않은 북새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래도 아직까지 부모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단 말이야. 저 차 모두 고향에서 엄니 아부지 한테 문안드리고 오는 차 아니겠어?”라고 읊조리는 동료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는데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평소엔 비어 있는 주유소 앞 공터까지 주차범위가 넓어졌다. 거기다가 같이 따라나선 아이들까지 깔깔거리며 오락가락하는 통에 더욱 부산하였다.

    밀려오는 먹구름

    “그나저나 저 차가 다 빠져나가려면 오늘밤 휴게소나 여기나 땀 꽤 흘리겠는데요. 이따가 눈붙일 사이도 없겠어요.”

    “할 수 없지 뭐…. 해보는 데까지 해야지.”

    우리의 그런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몰아닥치는 차량으로 주유소가 꽉 찬 느낌이었다. 그렇게 차가 갑자기 몰려들면 주유원의 기술적인 판단이 가미되어 기름 들어가는 속도를 달리하여 넣어주게 된다. 그냥 막무가내로 서두르다간 주유가 끝난 뒤차가 먼저 나가려고 경적을 울려대거나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려고 용을 쓰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도 벌어지게 된다. 실제로 엊그제는 뒤차가 먼저 나가려고 급히 출발했다가 연료통에 꽂힌 주유기 손잡이가 부러지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디스펜서 유리가 깨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다가 운전자는 잘못을 주유원에게 돌려 오히려 호통을 쳤다. 그 차에 주유를 한 동료는 여기저기서 핀잔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부러진 주유기 손잡이 부품 교체 비용으로 3만5000원을 변상해야 했다.

    그래서 차가 들어오면 물흐르듯 순서대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눈치를 척 보아 카드나 수표로 결제할 것 같으면 주유중에 부리나케 카운터로 달려가 미리 계산해 놓으며 최대한 시간을 줄여야 밀리지 않는다. 간간이 다 끝난 후에 세금계산서나 영수증을 요구하는 손님이 있는데 그때는 차를 한참 앞쪽으로 빼서 대기하게 하고 그 사이 서류를 떼어 또 거기까지 뛴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한 무리씩 작업을 마칠 수 있어 틈을 내 대기실에 앉아 있거나 담배를 몇 모금 빨 수도 있다.

    그렇듯 동분서주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마구 눌러대는 경적소리다. 종일 자동차 소음을 귀에 담고 살지만 경적소리를 들으면 유달리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이 난다. 휴게소 입구에 ‘경적금지’라는 팻말이 선명하건만 남 볼 것 없이 자기만 보라는 듯 소음을 내는 것이 무척 볼썽사납다.

    주유를 하다보면 멀찍이에서 경적을 울리며 들이닥치는 차가 있는데 그러면 우리 주유원 중 하나가 “왜 빵빵거리고 지랄여”라고 푸념하면 나머지 사람도 함께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경적이 울리면 숙소나 사무실에 있는 관리자들이 “어떻게 하길래 차가 시끄럽게 구느냐?”하며 핀잔을 주는 것도 큰 부담이다. 마음은 그래도 경적을 울린 차에 쫓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이유를 알아보면 영수증을 끊어달라거나 길을 묻는 정도의 사소한 것들이 많다. 차를 한쪽에 빼고 운전석에서 내려 카운터까지 와서 점잖게 묻는 운전자가 우리 주유원에겐 유달리 멋지게 보인다.

    땀 흘린 다음의 휴식이 주는 성취감은 꼭 대가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휴무일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나의 발길은 늘 솜털처럼 가볍다. 하지만 오늘의 귀향은 너무 무겁다. 내일 나는 그곳의 지방법원에 출두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 피고인 자격으로…. 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곳은 농협이다.

