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3-01-02 09:5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지금은 전화(戰禍)와 경제제재로 피폐해졌지만, 이라크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최초의 제국인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가 번성한 곳이다. 이슬람 문명을 한껏 꽃피우기도 했기 때문에 이라크 땅에는 인류 역사의 여명기를 빛낸 문화유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 대부분은 성서에도 언급될 만큼 인류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아시리아 제국의 도읍지였던 모술 인근의 님누드 궁전 터에는 라마스상(像)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상이다.

    그 옛날의 로마처럼 7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새벽은 무에진 소리와 함께 열린다. 여행자인 필자도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진 특유의 음색과 리듬에 잠을 깼다. 하지만 그 긴 울림은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기에 그곳에 머문 20여 일 동안 단 한번도 그걸 탓해 본 적이 없다.

    그렇듯 평화로운 도시에서 나는 예기치 않게 이라크 사람들의 목멘 소리를 듣게 됐다. 서울로 전화할 일이 있어 한 푼이라도 아껴볼 생각으로 호텔 전화를 쓰지 않고 사설 전화방을 찾아 암만 시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는데, 바로 거기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말이 전화방이지, 좁은 골목에 자리잡은 허름한 집에 전화 두 대와 팩스 한 대를 들여놓은 게 전부다.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설이기에 손님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주 끊기고 잡음이 많은 전화통 너머로 먼저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그런 다음 계속해서 울먹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들이 내뱉는 아랍어 대화를 알아듣진 못했으나, 전화방 주인을 통해 그들이 어디에다 전화를 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뒷모습에까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인구 2300만의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석유 매장량 세계 2위를 자랑하는 석유대국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매우 어렵다. 1990년 8월2일 쿠웨이트를 침공한 벌로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데다, 그 이듬해 1월17일에는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의 대규모 공습(이른바 ‘걸프전’)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본 것은 물론, 수도 바그다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해 3월3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종전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10만명이 숨졌고 부상자는 30만명, 포로는 6만여 명에 이르렀다(지난 10년 간 사망자는 150만명에 가깝다).



    그 무렵 많은 이라크인이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 요르단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대부분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인 이들이었다. 낯선 땅에서 빈털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리의 행상이 고작이었다. 암만의 길거리에서 초라한 행색에 볼품없는 좌판을 벌여놓은 이들은 열에 아홉이 이라크 사람이다.

    자신의 삶도 이토록 고달프기 짝이 없는데, 이라크 땅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끼니도 때우기 힘들다는 소식을 접했으니 그들의 속은 얼마나 타겠는가.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그 무언가에 대한 사무친 원망, 그래서 가족과 친지를 남겨두고 혼자만이라도 살겠다며 국경을 넘은 데 대한 죄책감….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몸을 휘감아 자신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리라.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광

    내가 요르단 땅을 밟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고향인 이라크로 들어가기 위한 전초단계였다. 이라크에 경제제재가 내려지고 곧이어 터진 걸프전 이후 입국비자를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은 암만 주재 이라크대사관뿐이다. 더구나 1992년 8월 미국이 이라크 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면서 이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항공기도 묶여 육로 외에는 길이 없는데, 바그다드로 가는 버스와 택시는 암만에서만 출발했다.

    이런 형편인데도 굳이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것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해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영역을 거느렸던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제국이 태어나 번성했던 곳이고, 한때 이슬람 문명이 꽃을 피웠던 땅이라서다.

    나는 1989년 여름에도 이 나라를 찾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문명의 흔적을 보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바람에 그 문명의 기반이 된 일상적인 삶의 편린들은 살펴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1995년 말, 본격적인 세계문명탐사에 나서면서 그때 미진했던 부분을 채우고자 이라크를 다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암만의 사설 전화방에서 고향을 등진 이라크인들이 고국의 가족, 친지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이라크의 오늘에 대한 사전 오리엔테이션 같았다. 그 순간 내 뇌리에는 구약 시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망향가(137장)’가 오버랩됐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하프같이 생긴 현악기)을 걸었나니…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어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기원전 598년. 지금의 이라크 땅에 자리잡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대왕(재위 BC695∼562)은 유대왕국을 쓰러뜨리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삼아 왕도 바빌론으로 끌고 왔다.

