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한국의 알리, 나비처럼 ‘인생의 링’을 날다

권투인 홍수환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입력2004-11-02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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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홍수환이 있다. WBA 밴텀급 챔피언과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등 2개 체급을 석권한 그는 복싱계에서 두둑한 배짱에 화려한 기술을 겸비한 테크니션으로 통했다. 암울했던 시절, 그의 복싱 경기만큼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한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챔피언을 두 번이나 지냈지만 삶은 평탄하지 못했고 지금도 링 밖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한국의 무하마드 알리


    홍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서울 동작구 사당1동 ‘21세기체육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비릿한 땀 냄새가 손님을 맞이한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복싱 체육관 시설은 여전히 열악해 보인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주인인 홍씨는 부재중이고, 대신 소녀 4~5명이 소파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이들은 이 체육관에서 얼마전까지 복싱을 배우던 학생들로, 복싱을 그만두고도 가끔씩 체육관을 찾는다고 했다.

    복싱 도장에 여성이 드나들고 복싱까지 배운다니,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샌드백을 치는 사람들 중에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은 몇 명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심지어 40대 얼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선수로 뛰기 위해서 체육관에 나온 것이 아니라 체중을 빼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고 했다. 이들과 잡담을 하는 사이 홍씨가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올해 53세.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게 중년의 원숙미가 얼굴에 가득하다. 1970년대 스포츠기자 시절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매서운 눈매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도발적인 언사도 조금은 남아있었다.

    -선수가 되고자 체육관을 찾는 사람보다 운동 삼아 복싱을 배우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관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복싱체육관에도 선수로 대성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하긴 누가 이런 고생을 자청하고 나서겠습니까. 복싱을 ‘헝그리 스포츠’라고 하지 않습니까. 크게 돈 버는 직업도 아니고, 또 무진 고생을 해야 그나마 빛을 볼까말까 한데 요즘 같이 편한 세상에 이것을 직업으로 삼을 리가 없지요. 호신술로 복싱을 배우는 사람, 살을 빼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전엔 10대가 가장 많았는데 요즘엔 40대도 많습니다.”

    얼굴이 아무렇게나 일그러지고, 흉터가 도처에 나있는 게 복싱선수의 일반적인 모습. 그런데 그에겐 그 흔한 상처 하나도 없다. 손도 세계챔피언을 지낸 사람답지 않게 조그맣고 예쁘장하다. 그런 손으로 세계를 호령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다.

    -홍수환씨 얼굴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그런 작은 주먹으로 KO승을 이끌어냈는지도 궁금합니다.

    “나는 원래 복싱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한국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아웃복싱에 능하죠. 기술 복싱에 능하다는 얘깁니다. 손이 작다보니 단 한방에 상대방을 쓰러뜨리지는 못해요. 연타에 의한 피니시 블로로 다운을 빼앗아 승리를 끌어냅니다. 사실 저는 KO승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가냘픈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을 보면 누구나 복싱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요. 저 같은 사람도 세계챔피언을 두 번이나 했잖아요. 열심히 연습하면 누구나 훌륭한 복싱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체조건이 좋지 않다고 지레 겁을 먹고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겁자들의 논리지요. 저를 스스로 ‘희망의 승부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려운 신체조건을 극복했으니까요.”

    -‘희망의 승부사’가 된 것은 4전5기 신화 때문 아닌가요. 당시 얘기 좀 들려주시죠.

    “인생에서 가장 절박하던 때,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지면 ‘영영 구제받을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절박했으니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강훈련을 했습니다. 노력하니 운도 따르더군요.”

    -4전5기가 행운이 따른 결과였다는 것입니까.

