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이 제조업 전반에서 우리를 바싹 추격하고 있다. 세계는 IT에 기반한 지식 기반 경제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면 동북아의 비즈니스 허브로 거듭나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대내외적 여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 대답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1997년 외환위기도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정부 주도 경제 운영에 집착한 결과 불거진 것이다. 또한 세계는 이미 정보통신산업을 기반으로 이른바 지식 기반 경제(knowledge-based economy)로 이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구 13억이 넘는 이웃 중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우리를 무섭게 따라오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우리 경제의 성장 기조도 벌써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외환위기 직전 1만달러를 넘어섰던 1인당 국민소득이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발전 모델과 성장 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들어 이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을 동북아의 경제 중심지(business hub)로 만들어야 한다는 국가 발전 비전이 제시됐고, 다행히 많은 국민이 이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가 발전 모형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 어느 나라나 지역이 진정한 경제 중심지가 되려면 그 나라나 지역은 우선 금융 분야에서 중심지가 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제 중심지란 한마디로 인근 국가에 필요불가결한 많은 고부가가치 서비스와 재화를 제공하는 곳인데, 그런 서비스 중 핵심이 되는 게 바로 금융 서비스다.
국제금융중심지에도 級이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한 시안이나 민간에서 제안한 내용은 주로 물류 같은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제안들은 동북아의 경제 중심지가 되려면 먼저 금융 중심지가 돼야 한다는 점을 놓침으로써 커다란 맹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뉴욕, 런던, 홍콩, 싱가포르 등은 세계적인 경제 중심지인데, 그것은 그들이 바로 금융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중심지(international financial center)란 국내 거주자 사이에는 물론이고 외국 거주자 간, 그리고 외국 거주자와 국내 거주자 간에 여러 형태의 금융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국제금융중심지는 앞서 말한 런던과 뉴욕이다.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들 수 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아일랜드 더블린, 미국의 샬롯과 델라웨어, 그리고 케이먼 아일랜드 등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같은 급의 국제금융중심지는 아니다.
우선 런던과 뉴욕은 전세계에서 모여든 시장 참여자들을 상대로 장단기 채권, 주식, 선물, 파생상품, 개인신탁, 연금, 예금, 대출, 보험 등 온갖 금융자산을 거래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종합적(broad-end)이며 세계적(global)인 금융 중심지라 일컫는다. 특히 런던은 국내 거주자보다 해외 거주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업 비중이 뉴욕보다 더 높아 국제금융중심지로서는 더 높이 평가받는다.
이에 비해 싱가포르, 홍콩 등은 여러 가지 금융상품을 취급하지만, 고객이 주로 아시아 지역에 한정돼 있다. 이들은 자국 경제 규모가 작고 자금 공급자 대부분이 비거주자들이며, 자금 사용자도 전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이라기보다는 아시아 지역을 발판으로 활동하는 기업 및 금융기관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국제금융중심지이기는 해도 엄밀하게 따지면 지역(regional) 국제금융중심지로 분류된다.
그리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위스 취리히, 룩셈부르크, 케이먼 아일랜드 등은 개인의 자산관리, 기금운용, 보험 등 몇몇 금융상품에 특화하는 이른바 틈새시장(niche market)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더블린, 델라웨어 등은 자체 금융거래에 중심을 둔다기보다는 다른 금융 중심지에서 발생한 금융거래의 회계처리, 계약작성, 법정기록 등 이른바 후선 업무(back-office service)에 집중한다.
이처럼 여러 형태의 금융 중심지가 있는데, 이들은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국내 거주자를 상대로 하는 금융거래든 비거주자를 상대로 하는 금융거래든 정부 규제나 감독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둘째, 금융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이 전혀 없거나 매우 낮고, 정부 규제도 적으며 금융비밀과 익명성이 잘 보장된다. 셋째,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창의적인 인력을 많이 보유하고 있고, 국제거래를 낮은 비용으로 신속하게 성사시키는 회계, 법률, 신용평가 분야의 전문가들도 많다.
우리가 세계 수준의 국제금융중심지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너무나 많다.