    형제처럼 여겼던 까마득한 후배에게 1000만원 대출 보증을 서주었더니 원금은 커녕 이자까지 고스란히 밀려 있다. 그러고도 이제와서 그처럼 뻔뻔해지다니…. 그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 과정에서 농협으로부터 받은 수모,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 등으로 많은 밤을 설쳐야 했다. 한달에 80만원 받는 주유원으로서 몇 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지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암담해 하기도 했다.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절대로 본받지 말아야 할 일본식 금융기법인 연대보증제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웃이 피눈물을 흘렸을까? 오직 은행 편리에 맞게 만든 세기의 악법을 반드시 철폐하고 신용도와 상환능력에 따른 일대일 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뻔한 판결을 기다리며 고속도로로 되돌아온 나는 쭉 뻗은 도로 위로 달리는 차들을 보며 활력을 얻었다.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요즘 들어 부쩍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 불꽃처럼 정신없이 분주한 일과중에 삶의 줄기까지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화창한 봄날의 끝무렵부터 휴게소와 주유소에는 특별한 볼 일이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휴게소와 주유소가 함께 공개입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앞일을 걱정하며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사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처우를 개선할 방도를 찾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일용직 근로자의 처지기도 하지만 그나마 맡아 관리하던 용역회사마저 부도 직전의 상태다. 그러는 중에 우리 중 한 명이 새 일자리를 찾아 나가 그 공백을 메우기도 쉽지 않았다. 보통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내어 사람을 구하지만 일이 쉽지 않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므로 일주일이 넘도록 문의하는 사람조차 없을 때가 있다. 하여간 사람을 구할 때까지 휴무도 미루고, 사무실에서 도와준다 하지만 말뿐이어서 주유원의 고생은 더욱 심하다. 사람을 구한다 해도 손에 익을 때까지는 손해를 함께 감수해야 하므로 초보자와 함께 일하기를 아주 꺼리는 형편이다. 그래도 며칠만 지나면 기름 넣는 것은 초보자도 금방 익혀 차이가 나지 않아 사람들은 주유를 단순 기능직으로 인식하고 있다.

    새 식구로 들어온 청년이 좀 오래 있을까 싶더니 한달 보름만에 그만두었다. 주유 경험이 있어서 일하기에 문제가 없지만 전공인 신학(神學)을 살려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인원이 변동돼 버거울 때 그것과 아랑곳없이 여름을 맞는 신고식이라도 하듯 꾸물꾸물하던 구름이 엄청난 비를 뿌렸다. 비오는 날의 주유소는 생각만으로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만큼 주유원을 힘들게 한다. 캐노피의 넓은 지붕이 있어서 언뜻 비나 눈에 영향이 없을 듯 보이나 높게 설치되어 있고 사방이 펑펑 뚫려 있어 바람까지 동반하면 가장자리 부분은 눈·비에 무방비 상태다. 그것도 모르고 어느 운전자가 차를 대는 통에 온통 빗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주유원도 마찬가지로 비오는 날 작업 시작할 무렵에는 그런대로 비옷을 갖춰입고 모자도 차양이 넓은 걸로 쓰는 등 구색을 갖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땀이 나고 옷깃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 축축해지면 비옷이고 모자고 다 벗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면서 비오는 곳과 안 오는 곳을 왔다갔다 하다보면 머리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된다. 그런 날씨에는 감기몸살에 걸리기 십상인데 그럴 때를 대비하여 우린 만반의 예방조치를 한다. 일과후에 재빨리 목욕하고 미리 감기약을 먹고 꼼짝않고 이불 속에 누워 다음날 출근시각에 맞추어 일어난다. 내 방의 사물함에도 감기몸살약이 항상 준비돼 있다.