    “경기 전 상대 선수였던 카라스키야가 다운을 몇 번 당하든 죽을 때까지 링에서 한번 붙어보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마’ 하고 대답했죠. WBA 룰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당시 파나마는 WBA 본부가 있을 정도로 복싱에 관한 한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였어요. 룰 정도는 쉽게 바꿀 수 있었죠. 그런 제안이 없었다면 제가 진 경기예요. 한 라운드에 3번 다운되면 자동적으로 KO패가 되는 게 WBA 룰이었습니다. 그 경기가 최초로 ‘무제한 녹다운 제도’를 도입한 경기가 된 셈이죠. 그래서 한 라운드에 4번이나 쓰러지고도 세계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4전 5기’라고들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당시 파나마가 무제한 녹다운 제도의 도입을 원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홍씨가 파나마에서 경기를 치르기 직전 부산에서 염동균과 파나마 리아스코 간의 세계 타이틀전이 있었다. 염동균이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었는데 리아스코의 판정승으로 결과가 나왔다. 관중들이 일제히 빈 병과 오물을 주심을 향해 내던지며 항의를 퍼붓자 공포에 질린 로자딜라 주심이 염동균의 손을 들어주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러나 염동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챔피언 벨트를 풀어야 했다. 로자딜라가 WBA 본부에 돌아가 기자회견을 자청, ‘생명의 위협을 느껴 염동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결국 염동균 대 리아스코전은 ‘노게임’으로 처리돼 염동균은 타이틀을 상실했다. 이 사건 때문에 파나마 복싱위원회측이 확실하게 승부를 가려야 한다면서 무제한 녹다운제를 제안한 것이다. 물론 카라스키야의 ‘KO주먹’을 믿는 구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무제한 녹다운제는 선수를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룰은 복싱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두번째 행운은 머물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주심 제이 에디슨을 만난 일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디슨이 ‘내가 레프리다’ 하면서 호의를 보이더군요. 어설픈 영어로 그와 몇 마디 나눴습니다. 우리도 미국사람이 서투르게나마 한국말을 하면 귀엽고 친근감이 가지 않습니까. 에디슨도 조그만 동양놈이 거리낌없이 말을 건네니, 제 인상을 좋게 보았나 봅니다. 아마 속으로 ‘귀여운 놈’ 했을 겁니다.

    2라운드에서 한번 자빠지고 또 자빠지고… 네번째 쓰러질 때 그가 링에서 뒹구는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물어요. 50차례의 크고 작은 프로 경기를 가졌지만 국내심판이든 외국심판이든 다운되면 기계적으로 카운트하고 KO패를 선언합니다. 그런데 에디슨 주심의 표정엔 ‘빨리 일어나라’는 걱정과 격려가 담겨있었습니다. ‘오케이, 아이 돈 캐어. 댓츠 굿’이라고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지요. 그런데 그가 내 글러브를 만져주며 옷 매무새를 살펴주는 거예요. 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복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죠. 그리고 바로 2라운드 종료 공이 울렸습니다.”

    복싱선수들은 다운을 당할 때 마약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한없이 가라앉고 싶은 충동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홍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한방 맞고 다운되면 한없이 잠을 자고 싶어져요. 온몸이 나른해지고, 머리가 오히려 개운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것처럼 한없이 고요해지고, 영겁의 시간 동안 누워있는 느낌입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아마 이런 기분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카라스키야전에서 홍수환은 달랐다. 한방 맞고 쓰러지면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파이팅을 외쳤다.

    “강한 훈련으로 다진 정신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경기에서 지면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 아내와의 문제도 경기에 지면 해결할 수 없었으니까요. 최선을 다하니 조금전에 말한 것처럼 운도 따라준 것이지요.”

    홍씨가 카라스키야를 KO시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한국 스포츠 의 명장면 중 하나다.

    “초 단위로 나눠서 당시를 ‘리와인드’할 수도 있어요. 그날에 대한 기억이 하도 선명해서 그 장면을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습니다. 사는 게 어렵고 팍팍하다고 느낄 때마다 ‘기억의 창고’에서 카라스키야전을 끄집어내지요.”

