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2-24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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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적 요충지에 자리한 약소국의 정치와 외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정나라의 정치가 자산은 명쾌한 처신으로 내치와 외치를 조화시켰다. 공자도 탄복한 자산의 언론관과 통치술, 외교 역량.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일러스트 이우정

    약소국으로 전락한 정(鄭)나라를 한계상황에서 구출하고, 결국 국가 위신을 빛낸 역사적 인물이 있다. 다름아닌 자산(子産)으로, 그는 춘추시대 제일의 외교가로 손꼽히거니와 공자(孔子)도 탄복해 마지않은 위대한 정치가다.

    우선 슬기롭고 활짝 트인 자산의 언론관부터 살펴보자. 자산이 정나라의 국무총리급 고위직인 ‘집정(執政)’에 재임할 때의 일이다. 정나라 사람들이 자주 향교에 모여 정치의 잘잘못을 비판했다. 그러자 연명이라는 관리가 나서서 향교의 폐지를 건의했다. 이 말을 들은 자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치도 않은 말일세. 그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는 거기 모여앉아 그때그때의 정치적 득실을 논의하는 것일 뿐이야. 우리는 거기서 좋다는 것을 시행하고, 나쁘다는 것을 고쳐나가는 것이 옳지. 그렇게 활용하면 언론이 스승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돼. 규제란 어불성설이야. 선철(先哲)은 여론을 경청해서 좋다는 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으나, 결코 반대의 처사로 원한을 사라고는 가르친 바 없네.

    설사 못마땅한 언론이 있다 해도 당장 중지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흐르는 강물을 막는 꼴이야. 고이고 고였다가 큰물이 되어 둑을 무너뜨리는 날에는 피해가 더욱 막심하여 우리도 손쓰지 못할 걸세. 언론탄압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보다는, 미리 적당히 물꼬를 터주고 흐르게 해야 한다. 언론의 비판을 귀담아들어 약으로 삼는 것이 합당할 걸세.”

    연명이 경청한 뒤 말하였다.



    “저는 오늘 비로소 성심으로 모실 분을 만났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온 나라가 보람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어찌 소수 관료만 덕 보는 데 그치겠습니까.”

    후일 이러한 자산의 정책을 전해들은 공자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렇게 평가했다. “그와 같은 언론관으로 미루어 자산에 대해 많은 것을 헤아리고 내다볼 수 있다. 앞으로 어느 누가 자산을 혹평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春秋左氏傳, 襄公三十一年. 中華書局, 春秋左傳注 1101∼02쪽)

    언론자유 창달한 정치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이미 언론자유 옹호의 참뜻을 천명했으니 자산과 공자가 다시 한번 우러러보인다. 또 그러한 가르침을 충심으로 받아들여 실천할 줄 알던 당시의 양심적 선비(우수한 공무원) 역시 높이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정치 규범’으로 널리 읽힌 ‘서경(書經)’은 이미 ‘하늘은 백성의 눈으로 보고, 백성의 귀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고 썼다. 환언하면 ‘하늘의 뜻은 여론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고대에도 같은 취지의 정치적 양식이 확고했다. 라틴의 격언은 ‘민중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Vox populi, vox Dei)’라고 했는데, 영어로는 ‘The voice of the people in the voice of God’이다. 이 격언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서구사회에 널리 보급됐다. 오늘날 동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국민여론 존중이 인류의 통념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여론 형성의 모체가 되는 신문방송 매체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 역시 세계적 양식으로 당연시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세력이 비록 본의는 아니라 해도 언론을 백안시하는 듯한 모습을 비친다면 이는 세계의 여론과 후세의 역사 앞에 중대한 과오가 된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집권세력은 일부 언론매체, 특히 몇몇 상업지가 마치 국민의 염원과 동떨어진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보도와 논평으로 자기들의 개혁성향을 비판하니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업지는 정부 지원이 아니라 시장원리에 따라 존재한다. 독자, 즉 구매자 없이는 생존하지 못하며 광고수입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언제나 자의적일 수 없으며 항상 국민의 성향에 민감하다.

    그뿐인가. 언론마다 사시(社是)가 있고 이에 어긋나면 국민이 외면하니 탈선적 이기주의도 대체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알기 위해 관용차보다 택시 타기가 권장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어떤 집권자는 이른바 ‘좋은 신문’과 ‘나쁜 신문’의 편 가르기를 즐겼는데, 이는 특권의식으로 국민의 선택 자유를 대체해보려는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스티드(H.W.Steed)는 일찍이 ‘좋은 신문이 자유를 누리려면 나쁜 신문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신문학의 격언을 제시했던 것이다.