    자신의 제국 북서쪽에서 약 1000년 간 서아시아 일대를 주름잡던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기 무섭게 그 빈 자리를 이집트가 차지하려는 것을 본 그는 유럽대륙과의 유일한 교역창구였던 동 지중해변의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 지역만은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이집트 침공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기 위해 대정복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멸망으로 모처럼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가만히 앉아 그의 야망 앞에서 희생양이 되진 않겠다”며 이집트와 손잡고 거세게 항거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솔로몬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1만명과 모든 공장(工匠)과 대장장이들이 사로잡혀’(열왕기 24:13), 예루살렘엔 빈천한 자 외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때를 ‘제1 성전시대’의 종말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국치의 날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또 느부갓네살 대왕을 악의 화신으로 그렸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미나렛과 돔이 황금빛을 발하는 바그다드의 알 카디마인 모스크. 예배자들로 늘 붐빈다.

    당시 바빌론에는 구약 창세기에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한다 하여 건설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의 언어를 흩트려 건설을 중단케 했노라고 기록돼 있는 바벨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도성을 두른 성벽 정면에는 제국의 융성을 기원하고자 신성(神性)을 지닌 상상의 동물과 실제의 동물들을 줄맞춰 새겨놓은 이시타르 성문이 두 팔을 벌리고 있고 산간지방 출신 왕비가 평지생활에 무료해할지 모른다며 왕궁 건물 옥상에 계단식으로 조성한 공중정원 같은 희한한 볼거리들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후일 그리스인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칠 만큼 대단한 축조물이다.

    이 모두는 제국의 최고지도자 느부갓네살의 대외 정복과 대대적인 건축사업에서 얻은 것이었다. 바벨탑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가 원래 모양을 되살린다며 크게 손을 봤고, 이시타르 성문과 공중정원은 그가 세웠다. 그 스스로도 “큰 바빌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과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다니엘서 4:30)고 했을 정도다.

    그가 바빌론을 대단한 왕도로 꾸미고자 한 것은 제국의 수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수메르·아시리아 문명의 계승자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의식이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이 만나는 지금의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태어났다. 메소포타미아란 후일 한때 이곳을 차지했던 그리스인들이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 사이의 들녘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두 강이 흐르면서 가져다준 비옥한 충적토가 텃밭을 제공하면서 수메르 문명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의 고고학자 새뮤얼 크레머가 일찍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됐다’란 제목으로 책을 펴낸 데서도 드러나듯, 그것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다. 크레머는 전세계 박물관에 소장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점토판 문서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수메르인들이 만들고, 발견하고, 기록한 것이 최초의 낙원설화, 창조설화, 서사시, 학교, 의회제도, 설형문자, 법전 등 무려 39가지에 이른다며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 그의 주장은 지금까지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수메르는 도시국가 형태의 문명을 이뤘다. 그때의 중심도시로는 에리두, 우룩, 우르, 니푸르 등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수메르 문명이 태어난 우르(Ur) 일대가 공교롭게도 성서에서 인류의 탄생지로 그려진 에덴동산의 현장일 뿐 아니라 ‘열국의 아비’라는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이라크 땅은 성서의 고향이다. 이는 낙원이던 땅에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니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여자같이 멸망할 바빌론아…’

    이라크인들은 우르 남쪽 작은 삼각주 쿠르나(Qurnah)를 에덴동산이 있던 곳이라며 그 한 모퉁이에 길이 70m, 너비 20m 크기의 ‘아담공원’을 만들어놓고는 키 큰 고목(일명 ‘아담나무’) 아래 이런 글귀를 새긴 동판까지 걸었다.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강이 만나는 신성한 이곳에 우리 조상 아담의 성스런 나무들이 에덴동산을 상징하며 자란다.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경배했다.”

    사실 이곳은 기후가 좋고 먹을 것이 풍부해 사람들이 살기에 더 없이 좋은 지역이라 ‘지상의 낙원’이 될 조건은 충분히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쿠르나 북쪽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수메르의 중심도시 우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75세가 되던 해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우르를 떠나 하란-가나안-애굽(이집트)-가나안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그가 우르에서 당대 최고의 문명을 경험한 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빌론의 이런 문화적 환경은 유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적 삶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땅이라 그들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법하다.