    홍씨는 다소 과장을 섞어 재미있게 얘기를 이끌어가기로 유명하다. 서울 말씨로 또박또박 씹듯이 뱉어내는 비유 섞인 말은 그가 복싱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한다.

    “3라운드 시작공이 울리자 나는 판정으로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링으로 뛰쳐나갔어요. 어차피 판정에선 질 테니까 미친 듯이 달려든 것입니다. 네 번이나 자빠진 놈이 제정신이었겠습니까. 다행히 카라스키야가 저를 살살 다루기 시작하더라고요. 다 차려놓은 밥상 먹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나 봅니다. 서두를 것 없다는 식이었죠.

    내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겁니다. 녀석을 거칠게 몰아붙였죠. 로프 쪽으로 밀면서 잽과 스트레이트를 터뜨리고 바짝 다가들었습니다. 녀석이 방심한 사이 좌우 연타를 턱에 명중시키고 계속 몰아쳤죠.

    휘청하더군요. 이때다 하고 미친 듯이 쥐어 팼습니다. 연방 정권이 팍팍 들어가는데, 뭇매에 장사가 없죠. 카라스키야의 얼굴이 호박처럼 커 보이더라고요. 잘 익은 누런 호박덩어리였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또 도와줍디다. 녀석이 로프에 걸쳐 반쯤 다운된 상태였습니다. 주심이 다운을 선언하고 카운트를 할 수도 있는데 내버려두더군요. 휘청거리는 녀석을 계속 흠씬 패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홍씨는 스포츠에서 정신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축구 얘기를 했다. 국가대표팀의 정신력에 문제가 많아 16강 진출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지금 같은 정신상태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한국선수들에겐 정신적 ‘스승’이 없습니다. 가난, 고통, 국가관 등도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선수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한국축구는 전통적으로 후반전에 더 강했습니다. 꼴을 허용하더라도 근성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여 역전승을 하곤 했지요. 과거에 일본축구가 우리한테 꼼짝 못한 게 이런 근성 때문 아닙니까.”

    홍씨는 최근 삼성, LG, SK 등 기업체를 돌며 강사 노릇을 하고 있다. 강의할 때마다 그는 회사원들에게 4전5기의 신화를 가능하게 한 비결에 대해 설명한다. 프로정신과 근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군사관학교에 복싱 사범으로 나가 사관생도 200명을 가르치는데, 정식으로 학점이 나오는 과목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생도들에게도 근성을 길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한 근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저는 근성은 한국인이 꼭 갖춰야 할 기본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한민족의 정체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WBA 밴텀급 말입니까.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에게 도전했지요.”

    그가 남아공으로 떠날 때 챔피언이 돼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권투위원회에서도 ‘어차피 질 놈이 뭣하러 가느냐’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외로웠습니다. 권투위원회는 물론 복싱인들도 철저히 경기를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힘을 얻게 됐습니다.”

    그는 더반에서 태극기를 들고 자신을 응원하던 원양어선 승무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단다.

    “남아공은 한국 사람들한테 무척 낯선 곳이었습니다. 교민 수도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링에 오르자마자 ‘홍수환’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관중석 구석에서 태극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원양어선 선원 20여 명이 저를 응원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이 목이 터져라 ‘홍수환 이겨라!’를 외치는데, 젖 먹던 힘까지 솟구치는 기분이었습니다.

    트레이너인 김준호씨한테 죽더라도 절대로 타월을 던지지 말라고 부탁했지요. 트레이너가 ‘너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면서 ‘니가 왜 져 임마!’하고 호통을 치더군요. 챔피언 벨트는 선원들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일러를 4번이나 캔버스에 눕혔지만, 텃세 탓에 경기를 마치고 승리를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아주 월등했었나 봅니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었어요. 판정이 나오자 선원들이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때의 감동은 정말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홍씨는 경기를 마치고 방송국의 주선으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다. 광고로까지 만들어진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대화는 이때의 일이다.