    권력자와 언론의 불협화음

    어떤 집권자는 언론의 차원 높은 정치적 시비 가름엔 질색을 하면서도, 중·하급 공무원층에 대한 부패 폭로와 비리 적발 등에는 제법 흥취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이른바 ‘행정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면서 고위층에 대한 비판은 용허하지 않지만, 일반 공무원에 대한 비판은 관용하겠다는 뜻을 비친 바 있었다.

    그러나 ‘떡고물’을 챙기는 사람은 위에다 바치는 한편 자기 몫도 챙기는 법이다. 안 바치면 집권자가 먼저 알고 처단하니까. 언론보도는 그 다음인 것이다. 즉 권력형 비리는 상하간에 불가분의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자기만을 보도권 밖에 두려고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으레 밝혀지길 몹시 두려워하는, 그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부 사회지도자들이 ‘데모를 해야 두각을 나타내고 출세할 수 있다’는 천박하고 편면적인 현실파악하에 경솔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집권측 실무자들은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의 정치적·행정적 책임은 덮어둔 채, 원인요법 대신 혼란의 책임을 언론보도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나아가서 어떤 강력한 집권자는 임기 말에 그의 실정(失政)이 속속 판명되고 보도되자 언론을 지목하면서 자기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다’고 나무랐다. 그 말은 반성능력의 결핍을 통감케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러한 피상적 관찰에도 전연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무릇 언론사도 일제의 지배나 독재의 철권통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적응 방식을 시의(時宜)에 맞게 조정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전부냐 무(無)냐’ 식의 태도는 슬기로운 생존전략이 아니다. 최후의 결전이 아니라면 간단히 떠들 바 아니다.

    물론 생존전략은 결코 노예적인 처지에서의 안주를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 참아가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즉 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하기 위해, 어렵지만 당장은 참아가며 필요할 때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이를 위해 우회할 수도 있고, 비원칙적 사안에 대한 일시적 타협도 고려한다.

    그렇다면 언론이 본연의 존재의의를 밝히고자 기다리는 중대 시점은 언제인가.

    하나는 독재자의 임기말 등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길 때다. 또 하나는 일제 패망 등 역사적 전환기다. 끝으로 국운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나 국민주권 원리가 완전히 무시당할 때 등 초비상 시국이다. 그 지경에 이르면 언론은 상응한 각오를 가다듬고 국민 앞에 밝힐 것을 밝힌다. 춘추시대의 자산은 그러한 언론의 힘을 언론의 긍정적 계몽가치와 더불어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선각자이니 더욱 위대한 정치가적 자질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정나라의 자산에 비견될 현대 미국의 정치가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있다.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이자 제3대 대통령인 그도 한때는 ‘언론의 피해자’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일부 신문의 부정확한 보도와 비우호적 논평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성인답게, 나중에는 ‘자유로운 신문을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사회에서는 만사가 안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신문은 인간 정신을 계발하여 합리적·도덕적·사회적 인간을 형성하는 최량의 도구다’라고 갈파했다. 일부 ‘옹졸한 야심가’나 ‘기회주의 정치인’과는 그릇이 다른 것이다.

    자산의 정치적 업적

    정치가의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결코 오늘의 척도로 측량될 것이 아니다. 그가 활약했던 국가사회의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요청 및 제약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원래 춘추시대에는 고작해야 관습법이 있었을 뿐 성문법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관료들의 자의에 의해 정치·행정이 운용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자산의 성문법 창시는 당시로서는 실로 놀랄 만한 생산적 개혁이었다. 그래서 국내 기득권층의 반대가 심했고, 심지어는 다른 제후국의 집권자들로부터 내정간섭에 가까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산은 백성을 보살피고 여론을 경청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인권옹호’와 ‘법치발전’으로서, 이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또한 자산의 온갖 개혁은 모두 민생에 직결된 것이고, 여론의 요구를 광범하게 수렴한 것이었다. 민생과 아무 관련 없는 소위 ‘겉치장 개혁’에는 애당초 손을 대지도 않았다.

    자산은 특히 인재의 발굴, 육성과 등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강점 본위의 인사를 했다. 결점의 거론은 거의 논외로 했다. 또 인재를 등용할 때는 여론을 참작하며 단독으로 결정하든지, 우수한 측근하고만 상의했다. 부족한 사람들과 상의하면 질투심과 ‘자리 지키기’ 심리가 작용해 자칫 우수한 인재를 놓칠 수도 있어서다.