첫째, 최첨단 금융기법과 노하우를 접함으로써 국내 금융산업 경쟁력이 현저히 강화된다. 또한 국내 금융기관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어 국내에서뿐 아니라 동북아 전역을 대상으로 영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나아가서는 전세계를 무대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우리 경제가 더욱 높은 성장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느 경제에서나 국민의 저축이 생산성이 높은 투자로 이어지지 못하면 침체되기 마련인데, 우리 금융산업이 발전하면 저축으로 마련된 모든 재원을 보다 효율적인 투자로 연결할 수 있다. 나아가 한층 발전된 금융산업, 특히 자본시장의 발전은 부실대출을 줄이고,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 같은 신규 사업 영역을 확대시켜 기술혁신의 속도를 높여준다.
셋째, 우리 국민은 국내에 있으면서도 전세계적으로 투자기회를 모색할 수 있게 되므로 투자 선택의 폭이 크게 넓어진다. 이것이 국민복지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넷째, 취업구조가 부가가치가 높은 형태로 재편된다. 금융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다. 런던의 금융산업은 타 산업에 비해 최소 3∼4배 높은, 연 평균소득 10만달러에 이르는 일자리를 100만개 이상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최근까지 전체 취업 인구의 7%밖에 되지 않는 금융업 종사자들이 국가 세수(稅收)의 14%를 부담했다. 이는 금융산업 발전이 경제 전체의 부가가치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다.
다섯째, 우리 경제가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를 겪을 개연성이 크게 낮아진다. 금융 중심지가 되면 우리 금융기관들의 영업 내용과 재무제표 투명성이 높아질 것이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재원이 늘어남으로써 우리의 투자도 전세계적으로 다변화되어 유동성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감소된다.
이에 더해 유수한 외국 기관이 우리나라에 진출하면 그들은 한국의 금융 안정이 자신의 이익과 부합한다고 볼 것이므로 외부 충격이 발생했을 때 즉각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만약 1997년 무렵에도 한국에 주요 외국 금융기관들이 진출해 있었다면 유동성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우리 정부와 기업, 가계는 필요한 자금을 좀더 쉽고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자본에 대한 접근이 제한돼 높은 자본조달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국제금융중심지가 되어 자본 유입이 증가하면 우리 정부, 기업, 가계는 필요한 자금을 지금보다 용이하고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자본조달 비용이 줄면 투자수익이 높아져 경제성장을 촉진한다.
일곱째, 서비스 산업 전반에 걸쳐, 즉 금융 부문과 직접 관련된 재무·회계·경영·법률 서비스뿐 아니라 그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오락·문화·교육·관광을 포함한 기타 서비스업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켜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는 앞으로 우리 제조업의 많은 부분이 경쟁력을 잃는 사태에 대비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안보 강화에도 도움
여덟째, 우리가 추구하는 지역 경제중심지로서의 기능이 강화된다. 기실 경제 중심지에 기반을 둔 많은 기업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자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면 한국은 진정한 경제 중심지, 비즈니스 허브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또한 허브와 주변국 간에 교역량이 증가할 때 무역금융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데, 그런 금융 서비스 수요를 저렴한 비용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비즈니스 허브는 유지되기 힘들다.
아홉째, 한반도의 안보가 획기적으로 강화된다. 금융 중심지는 주변국이 필요로 하는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다수의 대형 외국 금융기관들과 다국적 기업이 들어와 영업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주변국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선진국들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진정으로 원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조그만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많은 국방비를 쓰지 않으면서도 주변국과 당당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은행에서 투자상담 서비스를 받고 있는 외국인 고객들
그러나 한국이 동북아의 국제금융중심지가 되어 개발에 필요한 금융 수요를 충족시키고 이 지역 안의 금융 협력을 강화해 나가면 지역 경제 개발은 가속화하게 마련이다. 이 경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자연히 높아진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금융산업이란 하나의 성장산업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매킨지에 의하면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선진국들의 금융자산 총액은 10조7000억달러에서 무려 80조달러로 늘어났고, 2020년에는 200조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같은 증가율은 같은 기간 이들 국가에서 기록한 경제성장률보다 몇 배나 높다. 이는 앞으로 어느 나라든 금융산업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고도의 경제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국제금융중심지로 성장하면 이상과 같은 막대한 혜택을 누리게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대내외적 여건들은 국제금융중심지로 발전할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인구 100만 이상 도시 43개 인접
대외적 측면에서는 우선 세계 금융환경의 변화가 한국이 국제금융중심지로 성장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약 20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금융 중심지는 뉴욕과 런던으로 압축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이들 금융 중심지는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해졌다.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더블린, 델라웨어 같은 지역이 바로 그런 필요에 따라 금융 중심지로 성장했다. 세계 금융환경의 변화는 이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세계 금융 네트워크의 한 축으로 성장할 기회를 주고 있다.
