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ET 인형에 울고 휠라 신발로 웃고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윤윤수

  • 글: 윤윤수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입력2002-12-31 13:2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히트하지 않을까?’.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마자 샘플을 만들고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뿔싸. 나보다 한발 앞서 그 사업을 구상, 라이선스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내 노력은 물거품이 됐지만, 훗날 그는 내 인생에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됐다.
    ET 인형에 울고 휠라 신발로 웃고

    휠라와의 인연으로 평생 사업파트너가 된 호머 알티스(뒷줄 가운데)와 필자(맨 왼쪽)

    세상은 영웅에 의해 변화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영리한 사람에 의해 발전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세상은 소수일지라도 우직할 정도로 ‘변함없이’ 노력하는 자에 의해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한다. 진정한 행운도 영웅과 영리한 자의 것이 아니다. 우직할 정도로 변함없이 애쓰고 일하는 자의 것이다.

    나는 의사가 되고자 서울대 의과대학을 지원했으나 2지망을 했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치의예과에 합격해 반(半) 학기를 다닌 경험이 있다. 삼수 끝에 한국외대 정외과에 다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친구에게 ‘커닝’을 시켜주다 발각돼 1년 정학을 당했다.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던 20대 시절, 궁여지책으로 지원한 카투사에 복무하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이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 제대하고 복학하자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닌 이들보다 무려 6년이나 늦게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나이 서른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와 몇 군데 취직원서를 넣었지만, 나이가 많다 보니 번번이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해운공사 문을 두드렸는데, 카투사 시절 배운 영어실력 덕분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직장생활 2년여를 넘기자 그 무렵 젊은이들이 대개 그랬듯 해운업보다는 국제무역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JC페니(Penney)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매 체인망을 갖고 있던 회사에 입사했다.



    극과 극의 희비

    이 회사에 들어가보니 당시 인기 수출품목으로 각광받던 섬유제품들은 이미 입사한 분들이 다 맡고 있어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는 게 내 몫이 됐다. 다시 말해 하드라인(hardline) 개발을 떠맡은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수출할 만한 하드라인 제품이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찾아내 처음 수출한 제품이 카 스테레오였는데, 이게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사를 배워나가던 어느날,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가게 됐다. 그때 바이어 한 사람이 “일본 회사보다 싼 가격에 전자레인지를 납품받으면 좋을 텐데…” 하고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거 괜찮겠다 싶어 귀국하자마자 국내 전자업체 타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결같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만 해도 일반인들은 전자레인지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생산라인이 갖춰져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삼성전자가 관심을 보여왔다. 삼성 관계자는 즉각 미국 바이어에게 일본보다 대당 100달러 낮은 납품가격을 제시했다. 이 제의에 솔깃해하면서도 한국 회사의 생산능력이 못 미더웠던 바이어는 한국으로 날아와 두 눈으로 직접 공장을 보고서야 오케이 사인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전자업계의 그 유명한 전자레인지 신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삼성전자의 선풍기 공장에서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대량 수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나는 수출업계에 ‘진윤(Gene Yo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1년 (주)화승 수출이사로 스카우트됐다. 화승과는 그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화승의 전신인 동양고무에서 JC페니의 신발을 생산한 적이 있는데, 한때 품질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다. 그때 내가 나름대로 공정하게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동양고무 현승훈 사장과 얼굴을 익히게 됐다. 현사장은 훗날 화승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화승 부사장이 나를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추천하자 현회장이 쾌히 승낙함으로써 내가 학창시절에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되찾게 해줬다.

    30대 이상의 독자라면 1980년대 초 전국을 휩쓴 ET인형 리어카상 물결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 ET인형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화승 수출이사 시절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운 끝에 ET인형을 만들어 수출했는데, 그때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던 저작권 침해 판정을 받아 큰 낭패를 봤다.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있던 18만달러어치의 인형은 고스란히 불태워야 했다.

    그런 중에도 한국의 4개 공장에서는 ET인형이 계속 생산되고 있었는데, 수출길이 막힌 상태에서 대량 생산된 ET 인형은 리어카상들을 통해 헐값에라도 처분, 손실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에 피해를 안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다.

