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의 ‘금강전도’ (18세기 중반·호암미술관)
그 결과 1682년에는 그동안 명나라 제도에 따라 문묘(文廟)에 모셨던 역대 성현들 가운데서 조선 성리학의 명분론에 맞지 않는 인물들을 대거 빼내고 중국에서 모시지 않는 인물들을 새로 추가하는 대대적인 개정을 감행했다. 이로써 동아시아 유학사와 정신사를 완전히 조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정리하는 독자성을 과시했다. 나아가 1704년에는 중국에서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형식의 대보단(大報壇)을 이 땅에 설치해 숙종이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제사를 모시는 일을 거행했다.
이는 흔히 사대주의의 표본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조선 성리학자들이 이를 거행한 진정한 의도는 이제 조선이 동아시아 문화의 주체이므로 그 동안의 주체였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제사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조선중화사상을 실제로 실천한다는 데 있었다. 한 예로 송시열이 명나라 학문은 조선보다 못해 전혀 볼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 사실이나, 그 주변의 노론들이 명나라의 문묘제도를 조선의 기준으로 과감히 고쳐나간 사실에서 그 본의의 핵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사고와 가치의 기준을 조선에 두고 조선 중심으로 생각하는 주체적 자존의식과 자각의식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가령 유계나 홍여하 같은 지식인들은 우리 역사를 주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역사 편찬을 시도해, 그동안 중국사에만 적용해온 강목체로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체계화했다. 김만중 같은 문인들은 ‘중국의 한자어로 이루어진 우리 한문학은 본질적으로 앵무새의 흉내에 불과한 거짓 문학이며 우리말로 이루어진 한글 문학이 진정한 우리 문학’이라 단언하는 획기적 민족문학론을 정립했다. 나아가 18세기초 서울 문단을 주도한 김창흡은 진실한 시란 길거리의 아동이나 여염집 아낙네들의 말에 있다고 했고, 김춘택도 자기 나라의 언어로 지은 시는 허위가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사람을 가장 크게 감동시키는 것이라며 우리 문학의 언문일치를 주장했다. 다산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 한문시의 창작 원리를 따르는 “어리석은 식자”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기준에 입각한 “조선 시를 짓겠다”고 선언한 것은 조선 후기 광범위하게 퍼진 주체적이고 자존적인 자의식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중국식 양탄자냐, 조선의 화문석이냐

윤두서의 ‘선차도(목기 깎기)’ (18세기 초반·해남 종가)
18세기초에 진경풍속이 하나의 단층을 이룰 만큼 급격히 발전하며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데는 이러한 주체적 문화의식이 근원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확립시킨 정선과 조영석이 그러한 주체적 문화의식이 가장 강고했던 서인(西人) 핵심부에서 활동한 의식 있는 사대부 화가였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핵심 소재인 금강산을 그린 그림에 대해 말할 때마다 중국 사람들도 조선에 태어나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강조하거나 금강산은 중국에도 없는 천하의 최고 명산임을 자랑한 사실에서, 당시 사람들이 진경산수화에서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조영석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고, 전국의 산천을 수없이 사생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사실적이고 독창적인 산수화를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우리나라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했다. 이로써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