동북아 상황도 고무적이다. 현재 동북아 지역은 세계 GDP의 20%를 담당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그 비율이 30%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런 거대한 경제 규모와 급속한 발전에 따라 동북아 지역에서 금융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도 국제금융중심지가 없는 형편이다. 일본 도쿄는 2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금융중심지로 도약하는 데 실패했으며, 중국 상하이는 국제금융중심지를 지향하고 있으나 중국 경제가 아직 계획경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국제금융중심지로 도약하는 데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그간 홍콩과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 노릇을 해왔지만, 이들은 지리적으로 동북아보다는 동남아에 더 가깝다. 더구나 홍콩은 중국과의 정치·경제적 통합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며, 싱가포르는 지리적으로 보다 남쪽에 치우쳤을 뿐 아니라 경제 규모에서도 한국에 크게 뒤진다.
동북아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른 금융 수요가 증대하고 있는데도 동북아에 아직 금융 중심지가 없는 것을 고려하면 향후 이 지역에서 새로운 금융 중심지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한국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대외적 기회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동북아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여러 이점을 갖췄다.
우선 한국의 경제 규모는 현재 세계 13위로, 2010년이면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는 영국의 경제 규모와 비슷한 수준으로, 우리가 영국처럼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하는 데 있어 경제 규모로서는 손색이 없는 것이다.
둘째, 한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심장부에 위치한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이내 거리에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무려 43개나 있다. 게다가 영종도 국제공항이 허브 공항으로 개항한 이후 동북아뿐 아니라 유럽과 북미의 대도시를 저렴한 비용으로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이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면 국제금융중심지로 성장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셋째, 한국은 이미 국내적으로 많은 금융자산 풀(pool)을 보유하고 있다. 매킨지의 분석에 따르면 2001년 기준으로 한국의 전체 금융자산 규모는 1조6000억달러로 일본(23조달러)에는 크게 뒤지지만,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큰 중국(1조7000억달러)과는 비슷한 규모다. 따라서 이런 막대한 금융자산을 관리할 금융 서비스가 필요한 상황이다.
더욱이 한국의 인구구조로 볼 때 조만간 자금 수요자인 젊은 세대보다 자금 공급자인 노령층이 더욱 증가해 금융자산 규모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때문에 노령 저축자들의 자산관리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급증할 것이다.
넷째, 한국의 여러 개별 금융상품 시장 규모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수준이다. 특히 채권, 보험 분야에서 그러하다. 한국의 채권시장은 이미 아시아 최대 규모로, 1999년 말 우리 채권시장의 잔고는 2460억달러에 달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 채권시장 잔고의 36%를 차지했다.
현재 한국의 주식시장 규모는 외견상 그리 크지 않아 보이지만, 이는 한국의 주식가치가 경영의 투명성 결여 등과 같은 이유로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출 기준으로 아시아 100대 회사 중 56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주식시장은 얼마든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향후 저축자들의 예금이 은행 등에서 주식시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의 생명·손해보험 시장도 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수익 기준으로 1999년 우리나라 보험시장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의 49%를 점유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주가지수 선물이나 옵션 등 일부 파생상품의 경우 이미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장을 형성했다.
외환시장은 원-달러 거래의 경우는 활발한 편이나 이종통화(cross-currency) 거래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외국 투자가들 외에는 참여율이 매우 낮은 편이며, 스왑과 헤지 분야에선 거의 거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국내 기업마저 환율 헤지 등을 할 때는 해외시장을 활용하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아직껏 외국인들이 국내에서 원화자금을 조달하는 데 많은 규제를 받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규제만 풀리면 외환시장도 빠른 시일 안에 발전할 수 있는 부문이다.
다섯째, 그간 진행된 금융기관 통폐합의 결과 한국은 여러 대형 금융기관을 보유하게 됐다. 5년 전만 해도 아시아 100대 금융기관에 속하는 한국의 금융기관은 한 곳도 없었지만, 지금은 국민은행 등 9개 금융기관이 아시아 100대 기관에 진입했다. 특히 국민은행은 아시아 11위의 금융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금융기관 통폐합이 마무리되면 우리금융과 하나은행, 신한은행도 비슷한 수준의 대형 금융기관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금융기관의 대형화는 한국이 금융 중심지로 부상할 가능성을 더욱 크게 만든다.
