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당선자가 되기까지 후보 노무현의 여정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힘겨운 승리 다음엔 늘 예상치 못한 위기가 뒤따랐다. 그때마다 노후보는 특유의 승부수를 던졌고, 국민은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 민주당 국민경선,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 그리고 마지막 관문 대선. 300여 일간의 길고 고달팠던 노당선자의 도전기는 ‘각본 없는 드라마’ 그 자체였다.
12월6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노사모 회원들이 노무현 당선자를 후원하기 위한 ‘희망돼지 저금통’을 모으고 있다.
“노무현 후보 595표, 지지득표율 37.9%.”
2002년 3월16일, 김영배 민주당 선거관리위원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세 번째 권역별 국민경선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 광주 서구 염주종합체육관은 ‘노란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이변이었다. 노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이후보를 제치고 종합득표 1위로 올라선 것이다. 노후보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선사했지만, 이후보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은 ‘광주의 선택’으로 평가된 이날 경선은 결국 국민경선 끝까지 이어진 ‘노풍(盧風)’의 발원지가 됐다. 한 달 반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노후보가 당내 경선을 위해 캠프를 차린 것은 1월 말.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 사용하던 서울 여의도 모 빌딩 사무실에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후보 노무현 추대위원회’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노후보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돈과 조직은 물론 당내 지지세력조차 없었다. 경선캠프에는 현역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장 선거운동을 함께 다닐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노후보가 경선 초기 이처럼 열악한 형편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당내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동교동과 관계악화 피해
2001년 말. 개혁성향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쇄신파들이 당 개혁과 함께 동교동계 퇴진을 요구하면서 당은 물론 청와대까지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당은 쇄신파와 이에 발끈한 동교동 구파, 그리고 중도 진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도개혁포럼 간에 극단적 분열 양상을 보였다. 여차하면 서로 갈라서는 사태로도 치달을 수 있는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각 계파는 개헌론, 정계개편론, 조기 전당대회론 등 사안마다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간에 접점이 만들어졌고, ‘당 발전·쇄신 특별대책위원회’를 꾸려 타협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 최종 시한은 연말까지였다. 하지만 시한을 넘겨 2002년 1월5일에서야 ‘당 발전·쇄신 특대위 안(案)’이 일부 수정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4월 중 전당대회를 실시한다’는 조기 전당대회론을 사실상 받아들인 이 안은 이틀 후인 1월7일 당무회의에서 통과됐다. 이는 당내 각 대선주자들의 대권경쟁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사분오열돼 있던 당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권 후보들이 속속 출사표를 던졌다. 이인제, 노무현, 김근태, 정동영, 김중권, 한화갑, 유종근 등 무려 7명이 대권 후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의원들은 각 계파별로 지지후보를 정하고 캠프에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후보를 지지하는 의원은 없었다. 개혁성향인 쇄신파 의원들조차 노후보 지지를 꺼렸다. 당 쇄신을 위해 권노갑 등 일부 인사들의 인적청산과 동교동계의 퇴진을 요구했던 쇄신파 의원들의 행동에 노후보가 동참하지 않았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실제로 노후보는 쇄신파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노당선자의 오랜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갑원 의전팀장의 설명이다.
“노후보는 적대적 또는 비적대적 관계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다. 당의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녀사냥식’ 정치에 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정치인은 선거를 통해, 당직자는 전당대회를 통해 정상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람직한 타개책이라고 제시했다. 이것이 당내 쇄신운동에 반대하는 모양으로 비쳐졌다.”
노후보가 이같은 원칙을 고수한 것은 일정 부분 전략적 측면이 고려된 것이기도 하다. 노당선자의 또 다른 한 측근은 “당내 지지기반이 없었던 노후보 처지에선 동교동계와 굳이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 필요는 없다고 봤다”며 “하지만 국민경선운동이 시작되면서 동교동계에 중립을 지켜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쇄신파 의원들이 노후보에게 서운함을 갖게 된 것은 노후보의 이같은 전략적 고려와 무관치 않았던 것이다.
쇄신파가 노후보 지지를 애써 외면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대권 후보군 중에는 노후보 이외에도 김근태, 정동영 후보 등 개혁적 성향의 후보들이 있었고, 당내 쇄신운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줬던 한화갑 후보를 멀리할 수도 없었다. 또한 일부 쇄신파 의원들은 이인제 후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복잡한 ‘셈’에 여념이 없었다.