    그래서 그들 입에선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소리가 나왔고, 때로는 바빌론의 저주했다. 누구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여자같이 멸망할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라며 바빌론의 멸망을 재촉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잘 나가던 바빌론은 기원전 539년,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끌려온 지 59년째 되던 해 페르시아·메데스 연합군에 함락되고 만다. 그때 1400여 년을 이어오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문을 닫았다.

    “나는 키루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위엄있는 왕,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사계의 왕”이라 선포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구약에는 고레스로 표기돼 있다)은 이렇게 바빌로니아 제국을 쓰러뜨렸으나 바빌로니아인들의 고유신앙과 문화는 손대지 않았다. 대신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유대인들은 그를 해방자라고 칭송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불타버린 성전을 다시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른바 ‘유대인 의식(Judaism)’이다. 시련이 그들을 더욱 강한 민족으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도 따지고 보면 이 유대인 의식의 부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암만의 이라크인들은 앞으로 과연 무엇을 이루게 될 것인가.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바빌론의 명물 이시타르 성문에 새겨진 사자상. 사자는 권력을 상징한다.

    기다리던 비자가 나와 바그다드행 버스에 몸을 싣고 모래가 펄펄 날리는 요르단 사막을 가로질러 이라크 땅으로 들어갔다. 트레빌 국경 검문소에서 방문객을 반긴 것은 사담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였다.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에선 사람이나 동물 등 살아있는 것의 형상을 그리지 말라고 했는데 정치지도자의 초상화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승객들은 국경 검문소에서 입국수속과 세관검사는 물론 에이즈 검사까지 받았다. 암만에서 850km 떨어진 바그다드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5시. 무려 21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숙소인 라시드 호텔은 최고급이라는데도 아침식사로 나온 것은 시커먼 빵 두 조각과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잼, 홍차 한 잔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10달러나 받았다.

    바그다드는 얼핏 보기엔 1989년 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흙빛을 띤 티그리스강은 여전히 도도하게 흘렀고, 강변을 따라 난 널찍한 길은 아름드리 수목이 만든 그늘에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잠깐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을 자세히 보니 경제제재가 어떤 것인지 실감나기 시작했다. 자가용은 그나마 좀 나았으나 택시는 말이 아니었다. 문짝은 덜컹거리고 차체도 시뻘겋게 녹이 슬어 마치 오래된 쇳덩어리가 굴러가는 듯했다. 차가 달리다말고 갑자기 멈춰서면 길 한가운데가 곧장 정비소로 바뀌었다. 동행한 안내인 사미르는 “1990년 이후 새것이 들어오지 않아 이젠 갈아 끼울 부속품도 동났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모든 것이 심각했다. 병원에는 병상(病床)만 덩그러니 있을 뿐 약이나 주사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했고, 산부인과에선 인큐베이터도 작동하지 않았다. 시장에서도 봉지 쌀과 봉지 밀가루, 검정색 비누, 검정 고무신, 변색되어 상표가 잘 보이지 않는 오래된 통조림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이라크의 화폐인 디나르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치가 떨어져 상인들은 돈지갑이 아니라 아예 돈자루를 들고 다녔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장가들 돈이 없어 노총각이 늘어나고, 덩달아 처녀들도 나이만 먹고 있었다. 사미르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묻자 그는 “정부가 나눠주는 배급물자로 간신히 버티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해 따로 식량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무너진 중산층

    9·11테러 1주년을 맞아 2002년 가을 이라크 현지에서 찍은 것이라고 방영된 다큐멘터리나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바그다드 무역관장이 인터넷에 올린 보고 등을 종합해 보면 내가 이라크를 찾았던 1996년 초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은 듯 보인다. 그에 따르면 한 달 배급량이 1인당 쌀 2.5kg, 설탕 2.5kg, 밀가루 5kg, 식용유 1kg, 비누 4개 정도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 사이 유엔이 ‘식량과 석유의 교환(Oil for Food)’ 프로그램을 통해 제재 수준을 얼마간 완화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제재는 간단히 말해 이라크가 가진 석유를 유엔이 정한 쿼터를 넘어 수출해선 안되며(유엔은 이라크가 원유를 서방에 수출하는 루트인 터키 해안으로 나 있는 두 개의 대형 송유관 밸브 열쇠를 쥐고 있다), 그 대금도 생필품과 의약품 수입에만 써야 한다는 것이다. KOTRA 무역관장은 이런 보고도 함께 올려놓았다.

