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로 남북한의 위성발사체 개발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얼마전 H-2A 로켓 발사에 성공했으며, 중국은 이미 장정(長征) 로켓으로 위성을 쏘아올리고 있다. 치열한 동북아의 로켓 경쟁에 한국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늘 정복을 위해 불면의 나날을 보내는 과학자들의 세계와 한국형 로켓 발사 뒷이야기.
KRS-III 발사장면
2002년 11월28일 오후 2시52분26초. 국방과학연구소 안흥시험장이 위치한 서해안 태안반도 앞 바다의 한 섬. 국내 최초의 액체로켓 KSR -Ⅲ이 ‘꽝’ 하는 굉음과 함께 화염을 분출하며 서서히 발사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발사각도 82.6도로 천천히 수직 상승한 로켓에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발사대를 떠난 지 30여 초가 지나자 로켓은 하늘에 하얀 비행 구름만 남긴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관람석 여기저기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스피커에서는 레이더로 관측한 로켓의 비행상황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시간 53초. 최대고도 42.7㎞ 도달.”
“비행시간 231초 서해상에 착수(着水).”
로켓이 남서쪽으로 79㎞ 떨어진 전북 어청도 서남방 30㎞ 지점 바다에 떨어졌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몇 달 전부터 섬에 들어와 추위와 싸우며 발사대와 로켓 조립대를 설치했던 60여 명의 연구원과 기술자들은 다시 한번 환호성을 질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10년 동안 고군분투하며 개발해온 액체로켓 발사 시험이 4분도 못 돼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애초 목표했던 최대도달고도 42km, 사거리 84km와 차이는 있었지만, 오차 범위 이내였다. 바람의 영향과 처녀 비행인 점을 고려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액체로켓은 우주발사체 개발에 필수
발사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애초 발사 예정일은 11월27일이었지만 폭풍이 불어 하루 연기됐다. 다음날 카운트다운은 새벽 4시에 시작됐다. 서해안 일대의 항공기와 선박 운항이 통제됐다. 곧이어 액체산소 주입에 들어갔다. 그런데 발사 직전 로켓 낙하 예상해역에 외국상선이 들어와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상선이 20분 만에 빠져나가 예정보다 22분 가량 늦은 오후 2시52분, 발사되었다.
액체로켓 발사 시험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공기가 없는 우주공간을 나는 액체로켓은 영하 183℃로 냉각시킨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싣고 간다. 액체산소를 주입한 로켓은 상온에서 30분 이상 놔둘 수 없다. 30분 내에 발사하지 못하면 다시 몇 시간에 걸쳐 액체산소를 주입해야 한다.
이날 발사된 KSR-Ⅲ는 길이 14m, 지름 1m, 무게 6t의 소형 과학관측 로켓이다. 로켓엔진의 추력은 12.5t이고 연료는 최고급 등유를 사용한다. 길이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때 개발한 V-2로켓과 같지만 무게는 절반이다.
KSR-Ⅲ는 액체엔진을 쓴 것 외에도 첨단의 추력벡터 제어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유도제어용 관성항법장치를 이용해 로켓이 자세와 위치, 가속도를 스스로 파악해 화염이 분사되는 엔진의 노즐 방향을 제어하는 방식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우주발사체연구부 김준 박사는 “발사 직전 로켓의 컴퓨터에 목표지점의 좌표를 입력하면, 로켓이 엔진 노즐의 추력 방향을 조절해 목표지점에 정확히 도달한다”고 설명했다.
자의반 타의반 100% 국산화
로켓은 어떤 연료를 쓰느냐에 따라 액체로켓과 고체로켓으로 나뉜다. 액체로켓은 고체로켓보다 강한 추력을 발생시킨다. 발사 뒤에도 점화와 소화를 반복하며 궤도를 정확히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공위성 발사체로 흔히 이용된다. 고체로켓은 점화한 다음에는 속도 조절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값이 싸고 특별한 준비 과정 없이 바로 쏠 수 있는 중단거리 미사일로 주로 쓰인다.
