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가리켜 흔히 인종의 용광로라고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과 이들이 서로 결합하여 탄생한 혼혈인종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소위 ‘미국인’을 형성한다. 사람들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문화와 문명의 융합을 낳는다. 실제로 미국 문명은 세계 여러 지역 문명들간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복합문명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대중음악, 즉 재즈, 블루스, 록이다. 이 음악은 대단히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됐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럽의 화성음악과 아프리카의 리듬이 결합한 결과다. 유럽의 발달한 음악이론과 다양한 악기가 아프리카인의 정서와 영감,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영혼(soul)과 만나면서 이러한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흑인들이 많이 사는 빈민가 출신의 한 청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들의 리듬에 공감하면서 로큰롤의 전도사가 되어 새로운 음악을 백인사회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문화의 우상이 되면서 로큰롤은 이제 더 이상 흑인의 음악이 아닌 미국의 대중음악이 되었다.
서울 여러 곳에서 문을 열어 우리에게 친숙해진 세계적 브랜드 스타벅스 역시 로큰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화간 융합의 산물이다. 그것은 커피 맛에 정통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커피상의 미각, 낭만이 넘치는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의 친화력, 그리고 뉴욕 빈민가에서 피어난 아메리칸 드림의 생생한 결합에 의해 태어났다.
소설 ‘모비딕’에서 따온 이름, 스타벅스
스타벅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맛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타벅스의 생명은 바로 이 맛에 대한 고집에서 출발한다. 미국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아무래도 고급문화보다는 대중문화, 대량소비의 땅이다. 고급 원두커피보다는 맥스웰의 나라인 것이다.
커피 맛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원두의 질이지만 원두를 어떻게 배전(焙煎)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맥스웰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강배전이 정착하지 못했으며 약배전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포장식품 회사들은 많이 볶을수록 무게가 줄기 때문에 약배전을 선호한다. 또한 고열에서 볶는 과정을 견뎌내려면 ‘아라비카(arabica)’ 같은 고품질의 원두가 있어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 값싼 ‘로부스타(robusta)’ 종을 취급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약하게 볶은 커피 맛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커피의 참 맛은 강배전에 있다. 원두커피는 강하게 볶을 때 참다운 맛과 향기가 우러나온다. 잘 볶은 커피를 다크로스트 커피라고 하는데 스타벅스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 미국인 중에서도 소수만이 이 맛을 알고 있었다.
시애틀에 정착한 조그마한 소매업체 스타벅스 커피는 바로 이 강하게 볶은 커피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고속성장이나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었다. 이 회사를 창업한 제리 볼드윈과 제브 시글은 각각 영어 및 역사교사였으며 또 한 사람 고든 보커는 작가였다. 이들은 모두 커피 마니아인데 제대로 된 맛의 커피를 찾아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아예 가게를 창업하기로 했다.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이들은 ‘보잉버스트’라 불리는 시애틀 사상 최악의 불황기에 가게를 열었다. 시장의 동향이 아니라 오로지 좋은 커피를 먹고 싶어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스타벅스란 이름 역시 교사와 작가 출신인 이들 동업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타벅스는 바로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이름이다.
스타벅스의 세 창업자가 모든 것의 원조는 아니다. 원조 뒤에는 또 다른 ‘진짜 원조’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스타벅스의 정신적 지주인 네덜란드인 알프레드 피트다. 그는 암스테르담 커피상의 아들로 인도네시아, 동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커피에 대해 남다른 미각을 가지게 되었다. 십대에 그는 암스테르담의 큰 커피수입상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자라서 그는 커피무역상이 되었으며 커피 맛으로 원산지와 품질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그때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1950년대부터 고급종인 아라비카 커피 원두를 수입했으며 1966년에 ‘피츠 커피 앤 티’라는 상점을 개업하고 운영했다. 그는 커피 원두를 팔면서 커피를 마치 와인처럼 다루었다. 스타벅스가 원두를 사오는 곳이 바로 알프레드 피트의 상점이었다.