    언젠가 프로야구 선수와 주유원의 공통점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답은 부상을 입지 않고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이 나쁘면 연봉이 깎이는 프로야구 선수보다도 더 엄격하게 주유원에게는 패시브를 적용하여 월급이 깎이는 정도가 아니라 당일 수당을 한푼도 못받는다. 만일 아르바이트생이 대신 하게 되면 결근하는 주유원이 일당 3만원씩 계산해 준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고, 자르고 싶으면 당장 자를 수 있는 고용관계도 비슷해 고속도로 주유원은 나름대로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프로야구 선수가 실책을 범하듯 우리도 가끔 실수를 한다. 특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때는 비 막기에 급급하여 아무래도 행동이 민첩하지 않게 된다. 아무튼 그날은 연료통 뚜껑 문제로 종일 심란했다. 한번은 고급 승용차의 연료통 뚜껑을 닫지 않고 출발시켰는데 몇 시간 후 그 차의 주인이 서울에 도착하여 사실을 알고 전화한 것이다. 휘발유에 불이 붙어 폭발하면 어쩔 뻔했냐는 둥 연료통으로 빗물이 새어들어 엔진이 망가지면 500만원 물어내야 한다는 둥 우리를 엄중하게 문책하는 것부터 장사가 잘 되려면 서비스가 다른 곳과 달라야 한다는 경영에 대한 충고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사무실의 관리자도 기회다싶어 그걸 두고 한참 힐책하였다.

    이어 미처 닫지 못한 뚜껑을 봉투에 넣고 포장해 사무실 직원이 읍내까지 나가 소포로 부쳤다. 소포 운송요금 3000원은 근무했던 주유원이 물어내야 한다. 거기에 우리끼리도 과연 누가 뚜껑을 닫지 않고 보내 애매한 사람까지 싸잡아 욕 먹게 하느냐고 각자 불만이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보면 미처 자신이 실수하고도 모를 경우가 있다.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인 만큼 더 왈가왈부하지 말고 웃어넘기자고 말하려다 동료의 꿍한 눈빛을 보고 괜히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내가 의심받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저녁 무렵엔 1t 트럭 두 대가 양쪽으로 나란히 들어와 한 대는 주유를 마치고 먼저 가고 다른 한 대는 대기중이었다. 연료통 뚜껑이 닫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차라도 차종마다 뚜껑 크기가 조금씩 다른데 앞차와 뚜껑이 바뀐 것이다. 앞차는 원래보다 조금 큰 것이어서 무리없이 돌려닫고 가버렸으나 나중의 차는 아무리 해도 주둥이에 맞지 않았다. 또 그런 실수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리라 각오하며 눈매가 무서운 운전자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서울로 물건 떼러 간다는 가방 장수 청년은 목을 긁적이며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형씨 어쩔 거유? 빨리 뚜껑을 닫아야 갈 것 아뇨?”

    “아이고, 이걸 어쩌죠? 시간이라도 있으면 나가서 사올 텐데….”

    미안하고 멋쩍은 얼굴로 그의 처분만 바라는 듯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이마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뭘 생각하는가 싶더니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일 이맘때 이 길로 내려오는데 저기 하행선 휴게소에서 기다릴 테니 뚜껑이나 어디서 잘 구해보쇼. 소리를 지르든 전화를 걸든 알아서 하리다.”

    고마운 그의 말에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뚜껑의 크기와 구조를 살펴보고 쓰다버린 목장갑 두 켤레를 가져와 연료통 주둥이를 뒤집어씌운 다음 쓰레기통에서 라면봉지를 가져와 덧씌우고 고무밴드 여러 가닥으로 친친 동여매 응급조치를 했다. 한바탕 호통을 치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는데 떠날 때 미소까지 지어준 젊은 운전자의 얼굴이 무척 따뜻해 보였다.

    “이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 잔”