액체로켓은 1926년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가 처음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을 괴롭힌 독일의 V-2로켓,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나 아폴로호를 달에 보낸 로켓, 미국의 우주왕복선, 북한의 대포동 위성발사체가 모두 액체로켓이다.
액체로켓은 우주 개척의 필수품이지만, 로켓 머리 부분에 인공위성 대신 핵탄두를 달면 대륙간 탄도탄으로 쓸 수 있다. 이번에 한국이 쏜 액체로켓은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쓰기 때문에 발사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군사용 로켓으로 쓸 수 없다. 강대국들은 연료나 산화제를 미리 로켓에 주입해 장시간 보관하다가 준비작업 없이 바로 쏠 수 있는 액체로켓을 개발해 대륙간탄도탄(ICBM)으로 쓰고 있다.
KSR-Ⅲ는 부품을 100% 국산화한 ‘토종 로켓’이다. 국산 기술을 고집해 토종이 된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부품을 사올 수 없었기 때문에 국산화되었다.
2005년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에 건설될 우주발사센터 조감도.
이대성 부장은 “항우연 연구원 124명 가운데 외국에서 액체로켓 개발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항우연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박사들이 많다. 하지만 미국은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은 로켓 제조회사나 연구소에서 근무하지 못하게 한다. 미국에 유학 왔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 국방과학위원회 로켓 책임자가 된 중국인 첸쉐썬(錢學森) 박사가 1955년 중국에 돌아가 중국을 로켓 강대국으로 만든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국방과학연구소가 1978년 백곰, 1986년 현무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 항공우주연구원은 1993년 과학로켓1호(KSR-Ⅰ), 1998년 과학로켓2호(KSR-Ⅱ) 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미사일과 과학로켓은 모두 고체로켓이었다.
한국의 로켓 기술은 백곰 미사일 개발 이후 20년 동안 거의 발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우연의 채연석 원장은 당시 한국이 백곰 개발에 성공한 것은 1975년 파산 직전에 있던 로스앤젤레스 근처 록히드사의 로켓 추진제 제조공장을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시설은 미사일 추진제를 생산하는 ㈜한화 대전공장의 모체가 되었다. 고체로켓 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고체 추진제를 잘 혼합하는 일인데, 미국의 시설을 들여와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후 현무 미사일 개발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에 사정거리 180km 이상의 로켓은 개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이것이 로켓 개발의 족쇄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고체로켓과 전혀 다른 액체로켓에 도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부품 조달이 문제였다.
항우연 로켓체계개발그룹장 박정주 박사는 “액체로켓 개발을 위해, 필요한 핵심부품 4개를 미국에서 수입하려 했지만 거절당해 할 수 없이 모두 국산화했다”고 털어놓았다. 항우연은 미국 기업과 관성항법장치·전자광학추적장치·레이더추적장치·S밴드 송신기와 UHF 수신기 도입 계약을 맺었으나, 미 국무부가 KSR-Ⅲ는 한미간의 미사일 각서를 초과하는 로켓이라며 1998년과 1999년 수출 불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항우연은 발사대와 로켓을 연결해 전원을 공급해주다가 발사 직후 떨어져 나오는 커넥터를 프랑스 회사에 주문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다가 누군가의 압력을 받았는지 ‘못 팔겠다’고 통보해왔다.
끝까지 속 썩인 엔진 개발
그러나 이런 작은 부품들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은 액체엔진의 개발이었다. 항우연 기술진과 현대모비스 기술진은 ‘스파이’라는 누명을 무릅쓰고 러시아·중국·인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액체로켓 정보를 수집했다.
로켓이 목표 고도인 42km까지 올라가려면, 엔진이 지상시험에서 60초 동안 연소를 견뎌내야 한다. 엔진 시제품이 나온 것은 2년여 전. 처음에는 국내에 지상연소시험장이 없어 러시아에 가져가 시험을 했다. 그후 항우연에 시험장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연소 불안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실패를 거듭했고, 그동안 실험하다 버린 액체엔진만 무려 40여 개나 됐다.