    “지금 이라크에는 두 계층만 존재한다고 한다. 제재와는 상관없이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약 5%의 부유층, 제재로 극심한 타격을 입고 생계유지에 급급한 95%에 달하는 빈곤층이 그것이다. 한때 중동지역에서 가장 견실하고 두터웠던 이라크의 중산층은 이란과 미국을 상대로 한 두 차례의 전쟁과 연이어 닥친 경제제재의 강풍에 휩쓸려 무너졌다.”

    이라크에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지만, 수출 길이 막힌 석유는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또 길거리에 공업용 재봉틀을 내놓고 해지고, 찢어지고, 떨어진 옷가지와 가방, 구두 등을 꿰매고 붙이는 수선노점들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 12년 동안 경제제재를 받아왔으니 이라크인들의 비참한 생활도 이젠 청산될 법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테러 수출국’이란 낙인까지 찍혀 1991년 ‘사막의 폭풍’이나 ‘사막의 여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공습을 넋놓고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만약 이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바그다드는 또다시 초토화라는 오욕의 기록을 더할 수밖에 없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삶은 고달파도 이라크 어린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해맑다. 기질상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인 듯하다.

    바그다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762년. 메카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7세기 중엽에 들어서자 다마스쿠스(지금의 시리아 수도)를 도읍지로 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750년 우마이야를 쓰러뜨리며 이슬람 왕조를 새롭게 연 것이 압바스 왕조다.

    그런데 그 두 번째 칼리프(이슬람 왕조의 왕) 알 만수르(재위 750∼775)가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그 동쪽의, 흙탕물을 튀기며 남쪽으로 세차게 흐르는 티그리스 강변에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4년에 걸쳐 10만여 명의 인부와 기술자가 동원되어 건설한 신도시는 외벽, 주벽, 내벽 등 3중의 성벽에 둘러싸인 원형구조로, 그때의 이름은 ‘마디나 앗살람’, 그들 말로 평안의 도시였다. 하단 두께가 9m에 이르는 외벽에는 4개의 성문을 뒀고, 성벽 바깥에는 다시 깊고 넓은 해자(垓字)를 둘러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그들은 성문과 성문 사이에 28개의 높은 탑을 세워 성 안팎을 감시했다. 이렇게 물샐틈없이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춘 원형도시는 천국을 지상에 재현하려 한 것이라 성역(聖域)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알라에게 감사와 구원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공간이 마련돼야 할 터. 그에 따라 그 한가운데 황금빛을 발하는 돔(dome)을 머리에 인 ‘알 만수르 모스크’가 세워졌고, 그 옆에는 초록색 지붕을 인 금문궁(金門宮)이 들어섰다. 그들에게 황금색은 고귀함을, 초록색은 이슬람을 상징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금문궁 앞에는 왕자들의 거소와 행정관청, 귀족·고관·관료들의 거주지, 시장, 학교 등이 들어섰다. 길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격자로 뻗어 있어 동서남북 어느 곳이나 똑같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것은 이슬람의 평등정신을 상징한다.