    뚜껑 구하는 것도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차에 대해 잘 아는 단골 카센터 직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다행히 이튿날은 휴무여서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아침을 먹자마자 그의 차를 타고 뚜껑을 찾아나섰다. 청주 시내 몇 군데의 폐차장에 들러, 구하고자 한 것뿐 아니라 다른 종류도 여러 개 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말로만 듣던 폐차장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타이어가 빠지고 엔진이 떨어져나간 찌그러진 차가 그나마 강력압축기에 의해 납작하게 눌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저만큼의 분량밖에 안되는 금속의 내부에 사람이 타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뚜껑 구할 때는 내가 배낭을 메고 있으면 그가 주인 눈을 피해 쇠꼬챙이로 잽싸게 빼어내 배낭 속에 집어넣는 식이었다. 그의 말로는 주인이 봐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지만 빚진 것도 있고, 걸핏하면 와서 쑤셔대 미안하다는 것이다. 다른 뚜껑도 구한 이유는 주유할 때 간혹 뚜껑 없는 차량을 상대하는데 거기에 끼워주기 위해서다. 자기 차 연료통에 뚜껑이 없는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은 운전자에게 우리가 구한 뚜껑은 크게 소용될 물건임에 틀림없다. 물론 3000원 정도의 요금을 받기로 했으며 1000원은 가장 수고한 카센터 직원에게 주고, 나머지 2000원은 주유원 몫으로 돌릴 것이다.

    서둘러 주유소로 돌아와 하행선 휴게소를 바라보며 어제의 마음씨 좋은 가방 장수를 기다리는데 과연 두 시간쯤 후에 하행선 휴게소 잔디밭의 소나무 사이로 그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유소! 주유소! 뚜껑!”

    내가 얼른 나아가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뚜껑을 챙겨 그에게 갔다. 4차선 고속도로를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곳까지 가기엔 족히 10분은 걸린다. 휴게소 뒤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와 한참 외곽으로 걸어 고속도로 지하통로를 거친 다음 하행선 휴게소 뒷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그를 찾아 아는 체를 하고 연료통 옆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임시로 봉한 마개를 치우고 딱 맞는 것으로 갈아끼우니 차가 훨씬 깔끔해 보였다.

    “수고했소. 이것도 인연인데 저리 가서 차라도 한잔 합시다.”

    가방 장수는 나를 이끌고 벤치로 가더니 앉아있으라고 하고 더 물을 것도 없이 자판기의 커피 두 잔을 뽑아 왔다. 우리는 거기서 정말 그것도 인연인 듯 정다운 얘기를 한참 나누었다.

    무서운 기세로 치닫는 여름에 우려했던 대로 주유소와 휴게소가 민간업체로 넘어가는 과정이 가시화되었다. 우리 주유원들은 짬짬이 얼굴을 맞대고 앞으로의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꿈에 그리던 노동조합 편입에 열을 올리다가도 노조 자체를 결사 반대하는 새 주인의 성질 건드리지 말자고 결론지었고, 겨우 기름이나 넣으면서 골치 아플 필요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관리공단 직원도 인사 발령이 나서 떠나고 우리 중에도 한 사람이 짐을 꾸리고…. 하여튼 일자리를 옮기는 과정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그 번거로움과 착잡함을 짐작할 것이다. 혹시 그만두게 되면 어디로 갈 것인지 서로 궁금해할 만큼 모든 게 어수선하였다. 한 동료는 조립공장에 갈 것이라고 하고 논 수십 마지기를 가진 알부자 함씨 아저씨는 농사에 전념하리라 하였다.

    귀신 나오는 방

    “어이, 자네는 계속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

    나에게 던진 물음에 응대를 하기는 했는데 힘이 없었다.

    “그럼요. 난 이 길로 대성할 거요. 차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나는 희망에 부풀어오른다니까요.”

    “에이 이 사람, 도대체 희망은 무슨 얼어죽을….”

    함께 웃으며 넘어가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흐르고 있었다. 희망없는 직장생활이라….

    하나둘 새 주인이 될 업체의 이사가 시작되며 주유소 2층에 있는 주방이 치워지고 큰 방은 사무실로 개조하였으나 현관 옆에 있는 내 숙소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내 방은 주유소 외형의 모양새에 따라 반원 형태였다. 거기에 장롱과 옷걸이가 놓여 있고 몇가지 잡다한 물건이 널브러져 있으나 넓어서 별로 표시나지 않는다. 온통 유리벽이라 사방이 내려다보이고 커튼을 잘 설치해 햇살이 문제되지도 않는다. 방음이 잘 돼 종일 이어지는 차량의 소음도 크게 들리지 않는다. 처음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난 그 방에서 오히려 차소리가 크게 들리기 바란 적이 있다. 그것은 주유소에서 오래 전부터 일한 이씨 아저씨가 겁을 잔뜩 주었기 때문이다.

