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영어권 조기유학의 그늘

‘부적응’ 끝 자살 기도한 초등생, 홈스테이 ‘아빠’아이 임신한 여고생

  •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5-02-2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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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목고 진학의 지름길’‘아이비리그로 가는 길목’….
    • 조기유학을 홍보하는 달콤한 문구가 학부모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자녀를 홀로 외국에 보내려면 두 가지는 명심하라. 성공은 의지를 갖고 충실히 준비한 학생에게만 온다는 것.
    • 어떤 것도 부모의 보살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유학원의 상술에 울고 이국땅에서 방황하는 조기유학생들의 슬픈 그림자.
    캐나다 킹스턴의공립학교에 다니는 김정환(가명·16)군은 지난해 수학과목에서 낙제했다. 한창 사춘기 열병을 앓으며 모든 일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 늦잠을 자느라 결석하기 일쑤였고, 자신의 숙제를 봐주던 교육청 소속 튜터에게는 “숙제가 없다”며 밥 먹듯 거짓말을 했다. 김군이 사는 홈스테이의 주인은 일찍 출근하느라 그가 언제 등교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김군은 2년 전 홀로 캐나다에 온 조기유학생이다. 김군의 부모는 “학생의 가디언(guardian·보호자)인 교육청이 엄격히 출석을 관리하고, 교육청 소속 튜터가 숙제를 봐주며, 국·영·수 과목을 가르치는 한국인 교사와 유학원 관계자가 방과 후 생활도 지도해줄 것”이라는 유학원의 설명에 안심하고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학원의 호언장담을 덥석 믿어버린 걸 곧 후회했다.

    가디언인 교육청은 김군의 장기 결석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교가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원 관계자도 김군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당시 그를 가르친 한 교사는 “캐나다 교육청 소속 튜터와 학교 담임교사, 유학원 관계자가 서로 잘 알았다면 정환이가 상습적으로 결석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유학원의 허술한 운영 시스템을 꼬집었다.

    이에 해당 유학원 관계자는 “우리는 김군의 결석 사실을 학교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의 불성실한 생활태도에 대해 여러 번 지적했지만 아이가 잘 듣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학부모로선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유학원에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방치된 ‘관리 유학’



    ‘영어 습득의 지름길’ ‘외국어고·민족사관고 입학의 관문’…. 해외 조기유학을 홍보하며 유학원들이 내세운 화려한 광고문구다. 조기유학 열풍이 거세지면서 각종 유학업체가 ‘단기유학’ ‘교환학생’ ‘계절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학부모를 유혹하고 있다.

    통계를 통해 조기유학 열풍을 가늠해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조기유학을 떠난 초·중·고교생은 2000년 4397명에서 2001년 7944명으로 80.7%(3547명) 증가했다. 또 2002년엔 1만132명으로 전년에 비해 27.5%(2188명) 증가하는 등 조기유학생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것. 2003, 2004년의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열풍은 좀처럼 식지 않을 것”이라 분석한다.

    명문대에 진학한 유학생들의 성공담은 조기유학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높였다. 성공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영어능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 세계를 보는 넓은 안목과 자립심까지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그늘도 존재하는 법. 준비 없이 부모 품을 벗어난 ‘나홀로 유학족’에게 조기유학은 오히려 독(毒)이 된다. 일부 유학원의 허술한 프로그램 운영과 상술에 피해를 본 학생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조기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미성숙한 학생들이 부모와 떨어져 지내면서 그 시기에 필수적인 정서 발달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공립고교에 다니는 ‘나홀로 조기유학생’ 유정아(가명·17)양은 지난 2년간 한국 교포가 운영하는 관리형 기숙사에 머물며 마음고생을 했다. 한국인 교포 가족이 유학원 타이틀을 내걸고 관리형 기숙사를 운영했는데, 4채의 집에 무려 30~40명의 한국 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유양은 “말이 좋아 ‘기숙’이지, 수많은 학생을 커다란 우리에 가둬놓은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이 업체 대표는 새 학기가 되면 한국으로 건너와 ‘손님몰이’를 한다. 조기유학에 관심 많은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여는 것. “내가 부모라는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양질의 한국음식을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부족한 과목은 과외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공언은 학부모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001년 8월 뉴질랜드로 건너간 유양은 기숙사의 열악한 시스템에 혀를 내둘렀다. 또 과외비 명목으로 다른 홈스테이에 비해 한 달에 50만원 정도를 더 지불했지만, 실제 과외교사로 나선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였다. 심지어 과외교사는 물어보는 것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양이 다른 과외교사를 구하려 하자 기숙사측이 이를 막았다. 매끼 식사마다 제공되는 반찬도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힘든 기숙사 생활에 학교 적응마저 힘에 부쳤다.