여섯째,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금융개혁이 아직 강력한 모멘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향후 상대적으로 금융산업이 낙후된 상하이, 도쿄 등과의 경쟁에서 큰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은 이처럼 지속적인 금융개혁으로 외국 금융기관과 투자자의 신뢰를 계속 높여왔는데, 이는 한국이 국제금융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민주화, 사법부 독립도 큰 힘
일곱째, 한국은 교육수준이 높아 우수한 인적자본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전체 취업인구의 25% 이상이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췄고, 고등학교 졸업자 중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이런 수치는 미국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인 이스라엘에 버금가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지식기반 경제에 도움이 될 역량을 기르는 데 여념이 없다.
여덟째, 한국은 첨단 IT 시설과 양질의 IT 인력을 풍부하게 갖췄다. 국민의 51%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중 3분의 2는 고속 인터넷 서비스망(broadband service)을 이용한다. 증권 거래도 3분의 2가 온라인으로 처리된다.
이처럼 우수한 IT 인프라를 통해 한국은 하루 24시간 세계 어느 금융시장과도 다양한 금융상품을 온라인으로 거래할 수 있으며, 무선을 통한 금융거래 기반도 세계에서 가장 앞서 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우수한 IT 인프라는 금융거래를 지원하는 후선 업무, 특히 결제 업무(settlement clearance)에 즉각 활용할 수 있다.
아홉째, 한국의 사법부는 아직 선진국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간 지속된 민주주의 발전에 힘입어 여타 아시아 경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독립성을 확보했다. 세계적인 민간 투자 운영사인 론스타, 뉴브리지, 칼라일 등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한국에서 더 활발하게 영업을 펼치고 있는 것은 한국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금융 중심지에서 예상되는 분쟁을 효율적이고 신뢰성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열째,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국민의 열정은 매우 강렬하며 언론도 상당히 독립적이다. 무엇보다 지난 15년에 걸쳐 진행된 평화적 정권 교체는 외국 투자자들의 한국 정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나라는 국제금융중심지로 떠오를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될 능력과 여건도 구비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금융 중심지의 모습은 대략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를 설계하기에 앞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우선 고려할 것은 종합적인 금융 중심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틈새시장이 될 것인가 하는 것과 대상 고객을 전세계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인근 지역으로 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또한 어떤 금융상품과 영업 내용으로 특화할 것이냐, 시장 참여자로 어떤 기관과 사람을 유치할 것이냐, 금융거래를 지원할 각종 서비스는 어떤 수준으로 확보할 것이냐, 금융산업의 감독 체계를 어떤 형태로 할 것이냐, 세계의 다른 금융 중심지와는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이냐도 미리 챙겨야 할 사안이다. 이러한 고려에 따라 일차적으로 한국이 지향해야 할 국제금융중심지의 윤곽을 그려보자.
런던은 1980년대 후반부터 대담한 정책 개혁을 통해 세계 굴지의 금융 중심지로 성장했다.
따라서 한국은 우선 향후 8∼10년 간은 현재의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지역 국제금융중심지를 지향하면서 다양한 상품 개발에 역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려면 한국에 기반을 둔 금융기관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금융중개 기능을 수행하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금융자산을 모집·배분하며, 다양한 종류의 금융자산을 거래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시장이 필요로 하는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상품시장과 영업내용에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비교우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채권시장, 파생상품시장, 보험시장 등을 먼저 발전시키고, 외환시장도 남아 있는 규제를 빠른 시일 안에 철폐해 활성화시켜야 한다. 영업분야에서는 우리가 이미 상당한 경험을 쌓아온 상업은행업, 소매은행업, 증권중개업, 증권매매업 등을 발전시키고,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 투자은행업, 자산운영업, 펀드운영업 등으로 진출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우수한 IT 시설과 인력 여건을 고려하면 결제업무 등은 곧 착수할 수 있는 분야다.
유치할 시장 참여자로는 채권시장, 주식시장, 외환시장, 파생상품시장 등 모든 시장에서 국내 거주자는 물론이고 외국 업체 및 금융기관, 정부 및 정부 대행기관, 개인들을 망라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일류급 회계사와 변호사, 세무사, 증권분석가, 가격책정가, 신용평가사, 금융설계사들을 국내에서 양성해야 할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여와야 한다.