    “주유소 생기고 두번째로 온 김소장이 처음 이 방을 썼는데 회식 마치고 방에 들어서니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방 한가운데에 턱을 괴고 누워 있더래…. 그리고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눈이 없더래….”

    이씨 아저씨의 말에 나는 긴장해 물었다.

    “그래서요. 그게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야, 귀신이지. 그날 난 아래에서 주유하고 있었는데 그 뚱뚱한 소장은 기겁을 하고 2층 계단을 때굴때굴 굴러내려왔다니까.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더라고….”

    휴게소와 주유소의 통합

    그때의 다급함이라도 나타내려는 듯 회상하는 아저씨 목소리가 커졌다.

    “에이,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으려다 나도 그냥 넘어가기가 싱거워 말을 보탰다.

    “그럴 수도 있지요. 유령은 원래 엑토플라즘과 영혼이 결합된 형체인데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엑토플라즘인 까닭에 형체가 불분명해 눈이 없을 수도 있거든요.”

    이번엔 사태가 역전돼 이씨 아저씨가 오히려 내게 바싹 다가왔다.

    “무슨 플라즘? 그럼 귀신이 있긴 있는 거야?”

    “그럼요. 횡사한 사람은 죽은 줄 모르고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 사람이 죽으면 초혼제를 지내, 너는 죽었다고 알려주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어쩌면 하얀 옷 입은 할아버지는 여기가 집이었을지도 몰라요.”

    내 말에 아저씨는 박수를 한번 치며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맞아. 중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산을 싹 밀었는데 여긴 완전히 공동묘지터였다고….”

    그렇게 서로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무섭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와 그 얘기를 나누고 난 후 난 밤에 숙소에서 하얀 옷 입은 할아버지가 턱 괴고 누워 있었다는 곳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폈고, 창 밖으로 쌩쌩 내달리는 고속도로 위의 차량소음이 더 크게 들리길 바랄 정도였다.

    그런 사연이 있다 쳐도 나에게 집이나 다름없는 숙소이기에 정이 붙어서 언젠가는 주유소측에서 “옆의 큰 방으로 옮기고 싶으면 옮겨라”고 했을 때도 마다하였다. 또 어느 면에서 근로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은 그에게 신체적 안식을 주어 결국 생산성 향상이라는 기업목적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한 것 아닌가?

    회사가 바뀌는 사이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느라 노조를 결성한 휴게소 직원의 시위가 있었으나 새 경영진의 적절한 조치로 그 이상의 집단행동은 없었다. 모든 것이 평온하게 진행되면서 마찰을 꺼리는 새 경영주의 모습을 보는 듯해 적이 안심하였다. 본격적인 인수 이전에 새로 부임하는 지점장과 상견례를 가졌는데 신분보장은 책임지겠다고 단언했으며 화합과 단결을 강조해 새로운 의욕까지 얻었다. 이미 한식구가 된 휴게소 직원과 한 식당에서 식사할 때 지점장 이하 새 업체의 간부진도 함께 수저를 들며 애로사항을 듣기도,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근로자와 한마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변화의 조짐이 실감됐다.

    휴게소와 주유소에 그런 큰 변화가 있어도 외형적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는 듯하였다. 휴게소 매점에서는 변함없이 국밥, 커피, 오징어 돌구이, 테이프 등을 팔고, 우리는 변함없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주유하기에 바빴다. 주인이 바뀌고 간판이 바뀌고 갖가지 달라지는 주유소 분위기에 모범을 보이려는 듯 우리는 보란듯이 노련한 솜씨를 발휘했다. 한낮의 뜨거운 여름햇살이 유달리 나를 힘들게 했지만 오며가며 지나는 새로운 회사 간부들의 격려가 있기에 힘이 솟았다.

