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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문학, 세계의 반영

  • 글: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예창작 / 문학평론가 over82@lycos.co.kr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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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소설가 김영하, 백민석, 은희경, 배수아

가령,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1993)와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1995)이 억압되었던 한국문학의 내향적 미학을 현실화했고, 그 연장 위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은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1995), 백민석의 ‘헤이, 우리 소풍간다’(1995)로 그 징후를 드러냈으며,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김영하의 ‘호출’(1997)에 와서 선명한 미학적 차별성의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이 가설은 주관적인 것이며, 편향된 것이기도 하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90년대 문학의 동력 중 하나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개인성 혹은 개인적 삶의 공간에 대한 문학적 탐구와 관련된다.

문제는 90년대 문학이 모두 개인성의 실재를 주창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90년대 문학은 개인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해체했다. 개인적 공간에 대한 발견은 동시에 그 공간의 부재에 대한 회의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경숙과 윤대녕이 보여준 자기 기원에 대한 탐사는 90년대 문학에 하나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간체와 자기 반영적 글쓰기 등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신경숙의 일인칭 고백체가 가지는 문학사적 의미 역시 실존적 기원을 찾아가는 내면성의 지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돼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내면성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기보다는, 그 언어화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문학이며, 개인의 실존적 윤리학을 탐구하는 문학이다.

그 고백적 인간이 보편적인 가족주의를 수락함으로써, 신경숙 소설은 정신적 성숙을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적 의미의 인간 윤리학으로 귀환한다. 이를테면 고백적 자아와 낭만적 자아로 요약될 수 있는, 신경숙과 윤대녕 소설 속의 인간형들은, 집단적 주체를 대변하고자 하던 80년대 소설의 지배적 경향과 차별되는 지점에서 ‘안으로의 시선’을 드러낸다. 물론 이와 같은 경향이 90년대 여성소설의 주류로 부각되면서, 그 이후 다른 여성작가들에게도 인물의 스테레오 타입과 화법의 단성적·독백적 경향을 낳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세대론에 편입되지 못한 은희경은 90년대적인 여성소설의 주제를 자신의 개성 안에서 확대시켜 나가면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했다. 은희경은 내면성의 지향과는 반대편에서, 사랑과 로맨스를 탈낭만화하여 연애와 결혼과 가족, 그리고 성장을 둘러싼 생의 비루함을 거침없고 날카로운 입담으로 풀어냈다.

조금 다른 자리에서, 백민석과 배수아는 자기성찰적 태도를 과감하게 던져버림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미성년적이고 반사회적인 자아의 존재론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제도적 훈육을 거부하고 생에 관한 스타일의 반란을 도모하는 불온한 아이들의 육성이 등장한다. 이들의 과격한 허무주의는 새로운 세대의 가망 없는 나르시시즘과 문화적 저항의 표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두 작가의 급진성은 그것이 체험적 혹은 생래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작가는 문학제도 안의 규범적인 미학으로부터 탈주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미학과 잡종적인 차원의 새로운 여성적 언술로 자기 문학을 확대해나가면서, 그 전위의 문법을 지켜나간다.

성석제와 김영하는 고백하는 존재로서의 작가 개념을 넘어서 직업적인 이야기꾼의 면모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소설에서 작가와 등장인물 그리고 서술자 사이의 연계성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두 작가에게서 우리는 ‘극화(劇化)된 화자’와 혹은 숨은 ‘구연가’로서의 서술자라는 면모를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과 고백의 문법 틈새에서 새로운 화법을 실험했다는 맥락에서 의미 있다.

성석제는 한국문학에서 잊혀진 구연적 전통을 되살려 비루한 남성 영웅의 서사를 풍성한 유머와 위트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페이소스를 선사한다. 그는 여성적 화법이 지배적인 90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선명한 개성 하나를 보여주었다. 김영하는 새로운 문화적 상황과 코드를 소설화했는데, 이것은 하위적이고 주변적인 장르들과의 접속을 통해 소설 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소설 언술 자체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문학적 움직임은 박성원, 김연수 등 젊은 세대의 문화적 감각과 결합하면서 소설과 현실과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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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예창작 / 문학평론가 over82@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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