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두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와 오에 겐자부로
“대중문화 감각으로 단련된 새로운 문화 세대가, 이제까지 일본의 문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쌓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창출할 것”이라던 오에의 ‘불길한 예언’이 적중이라도 하듯, 가식적 교양주의를 거부하고 대중문화와 편견 없는 교감 속에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감수성을 선보인 20~30대의 작가들이 대거 출현했다. 이른바 ‘신세대 작가’였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이들이 1976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으며 등장한 무라카미 류와 1979년에 ‘군조(群像)’신인상으로 데뷔한 무라카미 하루키다. 무라카미 류는 데뷔작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물질적 상상력’과 ‘몰(沒)주체’의 감각을 작품 전체에 내세워 섹스와 마약으로 뒤범벅된 현실을 거칠고 원색적인 언어 공간에 담아냄으로써 이단(異端)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이 두 사람의 문학적 색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자세나 사회·문화적 현실 인식에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은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첫째, 소설의 성공과 ‘재미’에 관한 기존 작가들의 금욕적(혹은 위선적) 태도와 일선을 긋는다. 즉, 약간 고급스런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것을 독자와의 이상적인 관계 설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더는 작가가 ‘구도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두에서 가공의 인물인 미국 소설가 데렉 하트필드의 입을 빌려 “기분이 좋은 게 뭐가 나빠?”라고 한 말은 분명 기존 문단의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균질화한 개성 혹은 자본주의적 인간
둘째, 기존의 리얼리즘 문체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문학형식을 도입한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의 데뷔작은 해체주의적 상상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전차를 타면 맨 처음 승객 수를 세고, 계단 수를 모두 세고, 틈만 나면 맥박을 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969년 8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3일까지 사이에 나는 삼백 오십 팔 번 강의에 출석했고, 쉰 네 번 섹스를 했으며, 담배를 육천 구백 이십 일 개피 피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애써 작위적이고자 하는 지향 속에서 추출된 인공적 리얼리티, 숫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기성의 소설문법에 대한 식상을 내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평론가 가와무라 사부로는 이 소설을 두고 “생활의 리듬을 멀리하고 단지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말만을 적어놓은, 말의 콜라주와 같은 소설”이라 평했다.
셋째,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균적 소비문화를 누린 이른바 ‘풍족세대’ ‘개성세대’를 독자층으로 상정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빈곤’이 결여되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는 대학생들도 이성과 데이트할 때면 품격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복장에 대해 세련된 감각을 지녔으며, 관련 기술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고유명사도 곧잘 눈에 띈다. 같은 무렵 다나카 야스오는 소설 전체가 상품(정확하게는 이른바 명품) ‘카탈로그 잡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 ‘어쩐지 크리스탈’(1980)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속해’ 있기를 거부한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광고회사 경영자, 레스토랑 주인, 모델, 컴퓨터 프로그래머, 대학생…. 한결같이 소속의 중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업이다. 이야말로 균질한 소비문화를 향유하며 간섭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개성세대’가 꿈꾸는 세계인 것이다.
넷째, 소설에 대중문화, 혹은 대중문화적 감각을 과감히 접목시킨다. 1960년대 이후의 미국 팝 뮤직과 재즈, 할리우드와 유럽의 영화는 이들의 소설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문화적 기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