    만수르를 이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바그다드를 이슬람의 중심도시로 만들고 그 터전 위에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로 기록돼 있다. 아라비아 지역의 이야기 모음집인 ‘아라비안 나이트’가 나오고, 의학·천문학·수학·문학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을 구가했다. ‘알 미르바드 시 축제’가 열려 “시인이 없는 나라에선 결코 위대한 군주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바그다드엔 ‘지혜의 전당’이라 부르는 왕립도서관 겸 연구소를 두었다. 여기서 수많은 저작물을 번역하고 출간해 이슬람 문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로마 시대 유산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역과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주의를 지향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그리스·로마 문명을 온존시켰기에 훗날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압바스 왕조와 그 왕도 바그다드는 1258년 패망과 함께 초토화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송두리째 거머쥐고자 한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바그다드로 쳐들어와 “순순히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한 바그다드 시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웠고, 그 결과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그후 400년에 걸쳐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오랫동안 이렇다 할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던 바그다드는 193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이라크의 수도가 되면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고전 양식 건물 즐비

    옛 왕조시대의 유산은 그 무렵 모두 망가졌기에 지금의 바그다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영국 지배시대에 닦은 도로망과 중앙분리대, 그리고 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키 큰 가로수 덕분에 현대도시다운 면모를 띤다.

    발코니 난간의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고전 양식 건물들이 즐비한 라시드 거리,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대륙으로 가는 연결고리 노릇을 했던 바그다드역, 황금빛을 발하는 2개의 돔과 4개의 미나렛(모스크에 부속된 첨탑)으로 바그다드의 상징이 된 알 카디마인 모스크, 크기는 작으나 초록색 돔이 무척 아름다운 이븐 부니예 모스크, 중심광장 한편을 장식하고 있는 무명용사 기념비,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 이라크 땅에서 태어났다 사라진 문명이 남긴 유물들을 모아 놓은 이라크 박물관, ‘아라비안 나이트’에 알리바바의 하녀로 나오는 무르야나의 모습을 새긴 무르야나 조각 분수, 이란과의 전쟁에서 산화한 젊은이들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83년 드넓은 녹지대에 조성한 알 사히드 기념비 등 볼거리가 널린 바그다드를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사흘은 필요하다.

    바그다드를 둘러본 후 함무라비·느부갓네살 대왕 등 여러 걸출한 군주를 배출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태복수 조항을 담은 함무라비 법전(현존 최고(最古)의 법전),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바벨탑, 느부갓네살 대왕의 남궁전(南宮殿), 이시타르 성문 등으로 유명한 바빌론을 찾았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바빌론 유적지 입구에 세워진 대형 그림판. 백마를 탄 느부갓네살 대왕과 후세인 대통령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바그다드를 출발, 남쪽으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나를 맞은 것은, 우리네 가을 하늘보다 더 파란 바탕에 흰색과 황금색 광택타일로 사자(권력을 상징)와 시르시(영광과 번영을 상징) 등 실제 동물과 상상의 동물들을 수놓은, 아름다운 이시타르 성문이었다.

    1989년에는 방문객이 많아 표정이 밝아 보였는데, 이번에는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풀죽어 있었다. 관리인마저 자리를 비워 입장료를 아꼈다. 그 맞은편 레스토랑의 식탁에는 언제 사람이 다녀갔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걸프전과 경제제재가 말없는 이시타르 성문까지 빛 바래게 한 것이다.

    그 옛날에는 이시타르 성문 앞으로 축제도로가 길게 펼쳐지고, 축제 마당을 만들어주는 도로 벽면에도 사자와 시르시가 새겨져 있었다.

    바빌로니아 제국 최대의 의식행사였던 신년 축제가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기에 다른 축조물들엔 모두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면서도 유독 이시타르 성문과 축제도로 벽에는 불에 구워 만든 광택타일을 사용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것이다.

    전경은 지금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9년부터 17년간 바빌론 유적을 발굴한 독일 오리엔트학회의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그 성과물들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후세인의 등장

    이시타르 성문을 지나니 남궁전이 나타났다.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서인지 벽체가 무척 두꺼워 마치 요새 같다. 그런데 입구는 아치 형태다. 아마도 직사광선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듯했다.

    느부갓네살 대왕의 집무실인 남궁전은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됐으나, 그로부터 200여 년 뒤 이곳을 찾았던 알렉산더 대왕은 허물어진 모습에도 매료되어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가 이 남궁전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에 얼마나 애착을 보였는지 알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남궁전은 그때의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허가 돼버린 것을 사담 후세인이 198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다. 이시타르 성문도 그때 복원했다. 그러나 850만개의 벽돌을 91m 높이로 쌓아 올려 만들었다는 바벨탑은 손 댈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사각의 웅덩이처럼 생긴 기단만 남아 있다.