    변기 하나에 수십 명 몰려

    사실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내게 여름은 언제나 고역이고, 여름 지내기 묘안을 짜느라 바빴다. 일과가 끝나고 밤에 숙소로 들어가면 창문을 모두 열고 모기향을 세 개나 피우며 서늘한 바람의 끝이라도 잡으려 했다. 시원하게 쭉 뻗은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때문에 한번도 조용한 밤을 보낸 적이 없지만 날씨만 빼면 어떤 상황에도 잘 적응하는 편인데 그런 약점을 아는지 더위는 오히려 기세를 부렸다. 집에 있는 배구공만한 선풍기가 유난히 머리에 그려졌다.

    며칠 후에 이어진 야근에서는 더위뿐 아니라 수도 없이 달려드는 모기떼의 극성에 주유하기가 힘들었다. 모기나 벌레 살충제에 석유류를 타 유인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휘발유나 경유 냄새가 나는 주유소에는 더욱 많은 모기가 날아든다. 그나마 엊그제 사무실에서 미리 그런 고충을 알고 대형 전기 모기퇴치기를 설치해주 훨씬 정도가 덜한 상태기도 하다. 여러모로 근로자를 생각하는 후덕함이 배어나오는 듯하였다.

    그런 흐뭇함에 취할 겨를도 없이 밤 두시경에 대형 관광버스가 무더기로 들어오는 통에 가만 있어도 흐를 땀을 부추겼다. 어디 마을단체로 놀러갔다 오는중이라는데 차가 기우뚱거릴 정도로 아주머니들이 손바닥을 펴든 채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뒷자리에는 골아떨어진 아저씨들이 아무 곳에나 머리를 기대고 빽빽 울려대는 테이프 소리와 아무 상관 없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유를 기다리는 세번째 차에서 우루루 화장실 가려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사방이 왁자지껄하였다. 주유중에 뛰어가 주유소 화장실 용량이 너무 작으니 조금 걸어서 휴게소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두 손을 휘저으며 부탁해야 했다. 그러다가 주유기쪽으로 돌아오면 그쪽으로 향하던 사람 중 하나가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면 연쇄적으로 모두 방향을 돌려 주유소 화장실로 몰려든다. 몇 기의 변기가 있는 곳에 수십 명이 몰려드니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주유원 청소거리가 잔뜩 널려있다.

    주유중에 운전자가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들이 서해안 바닷가에서 오는중이라는 걸 알았다.

    “아줌마들 힘도 좋아. 바닷가에서 여기 오도록 쉬질 않아요, 글쎄!”

    “그나저나 젊은이도 고생 많소. 누구는 놀러다니는데 누구는 기름이나 넣고…. 어디 피서는 다녀왔소?”

    “피서라니요. 우린 그런 거 몰라요.”

    “그럴 새가 없겠구먼… 하긴 나도 아직 피서 못 갔어.”

    “아이고, 아저씨도 참! 관광버스 기사라면 매일 가는 게 피서 아니에요?”

    “아닐세. 난 단지 사람을 거기까지 갖다주고 갖고오는 사람일뿐이야. 여태껏 노는 사람 보기만 했지 한번도 놀아본 적이 없어.”

    피서지를 가보지 못했다는 철학자 관광버스 기사와 헤어지고 난 뒤의 한여름밤은 바람도 약간 서늘해지고 한바탕 땀을 쏟은 후라 상쾌한 분위기였다. 더구나 관광버스 기사가 건네준 땅콩과 오징어가 있어 입도 즐거웠다. 밤새 모기 뜯겨가며 고생해도 그맘때가 되면 그처럼 기분 좋은 이유는 곧 닥칠 근무교대 때문이다. 근무가 끝나면 샤워를 하고 찬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정오까지는 마음껏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흥이 났다. 정오라고 시간을 정한 이유는 그때가 점심식사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향의 집에 있을 때는 내 맘대로라 오히려 식사시간이 불규칙했는데 이곳에 오고부터는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빼놓지 않았다.