    “한창 엄마 손길을 받아야 할 초등학생들은 더 심각한 상황이에요. 기숙사에서는 아이들의 생활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제때 씻지도, 목욕도 하지 않는 아이가 많았어요.”

    유양이 기숙사에서 나가려 하자 “나가면 다니던 중학교도 옮겨야 해. 나쁜 친구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을 거야. 자신 있어?” 하는 식의 엄포가 이어졌다. 한국에 머물던 유양의 부모는 아이가 정말 잘못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결국 기숙사의 감언이설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한 교포의 도움으로 유양은 현지인 홈스테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훨씬 자유롭고 마음도 편해졌다.

    영어권 조기유학의 그늘

    미국의 주요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1월9일 한국의 ‘기러기 가족’을 1면에 보도했다.

    일부 유학원은 위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학원의 제안에 현혹돼 쉽게 판단을 내릴 경우 조기유학은 자칫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동아유학지오넷’의 주은미 차장은 황당한 상담사례를 털어놨다.

    “1월 초 한 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찾아왔어요. 모 유학원에서 ‘딸의 중학교 성적표를 위조해야 아이를 미국 명문 사립고에 보낼 수 있다’고 은밀히 제안했다는 거예요. 성적표 중 딱 한 과목에 ‘양’이 있는데, 이걸 영문 번역하는 과정에 고치자는 거였죠. 수백만 원의 돈을 요구하면서.

    대학은 영문 성적표를 직접 발급하기 때문에 위조가 불가능하지만, 중·고등학교 성적표는 번역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허점을 이용한 거죠. 그러나 편법을 동원해 좋은 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유학생활이 과연 평탄할 수 있을까요?”

    사설기관으로, 캐나다 지방자치단체와 국내 유학원의 연결 역을 맡고 있는 ‘주한캐나다교육원’의 이상미 홍보실장도 얼마 전 한 유학업체로부터 바가지를 쓴 한 어머니의 상담을 의뢰받았다. 같은 유학원을 통해 ‘캐나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등록한 다른 학부모가 지불한 돈과 자신이 지불한 액수가 턱없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주요 과목의 과외, 골프 레슨, 공항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이 어머니가 낸 돈은 1000만원. 그러나 이웃 학부모는 같은 업체에서 똑같은 프로그램을 등록하며 이보다 몇백만 원 적게 냈다.

    이 실장은 “일부 유학원에서 고객들에게 내키는 대로 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다른 유학원과 꼼꼼히 비교해볼 것을 당부했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유학원을 운영하는 박영석씨는 “일부 유학원의 비양심적 영업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부모의 현장 답사는 필수”라고 말했다. 학생이 적은 학교일수록 유학원에 더 많은 커미션을 얹어주며 학생을 유치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캐나다 오타와로 유학 온 김모(17)군은 유학원의 소개로 선택한 학교에 크게 실망했다. 시가지 건물에 들어선 학교는 인근 모텔을 빌려 기숙사로 삼을 만큼 교육환경이 열악했다. 학교로부터 웃돈을 받은 유학원이 자신을 그쪽에 소개했다는 사실을 알고 김군은 부랴부랴 다른 학교로 전학 갈 궁리를 하고 있다.