금융감독 체계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감독, 실효성 있는 감독, 사후보다는 사전적인 감독, 대립적이기보다는 상호협조적인 감독, 감독자와 피감독자 간의 양방향 의사소통이 이뤄지도록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다른 금융 중심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두 가지 원칙이 강조된다. 타 금융 중심지와 경쟁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에는 상호보완적인 면도 많으므로 서로 협조하고 고객을 소개하는 등 업무에서 긴밀히 제휴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한국의 금융 중심지는 런던을 모델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런던은 뉴욕에 비해 국제 업무의 비중이 크다. 또한 런던에는 유럽이라는 거대한 배후시장이 있듯이 한국도 동북아라는 매우 큰 배후시장을 갖고 있다. 특히 런던이 1980년대 후반 이른바 ‘빅뱅(Big Bang)’이라는 대담한 정책 변혁을 통해 오늘날 세계 굴지의 금융 중심지가 된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아시아 최대 채권시장 키워야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한국이 향후 8∼10년에 걸쳐 국제금융중심지로서 지향해야 할 중간 목표를 정리해 보자.
첫째, 우리 정부와 기업, 외국 정부와 기업을 모두 참여시켜 다양한 만기(滿期)의 상품을 제공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가장 큰 유동성을 제공하는,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채권시장을 발전시킨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보다 다채로운 만기의 국채를 정기적으로 발행, 이른바 수익률 곡선(yield curve)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모든 금융상품 거래를 위한 일종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둘째, 아시아의 선도적 자산관리사 30% 이상이 소재하는, 아시아 3대 자산관리 및 개인금융(private banking) 시장의 하나가 된다.
셋째, 각종 기업의 자금 조달을 돕는 다양하고 심층적이며 유동성이 높은 거래소를 보유한 아시아 3대 주식시장 가운데 하나가 된다.
넷째, 다양한 종류의 파생상품과 만기 구조를 제공해 기관들의 완전한 위험 헤지가 가능하고, 상품이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외환시장을 조성한다.
다섯째, 시가총액 기준으로 아시아 3대 금융기관 본부의 소재지가 된다.
여섯째, 저렴한 비용의 신속한 지급·결제 시스템을 구축한다.
일곱째, 정부와 업계 간에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협력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규제·감독 환경을 조성한다.
여덟째, 최소한 서울이 외국인의 생활환경 면에서 아시아 상위 3위 안에 들도록 한다.
아홉째, 여타 금융 중심지와 밀접한 상호협력을 증진시켜 서로 윈-윈(win-win) 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국제금융중심지가 된다.
우리가 이런 중간 목표를 달성해 궁극적으로 동북아 국제금융중심지로 발전하려면 금융시장 개편전략과 금융외 부문 개혁전략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금융시장을 개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열 가지 전략이 수행돼야 한다.
첫째, 상호의존과 통합이라는 세계화 추세에 맞춰 외국 금융 중심지와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우호적인 통합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국제금융중심지가 되려면 다양한 국제 통화로 표시·평가되는 금융상품시장이 형성돼야 한다.
셋째, 매출·자산규모 같은 외형의 성장보다 내실 있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견실한 사업 모델과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춘 국내외 자본 수요자를 유치한다.
넷째, 효율성, 신용, 간소한 절차에 기초해 국내외 자본 공급자를 유치한다.
다섯째, 세계적 수준의 재무·회계·경영·법률 등 금융 관련 서비스를 확보한다.
여섯째, 위험을 극소화하면서도 혁신과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일곱째, 최고 수준의 기강과 정직성(discipline and integrity)을 구비한 시장을 만든다.