연소가 불안정해지면 엔진의 진동이 심해져 폭발할 수도 있다. 엔진의 소음 주파수와 엔진의 고유 진동수가 공진 현상을 일으켜 엔진의 진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게 연소 불안정이다. 항우연 추진성능시험그룹장 이수용 박사는 연소가 진동 주파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파수를 조정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밝혔다.
올해 초에는 점화 직후 엔진 내부의 압력이 수십 배 치솟는 ‘하드 스타트’ 가 일어나 엔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폭발력이 얼마나 컸던지 시험장 방화문이 날아가고 시험시설이 파손되었다. 원래 액체로켓은 2002년 4월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일곱 달이나 연기됐다.
한국이 액체로켓 개발에 나선 것은 90년대 초부터이다. 주변의 반대도 많았지만 단순하고 작은 인공위성 제어용 추력기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추력기 국산화에 대한 연구는 한국통신이 항우연에 지원한 방송통신위성 관련 연구과제의 일부였다. 몇 년의 고생 끝에 만들어진 첫 추력기는 5파운드(2.3kg)의 아주 작은 것이었다.
연료는 특수 촉매가 필요한 하이드라진이었는데 특수촉매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 실험할 경우에는 촉매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실험방법도 배울 수 있는 등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항우연 연구원들은 1994년 11월 추력기를 가방에 넣고 상하이로 가 실험을 했다.
1993년 5월 북한이 액체로켓인 로동1호 발사에 성공하자 김영삼 정부는 액체로켓 발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좀더 크고 연료와 산화제를 모두 액체로 쓰는 진짜 액체로켓 엔진의 설계가 현대모비스와 항우연에 의해 시작됐다.
그 결과 1995년 9월 추력 180kg의 국내 최초 소형 액체로켓 엔진이 ㈜한화 대전공장에서 지상시험을 하는 데 성공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로동1호에 이어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함에 따라, 액체로켓을 개발해 1997년 말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계획을 검토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백지화하고 말았다.
본격적인 액체로켓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97년 12월. 이때부터 과기부가 KSR-Ⅲ 개발에 들인 돈은 총 780억원이다. 하지만 북한이 1998년 대포동 1호를 발사하지 않았다면 액체로켓은 만들어보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개발 초기인 1997∼98년, KSR-Ⅲ에 배정된 예산은 연간 25억원, 연구 인력은 3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북한이 사정거리 2200km의 대포동1호로 인공위성을 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가 미소간에 우주개발 경쟁을 불러일으켰듯이 남북한간 우주개발 경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액체로켓 개발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과기부와 항우연을 살려준 것은 북한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대포동1호 발사 직후 강창희 과기부 장관은 군 출신답게 우주 발사체 개발을 앞당겨야 한다고 김대중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에 따라 2010년으로 잡혔던 독자적인 위성 발사 시기가 2005년으로 앞당겨졌다. 위성발사의 전단계로 쏘는 KSR-Ⅲ 로켓의 예산도 30억원에서 1999년에 197억원으로 껑충 뛰다.
2005년 한국이 독자적으로 쏘아올릴 자력(自力)로켓이 KSLV-Ⅰ이다. 이 로켓은 100kg급 위성을 쏘아올려야 하는데 이러한 우주 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KSLV-Ⅰ 발사체는 건물 10층 높이인 32m 길이에, 무게는 130여t이 될 것으로 보인다. 6t에 불과한 KSR-Ⅲ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다. 이번 액체로켓은 42km 상공까지 올라갔지만 2005년 발사될 로켓은 300km 고도까지 쏘아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추진력이 10배 이상 되는 로켓을 개발해야 한다.
건물 10층 높이 우주발사체 KSLV-Ⅰ
이 정도 규모의 로켓을 조립하고 발사하려면, 국방과학연구소의 안흥시험장으로는 어림없다. 그래서 정부는 1300억원을 들여 2005년까지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에 우주센터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우주센터에는 발사시설 외에 로켓조립건물, 지상연소시험장, 우주전시관이 들어선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기지처럼 관광지로 조성된다.