    남아공에서 경기를 마치고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동거하고 있던 이진희(50)씨의 어머니, 즉 장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왜 곧바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나요.

    “복수하러 갔습니다.”

    장모에게 복수라니, 그러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했다.

    홍수환은 1971년 11월 서울에서 오르테가와 경기를 갖고 바로 5일후 괌에서 필리핀의 살로마와 경기를 했다. 오르테가한테 맞아 생긴 주먹독이 채 빠지기도 전에 다시 살로마와 경기를 했으니, 경기가 제대로 풀릴 리가 없었다. 홍수환은 9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마지막 10라운드. 공격만 하던 살로마도 지치기는 매한가지였다. 홍수환이 살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라운드 종료 직전 홍수환의 스트레이트가 관자놀이를 강타, 살로마는 결국 링으로 고꾸라졌고 곧 이어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렸다. 그런데 카운트를 해야 할 심판이 살로마를 일으켜 세워 자기 코너로 가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살로마는 그때까지 26전 26승 무패의 전적을 갖고 있었던 필리핀의 슈퍼스타로 한국에서 온 무명선수 홍수환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필리핀의 전체 복싱 흥행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결국 승리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살로마에게 돌아갔다.

    홍수환은 당시 동료 신춘교 선수와 함께 괌에 갔는데, 미국에 건너가 살 작정으로 경기를 마치고 신선수와 함께 무장적 하와이로 떠났다.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어머니의 옛 친구를 찾아갔다. 이 아주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하와이로 건너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이민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미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저를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들어오라는 성화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하와이 식당 주인의 딸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데, 당시 고교생이던 이 여자가 바로 이진희씨다.

    홍씨와 자신의 딸이 사귄다는 사실을 안 장모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딸애를 건드리면 네 심장에 검은콩(탄환)이 들어갈 줄 알라”면서 엄포를 놓았다. 홍씨는 아내와 동거를 하며 큰딸 정은(27)씨를 낳았다. 자식까지 보았는데도 장모는 그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복수란 말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챔피언이 됐으니 이제 절 좀 받아주십쇼” 하고 하소연 하려고 하와이에 간 거예요. 그런데 장모님은 저를 만나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사위가 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나 봅니다.”

    -밉보인 이유가 있었겠지요.

    “묻지 않아도 답은 빤하잖아요. 자기 집에서 접시 닦던 거렁뱅이가 딸을 겁탈하고, 데리고 산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번 접시 닦는 거렁뱅이는 영원히 접시 닦는 거렁뱅이죠. 나도 보통 놈은 아니지만 장모 역시 보통은 넘었습니다. 이혼을 한 뒤 자식에 대한 의무도 버리고 혼자 하와이로 갔으니까요.

    그는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이씨에게서 큰딸, 둘째 지은(25), 아들 대호(23), 막내 주희(22)씨를 얻었다.

    “아이를 넷이나 낳았는데도 장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결국은 그게 부부관계를 악화시키더군요. 아내는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면서 곧 떠날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수환씨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여가수와 스캔들도 있었고요.

    “내가 조강지처를 버렸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항상 불안정했습니다. 아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주간지 ‘선데이서울’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팬과 함께’란 코너였는데 잡지사 쪽에서 파트너로 엮어준 사람이 가수 옥희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통했습니다.”

    -옥희씨와의 사이에도 자녀가 있지요.

    “딸 윤정(23)이와 막내아들 장환(9)이가 있습니다.”

    그의 가정사는 매우 복잡하다. 이진희씨에게서 낳은 아들 대호씨와 옥희씨에게서 태어난 윤정씨의 나이가 같다.

    -두 집 살림을 했으니 비난을 받을 만도 하군요.

    이 부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있었지만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다시 복싱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기억에 남는 외국선수가 있습니까.

