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품에서 잠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품에서 옛날 이야기 듣기를 무척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는,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제보자’였다. 할머니 품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다 잠들고, 다음날을 맞는 게 그 무렵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할머니가 이야기 잘하는 분으로 동네에 소문나 있었기 때문에, 내 또래 아이들도 우리 집에 모여 할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즐겼다. 할머니의 이야기 레퍼토리는 아주 다양했다. 무서운 이야기와 우스운 이야기, 임경업 장군 이야기와 장화홍련 이야기, 긴 이야기와 짧은 이야기를 섞어가며 어린 나의 구미에 맞게 잘 얘기해주는 좋은 ‘구연자’였다. 할머니는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간혹 동네 이야기꾼이나 노래 잘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조금 더 큰 규모의 ‘이야기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판에서 어떤 이야기는 노래로 아주 길게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그 무대는 ‘소리판’으로 바뀌었다. 놀이·연희·공연을 위한 무대를 우리는 전통적으로 ‘판’이라 불러왔다. 전통사회에서는 유랑 예능인들이 놀이판을 마련하고 땅재주나 줄타기 등 곡예를 공연했다. 그들이 공연한 무대를 ‘굿판’이라 했으며, 굿판에서 벌인 여러 예술 형태를 묶어 ‘판굿’ 혹은 ‘판놀음’이라 불렀다.
전통사회의 굿판에서 광대들이 벌인 판놀음에는 풍물이나 줄타기, 꼭두각시놀음 등 여러 레퍼토리가 있었으며, 판소리는 명창이 청중을 대상으로 부르는 소리의 측면이 강화된 연행예술이었다. 판소리는 명창이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정도 걸리는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흥미롭게 노래하는 판의 예술이다. 연행하는 형태를 보면 음악극의 모습이며,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면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서사극이기도 하다. ‘판’에서 이야기와 노래와 연행이 함께 이뤄지는 종합예술의 형태가 바로 판소리인 것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민중예술의 하나로,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서민예술이다.
탁하면서 맑은, 거칠면서 부드러운
판소리 명창은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소리를 하는데, 잘 들어보면 노래로 하는 부분과 말로 하는 부분이 교차돼 나타난다. 노래로 부르는 부분을 ‘창(唱)’이라 하고 말로 하는 부분을 ‘아니리’라고 한다. 아니리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 나타나는 대목으로, 평탄한 말로 이야기 줄거리를 요약해주거나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니리를 하는 동안 광대는 막 들려준 노래로 죄어놨던 청중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자신은 숨을 돌리고 목을 쉬면서 다음 소리를 대비한다. 또 광대는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고연극적 동작도 하는데, 이를 ‘발림’ 혹은 ‘너름새’라고 한다. 고수는 북을 쳐서 반주하며 소리 중간중간에 ‘얼씨구’ ‘좋다’ 따위의 추임새를 연발한다. 판소리 명창은 전통사회의 예술인으로서 음유시인이자 작곡가이며, 가수이자 연극배우라 할 수 있다.
판소리 명창은 훌륭한 가수로서 좋은 목을 타고나야 한다. 또 오랜 훈련을 통해 완성된 성음을 구사해야 한다. 판소리에 필요한 음색과 여러가지 발성 기교를 습득하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한다. 판소리는 쉬어서 거친 듯한 탁한 목소리, ‘곰삭은 소리’를 구사하여 연행한다. 그러나 탁하면서도 맑아야 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를 지향한다.
판소리는 목소리를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목소리의 특징을 설명하는 ‘목’ ‘성음(聲音)’ 등의 용어로 소리의 특징과 완성도를 규정한다. 성음은 명창이 내는 소리의 특질을 의미하는 용어로, ‘통성’ ‘수리성’ ‘천구성’ ‘떡목’ 등의 표현으로 소리의 등급과 완성도를 나타낸다. 통성은 뱃속에서 위로 뽑아내는 호방한 소리를 말하며, 수리성은 쉰 목소리같이 껄껄하게 나오는 소리를 뜻한다. 천구성은 거칠고도 맑으며 높은 음역으로 내는 슬픈 선율의 소리를 말하는데, 가장 좋은 성음으로 친다.
판소리 명창은 연극배우처럼 연희를 보여주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소리뿐 아니라 몸짓을 통해서도 판소리를 연기한다. 광대가 소리를 하면서 보여주는 몸짓이나 연기가 너름새와 발림이다. 너름새는 사설이 그려내고 있는 장면을 춤이나 동작을 통해 보조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부채를 펴서 박 타는 흉내를 내거나 부채를 떨어뜨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비유를 하듯, 너름새는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상징화·양식화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광대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 등 4가지 덕목을 꼽고, 그중에서도 순식간에 천태만상을 보여주기 위해 너름새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