정부는 KSLV-Ⅰ 발사체 개발에 3594억원을 투입키로 결정했다. KSLV-Ⅰ에 이어 2010년에는 KSLV-Ⅱ 로켓으로 1t급의 위성을 쏘아올리고, 2015년에는 KSLV-Ⅲ로 무궁화위성과 같은 1.5t급 실용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올려놓을 계획이다.
정부가 우주발사체 개발과 우주센터 건설을 결정한 것은 2001년 1월 로켓 개발의 족쇄가 돼온 한미 미사일 각서가 개정되고, 그해 3월 33번째로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다.
개정된 한미 미사일 각서에 따라 한국이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300km로 늘어났고, 민간용 로켓은 사정거리의 규제 없이 개발할 수 있게 됐다. MTCR에 가입하면서 외국의 부품과 기술 도입도 쉬워졌다. MTCR은 비가입 국가에 대해서는 기술의 확산을 억제하지만, 가입국 사이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기술을 이전하거나 부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통신·관측·군사 목적의 위성 수요가 급증한 것도 독자적인 우주발사체 개발에 나선 또 다른 이유이다. 1992년 우리별 1호 발사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지구궤도에 쏘아올린 인공위성은 모두 7기인데 이 위성은 모두 외국의 발사체를 빌려서 쏘아올렸다.
정부의 우주개발중장기계획에 따르면 2015년까지 18기의 위성을 쏘아올릴 예정인데, 이 가운데 절반을 국산 발사체로 쏘아올리게 된다. 위성의 수명은 길어야 7년 정도다. 초기 위성은 대리 발사를 했으나, 후속 위성은 자력으로 발사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하지만 KSLV-Ⅰ은 워낙 큰 로켓이어서 국내 기술만으로는 개발이 어려워 기술 및 부품 도입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에 연구원을 파견해 터보펌프가 들어간 액체엔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고 프랑스 쪽도 두드리고 있다.
우주개발 선진국은 큰 발사체에 ‘터보 펌프식 액체엔진’을 쓴다. 이는 고압 질소 가스 대신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펌프가 연료와 산화제를 밀어내 분사하는 방식이다. 현재 한국이 가장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대형 액체엔진과 터보 펌프이다.
과기부 우주항공기술과 최종배 서기관은 “2005년에 쏘아올릴 우주발사체는 이번에 개발한 ‘가압식 액체로켓’ 3개를 다발로 묶어서 만들 계획이었으나, 기술을 재검토한 끝에 2단짜리 ‘터보 펌프식 액체로켓’으로 수정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한 단계 높은 기술을 우주발사체에 적용키로 한 것은,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부품 및 기술 이전 의사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로켓 기술 협력은 2001년 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해 한국의 우주개발에 참여하겠다고 밝히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해 5월 유희열 과기부 차관은 러시아 항공우주청장과 기술협력약정서 체결 의향서에 서명했다. 한국이 액체로켓을 발사한 바로 다음날인 11월29일 모스크바에서는 한러경제공동위원회가 열려, 한국이 못 받고 있는 경협차관을 로켓 등 우주분야 장비와 방위산업 물자로 현물 상환할 수도 있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경제난 해소책의 하나로 발사서비스와 우주기술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인도는 러시아의 액체로켓 엔진을 도입해 대형 인공위성을 발사한 대표적 국가이다. 인도는 러시아로부터 받은 실물 엔진을 개량해, 2001년 4월18일 액체로켓(GSLV)으로 1.5t급 실험 위성을 3만6000km 상공의 지구정지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아홉 번째 위성 발사국 경쟁
지금까지 자신이 만든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쏘아올린 나라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중국 영국 인도 이스라엘 8개국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2차 대전 때 독일의 폰 브라운 박사가 만든 V-2 액체로켓을 가져와 로켓을 개발했다.
러시아는 1957년 10월4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1호를 지구 저궤도에 쏘아올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스푸트니크1호를 쏘아 올린 R-7로켓은 길이 29.2m, 최대 직경 10.3m에 4개의 액체엔진을 부착한 초대형 발사체였다. 무게는 260t, 추력은 327t이었다.