    독립국가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높이기 위해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보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걸 등한시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후세인이 주도한 바빌론 유적 복원사업은 그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행해졌다. 그 비밀은 유적 입구에 세워놓은 대형 그림판에서 읽을 수 있는데, 거기에는 백마를 탄 느부갓네살 대왕과 군복 차림의 후세인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누가 보더라도 후세인이 느부갓네살을 닮고자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이라크를 느부갓네살 대왕 시절의 바빌로니아처럼 대제국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을 가진 게 아닐까. 중세시대 바그다드에서 열렸던 알 미르바드 시 축제를 부활시켜 매년 여름 바빌론을 뜨겁게 달구는 것도 그 일환일 터이다.

    1937년 이라크 중부 티크리트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담 후세인은 매질을 일삼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양떼를 돌보며 자랐다. 그의 강인한 정신은 아마도 이런 환경 속에서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훈육의 전부는 아니었다. 교사였던 외삼촌 탈환은 그에게 반제국주의, 반외세 저항정신을 심어줬다.

    후세인이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통일운동,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차례로 일어났다. 그는 수웨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그에 따라 벌어진 서구 제국과의 연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아랍통일운동에 흠뻑 빠졌다. 곧 아랍통일을 목표로 하는 바트당(정식명칭은 아랍사회주의 부흥당)에 입당해 행동하는 혁명가의 길로 나섰다.

    1958년, 왕정이 타도되고 민정이 수립됐다. 하지만 그 일을 주도한 압둘 카심은 후세인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를 실망시켰다. 후세인은 반혁명세력에 가담해 카심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쳐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됐는데, 그때 이집트로 건너가 학교에 다니며 아랍통일의 꿈을 키웠다.

    카심은 그로부터 꼭 5년을 더 살았다. 1963년 바트당이 그를 축출했다. 후세인은 즉시 바그다드로 돌아와 정치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바트당이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바트당이 세력을 잡은 것은 다시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인 1968년이다. 그때 후세인은 당수 바크르를 대통령으로 밀면서 자신은 혁명평의회 부위원장을 맡아 2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후세인은 2인자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1979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바크르마저 숙청하고 그토록 바라던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후 지금껏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수메르 문명 최고의 문화유산인 우르의 지구라트. 안내인 사미르, 운전기사, 현지관리인 등과 함께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이 된 그가 한 일은 크게 세 가지다. 바빌론 유적의 대대적인 복원, 옥토화 사업, 그리고 1970년대 초 오일 붐을 타고 확대된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돌린 것이다.

    이라크는 중동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평지가 넓다. 지형이 낮기도 하지만, 티그리스·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 강이 국토 한가운데를 길게 흐르고 있어서 그렇다. 이라크라는 국명이 ‘낮은 땅’이란 페르시아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이 나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으리라.

    후세인은 관개의 혜택을 보지 못해 황무지로 버려둔 땅을 농지로 개간, 식량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을 목표로 삼아 옥토화 사업을 벌였다. 1980년대에 우리 기업이 이라크 땅에서 벌인 토목사업 대부분은 바로 관개수로 건설공사였다. 특히 1980년대 말 한양건설이 북부도시 모술 인근에서 벌인 북(北) 자지라 관개용 대수로 공사는 후세인이 직접 공사를 독려할 만큼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이 나라 최대의 저수지를 만들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중부도시 사마라 인근의 사담 인공호수가 그것이다.

    유적 복원이나 옥토화 사업 같은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니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세 번째 사업은 성격이 아주 다르다. 군사력 팽창은 이웃나라나 적대 국가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1980년 9월 이웃 이란과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8년이나 끌었던 그 전쟁을 통해 자신의 군사력을 시험해보자 했던 그는 결과적으로 아랍세계의 지도자 자리를 굳히게 됐고 미국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성과를 거뒀다.