여덟째, 감독기관과 피감독자가 과거의 일방적, 지시적 관계에서 탈피해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규제 및 감독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강화한다. 특히 규제·감독의 틀 안에서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상품은 제공할 수 없는 현행 ‘포지티브 리스트 접근 방식(positive list approach)’에서, 금지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네거티브 리스트 접근 방식(negative list approach)’으로 전환해 금융 중심지의 생명이라 할 새로운 상품 개발이 촉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금융 시스템의 복잡성을 제거함으로써 제도의 복잡성에서 연유하는 각종 마찰을 최소화하고 이로써 금융거래가 더욱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
구조조정, 세제개혁 시급
금융시장 여건 개편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금융 중심지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크게 경제부문과 비경제 부문으로 나눠볼 수 있다. 경제 부문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정부의 기능을 명확하게 재정립해야 한다. 그간 우리 정부는 시장경제원리에 부합하는 정부 기능 재정립을 입버릇처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국민 여론을 수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여러 정부 부처들이 정부가 시장을 선도하는 것과 같은 지시적인 일을 다반사로 행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문에 조흥은행의 정부 지분 매각을 지연시키고 있는 게 그런 예다. 제대로 된 시장경제체제에서 정부는 시장이 잘 작동되도록 하는 조력자(facilitator 또는 enabler)여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간 정부가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구조조정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부문의 구조조정 진척도는 50% 정도라고 보는 게 옳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제2금융권에서 더 심각하다. 금융기관의 이윤도 외국 금융기관에 비하면 낮고, 금융기관 통합도 아직 진행중이다. 은행의 민영화는 이제 착수단계나 마찬가지다.
기업 구조조정도 미완성이다. 진작에 퇴출돼야 마땅한 기업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제조업 분야의 많은 기업들은 영업이익으로 부채 이자도 못 갚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의 실적이 이처럼 열악하면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수익성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증시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여전한 것은 기업의 수익성뿐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현 정부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많이 높였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실상과는 좀 다른 얘기다. 구조조정을 위해 정리해고를 하려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전임자에겐 사용자측이 보수를 줘야 하고, 노사정위원회는 노사쟁의를 정치화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제기됐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무색해졌다. 특히 한국처럼 금융부문에 노조가 결성된 나라는 극히 드물다.
현행 조세제도도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는 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 특히 개인소득세와 법인세가 큰 문제다. 개인소득세와 법인세는 우선 누진율이 너무 높다. 개인소득세의 경우 연간 소득이 8000만원을 넘으면 39.6%라는 최고 한계세율을 적용한다. 법인세에선 법인의 연간 순소득이 1억원을 넘으면 29.7%라는 높은 세율을 적용한다.
이처럼 높은 한계세율은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지나친 누진율은 납세자들로 하여금 정치력을 동원해 여러 가지 공제와 면제 조항을 도입하게 만든다. 그 결과 세법은 더 복잡해지고 투명성을 잃게 되며, 세무당국 실무자의 빈번한 자의적 해석에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다. 누진율이 우리나라처럼 높으면 해외의 금융 전문인력들이 한국에 오려 하지 않는다. 개인소득세 최고 한계세율이 20%인 홍콩이나 28%인 싱가포르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하는 게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외국인의 개인소득에 대해 특별한 공제제도를 도입할 게 아니라 싱가포르와 홍콩처럼 모든 납세자에 대해 공제를 최소화하고, 대신 누진율을 크게 낮춤으로써 사실상 비례세율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 법인세의 경우 아일랜드처럼 세율을 14% 수준으로 낮추거나 나아가서는 폐지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아일랜드는 1970년대 초 법인세를 크게 낮춘 이후 지금까지 EU의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했다.
비경제 분야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정책과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첫째는 법률 서비스 강화다. 한국의 법률시장은 세계 수준의 국제금융중심지를 지원하기에는 아직도 보강돼야 할 부분이 많다. 국제금융거래가 요구하는 기법도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 또 다른 아시아 지역과 비교하면 사법부의 독립성이 잘 보장되고 있다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다. 외국인이 대규모 국제금융거래를 할 때 우리나라에서 계약을 하지 않고 구태여 홍콩, 싱가포르까지 가서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법률시장과 법제도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국내 법률시장 개방은 더 지체할 일이 아니다. 법률시장 개방은 국내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국 법률사무소가 국내에서 활동할 경우 우리 정부의 규제 및 법률체계를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민정책 개혁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3D 업종의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순노동력 확보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외국 전문인력 유치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정부는 외국인 단순노동자에 대해서는 불법체류기간 연장 등과 같은 관대한 조치를 취하면서도 외국 고급인력에게는 여전히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금융중심지로 뿌리 내리려면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전문인력들이 필요하게 마련이며, 특히 초기에는 이런 인력에 대한 수요를 국내에서 다 충족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이민정책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일정한 자격을 갖춘 외국 전문인력에게는 영주권을 주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는 생활환경 개선이다. 교통체증, 공해, 높은 주거비용, 아동 교육시설 미비, 영어 소통의 한계, 오락 및 문화적 향유 기회의 부족 등은 외국인이 한국에 거주하는 데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이런 전반적인 생활환경 문제는 중앙정부와 서울시 같은 지방정부가 협조하면 단시일 안에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국은 예술, 특히 음악 부문에서 세계 수준의 거장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연시설을 확충한다면 최소한 문화면에서 서울은 매우 매력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 또한 환경 감시 공무원에게 경찰권을 부여해 환경 관련 법규가 보다 효과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하면 환경오염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같은 조치들은 한국을 국제금융중심지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 아니라 한국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범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금융 중심지가 되기 위해 고쳐야 할 제도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장기간에 걸쳐 금융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하고, 정치권도 초당파적인 컨센서스를 이뤄야 한다.