고립무원이던 노후보가 본격적인 당내 경선에 뛰어들면서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론뿐이었다. 이때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이 바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다. 다행히 당시 여론은 노후보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노후보의 경쟁력은 이인제 후보와 박빙의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인제 후보는 강적이었다. 당 안팎에선 7명의 대권 후보 중 이후보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았다. 이후보가 동교동 구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쇄신파의 강력한 도전에 밀려 상처 입긴 했어도 동교동 구파는 여전히 묵시적 실세그룹이었다. 민주당 대의원과 당원 상당수가 동교동 구파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경선 당시 동교동 구파가 이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당내에서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훈평 의원은 당시 구 동교동계가 이후보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털어놓기도 했다.
“권노갑 고문 등 동교동계가 이인제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1997년 대선 때 이인제가 얻었던 500만표에 호남표와 충청표, 그리고 수도권표를 합하면 이회창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잘못된 계산이 아니었나 싶다.”
여기에 전용학, 김효석, 장성원 등 과거 국민신당 출신 계보 의원까지 합하면 이후보의 실질적 지지세력은 어느 누구보다 컸다.
이후보에 대한 노후보의 도전은 노사모와 함께 시작됐다. 노후보는 1월말 발족한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후보 노무현 추대위원회’를 2월 중순까지 전국 단위 조직으로 꾸려나갔다. 당원과 대의원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설득작업을 벌이면서 철저히 밑바닥부터 훑는 전략을 폈다. 아울러 ‘영남후보론’을 내세웠다.
“노후보는 영남권에서 37% 이상의 득표력이 있다. 영호남 화합과 지역통합을 위해서는 노후보만한 사람이 없다”는 논리는 대의원들에게 예상외로 잘 먹혀들었다. 민주당 당원과 대의원들의 정서를 파고들기에 적절했기 때문이다. 노당선자측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DJ 정권의 각종 게이트들이 불거지면서 당원과 대의원들은 거의 모두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과 원망은 DJ보다는 DJ정권을 망가뜨린 몇몇 소수 그룹으로 향했다. 문제의 소수그룹이 지지하는 후보가 바로 이인제였다. 또 상당수 당원과 대의원들은 이인제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바보 노무현,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노후보는 이와 함께 국민선거인단 모집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노사모 조직과 시민단체, 노조 등 개혁적 성향의 국민들이 국민선거인단에 적극 참여했고, 이것이 나중에 경선 승리에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노후보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성향으로 비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름의 차별화 전략도 구사했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유지해 온 기조는 버리지 않고 적정한 선을 유지해나갔다.
김근태·정동영 후보가 경선자금을 공개하면서 다른 후보들도 자금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을 때 노후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후보는 경선 6일을 남겨둔 3월3일 측근을 통해 그 이유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깨끗한 정치를 위한 김근태 고문의 충정어린 선언이 여야 간의 정쟁거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면서 경선자금 공개가 개선을 향한 출발이 아니라 이전투구의 시작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우려를 사전에 예방할 법과 제도 및 여와 야, 당내 후보간에 ‘합당한 기준’이 마련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경선자금을 공개할 것이다.”
민주당 광주 국민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노 당선자가 노사모 회원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국민경선 10여 일 전, 쇄신파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천정배 의원이 캠프에 전격 합류했다. 외롭고 힘겹게 선거운동을 벌이던 노후보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국민경선이 시작되면서 노후보의 선거전략이 효과를 나타냈다. 3월9일 제주에 이어 울산, 광주에서 급기야 ‘노풍’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그가 이처럼 거대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는 천운(天運)도 따랐다.
인터넷 매체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그 어느 후보보다도 노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0년 4월 노후보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생겨난 노사모는 인터넷 활동을 통해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온 터였다. 여기에 때를 맞춰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는 제목의 책이 발간되는가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광고 하나가 노풍의 발화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광주 경선을 며칠 앞둔 시기, 50대의 한 평범한 시민이 모 일간지에 낸 광고는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갔다.
“바보 노무현,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광주에 사는 번역가 김모씨가 사비를 털어 낸 광고였다. 민청학련 세대인 김씨는 광고를 낸 이유에 대해 “절망 속에서 그나마 노무현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서갑원 팀장은 이에 대해 “국민들 사이에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라며 “새로운 한 세기의 시작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했다”고 털어놨다.