    그가 1990년 8월에는 쿠웨이트를 공격했다. “쿠웨이트는 서구 식민제국이 억지로 만들어낸 ‘반이슬람 꼭두각시 나라’인만큼 이라크가 소유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로써 한때 동맹관계를 유지했던 미국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그로부터 12년 세월이 훌쩍 지났건만 양국 관계는 호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다. 후세인,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후세인은 결코 간단한 인간이 아니다. 반외세·반제국주의·민족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 시대의 느부갓네살’이 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3차 십자군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슬람의 용장 살라딘(1137∼93)이 되고자 한다.

    십자군전쟁 당시 이집트의 시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던 살라딘은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십자군을 궤멸해 이슬람세계를 기독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낸 인물이다. “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로마 교황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십자군의 동방 원정에 알라의 이름으로 응전한 지하드(성전)였기에 이슬람교도라면 그를 숭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후세인은 제2의 살라딘이 되고자 대통령궁 외관을 살라딘의 투구 형상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더구나 살라딘은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에서 태어났으니, 후세인이 “내 몸 속엔 살라딘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누가 감히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가 이슬람의 맹주가 되고자 그런 일을 꾸미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그는 여전히 “국민의 단결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마치 이를 증명하려는듯 바그다드의 옛 국내선 공항 터엔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가 건립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스크를 짓는 데엔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후세인. 아랍어로 ‘좋다’는 뜻으로, 사내아이에게만 붙이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이슬람의 어두운 역사가 담겨 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동딸 파티마와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즉 칼리프)이던 알리 사이에서 태어난 후세인이 그 주인공이다.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믿은 후세인은 이슬람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우마이야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우마이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말기에.

    알리와 그 직계 혈통만이 예언자의 정당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은 시아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을 따랐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680년 바그다드 남쪽의 케르발라 평원에서 우마이야의 대군과 맞섰다. 후세인 자신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패배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그는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백마에 올랐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적군에 포위됐고, 식수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었던 용장 압바스마저 전사하자 이내 전멸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후세인이 내걸었던 정의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순교뿐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시아파의 전통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소수 세력에 지나지 않아 ‘분리파’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시아파에게는 이처럼 처절한 전통이 숨어 있다.

    이라크 국민의 60%가 시아파지만,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가 아니다. 그는 이라크에선 소수지만 이슬람 세계에선 주류를 이루는 수니파다. ‘수니’란 그들 말로 정통을 뜻한다. 그런데도 사담 후세인은, 후세인과 알리가 순교한 곳이자 그의 유해가 안치된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 케르발라와 나자프가 이라크 땅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라크 인민들에게 지하드와 순교의 깃발을 높이 쳐들자고 호소한다. 서방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후세인인지라 사람들은 아직 그를 따르고 있다.

    바빌론에서 다시 남쪽으로 달렸다. 줄곧 평원이 펼쳐지다가 어느새 늪지대로 바뀐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옛 수메르 땅이 가까워진 것이다. 나시리아라는 도시를 지나 수메르의 중심도시 우르에 닿았다.

    4000여 년 전에는 크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겠지만, 지금은 계단식 피라미드 축조물인 지구라트가 유일한 볼거리다. 세계 건축사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우르의 지구라트는 원래는 4층 구조였다고 하나 지금은 2층뿐이다. 상단부분이 허물어진 것이다. 복원의 손길 덕택에 이 정도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바빌로니아 제국 부흥 꿈꾸는 인류 문명의 發芽地

    바그다드의 중심가 사둔 거리 로터리의 무르야나 조각분수. 무르야나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알리바바의 하녀 이름이다.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지은 지구라트는 무덤이다, 천체관측소다 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달리 신전으로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르는 지구라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신전도시였다.

    이 일대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는 인근 왕묘에서 4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군기(軍旗), 하프, 황금 장신구 등을 캐냈다. 그것은 수메르 문명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일 뿐 아니라 인류 최초 문명의 실체이기도 하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고향’이라 기록한 ‘갈대아 우르’가 가상의 지명이 아니라 역사적 근거를 가진 장소라는 것도 그걸 통해 밝혀졌던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랐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접하며 살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그를 이 문명의 땅에서 떠나게 한 것일까. 농경문화는 우상숭배 경향이 있어 아브라함의 족속이 어쩌다 하느님을 멀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럴 가능성이 없는 메마른 땅으로 보내 유목생활을 영위하라고 한 것일까.