또한 요즘처럼 빨리 변하는 국제금융환경에 적응하려면 정부 실무자들의 전문성에만 의지하기보다 민과 관의 파트너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체적인 작업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채권시장, 주식시장, 외환시장, 파생상품시장, 금융중개기관, 금융거래 인프라, 회계, 각 분야별 전문성 기준, 규제 및 감독, 법률서비스시장, 조세제도, 출입국 절차 및 비자를 포함한 이민정책, 노동 및 주거환경 등 10여 개 과제별로 실무작업반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직속 민관합동위 만들자
국제금융중심지를 향한 비전은 일시적인 노력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향후 8∼10년간 지속될 단계별 또는 파상형 접근(waved approach)이 필요하다. 이 접근법은 단계별로 다소 중첩되는 4단계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1단계는 기본 전략을 완성하는 단계, 2단계는 역내 경쟁력을 갖춘 일류 금융기관(regional champions)을 육성하는 단계다. 1단계가 완료된 후 2단계와 기간이 중첩되며 추진될 3단계에서는 국내 금융시장을 완전히 국제화하고, 2단계가 끝난 뒤 3단계와 중첩되며 추진될 4단계에서는 한국의 역내 위상을 높여 금융 중심지로서 기반을 굳힌다.
한국을 세계 수준의 국제금융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시간적 여유는 그리 넉넉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이 이런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유일한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도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등이 비슷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땀을 쏟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우리가 상하이나 도쿄에 비해 비교우위와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므로 궁극적으로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하는 데 8∼10년의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해도 계획과 추진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2003년 2월 출범할 새 정부는 출범 직후 한국을 동북아 국제금융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대통령 직속의 민관합동 기획·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야 한다.
이 위원회에는 급격히 변화하는 금융시장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도록 민간 금융전문가도 참여시키고, 세계 금융환경 변화에 정통한 자문을 받기 위해 외국 전문가도 일정 부분 참여시켜야 한다. 또한 정부의 고위 정책 입안자와 민간의 내·외국인 전문가 및 지도급 인사가 참여하는 이 민관합동위원회는 범국가적 노력이 진행되는 모든 단계에서 효과적인 업무추진에 필요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
향후 8∼10년에 걸쳐 국제금융중심지가 되기 위한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현존하는 갖가지 제도적 장벽을 제거해 간다면 한국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상당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세계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고,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지속되어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도 2만달러를 훨씬 넘어서며, 외부 충격을 탄력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경제 체질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한국이 동북아 국제금융중심지가 되면 한국은 말 그대로 이 지역의 종합적인 경제 중심지가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국제금융중심지로서 동북아 전역에 걸친 경제개발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과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줄곧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지난 40여 년 동안은 경제발전에 앞선 우리가 중국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중국이 제조업 부문에서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따라잡고 있는 현실에서 금융분야마저 중국에 뒤지게 되면 우리는 물론 후손들마저 또 다시 중국의 절대적 영향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유태인의 ‘금융파워’
그러나 우리가 중국보다 먼저 금융 중심지가 되면 외교력과 국제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평화통일도 앞당길 수 있다. 북한도 언젠가는 경제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하고, 그 과정에 우리가 금융면에서 도움을 주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공고해진다.
어떤 이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수민족 유태인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세계질서의 헤게모니를 쥔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배후에서 조정하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태인이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전세계 금융 분야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국제금융중심지로 부상할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간의 경제적 성과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글자 그대로 새 세기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