이 무렵 노사모의 열풍도 대단했다. 인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른 정치인 지지자들의 인터넷 친목모임과는 크게 달랐다. 순수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모인 회원들은 경선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며 함께 즐겼다. 언론은 앞다퉈 ‘노풍’과 ‘노사모’에 대해 전문가들까지 동원해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간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선거문화였기 때문이다.
국민경선이 진행되면서 점차 ‘노무현 대세론’이 확산됐다. 이회창 대세론은 시들해졌다. 쇄신파를 포함한 당내 개혁세력들이 속속 노캠프에 합류했고, 노후보의 지지율은 60%에 육박했다. 반면 이회창 지지율은 30%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4월27일. 노후보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지역 경선을 마지막으로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두 달 가까이 국민경선을 치르면서 ‘노풍’은 어느새 한반도를 덮어버렸다. 돈과 조직을 버리고 철저히 밑바닥부터 훑은 전략과 천운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위기가 찾아들었다. 노후보는 대선후보로 선출된 지 사흘 후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기 위해 건넨 농담 한마디가 화근이 됐다. 당시 노후보와 YS가 나눈 문제의 대화 내용 중 일부다.
노후보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이 시계가 기억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총재님이 1989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사다주신 겁니다. 제가 민주당 만들고 총재님 비난하고 다닐 때는 풀어서 농 안에 넣어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제 생각만 맞는 게 아닌 것 같고…그래서 총재님 생각나면 차고 다녔습니다.”
YS “정말 장해요. 여당에 맹장이 많아서 후보가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노후보가 생각하기에 이날 YS와의 만남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노후보의 ‘YS 시계’ 발언은 다음날부터 언론의 집중포화 대상이 됐다. 재야와 시민단체들도 ‘3김 청산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노후보측 일부 관계자들은 노후보의 단순한 말 실수를 물고늘어진 언론에 책임을 돌렸지만 실제로는 ‘전략의 오류’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2002년 4월30일, 상도동을 방문한 노후보가 YS에게 화근이 될 ‘문제’의 시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후보가 되면 현재의 민주당을 확대·발전시키는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중략)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민주당이 확고한 중심이 돼 확대·발전시키는 정계개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당의 비전이자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당이 대선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변함 없는 저의 소신입니다.”
상도동을 방문하기 직전에 노후보측의 한 관계자는 YS와의 만남을 추진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YS와 DJ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동지였으며, 두 분이 ‘민주세력의 뿌리’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노후보는 YS와의 만남을 통해 분열 이전의 정치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려 한 것이다.”
노후보가 하루 전날 청와대로 DJ를 찾은 데 이어 YS까지 방문한 것은 두 사람을 계승하는 ‘민주단일후보’로서의 위상 확보를 노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노후보식 ‘정계개편’의 불씨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윤석규 정치개혁추진본부 사무처장은 이같은 전략전술상의 노림수와 오류에 대해 “DJ와 YS의 화해를 통해 지역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노무현이라는 정치후계자를 통해 이를 해결하는 시나리오는 노후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구시대 정치인들의 ‘원심력’이 워낙 강했다. 또 노후보의 행동이 정치적 연출로 잘못 비쳐진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너무 서두른 감도 없지 않다”고 했다.
‘YS 시계’ 파문이 좀체 가라앉지 않자 노후보는 곧바로 전략을 수정했다. 3김을 개혁세력의 통합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정리해버린 것. 5월20일 노후보측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이나 의식을 3김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노무현과 YS의 만남과 관련한 논란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우리 정치의 중심은 바뀌고 있다. 3김은 더 이상 우리 정치를 좌우할 수 없다. 더 이상 3김을 의식하는 것은 개혁세력의 통합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러나 악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노후보의 지지도 상승에 위기를 느낀 한나라당은 경선 후반기부터 터져나온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의혹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홍업씨와 홍걸씨의 비리의혹이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나자 파문은 증폭됐고, 이에 따라 이른바 ‘3홍(弘) 게이트’가 정국을 강타했다.
당에 던진 회심의 승부수
민주당은 물론 노후보의 지지율은 이때부터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6·13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했다. 더욱이 당내에서는 ‘비노(非盧)’ ‘반노(反盧)’세력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통해 다시금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노후보 재신임’을 거론하고 나섰다.