    계획대로 근무교대하고 난 숙소로 올라와 식사하고 샤워하고 아무것도 깔지 않은 시원한 바닥에 벌렁 누웠다. 간밤의 주유작업이 고되었는지 이내 코를 골았다. 좀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주위에 웅성웅성 사람이 모여들어 아쉽게도 단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우리 회사의 사장이 여남은 명은 될 듯한 부하직원을 이끌고 휴게소 전체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지점장의 소개로 처음 보는 사장에게 엉겹결에 인사하고 어느새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치고 반사적으로 베개를 치웠다.

    “됐어, 됐어. 야근해서 피곤할텐데 그냥 자도록 해요.”

    그 말로 시작한 사장의 지시는 내게 가슴벅찰 정도의 행복감을 주었다. 더위가 심한데 근로자 복지 차원에서 숙소에 에어컨을 설치하라는 말이 떨어졌을 때 지점장은 이왕이면 용량이 큰 걸로 준비하겠다고 답변했다. 서너 군데 중소기업 사주가 조합을 만들어 투자한데다 현장에서 일해본 사장들이라 그런지 근로자 생각을 보통으로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며칠 후에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올라보니 분리형 에어컨을 깔끔히 설치하여 내 입을 쫙 벌어지게 하였다. 간단한 스위치 조작으로 만드는 시원한 바람을 쐬며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 같은 예감까지 들었다.

    정체불명의 기름

    이미 한 회사직원이 된 터라 휴게소 직원과 한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여러가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 일에 간섭이 없고 모든 걸 자율에 맡기고 있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항상 움츠리며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용직 근로자인 우리 주유원은 이미 자율이란 단어를 모르는 처지였다. 또 그런 식으로 근로자의 불만이 없도록 하는 이번 우리 회사는 뭔가 남다른 점을 가지고 있어 크게 번창할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에 따라 휴게소 직원의 얼굴엔 싱글벙글한 표정이 역력하고 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인 듯이 보였다.

    하지만 노조가입을 원천 봉쇄당한 우리 주유원에겐 회사가 자리잡힐수록 점점 엄중한 규율이 나타났다. 조회 때 간부들은 점점 큰 목소리로 장사가 잘 돼야 대우도 좋아지는 것이라며 차가 저만치서 들어오면 목청껏 인사하며 뛰어나가라는 둥, 쓰레기통과 재떨이 비우는 것은 손님이 청하기 전에 해야 할 기본이라는 둥 핏대를 세웠다.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유류 취급으로 우리 주유원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폴사인에 표시된 정유회사가 아닌 다른 정유회사 기름을 받아서 파는 것도 모자라 무도색 차량을 이용한 정체 불명의 기름까지 끌어들이는 거였다. 우리가 의아해하자 주유소 업무를 관리하는 사람은 이미 원래의 정유회사가 알고 있으니 문제될 것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름 똑바로 넣어주고 돈이나 제대로 받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유류업계의 요지경을 보는 듯해 싫었다. 남의 회사 기름이 자기 회사 이름으로 팔려도 거기서 거기라는 꼴이니 차별성을 나타내려고 혈안인 각종 광고의 진실이 어디까지인지 모를 일이다. 어느 회사 제품이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기름으로 많이만 팔아 단기간내 순이익을 내려는 전략으로 도덕성을 생각하지 않은 기업이론에 충실한 꼴이다.

    스님과 수녀원의 주유 영수증

    그런 복잡한 기류가 흐르는 판에도 차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우리 주유원 역시 기름총을 들고 다니며 임무에 충실했다.

    “휘발유 3만원어치 넣어주시고, 다음에….”