미국은 러시아가 스푸트니크1호 성공 109일 뒤 인공위성 익스플로러1호를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위성은 무게가 14kg으로 83kg에 이르렀던 스푸트니크1호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이를 쏘아올린 발사체인 주피터-C 로켓도 러시아의 R-7로켓에 비하면 추력이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이어 프랑스가 1965년 디아망 액체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프랑스는 1975년 유럽우주기구(ESA) 창설을 주도해 상업용 아리안로켓을 개발했다. 일본은 1970년 2월, 중국은 1970년 4월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영국은 1971년, 인도는 1980년, 이스라엘은 1988년 각각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았다.
아홉 번째로 위성을 발사할 나라로는 이라크·브라질·북한·남한 중의 한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는 1989년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나 궤도 진입에 실패했고, 걸프전으로 시설이 많이 파괴돼 쉽지 않은 상태다. 브라질도 1997년과 1999년 위성 발사에 실패했고 요즘에는 경제난까지 겹쳐 발사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1970년대에 위성을 자력 발사한 일본과 중국은 상업 위성발사 시장에 뛰어들어 미국·러시아·프랑스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중국은 1995년과 1996년 발사된 ‘장정(長征)’ 로켓이 잇따라 폭발해 한동안 절망했으나, 그 뒤 25번에 걸친 위성 발사를 모두 성공했다.
‘장정’ 로켓은 발사 비용이 매우 저렴해 인기이다. 이미 22개의 외국 위성을 쏘아주었다. 중국은 2010년 세계 세 번째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겠다며 준비 단계로 ‘선저우(神舟)’ 무인우주선을 세 차례 발사해 귀환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중국은 달에 사람을 보내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우주개발사업단은 1983년부터 3조원을 쏟아부어, 1994년 ‘H-2’ 로켓을 개발했다. 이로써 일본은 3만6000km 상공의 정지궤도에 방송통신위성을 진입시킬 수 있는 ‘빅 5’국가 대열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 로켓은 제작비가 국제 위성발사 가격보다 배 이상 비싸 국제경쟁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이에 따라 컨소시엄 형태로 일본로켓시스템사를 설립해 2001년 개량형 ‘H-2A’ 로켓을 개발했다. H-2A 로켓은 세 번 발사에 성공했다. 일본은 민간추진방식으로 방향을 바꾸고 부품을 국제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제작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뒤늦게 중국과 일본 추적에 나선 한국은 2015년 세계 10위권의 선진 우주국 진입을 목표로 총 5조1570억원이 소요되는 ‘국가우주개발 중장기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드는 우주개발 계획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액체로켓 KSR-Ⅲ가 ‘한미 미사일 각서’ 위반이라며 끊임없이 발목을 잡던 미국은, 2001년 9·11테러 바로 다음날 국무부 직원 등으로 구성된 사찰단을 항우연에 보내, 로켓 개발 시설을 조사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이 MTCR에 가입했고, 한미 미사일 각서도 개정했지만, 자국의 규정을 들어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독자적인 우주발사체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는 위성 발사에 제약을 받는다.
20년 전 한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겨우 고개를 들었던 로켓 기술의 싹이 뿌리째 뽑힌 경험이 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직후 단행된 국방과학연구소 미사일 개발팀의 대량 숙청이 그것이다. 이 숙청은 새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미국에 잘 보이려고 ‘알아서 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더 지배적이다.
위성 자력 발사는 안보에도 중요
위성 자력 발사 능력의 확보는 우주 개척뿐만 아니라 안보에도 중요하다. 금강산댐에 구멍이 나 있는지, 주변 국가가 어떤 무기를 겨누고 있는지 알려면, 고해상도의 관측위성을 자력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와 국민의 관심이다. 우주 개발은 천문학적인 돈이 들기 때문에 흔들림 없는 국가 목표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2002년 10월과 11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과학기술자들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의회 연설을 통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낸 뒤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에게 혹시 이런 ‘빅 프로젝트’ 구상은 없냐고 물었다. 두 후보 모두 빅 프로젝트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무엇을 할지는 좀더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된 후보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항우연을 방문해 로켓 개발진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