    하늘의 속뜻을 알 수는 없지만, 우르의 지구라트가 달의 신 아난나를 모시는 신전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르는 달의 신, 바람의 신, 하늘의 신 등 수많은 신을 모신 농경문화권이었다.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압바스 시대 한때 잠깐 왕도 노릇을 한 덕분에 황금 모스크와 나선형 계단을 가진 미나렛이 그 위용을 뽐내는 사마라란 도시를 만나게 된다. 이곳의 명물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선형 미나렛. 그 형상도 특이하지만 꼭대기에 오르면 그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사담호수도 한눈에 들어온다.

    아시리아 군주들의 ‘내공쌓기’

    그곳에서 출발해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며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2세기 로마제국이 동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힘으로 막으려 했던 파르티아 제국의 서방전진기지 하트라 도성이 나온다. 디완이라 부르는 이슬람 특유의 건축 양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신전도 볼거리지만, 도성 안 한 켠에 복원작업을 위해 세워둔 장비들이 걸프전 이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듯 벌겋게 녹슨 것도 가슴아픈 정경이다.

    그 너머의 이라크 북부는 옛 아시리아 땅이다. 그 중심은 이 나라 제2의 도시 모술인데, 아시리아 제국의 두번째 왕도인 니느웨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이곳이 번영을 누린 것은 기원전 9세기 아수르바니팔 대왕 시절이다. 구약 요나(3:3)는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3일 길이다”며 당시의 니느웨를 묘사하고 있다.

    타원형 성내에는 아수르바니팔의 ‘사자 사냥도’ 부조(浮彫)와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대홍수의 기록을 적어놓은 점토판 문서(이들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다) 등이 발굴된 퀸지크 언덕이 있지만, 현재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모술 근교에는 아시리아 제국이 세 번째 도읍지로 삼았던 님누드 유적이 건재한다. 커다란 수호신상인 ‘사람 얼굴에 독수리 날개를 단 황소상(정식명칭은 라마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허물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볼 만한 것이 여럿 남아 있어 번성했던 그 옛날을 짐작케 했다.

    아시리아 제국이 남긴 대규모 건축물과 사실적인 조각 작품을 보면 웅혼한 기상이 절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군주들이 전쟁과 사냥만으로 소일한 것은 아니다. 왕실 도서관 터에서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이야기’ 점토판과 같은 문학작품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내공 쌓기’도 게을리하지 않은 듯하다.

    이라크인들의 대국 근성

    이라크 땅에는 이렇듯 인류 역사의 여명기를 빛낸 문화유산들이 곳곳에 산재한다. 또 이들 대부분은 성서에도 언급돼 있을 정도로 인류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 이라크인들이 자기네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그다드 무역관의 정종래 관장은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이라크인들에게는 이른바 대국기질이 있다. 12년에 걸친 혹독한 경제제재로 피폐해진 오늘에도 이들의 대국근성은 여전하다. 여유와 아량이 있다. 그렇다 보니 일부 산유국의 졸부 근성도, 아랍 빈국의 전형적인 거지 근성과도 거리가 멀다. 아직도 자신들만이 이스라엘에 대항할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강한 주체의식을 보여준다.

    이들의 대국기질은 비즈니스에선 신뢰로 나타난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믿어준다. 무기사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미국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본다. 자기들은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상대방은 말장난을 한다는 것이다.”

    후세인은 이라크인들의 자부심에 기름을 부으며 대미 항전을 계속하려는 게 아니던가. 누군가는 “아랍세계에는 국경은 없고 민족만 있다”고 했다. 서구사회에선 민족주의가 퇴색했지만 아랍에선 지금 그 극치를 달린다. 그들은 세계화를 외칠 만큼 남의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열흘 동안에 걸친 답사를 마치고 다시 암만으로 떠나는 버스에 오르면서 나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됐다. 의문을 풀고자 먼길을 마다 않고 힘들게 찾아갔다면 그 해답을 얻어서 나와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로부터 6년여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 그 의문에 답을 얻지 못했다. 그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

    “문명의 땅이자 성서의 고향인 이라크에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쌓아올린 문명과 하느님의 역사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