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가의 화제는 온통 민주당 경선 릴레이와 한나라당 분란 사태다. 여당에서는 올해말 치르는 대선의 후보가 되기 위해 경선이 펼쳐지는 지방으로 몰려다니고, 야당에서는 탈당과 이회창 총재와 측근 비판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서 내분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데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는 최근에 헌정사상 상당히 주목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3월8일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 국회법 개정안에 따라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이 그동안 소속해 있던 민주당을 탈당했다.
지금까지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이긴 하지만 사실상 청와대의 내정에 의해 결정되는 편이었기 때문에 대통령과 집권여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권력의 눈치를 보는 국회의장이 ‘날치기 통과’에 앞장서야 하는 눈꼴 사나운 풍경도 여러 번 보여줬다.
그러나 이번 국회법 개정안의 통과로 국회의장은 재임시 당적 없이 국회를 운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법의 제정과 통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이만섭 국회의장을 3월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장실에서 만났다. 이의장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국제의회연맹(IPU) 제107차 총회 참석과 이집트 모로코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의 공식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3월 임시국회가 본회의를 한 번도 열지 못한 상황에서 국회의장이 3월11일부터 16박17일간의 ‘장기외유’를 떠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이의장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의장비서실에서는 이의장이 헝가리 방문 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마들 대통령으로부터 ‘헝가리 대십자 훈장’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청와대나 집권여당 눈치 볼 필요없어
훤칠한 키의 이의장과 악수를 나누고 난 뒤 “헝가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느냐”는 인사성 질문을 하자 이의장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1955년에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내가 연세대에 다니고 있었어요. 헝가리의 자유를 지켜주자며 학생의용군을 조직했지요. 세계적인 여론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래서 당시 김용호 국방장관을 찾아갔는데 ‘정의감은 가상하지만 아직 학생들이니까 좀 참으라’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헝가리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헝가리 대십자 훈장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이만섭 의장은 지난 대선 때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대통령 후보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국민신당 대표로서 이후보를 전면에서 도왔다. 그런만큼 이번에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이 참여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관심이 많을 것 같아 이쪽 화제부터 먼저 꺼냈다. 그런데 이의장은 민주당 경선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의외로 한숨부터 쉬었다.
“국민을 예비선거에 참여시킨다는 취지는 좋지만 충분한 사전 준비와 보완책을 마련해놓고 국민경선제를 실시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떤 국민이 참여하는 것인지, 어떻게 동원하는지, 그리고 금품은 개재되지 않는지 등의 여부는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충분히 대책을 세웠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경선 취지와는 달리 부작용이 생기면 경선 결과에 불복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어 우려됩니다. 정치 이상도 좋지만 현실과 조화를 이뤄야죠. 미국식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처음부터 걱정을 했습니다. 경선이 과열돼서 후보들간에 비난, 인신공격, 대의원들에 대한 물량공세 등으로 얼룩지면 경선후 화합이 될지 걱정이 됩니다. 단합이 돼야 할 텐데 분열이 될까 걱정됩니다.”
-민주당 경선 후보들의 텔레비전 토론은 보았습니까.
“처음에 보다가 같은 당의 동지들끼리 지나치게 비판, 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서 그 다음부터는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당은 경선이 문제가 아니라 본선거에서 어떻게 이길지 연구해야 하는데 예비선거에서만 치고받고 합니다. 그러니까 국민들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이의장의 우려와는 달리 현재까지 민주당 경선은 국민들의 시선을 끌며 그동안 추락했던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를 올려놓았다. 막판에 가서 이의장의 우려가 현실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내가 16대 국회의장이 된 직후부터 국회의장은 당적을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래야 여야를 초월해서 공정한 국회 운영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쭉 해왔어요. 정치개혁특별위원들에게 2월말까지 이 법이 통과되도록 해달라고 여러 번 독촉했어요. 왜냐하면 내 임기 전에 만들어놓아야지, 내가 그만두면 이 법을 추진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에요. 국회의장이 청와대 눈치 안 보고 또 자기가 속해 있는 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올바르게 국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한 겁니다. 국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진일보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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