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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소작농민의 사회적 안전망 대부모(代父母) 제도

  • 백승종|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소작농민의 사회적 안전망 대부모(代父母)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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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름 마을의 빈농들

독일 역사가 위르겐 슐룸봄은 독일 북부의 농촌마을 벨름을 연구해 주목을 받았다. 그 백미(白眉)는 17~19세기 그곳의 소작농민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각도로 밝힌 점이다. 당시에는 한 뼘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 곧 빈농(貧農)이 주민의 대다수였다. 농촌의 양극화는 18세기 이후 심화됐다.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한 결과였다.

당초 유럽의 지주들은 빈농이 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막았다. 극빈층의 증가는 사회 혼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 사회에는 가난해서 비혼(非婚)으로 남은 독신자가 많았다. 그 비율이 총 가구 수의 10%를 넘은 곳도 있었다. ‘짚신도 짝이 있다.’ 이런 속담이 널리 퍼진 한국 사회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17세기 후반 유럽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빈농층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지주의 이익에 기여한다.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은 국가의 세수입 증가에도 기여한다.’ 이처럼 새로운 주장이 이목을 끌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및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노동력의 수요가 커졌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화되자 빈농층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유럽의 지배층은 소작제도의 정착을 서둘렀다. 독일의 벨름 마을에서도 4년제 소작계약서가 유행했다. 지주는 자신의 거주 구역에 1~3채의 오두막을 지어놓고 근면한 소작농을 유치했다. 많은 소작농민이 지주가 제공하는 오두막에 살며 정해진 소작료를 해마다 꼬박꼬박 냈다. 겨울철이면 그들은 지주에게서 땔감을 사기도 했다. 또 그들은 지주의 요구대로 농사일을 거들었다. 지주는 소작인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소작농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판단하면 지주는 언제든지 즉각 계약 해지를 선언했다. 이 경우 소작농은 살고 있던 집을 당장에 떠나야 했다. 소작농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부초 같은 소작 인생

소작농민의 사회적 안전망 대부모(代父母) 제도

의사가족공동체에서는 대부모와 대자녀 집안을 친족집단으로 인식 집안 간 결혼도 기피했다.[REX]

소작농의 지위에 관해 유럽 사회에는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소 낭만적인 전설을 고집한다. 소작농들이 평생 한 집안의 소작인으로 살았고 더러 대를 이어 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반대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소작농민의 지위는 초라하기 그지없어 어디서나 ‘도망자 신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을까. 필자는 슐룸봄의 연구 결과를 들여다보았다. 역사의 진실은 후자에 가까웠다. 18세기 벨름 마을에서는 소작농민의 30%가량이 4년마다 농지를 찾아 다른 마을로 떠났다. 대략 14년마다 마을의 소작농민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19세기가 되면 소작 관계가 조금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벨름의 소작농민이 완전히 바뀌는 데 2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업 사회는 정착 사회다.’ 지금도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소작농민층은 끊임없이 부유(浮游)했다.

필자가 조선시대 경상도 단성현의 호적을 연구한 결과 그곳의 극빈층은 30년을 주기로 마을을 떠났다. 가난한 소작농민의 신세는 ‘부초(浮草)’와 같았다. 지금도 가난한 소시민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소작농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8세기 후반, 벨름의 실정을 좀 더 깊이 파헤쳐보자. 소작농민의 과반수는 소작농민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흙수저’, 가난의 대물림이었다. 또, 소유한 농토의 규모가 자급자족에 미치지 못한 소농민의 자녀들이 소작농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작농민의 20%는 소농의 자녀로서 상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대농(지주)의 자녀라 해도 상속자 1인을 제외하면 모두 소작농민이 되고 말았다. 벨름의 대농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 자녀가 소작농민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했다.

출신이 무엇이든, 일단 소작농민으로 지위가 떨어진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상승 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번 소작농은 영원한 소작농이었다. 가난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17세기 이후 이 마을의 소작농민 가운데서는 자력으로 소농이나 대농의 지위를 얻은 이도 없었다. 소농 중에서도 대농으로 성장한 집안이 없었다. 독일 북부 농촌 사회에서는 기껏해야 현상 유지요, 그도 아니면 사회적 하강 운동만 무한 반복되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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