    “1973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스코타이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스코타이예요. 스코타이에게 8회 중반까지 죽도록 맞았어요. 8회 종료 직전 역전 KO승을 거두긴 했지만 누가 봐도 내용으로는 내가 진 경기였어요. 스코타이는 벙어리였는데 인품이 좋고 주먹도 야물고 기술도 뛰어났습니다.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선수였는데 그 친구가 말을 못해 우정을 나누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기도 있습니까.

    “1975년 알폰소 자모라와의 경기가 가장 씁쓸합니다. 밴텀급 세계챔피언이 되고 나서 치른 첫번째 방어전이었는데, 자모라는 ‘멕시코의 KO주먹’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던 선수예요.”

    당시 체중 조절에 실패한 홍수환은 경기하는 날 오전까지 사우나에서 땀을 빼야 했다. 단 몇g이라도 줄이기 위해 침까지 쉴 새 없이 뱉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몸의 수분을 배출해 체중을 감량했으니 몸 컨디션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경기 직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꿀에 잰 인삼을 먹었는데 꿀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였단다. 홍수환은 끝내 4회 KO를 당해 패하고 말았다. 주먹 한번 제대로 날려보지도 못하고 진 치욕스러운 한판이었다. 이듬해 도전자 자격으로 자모라와 다시 한번 붙었지만 이때도 11라운드에 TKO패를 당했다.

    “두번째 경기 때는 이길 수 있는 찬스가 있었습니다.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어요. 자모라를 코너에 몰아넣고 원투를 쳤는데 그대로 적중해 녀석이 휘청하더라고요. 이때다 하고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는데 주심이 떼어놓는 겁니다. 주심은 멕시코 출신 옥타비오 메이란이란 사람이었는데 자국 선수를 위해 편파적으로 게임을 진행한 것입니다. 원래 타이틀전에서는 선수와 국적이 같은 주심은 배제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떻게 멕시코 심판이 주심을 맞게 됐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11라운드에 무너졌죠.”

    홍수환이 경기에서 지면 꼭 여자문제 때문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홍선수가 게임 준비는 하지도 않고 훈련 캠프를 빠져나가 여자 집을 전전했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사실입니까.

    “모두 음해하는 말이에요. 왜 제가 복싱계의 이단자로 통하지 않았습니까. 권투위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권투위원회가 뭘 하는 조직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수를 돕고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고 횡포를 부리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투위원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선수가 나오면 별별 엉뚱한 이유로 모함과 음해를 일삼았습니다. 그런 소문에 대해 100%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난 것처럼 지저분하게 생활하지 않았다고 맹세합니다. 다만 두 여자 사이를 오간 것은 사실입니다.”

    홍씨는 오히려 그런 것이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냐고 했다. 그는 권투위원회에 대해 아직도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카라스키야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권투위원회 책임자가 이런 말을 합디다. ‘질 거지만 잘 싸우고 오시오’ 이게 어디 할 말입니까. 이기러 가는 선수에게 질 거지만 잘 싸우라는 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입니까. 홍수환이라는 인간이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열심히 싸워서 국위를 선양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때 로스앤젤레스와 앵커리지에서도 살았지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헤어진 뒤 옥희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그녀와도 헤어지게 됐지요. 미국으로 건너가 본처와 재결합을 했습니다. 앵커리지에서 택시 석 대를 구입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접 택시기사 노릇을 하면서 사업을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사업이 잘 안되다 보니 아내와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죠. 결국 아내를 미국에 두고 저만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얼마쯤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홀가분한 생각이 들었고 다시 옥희를 찾아가 재결합했습니다. 옥희도 그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헤어진 상황이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재결합한 뒤 아이도 가졌습니다. 막내아들이 올해 아홉 살입니다.”

    홍씨는 “사생활이 아주 복잡한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두 여자 사이를 오간 것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그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옥희씨, 아홉살배기 아들과 살고 있다. 갑상선이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집을 구한 것이라고 했다. 장성한 아이들은 모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한다. 이진희씨에게서 난 아이들과 옥희씨에게서 난 아이들이 함께 살며 학교와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는 1년에 두세 차례 자식들을 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 2월에도 미국에 다녀왔다.