    한발 늦은 아이디어

    그후로도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며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럴 때마다 주변으로부터 뜻밖의 도움을 받아 큰 힘이 됐다. 화승에서 나와 고전할 때는 그 전부터 비즈니스 관계를 맺어온 존 피치라는 미국인이 “사업하는 데 보태 쓰라”며 1만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훗날 나는 피치가 사업에 실패하고 방황할 때 그에게 4만달러로 보답해 용기를 줬다. 일면식도 없던 부산의 신발업체인 태광실업 박연차 사장은 내가 사업을 일으키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5000만원짜리 당좌수표를 건네주기도 했다.

    휠라(FILA)와 손이 닿은 것은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있을 때였다. 당시 휠라는 의류분야에서는 꽤 알려진 브랜드였다. 반듯반듯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휠라 티셔츠가 제법 멋있게 보였다.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였다. 그걸 느끼는 순간 비즈니스 감각이 발동했다.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장사가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 라이선스로 미국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이디어를 떠올리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화승의 방계회사인 풍영에서 부리나케 신발 샘플을 만들어 휠라측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나보다 한발 앞서 그 사업을 생각해내고 라이선스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파트너가 된 호머 알티스다. 신발 샘플을 들고 이탈리아 본사로 찾아갈 예정이었으나 이미 라이선스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왠지 미련이 남았다. 라이선스를 받았다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어렵사리 알티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 미국 볼티모어로 날아갔다.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휠라 최초의 운동화 샘플(비록 내 마음대로 만든 것이지만)을 가져왔다고 하니 그도 마음이 동했는지, 또한 밑질 게 없다는 심정에선지 나를 만나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밤10시 볼티모어 공항에서 그를 만났다.

    거기서 참으로 기묘한 일을 겪었다. 알티스는 한국에 샘플을 주문할 생각이었고, 그 업체는 다름아닌 화승이었던 것이다. 내가 누군가. 화승의 현직 수출담당 이사가 아닌가. 두 사람의 묘한 인연에 우리는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 구상을 들어보니 의문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의 사업마인드로는 도저히 성공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신발제조업의 메카나 다름없던 한국이나 대만과는 함께 일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또 하나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자본력이었다. 제3자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로 했다지만, 그 정도 규모의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코끼리 비스킷’일 만큼 역부족이었다. 한마디로 영속적인 비즈니스가 불가능한 액수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왠지 허탈했다. 좋은 사업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간발의 차로 놓쳤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랬기에 휠라는 그후로도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대되는 ‘3분의 1’의 삶

    해운공사 2년, JC페니 5년, 그리고 화승에서 3년. 그렇게 10년에 걸친 직장생활을 끝내니 그야말로 섭섭했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도 없어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늘 마음에 담아뒀던 휠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비엘라를 찾았다. 미국 시장은 이미 알티스가 가져갔지만, 한국에서라도 라이선스 사업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보잘것없는 비즈니스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알티스가 미국에서 어떻게 휠라 라이선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짐작했던 대로 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84년 봄 볼티모어로 날아가 알티스를 만났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50만달러의 빚을 진 상태였다. 그래서 라이선스를 다른 곳으로 넘기고 자신은 월급쟁이 사장으로 일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를 차분하게 설득해 나갔다. 나는 브랜드 회사와 라이선스 계약자, 그리고 새 재정 파트너와 제품 공급자, 이렇게 4자 간에 역할 분담을 하는 비즈니스를 염두에 뒀다. 일이 되려고 했던지 행운도 겹쳤다. 마침 재정 파트너로 삼을 쌍용 미국지사의 정영우 지사장이 나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새로운 네트워킹을 통해 판매전략도 바꿨다.

    이러한 전략들은 그대로 적중하며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수익에 흡족해했다. 특히 알티스는 나를 은인처럼 여겼다. 나는 에이전시로서 판매액의 3%를 커미션으로 받았는데, 그 액수는 근근히 내 회사를 꾸려가기에 적당한 액수였다.

    그후 알티스는 휠라에서 손을 떼면서 필자에게 큰 도움을 줬다. 그가 본사에 조언을 해준 덕분에 나는 1991년, 연봉 100만달러를 받는 휠라코리아 사장이 됐다.

    안타깝게도 알티스는 7년 전 폐암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휠라 신발사업으로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많은 돈을 벌어놓고는 세상과 하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죽기 한 달 전에도 내게 전화를 걸어 “내가 큰돈을 번 것은 당신 덕분”이라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제 내 인생의 3분의 2는 산 것 같다. 참으로 굴곡 많은 시간이었다. 나머지 3분의 1 인생에선 과연 또 어떤 우여곡절과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질지 사뭇 기대가 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