    최근 캐나다에서 유행하는 관리형 단기유학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현지에서 한국 교과까지 완전히 마스터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라면, 절대 우리 아이를 유학원에 맡긴 채 혼자 캐나다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윤선(가명·26)씨는 지난해 A유학원 국어교사로 선발돼 약 1년간 캐나다에서 한국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기대는 분노로 바뀌었다. 유학원은 자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마치 특목고 진학의 지름길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실제 시스템은 주먹구구였기 때문이다.

    A유학원은 최근 유행하는 ‘캐나다 단기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단기유학 프로그램이란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이 1~2년간 캐나다 현지 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익힌 후 다시 귀국하는 시스템. 서울 중계동에서 입시학원과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노하우를 쌓아온 ‘토피아아이비클럽(이하 토피아)’이 2000년대 초 이 프로그램을 선보이자(‘신동아’ 2003년 2월호 보도), 여러 유학업체가 이를 벤치마킹하고 나섰다.

    A유학원의 운영방식도 토피아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학원은 방과 후 학생들에게 2시간씩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한국 교과를 가르치는 학원도 겸한다. 유학생들의 한국 귀국시 적응을 돕기 위해서다.

    ‘한국 교과 완전 마스터’는 거짓말

    이씨는 조기유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방과 후 생활을 지도했다. 학생들이 향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한국음식도 만들어줬다. 이른바 ‘조기유학 토털서비스’를 제공하는 셈. 그러나 학원이 제시한 핑크빛 시나리오와 현실은 사뭇 달랐다.

    “유학원은 학생들이 캐나다 현지에서 한국 교과목을 ‘완전 마스터할 수 있다’고 광고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12명의 학생을 놓고 한 과목당 50분간 수업하는데, 학생들의 학년과 실력은 모두 다르거든요.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겠어요?

    게다가 국·영·수 교사들은 캐나다로 오기 전 그 흔한 오리엔테이션조차 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과 지도, 교재 선택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없더라고요. 교사들은 대부분 캐나다를 처음 방문하는 것이라 학생들이 문화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적절한 도움조차 줄 수 없었습니다.”

    이씨는 유학원이 동료 교사들로 하여금 출신 학과를 속이라고 공공연히 권유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동료 교사들이 S여대 수학과가 아닌 가정과 출신이고, K대 영문과가 아닌 생물학과 출신이라는 사실을 수개월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학부모에게 생색내기 위한 유학원의 저급한 발상이었겠죠. 일류대 출신으로 속이는 ‘학벌 세탁’ 수준은 아니지만, 동료들끼리도 학과를 속였다는 게 꺼림칙하잖아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데, 과연 유학원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30~40명 관리하는 ‘가디언’

    캐나다 밴쿠버에서 유학업체를 운영하는 40대 김모씨는 유학원이 제공하는 토털 케어 서비스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나홀로 조기유학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홈스테이와 가디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유학원의 제도적 관리보다 ‘운(運)’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요. 많은 유학원이 캐나다 지방 교육청의 공신력과 유학원 조직의 노하우를 내세워 ‘학생들을 제도적으로 관리한다’고 선전하는데, 이건 환상입니다. 상업적인 논리죠.

    최근 유학원과 캐나다 교육청이 공동 주관하는 유학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교육청은 유학원들이 어느 정도 양식을 갖춰 제안서를 제출하면 교육청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외국 학생들이 들어오면 우선 돈벌이가 되니까요.”

    조기유학생의 지킴이 노릇을 하는 가디언 사업은 캐나다 교민사회의 가장 큰 수입원 중 하나다. 캐나다·미국·호주 등 영어권 국가는 부모를 동반하지 않는 18세 이하 학생에게 유학비자를 발급할 경우 ‘법적 가디언’을 두도록 요구한다. 보통 이 경우 학생의 친인척, 한국인 교포 혹은 교육청이 가디언 역할을 맡는다.