노후보는 이같은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6월17일 당 연석회의에서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후보 재신임은 8·8 재보선 이후에 결정하자. 당내에 재보선을 위한 특별기구를 별도로 설치해서 후보를 결정하고 선거를 치르자. 이 모든 것은 당에서 결정하라”고 제안한 것. 그리고 이날 기자회견에서 “특별기구를 통해 재보선을 책임지고 치르겠다는 의미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환경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특별기구를 책임진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나무 위에 올라갈 때는 밑에서 누가 흔드는지, 안 흔드는지 분명하게 확인하고 올라가야 한다.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를 흔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당내 결정에 대한 상호의 신뢰, 약속을 이행하려는 상호의 자세도 중요한 것이다.”
자신을 흔들어대는 당내 일부 세력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강력한 승부수였다. 이에 반노 진영 일부 의원들이 “당을 노무현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 끌기 술책”이라며 반발했지만, 당 지도부는 결국 노후보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노후보 재신임을 결정했다.
한 관계자는 “당 지도부로서는 국민경선을 통해 뽑은 노후보에 대해 재신임을 묻기가 무척 어려웠다. 자칫 당 지도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노후보의 전략이 성공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8·8 재보선은 노후보의 편이 아니었다. 6·13 지방선거에 이어 민주당은 또 다시 참패했다. 당도, 노후보도 큰 충격을 받았다. 당 지도부 긴급 대책회의에서는 후보 재경선 방법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고성이 오갔다. 반노·비노측은 “노후보가 후보직을 사퇴한 후 재경선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친노측은 “재보선을 위해 도와준 게 뭐냐”고 책임론을 거론하면서 반박했다.
당 지도부가 적절한 문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당의 내분은 다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노후보에 대한 반노·비노 진영 의원들의 비판은 감정까지 섞여 더욱 거세졌다. 김영배 의원은 “노무현은 설렁탕 한 그릇도 안 샀다”며 이른바 ‘설렁탕론’을 들고 나왔다. 명색 대선 후보라는 노후보가 당 운영이나 선거자금 조달도 제대로 못하는 ‘자격 미달자’라는 얘기였다.
친노 진영에서조차 타개책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 “후보가 스킨십과 포용력을 발휘해 반노와 비노 진영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견해와 “노후보 방식대로, 필요하면 당을 깨고라도 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극화한 것. 노후보를 지지하던 의원들 중 일부는 노후보에게 “이인제를 찾아가라”며 ‘정책적 거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노 진영에서는 ‘포용론’이 점차 우세해졌다. 하지만 반노·비노 진영은 딴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정권 재창출’ 자체를 포기한 채 대선 이후 당내 입지를 선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노후보측은 암담했다. 그렇다고 마땅히 타개할 방법도 없었다. 서갑원 팀장의 말.
“반노·비노세력들은 심정적으론 노후보를 단 1%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정치귀족(기득권) 세력이었던 그들은 노후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내부적으로 돌파하기 위한 ‘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후보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의 민심이 그랬다. 그 지지층은 월드컵을 통해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은 무소속 정몽준 의원에게 그대로 옮겨갔다. 노후보의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민심이 그 대안으로 정몽준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노후보에 대한 영남지역 지지층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로 이동하거나 유보층으로 내려앉았다.
선대위 강행은 反盧·非盧 경고용
흔들리기는 노후보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신당을 만들자” “당명을 바꾸자” “탈(脫)DJ를 선언하자” “이 기회에 동교동을 내치자”는 등 ‘노무현당(黨)’으로 거듭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노후보는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인수하겠다”며 ‘기존 원칙 고수’를 거듭 천명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승부수를 띄웠다. 9월30일 노후보는 반노·비노 진영 의원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 친노 성향 의원들을 중심으로 선대위(위원장·정대철) 출범을 전격 결행한 것이다. 이는 비노·반노 진영에서 ‘정풍(鄭風)’ 바람을 타고 상대적으로 지지도가 오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들고 나온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노후보로서는 기분도 상했겠지만, 후보 단일화 논의를 통해 또다시 ‘흔들기’를 강화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을 법하다.
