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 사람의 삶

한국의 알리, 나비처럼 ‘인생의 링’을 날다

권투인 홍수환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한국의 알리, 나비처럼 ‘인생의 링’을 날다

2/7
얼굴이 아무렇게나 일그러지고, 흉터가 도처에 나있는 게 복싱선수의 일반적인 모습. 그런데 그에겐 그 흔한 상처 하나도 없다. 손도 세계챔피언을 지낸 사람답지 않게 조그맣고 예쁘장하다. 그런 손으로 세계를 호령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다.

-홍수환씨 얼굴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그런 작은 주먹으로 KO승을 이끌어냈는지도 궁금합니다.

“나는 원래 복싱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한국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아웃복싱에 능하죠. 기술 복싱에 능하다는 얘깁니다. 손이 작다보니 단 한방에 상대방을 쓰러뜨리지는 못해요. 연타에 의한 피니시 블로로 다운을 빼앗아 승리를 끌어냅니다. 사실 저는 KO승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가냘픈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을 보면 누구나 복싱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요. 저 같은 사람도 세계챔피언을 두 번이나 했잖아요. 열심히 연습하면 누구나 훌륭한 복싱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체조건이 좋지 않다고 지레 겁을 먹고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겁자들의 논리지요. 저를 스스로 ‘희망의 승부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려운 신체조건을 극복했으니까요.”



-‘희망의 승부사’가 된 것은 4전5기 신화 때문 아닌가요. 당시 얘기 좀 들려주시죠.

“인생에서 가장 절박하던 때,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지면 ‘영영 구제받을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절박했으니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강훈련을 했습니다. 노력하니 운도 따르더군요.”

-4전5기가 행운이 따른 결과였다는 것입니까.

“경기 전 상대 선수였던 카라스키야가 다운을 몇 번 당하든 죽을 때까지 링에서 한번 붙어보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마’ 하고 대답했죠. WBA 룰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당시 파나마는 WBA 본부가 있을 정도로 복싱에 관한 한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였어요. 룰 정도는 쉽게 바꿀 수 있었죠. 그런 제안이 없었다면 제가 진 경기예요. 한 라운드에 3번 다운되면 자동적으로 KO패가 되는 게 WBA 룰이었습니다. 그 경기가 최초로 ‘무제한 녹다운 제도’를 도입한 경기가 된 셈이죠. 그래서 한 라운드에 4번이나 쓰러지고도 세계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4전 5기’라고들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당시 파나마가 무제한 녹다운 제도의 도입을 원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홍씨가 파나마에서 경기를 치르기 직전 부산에서 염동균과 파나마 리아스코 간의 세계 타이틀전이 있었다. 염동균이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었는데 리아스코의 판정승으로 결과가 나왔다. 관중들이 일제히 빈 병과 오물을 주심을 향해 내던지며 항의를 퍼붓자 공포에 질린 로자딜라 주심이 염동균의 손을 들어주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러나 염동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챔피언 벨트를 풀어야 했다. 로자딜라가 WBA 본부에 돌아가 기자회견을 자청, ‘생명의 위협을 느껴 염동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결국 염동균 대 리아스코전은 ‘노게임’으로 처리돼 염동균은 타이틀을 상실했다. 이 사건 때문에 파나마 복싱위원회측이 확실하게 승부를 가려야 한다면서 무제한 녹다운제를 제안한 것이다. 물론 카라스키야의 ‘KO주먹’을 믿는 구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무제한 녹다운제는 선수를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룰은 복싱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두번째 행운은 머물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주심 제이 에디슨을 만난 일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디슨이 ‘내가 레프리다’ 하면서 호의를 보이더군요. 어설픈 영어로 그와 몇 마디 나눴습니다. 우리도 미국사람이 서투르게나마 한국말을 하면 귀엽고 친근감이 가지 않습니까. 에디슨도 조그만 동양놈이 거리낌없이 말을 건네니, 제 인상을 좋게 보았나 봅니다. 아마 속으로 ‘귀여운 놈’ 했을 겁니다.

2라운드에서 한번 자빠지고 또 자빠지고… 네번째 쓰러질 때 그가 링에서 뒹구는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물어요. 50차례의 크고 작은 프로 경기를 가졌지만 국내심판이든 외국심판이든 다운되면 기계적으로 카운트하고 KO패를 선언합니다. 그런데 에디슨 주심의 표정엔 ‘빨리 일어나라’는 걱정과 격려가 담겨있었습니다. ‘오케이, 아이 돈 캐어. 댓츠 굿’이라고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지요. 그런데 그가 내 글러브를 만져주며 옷 매무새를 살펴주는 거예요. 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복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죠. 그리고 바로 2라운드 종료 공이 울렸습니다.”

복싱선수들은 다운을 당할 때 마약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한없이 가라앉고 싶은 충동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홍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한방 맞고 다운되면 한없이 잠을 자고 싶어져요. 온몸이 나른해지고, 머리가 오히려 개운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것처럼 한없이 고요해지고, 영겁의 시간 동안 누워있는 느낌입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아마 이런 기분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카라스키야전에서 홍수환은 달랐다. 한방 맞고 쓰러지면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파이팅을 외쳤다.

“강한 훈련으로 다진 정신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경기에서 지면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 아내와의 문제도 경기에 지면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요. 최선을 다하니 조금전에 말한 것처럼 운도 따라준 것이지요.”

2/7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연재

이사람의 삶

더보기
목록 닫기

한국의 알리, 나비처럼 ‘인생의 링’을 날다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