    -아이들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예요. 세계 챔피언도 하고 부인이 가수니 돈을 많이 모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에요. 벌기는 많이 벌었죠. 그런데 가족들에게 다 들어갔어요. 형님과 동생(홍수철, 가수활동을 하다 지금은 신학대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 중)들 뒷바라지도 제가 다 했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끝까지 베풀고 얻어먹는 사람은 끝까지 얻어먹는 습성이 있어요. 상대방이 굶어죽게 됐는데도 손을 내미는 사람은 내밀어요.”

    -현재는 수입이 어떻습니까.

    “월 500만~600만원 정도 벌고 있습니다. 기업체 등에서 강의하면서 받는 특강료와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버는 돈을 합치면 그 정도가 됩니다. 언뜻 보면 수입이 많은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번 돈의 대부분을 체육관에 재투자하고 있습니다. 와이프는 부천 등지의 밤무대를 뛰면서 월 1000만원 정도를 벌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씩 밤무대에 서기도 해요. 옥희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수준급입니다(웃음).”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자식들이 용돈을 보내오지는 않습니까.

    “반대예요. 자주 미국에 들르는 것도 다 애들 용돈 주려고 가는 거예요.”

    -첫 부인과 낳은 자녀들은 친어머니와 자주 만나는지요.

    “애들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살면서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링에서는 성공했지만 인생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사각의 좁은 링에선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인생이란 큰 링에선 정말 보잘것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여자관계에서 실패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죠. 장난스럽게 첫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이 인생이 망가지는 단초 구실을 했어요.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꼭 말해주고 싶고요.”

    -꼭 결혼이나 여자 탓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인생은 어찌 보면 스스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는 쉽게 동의했다. 자신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그가 뒤집어쓰는 것은 억울하다고 했다.

    “저한테는 내조라는 것이 없었어요. 따뜻한 내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질문이 늦었습니다. 복싱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복싱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14세 때인 1964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신의주중학 시절 육상선수, 그것도 학교대표 마라톤 선수였는데 월남해서는 복싱경기를 좋아하셨어요. 동대문운동장 배구장에서 복싱경기가 열릴 때마다 아버지는 꼭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김준호 전복수 송재구 최익수 선수의 경기를 자주 봤습니다. 복싱경기를 자주 접하다보니 저절로 흥미가 생겨났습니다. 종로구 내수동에 살 때 앞집이 바로 김준호 선생님 댁이었어요. 김준호 선생님의 아들인 김택구와 함께 선생님께 복싱을 배운 것이 권투에 입문하게 된 동기입니다.”

    -홍수환씨의 복싱을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근성의 복싱’이죠. 또 ‘성깔 있는 복싱’ ‘끼 있는 복싱’ 이런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 생활을 하지 않고 프로에 바로 뛰어든 것도 근성, 성깔, 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십니까.

    “매일 아침 동네 뒷산으로 산책을 나갑니다. 요즘은 아내가 지방 순회공연을 하고 있어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있어요. 학교 보내랴, 밥 차려 주랴, 빨래 하랴,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어린 아들로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 들어올 거냐는 투정이 전화 내용.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황급히 귀가했다.

    “집에서 나오면 특강을 하러 가고, 체육관에는 월수금 주 3회 나옵니다. 일요일엔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홍수환은 “1996년 예수를 영접했다”고 했다. 세상과 다투며 살아온 인생이 덧없게 느껴져 종교를 갖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교회 찬양대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가 됐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내 손으로 꼭 세계챔피언을 만들 겁니다.”

    그는 젊은이들이 복싱선수가 되는 것을 꺼려리는 풍조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들 대호군을 프로복서로 만들었으나, 세계챔피언을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진 못했다. 최근엔 자식도 잘 가르치지 못했는데, 남의 자식을 세계챔피언으로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고 한다. 그는 한국권투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별도의 복싱단체를 결성할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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