    운전자는 안경 낀 스님이었고, 나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운터로 달려갔다. 승려나 수녀가 운전석에 있는 경우엔 100%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두 영수증을 요구한다. 그걸 알기 때문에 무슨 말이 없어도 카운터로 가서 영수증을 떼어놓는 버릇이 들었다. 사실 일반회사의 지출내역에서 유류비 지출 영수증만큼 믿지 못할 것도 드물다. 2만원어치 넣고 3만원짜리 영수증 끊는 등의 편법도 모자라 아예 백지 영수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명이라도 손님을 더 유치해야 하는 우리 처지에서는 거절하기 어렵다. 실태가 그러하므로 운전자가 성직자인 경우에는 그야말로 정직하고 정확한 영수증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고보면 작은 부분일지 모르지만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확립하려면 종교인처럼 성스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유를 마치고 스님께 영수증을 떼어드렸더니 합장하고 받아들며 깊은 인사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뒷자리에서 깔깔거리며 떠들기에 바쁜 고등학생들에게 무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학생들이 먹고 있는 과자부스러기였는데 스님은 봉지째 받아서 내게 내밀었다. 모두가 함께 나누어먹는 아름다운 세상임을 깨우쳐주는 듯하였다.

    그들이 가고 비닐봉투 속의 비스킷과 초콜릿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지나던 동료가 꺼내먹었다. 내가 과자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주려면 많이 좀 주지” 하며 한술 더 떴다.

    그런 따뜻한 일도 더러 생기는 주유소 현장이지만, 그와 반대로 막후에서는 바람잘 날이 없기도 하다. 하긴 여기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주유소가 평온해 보이지만 실은 골머리 썩고 있다고 들었다. 점점 의기소침한 분위기에서 주유원의 급여를 관리해온 용역회사마저 위기의 선을 넘어 완전히 무너져 우리는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됐다. 급기야 우리는 업주가 선정한 또다른 용역회사에 억지로 취직하는 꼴이 되었다. 업주가 선정한 용역회사이니 얼마나 자기의 기호에 맞출 수 있겠는가? 그런 체계에서 일용직 근로자인 우리 주유원은 소속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도 얕보게 된다.

    “이번 회사는 뭔가 다르다면서?”

    언젠가 휴게소 전체를 인수한 우리 회사가 근로자 복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휴게소 노동조합과도 대화로 걸림돌을 피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소리내 말한 것을 동료가 기억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새로운 회사가 본격적인 주식회사로 자리잡으면서 우리의 기대는 점점 허물어져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난 기업이윤을 남기려는 일반 민간업체의 당연한 행보려니 여겼다.

    뜻밖의 통보

    차차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경영방침에 충실하려 했고, 하여 회사가 선정한 새로운 용역회사에 취업용으로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한 주민등록등본 2통과 예금통장 사본도 준비했다.

    그런중에 나는 참으로 뜻밖의 통보를 받았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회사를 창립한 사장단이 그곳에 오면 자기 집이면서도 쉴 곳이 없으니 지금의 내 숙소를 그들 숙소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난 인근 부락에 따로 방을 얻으라는 통보였다. 그런 얘기를 전하며 나의 얼굴을 떳떳하게 쳐다보지 못하는 관리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장이 직접 근로자 복지 운운하며 에어컨까지 설치해준 근로자 숙소를 폐쇄하는 것에 어이가 없다가 이내 지금까지의 과정에 복선이 깔려 있음을 직감했다.

    고속도로 주유원으로 아파도 아픈 내색하지 않고 일해야 한 달에 80만원 버는 마당에 방까지 얻어가며 일에 미련을 둘 여유와 이유가 없으므로 그 자리에서 쉽게 사직을 결심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내 숙소에 에어컨이 설치될 때부터 해고가 추진되고 있었음을 믿고 싶지 않다. 취업과 사직이 빈번한 주유원에겐 그에 걸맞게 절차 역시 간단한 법이다. 갑작스럽게 사직이 결정된 다음날 송별회나 퇴직금 없이 난 고속도로 주유소에 처음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배낭을 등에 메고 덩그라니 큰 가방 하나 든 채 그곳을 훌쩍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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