노후보는 이날 “선대위 출범을 계기로 한치의 흔들림 없이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겠다. 어떤 압력이나 세력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자신을 흔들고 있는 세력들을 정면 돌파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대선 막판 최대의 쟁점으로 떠오른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과 함께.
당은 한바탕 술렁였다. 반노·비노 진영 의원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 34명은 나흘 후 후보 단일화 독자 추진 기구인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회장·김영배)’를 공식 발족하고 선대위와 맞섰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분당 수순에 돌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후단협은 이 때부터 ‘후보 단일화’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신당 창당’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하지만 후단협은 결속력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내부 의원들간에 후보 단일화와 신당 창당, 원내교섭단체 구성방법 등 사안마다 현격한 시각차이를 드러낸 것.
반면 민주당은 친노 중심으로 구성된 선대위가 당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비노 진영에 가까웠던 동교동계 의원들이 관망하는 태도로 돌아서면서 ‘후보 흔들기’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20% 이하로 떨어진 노후보의 지지율이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자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당초 정의원의 지지도가 10월 초부터 바람이 빠지기 시작해 10월 말∼11월 초면 ‘이(李)-노(盧) 대 정(鄭)’의 2강1중 구도가 되리라는 전제 하에 노후보측이 세운 전략에 커다란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1월3∼4일부터 후단협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집단 탈당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도 노후보측에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같은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노후보의 결단이 필요했다. 노후보는 결국 11월3일 국민통합21(10월17일 창당) 정몽준 대표에게 국민경선을 전제로 ‘후보 단일화’를 공식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노후보의 지지도가 당초 예상했던 전략적 목표에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노후보의 제안은 정대표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준 한편 후단협의 명분을 크게 약화시키는 2중의 효과를 거뒀다.
그리고 노후보가 결단을 내린 이후 정대표의 계속되는 무리한 요구를 ‘양보하는 자세’로 받아들이자 노후보에게 등을 돌렸던 여론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노후보와 정대표, 양측 실무협상단의 협상이 계속 난항을 겪자 노후보는 선대위 본부장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1월22일 정대표와 단독회담을 통해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하기에 이른다.
“어차피 단일화를 제안한 입장에서 어떻게든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단일화가 무산되면 그 책임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는 게 노후보측 관계자가 전한 결단의 배경이다. 대권 도전을 위한 노후보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여론조사 결과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노후보측에 불리한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박빙의 게임’은 국민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결전의 날인 11월25일 자정. 많은 국민이 TV를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노후보는 정대표와의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 1대 0의 신승을 거뒀다. 3월16일 광주의 환호성이 이번엔 서울 강남 라마다 르네상스호텔 라운지를 가득 메웠다. 사라졌던 ‘노풍’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속보’-정몽준, 노 지지철회
하지만 선거일을 두 시간 앞둔 12월18일 밤, 노후보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최대의 고비를 맞는다. 정대표와 함께한 마지막 유세장에서 내뱉은 한마디 말 실수가 화를 불렀다. 정대표의 자존심을 자극한 게 문제였다.
‘긴급속보-정몽준, 노무현 지지선언 철회’.
그날 밤, 노후보는 사태수습을 위해 긴급히 평창동 정대표 자택을 방문했으나 문전박대 당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선거 당일로 접어들었다. 선거법상 이제 국민에게 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남은 것은 국민의 선택뿐이었다.
아침 6시, 선거는 시작됐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정대표의 지지철회가 투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느라 분주했다. 민주당엔 비상이 걸렸고, 한나라당엔 활기가 돌았다.
선거 초반,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노후보의 열세. 방송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19일 오후 1시 현재, 노후보는 이후보에 0.3∼1.2%포인트 뒤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이번에도 국민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등 노후보 지지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투표 참여와 노후보 지지를 호소하자 오후부터 젊은층의 투표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불과 두 시간 후인 오후 3시, 방송 3사가 이번에는 일제히 “노후보가 이후보를 앞서기 시작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오후 6시, 투표가 끝난 직후 방송 3사는 노후보의 승리를 예상하는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주당사엔 환호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개표방송 초기엔 이후보가 노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표차는 계속 줄어들었고, 8시30분 경엔 노후보가 역전에 성공했다.
마침내 저녁 10시. TV 화면엔 ‘노무현 후보 당선 확정!’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노무현 드라마’는 이렇게 극적인 대미를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