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과 더불어 성장하고 책을 통해 인생의 답을 얻어왔다. 그 결과 매우 ‘충동적인 성격’인데도 ‘무사히(?)’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무사히’라니?”,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책 때문에!’ 이렇게 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일 내가 읽은 그 무수한 소설과 시와 수많은 읽을 거리가 없었더라면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하겠다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간접체험’이라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호기심 진정제’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격랑 속의 쪽배’였을 것이다. 책 때문에 이나마 안정적이고 평화스럽게 살아왔다고 여긴다.
‘어쩔 수 없는’ 활자중독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읽기를 무조건 좋아했다. 하다못해 그 옛날 시장 다녀온 엄마의 장바구니에 든 신문지 조각까지 읽어내려 갔다. 꼬마 책벌레는 어른이 되면서 활자중독자가 됐다. 기실 나는 여러 가지 중독증세를 지니고 있다. 아주 가벼운 정도의 알콜중독을 비롯해 커피중독 등등.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게 활자중독이다. 여전히 무엇인가를 읽지 않고 있으면 불안하다.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는 바쁜 일정 속에서 허전하고 웬일인지 기운이 없을 때가 있다. 며칠 간의 일정을 곰곰 복기해보면 답은 대개 두 가지 이유로 집약된다.
우선 고기를 한 번도 먹지 않고 매우 부실한 식사만 했을 때다. 아무리 제리미 리프킨이 외쳐도 나는 철저한 육식동물인 듯 고기를 안 먹고 며칠 정신 없이 일하면 매우 힘이 든다. 그날은 당장 고깃간에 가서 좋은 안심을 사다 스테이크를 해먹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동네 패밀리 레스토랑에라도 간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작심해 읽은 책이 없는 경우다. 대충 눈으로 훑어내려간 속독식 독서로 몇 권을 해치웠거나, 신문·잡지나 인터넷 훑기로 밤을 지샌 경우다. 마음에 드는, 명석한 저자가 그의 온갖 지식과 재능을 확신하며 ‘바로 이거라구, 제대로 생각해봐’하고 자신만만하게 밀고 들어오는 책의 유혹은 지금도 ‘한 번 경험해보면 어떨까’ 싶은 마약의 유혹처럼 강렬하다.
그래서 그런 날은 새벽 2∼3시까지 폭식하듯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 내가 좋아하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두 잔 곁들이면 그보다 더한 사치와 쾌락과 행복은 없는 듯하다.
언젠가 아이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경주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모두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인지라 ‘엔터테이닝’도 고달팠다. 온천과 맛난 음식, 산책이 이어졌는데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이와 어머니와 함께였는데도 그리 행복한 줄 몰랐다. 그러나 마침내 오랜 시간 온천에 지친 어머니와 아이가 곯아떨어졌을 때 어두운 호텔방에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세상은 잠들었고 나는 깨 있었다. 집중력이 생기자 생각을 많이 해가며 읽어야 하는 책을 두 권이나 읽고 포만감에 잠든 기억이 난다.
일본특파원 시절 일 주일 내내 팽팽 돌아가는 긴장감 속에, 또 매일 저녁을 술과 장미의 나날로 보낸 내게 주말은 ‘오아시스’였다. 모처럼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고 열 권쯤 되는 잡지를 소비하듯 읽어제쳤다(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락은 잡지를 읽는 일이다). 이틀 동안 어느 누구와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책만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 기억이다.
어떤 책을 즐겨 읽는가? 많은 이들이 묻는다. 물론 모든 책을 읽는다. 그렇지만 나이와 더불어 책읽기 성향 역시 변화를 거듭하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 매우 조숙한 편이어서 이미 초등학교 때 ‘테스’ ‘노인과 바다’ ‘죄와 벌’을 읽었는데 지금은 그 점이 참 아쉽다. 그저 스토리텔링을 따라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가로운 시간이 생기면(은퇴 후?) 초등학교 때 읽었던 그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볼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대학시절엔 전공이 사회학이었던 만큼 철학·심리학·인류학·정치학·경제학 등 사회과학서적을 두루 읽었다. 개인적으로, 전공보다는 대학시절 자유롭게 읽었던 수많은 책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경쟁력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처절한 사회생활의 현실’에서 종교서적도 이것저것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차별’에 분노해서 여성학 관련 책들도 많이 찾아 읽었다. 물론 사회생활에 나름대로 이력이 붙고 자신감이 붙어가면서 경영·경제서적을 읽었다.
또 일본에서 특파원 생활을 할 때는 ‘일본을 제대로 알자’고 작정하고 일본어 공부를 겸해 일본문학서를 100권 돌파하고, 일본 정치사상사 및 문화사 관련 책들을 읽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어 실력도 늘었지만, 무엇보다 일본사회를 들여다보면 그런 대로 감이 잡히고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예측하는 나름의 능력을 갖게 돼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14년 간의 기자생활을 청산했다. 마치 ‘대한독립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선 누군가의 지시를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점, 시간당 계산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책 읽는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읽기는 직장시절처럼 ‘교양’이나 ‘오락’이 아니라 철저한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
“나는 여전히 읽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받아들이고 걸러내고 내 나름대로 가공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그 자체가 부가가치를 더해 돈이 되었다. ‘자유계약선수(Free Agent)’가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지식이 곧 돈이라는 지식자본의 의미를 체험했고 지식이 직거래되는 시대를 예감했다. 그런 점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가장 확실한 투자다. 특히 이 투자는 누가 빼앗아갈 염려도 필요없다는 점에서 안전하고 가장 수익률이 높은 투자다. 그래서 그 이후 더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쓰며 살아왔다.
요즘 내 관심사는 과학서적 읽기다. 대학시절부터 인류학에 관심이 컸지만 생물학이나 동물학엔 그리 흥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인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여성과 남성은 왜 다른가?’ ‘왜 남성은 지배자였던가?’ ‘왜 남성은 폭력적인가?’ 등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게 됐다. 그 답을 안겨준 이들은 모두 과학자나 동물학자, 생물학자들이었다.
여성 과학자 린 마골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살아 있음의 경이를 배웠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논쟁적인 책 ‘털없는 원숭이’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자연주의자’는 무척 감동적으로 읽은 아름다운 책이다. 바래쉬 부부의 ‘일부일처제의 신화’,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이나 ‘게놈’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물론 남성의 폭력성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 대안까지 제시한 리처드 랭햄의 ‘악마 같은 남성’은 남녀불문하고 한번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런 책을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