스타벅스의 창업자들이 피쿼드의 일등항해사 이름을 사명(社名)으로 한 것도 대양을 향해하던 무역선, 커피를 운반하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고 결국은 근대세계를 창출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었을까. 모비딕에서 스타벅스는 흰고래를 광적으로 좇는 에이허브 선장의 열정에 대해 사사건건 이성적으로 제동을 거는 인물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에이허브가 밧줄에 엉켜서 흰고래와 한몸이 되어 바다로 빨려 들어가자 그때까지 가장 이성적이던 스타벅스가 돌연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선원들에게 흰고래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주인공 이슈메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원이 바다에서 몰사한다.
아버지의 실직이 남긴 상처
이제 맨 마지막으로 오는 또 하나의 요소가 바로 뉴욕 빈민가 출신의 아메리칸 드림의 살아있는 화신, 하워드 슐츠다. 스타벅스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워낸 하워드 슐츠는 전형적인 빈민가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의 저서 ‘Put your heart into it’에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가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실직이다. 1961년 하워드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발을 위로 올린 채 한달 이상 집에서 쉬어야 했다. 일을 하지 않으므로 봉급도 받을 수 없었고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이라 일을 할 수 없었다. 하워드의 가족은 수입이 전혀 없는 데다가 의료보험도, 노동자 재해보상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이 사건은 어린 하워드의 마음에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긴 것 같다. 하워드는 후일 스타벅스의 CEO가 된 뒤 계약직 사원에게까지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다른 대기업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 종업원들의 신뢰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이와 같은 선이 굵은 정책으로 연결된 것이다.
트럭운전, 공장노동, 택시운전 등 블루칼라 일을 전전하던 하워드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공하기 전까지 끝내 집 한채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의 스타벅스가 대성공을 거두기 직전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하워드가 빈민가를 빠져나오게 된 것은 그의 정신보다는 육체 덕분이다. 하워드의 학교에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미식축구팀은 원정경기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하워드는 노던 미시간 대학교의 스카우트 담당자의 눈에 띄어 미식축구선수로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에게 찾아온 첫번째 기회였다. 그는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고 처음으로 뉴욕 바깥으로 나가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이후 그는 훌륭한 플레이를 하지 못했고 장학금은 중단되었다. 그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마쳤다. 졸업성적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해마플라스트라는 대기업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했으며 탁월한 실적을 올려 승승장구, 임원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결혼했고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즐기는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두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순수한’ 커피 맛을 찾아서
해마플라스트의 영업담당 부사장으로 재직중이던 하워드는 1981년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시애틀에 있는 조그마한 소매업체가 이례적으로 한 종류의 드립식 커피 추출기를 대량으로 주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기 퍼콜레이터나 드립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고 있는데 이 회사는 왜 구식 제품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애틀을 방문했으며 이것이 결국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그는 스타벅스 커피 맛을 한번 보고는 이것은 커다란 사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별 생각 없이 미국식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강배전한 아라비카 커피 맛을 보고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다면 전체 미국인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스타벅스의 비전을 보았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힌다. 하워드 슐츠의 엄청난 야심에 겁을 집어먹은 스타벅스 경영자들이 그를 거부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스타벅스의 창업자들은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커피를 좋아해서 회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기업 부사장 출신의 인물을 영입해서 회사가 새로운 바람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워드가 스타벅스의 창업자 제리 볼드윈을 설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하워드의 열정에 감복한 제리는 1982년 마침내 그의 입사를 허락한다. 7만5000달러의 연봉과 다국적기업의 부사장이라는 권위, 회사가 제공하는 승용차와 비서를 버리고, 자신의 주거지에서 3000마일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소매업체에 합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워드 슐츠의 아메리칸 드림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미 잘 정비되어 있는 대기업 조직의 조그마한 나사가 되기보다는 자기 꿈을 실현하는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커피상의 고집, 문학과 역사 교사 및 작가가 모인 조그마한 가게는 커피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자기들이 갖고 있는 맛을 전세계에 개방하고 이를 퍼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한 신념과 추진력이 필요했다. 바로 그 자리에 뉴욕 빈민가 출신의 하워드가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타벅스는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회사였지 커피숍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손님들은 커피를 사가지고 가서 집에서 끓여 먹었다. 커피 바를 개장하자는 아이디어를 추진한 것은 물론 하워드이다.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에스프레소 바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 이상의 곳이다. 그곳은 앞뜰의 연장이자 가족개념의 연장으로서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서 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은 단지 커피를 마시고 갈 뿐인 미국의 커피숍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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