    가디언은 그 역할 범위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학생 한 명을 관리하는 데 1년간 5000캐나다달러(약 400만원) 가량을 받는다. 일부 교민은 아예 가디언을 직업으로 삼고, 수십 명의 한국 조기유학생을 관리한다. 새 학기가 되면 한국으로 건너가 ‘고객 유치 작업’에 나서는 교민도 많다. 그러나 30~40명의 학생을 한꺼번에 돌봐야 하는 가디언에게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요구하긴 어렵다.

    현재 캐나다에서 유학생 2명의 가디언으로 일하는 김건씨는 아이들이 홈스테이 생활에 잘 적응하는지, 학교엔 꼬박꼬박 출석하는지 자주 연락을 취하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상업적으로 수십 명의 아이를 관리하는 가디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그러나 가디언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유학생의 세밀한 사생활까지 챙기기는 어렵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디언으로 활동하던 서규식(가명)씨는 2003년 가을 자신이 돌보던 여고생이 홈스테이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자 큰 고민에 빠졌다. 서씨도 모르는 사이 여고생과 홈스테이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게 된 것. 여고생은 1년 동안 서씨에게 학교생활이나 홈스테이 환경에 대한 불만 한번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고생을 보며 서씨는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끼리끼리 문화’와 왕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욕심과 주관적 판단은 오히려 자녀의 미래를 망치기도 한다. 조기유학의 성공은 바로 학생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정민호(가명·18)군은 2년 전 부모의 강요로 미국 동부의 한 사립고교에 진학했다. 정군의 성적은 학교의 요구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나, 부모가 학교에 사정하고 돈을 기부해서 입학이 성사됐다. 명문 사립고에 자녀를 넣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군의 방황이 시작됐다. 도통 따라갈 수 없는 수업 때문에 결석하기 일쑤였다. 잘 안 통하는 영어 때문에 백인 아이들의 커뮤니티에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기숙학교에서 지내던 그는 한국학생들과 몰려다니며 1년에 무려 7000만원을 썼다. 부모는 아들의 방황을 뒤늦게 알고 그를 전학시켰다. 그나마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결국 택한 곳이 학원 수준에 불과한 사립고교였다. 성적도, 영어도 안 되는 극단적 상황에서 내린 고육책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한국 입시과정을 쫓아갈 엄두는 더 더욱 나지 않았다.

    ‘STS 에듀케이션’의 김효상 과장은 학부모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오류 중 하나가 순위로 학교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느 지역의 어느 학교가 최고인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위 10위 안에 랭크된 명문 사립고에 진학하는 것만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먼저 내 자녀가 명문 사립고에 진학할 자질을 갖췄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지요. 또 명문 사립고를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도 아니고요. GPA(학점 평균), 커리어 관리, SSAT 점수, 토플 점수 등의 여건이 뒷받침돼야죠. 학교를 선택하기에 앞서 자녀의 객관적 실력과 교육환경, 한국인의 분포, 생활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영어권 조기유학의 그늘

    해외유학박람회에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 한 초등학생 가족.

    한국학생들이 넘쳐나면서, 유학생들 사이에 ‘끼리끼리 문화’도 생겨났다. 2003년 한국학생 입학 정원이 4명인 미국 보스턴의 한 사립중학교에 한국학생 90여명이 몰려와서 입학 심사 인터뷰에 응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 학교에서 한국학생들끼리 몰려다니는 부작용이 발생했고, 심지어 외국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한국학생이 유학생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미국 뉴저지주의 한 명문 사립고에 다니던 지모(17)양은 현지 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적극적 성격 때문에 오히려 한국유학생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높은 성적을 받고, 수업시간엔 적극적으로 발표하던 그는 미국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한국유학생들이었다. “한국 애면 한국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것 아냐. 네가 그렇게 영어를 잘해? 그렇게 잘났냐?”는 식이었다.

