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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유럽기행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포도줏빛 고전주의 빚어낸 괴테 문학의 산실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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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지성의 허브’ 바이마르

18∼19세기의 정경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우엔플란 앞 광장 거리.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괴테의 집’에는 노란 벽에 굵은 테를 한 창이 열지어 나 있고 문은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하나는 방문자용, 다른 하나는 마차용이었으나 지금은 마차가 드나들지 않아 큰 문은 닫혀 있다. 작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념품 가게가 나왔다. 이미 방문객들이 들어차 어수선한 그곳에는 괴테와 바이마르에 관한 책자를 비롯해 엽서, 마스코트, 컵, 티셔츠 등이 내걸려 있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괴테와 바이마르와의 인연에 관한 20분짜리 영화를 틀어주는 영사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룸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28일 라인강변의 상업·금융·교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복하고 명망 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생이 뭔지 모르고 자랐다. 라이프치히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사무실까지 냈지만, 본업인 법률보다 취미인 문학에 더 심취, 25살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을 써 유럽 지식인들로부터 ‘세계적인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775년 11월3일 새벽, 그는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그게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때의 광경이 어땠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는 후일 그가 쓴 ‘이탈리아 기행’의 첫머리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새벽 3시 칼스바트(그의 여름 휴양지)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넓혀보려고 바이마르 행을 결심한 터였다. 그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우편마차에 실려 푼다, 아이제나하, 에르푸르트 등을 거쳐 11월7일 드디어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지금은 고속열차가 4시간 만에 데려다주지만 온통 진흙길이던 당시에는 걸핏하면 바퀴가 진흙 속으로 빠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괴테는 진흙에 빠진 마차를 끌어내는 일을 돕다 갈비뼈를 다치기도 했다.



괴테 안내 영화는 낙엽이 흩날리는 광경을 배경 화면으로 처리해 괴테가 바이마르를 찾은 때가 스산한 시기였음을 암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 도시에 화사한 봄을 안겨다줬다. 그가 밑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게 했다는 사실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영화는 이어 바이마르에서의 괴테 행적을 보여줬으나 초점은 어디까지나 문학가로서의 그의 면모에 맞춰졌다.

두 ‘애송이’의 위대한 만남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국가이던 프랑스와는 달리 수십 개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진 상태였고, 바이마르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이 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였던 것. 그런데 누구보다도 포부가 컸던 26살의 청년 괴테가 이런 바이마르를 찾았다.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지도자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1757∼1828) 공(公)의 초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가 처한 상황이나 그곳으로 가는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트는 명색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실은 18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가 이미 1년 전부터 괴테를 만나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와 그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안다면 그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대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마따나 아우구스트는 제대로 된 인재 한 사람만 있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예상대로 괴테와의 만남은 바이마르를 유럽 문화 중심축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됐다. 10대와 20대 두 애송이의 신선한 만남이 세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괴테 개인에게도 일생 일대의 전기가 됐다.

괴테도 처음엔 바이마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얼마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와 죽이 아주 잘 맞은 데다, 계속해서 은(銀)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궁정극장 책임자라는 요직을 두루 맡게 되자 도저히 그의 청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게 됐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기간을 제외하고는 8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58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바이마르를 처음 찾았을 때의 사정을 그의 조수이자 절친한 동료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들려준 바 있는데, 에커만이 정리한 ‘괴테와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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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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