    10명이 넘는 한국 친구들이 지양에게서 등을 돌리자, 성격이 원만한 그도 견디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지양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로 전학하기로 결심했다. 폐쇄적 문화를 고집하는 한국 친구들에게 상처 받았기 때문이다.

    포르노 중독으로 퇴학위기

    조기유학은 결코 문제학생의 해방구가 될 수 없다. 한국의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강제로 떠밀려온 학생들은 해외에서도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자녀를 홀로 방치하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초등학교 4학년인 서제동(가명·10)군은 부모의 불화로 2003년 캐나다의 한 도시에 ‘나홀로 유학’을 왔다. 서군은 평소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며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곤 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유학원과 캐나다 학교에 이런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아 문제가 커졌다. 서군을 돌보던 홈스테이 부모는 “더 이상 아이를 맡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서툰 영어와 소극적 성격 때문에 캐나다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서군은 학교에서 자살소동을 벌여 퇴학 위기에 처했다. 문구용 칼을 팔목에 들이대며 ‘죽어버리겠다’고 친구들을 협박한 것. 그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6개월 후 캐나다에 들어왔다. 정서가 불안정한 아이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5년간 일본에서 머물다 귀국한 윤정희(가명·14)양은 한국 친구들에게 ‘쪽바리’라고 놀림을 받으며 왕따를 당하자 캐나다행을 결심했다. 편견 없고 분위기가 자유로운 캐나다 학교에서 기를 펴고 즐겁게 살았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양의 삶은 캐나다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폐쇄적 성격에다 의사소통마저 어렵다 보니 홈스테이 가정에서도 매일 밤 혼자 TV만 봤다. 가족끼리 함께 대화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늦게까지 TV 보는 것을 금하는 캐나다 홈스테이 가정에서 윤양의 행동은 계속 분란을 일으켰다.

    부모의 통제에서 자유롭다는 해방감 때문에 사춘기 청소년들은 일탈하기 더욱 쉽다. 캐나다 공립학교 8학년에 재학중인 황성진(가명·14)군은 부모가 선물한 노트북 컴퓨터로 매일 밤 포르노를 보느라 학업을 소홀히 했다. 수업에 빠지는 것도 다반사. 중위권 성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홈스테이 부모는 황군의 노트북 컴퓨터를 빼앗고 “계속 포르노에 빠져 있으면 홈스테이에서 쫓아내겠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교육청의 선처로 학교는 무사히 다닐 수 있었지만, 한국의 부모는 불안함을 떨칠 길이 없다.

    조기유학의 폐해가 알려지면서, 유학생 신변관리 전문 컨설팅업체도 생겨났다. 해외로 떠밀려간 학생들이 일탈하지 않는지, 용돈이 부족해 불법적으로 취업하거나 음주운전, 형사사건에 연루되지 않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관리해준다는 것. ‘토털 시큐러티’의 김민성 대표는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보낸 ‘기러기 아빠’들이 아내의 사생활과 자녀의 학교 적응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객은 월 관리비로 600만~800만원을 지출할 수 있는 강남 상류층 학부모”라고 말했다.

    “유학비용 10조원 중 9조원은 낭비”

    그러나 이러한 부작용들도 조기유학 열풍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영어 실력은 이미 한국사회에서 살아남는 중요한 특권이 됐고, ‘세계화 마인드’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기유학에서 거두는 교육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문제는 무분별한 ‘묻지마 조기유학’에서 생겨난다.

    유학생들의 실패사례를 수없이 지켜본 서진학원 한상범 입시컨설팅팀장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새겨볼 만하다.

    “한 해 한국에서 유학비용으로 10조원이 지출되는데 그중 9조원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낭비되는 돈일 겁니다. 제때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학년 과락(科落)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오는 학생이 비일비재하거든요. 영어권 국가의 조기유학에 성공한 학생들은 본인이 의지를 갖고 충실히 준비해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성공의 열매’는 준비된 사람만이 먹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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