    자산의 그러한 내치 정돈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민생이 뚜렷이 향상됐다. 약소국 나름으로 국력이 증강했으며, 외세 침략 또한 특기할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국민이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가 기원전 522년에 병으로 서거하자 정나라의 모든 국민이 통곡했다고 한다.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고대 중국 정나라의 정치가 자산은 유연한 언론관을 갖고 있었다. <br>사진은 2001년 8월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실시 1주년을 맞아 ‘자유언론 탄압 규탄대회’를 갖고 있는 자유시민연대 회원들.

    앞서 이 글의 제2회(‘신동아’ 2005년 2월호 450쪽)에서 정나라의 장공(莊公)이 구사한 ‘잡기 위해 놓아두기’ 계략을 풀이한 바 있다. 그 유연한 사고활동이 자산에게도 자연스럽게 계승됐다. 자산의 슬기로운 정치자세에서 우러나온 정술(政術)의 기본은 강유(剛柔, 꿋꿋함과 부드러움) 또는 관엄(寬嚴, 관대함과 엄격함)을 번갈아 사용하는 데 있다.

    이는 통치술에서 반드시 파악돼야 할 정치심리의 으뜸이니 독자께선 꼭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공자도 다음에 언급할 바와 같이 매우 중시한 바 있다. 일부 정치인들의 위선적 언사에 현혹되어 정치심리를 몰각하다가는 서로간에 이로울 것이 없다. 우선 고전에서 ‘타인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

    자산은 중병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후계자로 내정된 자대숙(子大叔)을 불러 말했다.

    “내 뒤를 이어 국정을 맡을 사람은 당신이다. 일반적으로 정술(政術)은 엄격함과 관대함을 병용하지만, 문제는 집권 직후의 선택에 있다. 유덕한 성인(聖人)이라면 취임 초부터 관대한 정치로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처럼 범상한 위정자라면 차라리 엄격한 편이 슬기롭다. 예를 들어 불은 뜨거워서 백성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두려워하므로 타 죽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물은 유약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깔보고 장난치다 익사하는 경우가 많다. 관대한 정치란 물과 같다. 얼른 보면 손쉬운 방법 같지만 기실 몹시 어려운 통치방법이니 주의해야 한다.”

    수 개월 후 자산이 서거하자 자대숙은 정권을 인수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라 차마 엄격한 자세로 다스릴 수 없어 매사에 관용 위주로 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랬더니 범법자와 도둑이 늘고, 특히 조직범죄가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자대숙은 후회했다.

    “내가 처음부터 자산의 말씀을 따랐더라면, 사태가 이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자대숙은 부득이 무력을 사용해서 범법조직들의 소굴을 토벌했다. 군경이 그들을 전원 소탕함으로써 사회질서가 어지간히 회복되었지만 희생은 몹시 컸다. 공자가 그러한 사건, 특히 자산의 경고를 전해듣고서 말하였다.

    “옳거니, 정치란 자산의 말과 같다. 만약 정치가 관용에 치우치면 인민은 방종해진다. 엄격하게 다스려 고쳐나가며 바로잡아야 한다. 한편 엄격한 정치 때문에 인민이 해를 입게 되면 이번엔 관용으로 완화한다. 관대로 엄격을 조율하고 엄격으로 관대를 조율하면 비로소 화합정치가 이루어진다.”(春秋左氏傳, 昭公 20년)

    공자는 ‘논어’에서도 정치가로서 자산을 최대한으로 찬양했다. 처신이 신중했고,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역이 공평했다는 것이다(論語, 公冶長).

    요충지 약소국의 두 가지 급선무

    자산의 외교적 업적은 전환기에 강대국들의 틈에 놓인 약소국의 생존과 독립, 국가적 존엄성을 슬기롭게 지켜낸 것으로 집약된다. 오늘날에도 시사적으로 참고가 될 만한 많은 경험적 교훈을 남겼다.

    본시 서주(西周) 왕조의 종법제(宗法制)하에서는 외교가 없었고, 종주국에 대한 종속국(제후국)의 예의와 충성, 그 대가인 보호 등 상하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종적(縱的)인 예의(禮儀)질서의 세계였다.

    그러던 것이 수도이전 이후 동주(東周) 왕조의 권위와 통제력이 실추되고, 제후국들의 자주·독립 노선이 활발해짐에 따라 비로소 실질적인 외교활동이 싹텄다. 자산이 바로 이 시기의 대표적 외교활동가다.

    원래 외교란 평등한 주권국가들이 공존하는 국제사회의 성립을 전제로 한 대외관계 조정이다. 목적은 국가이익의 주장과 관철이고, 방법은 설득, 타협, 협박이다.

    그 배경에는 종합적인 국력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은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민족성, 국민의 사기와 단결, 인구, 자원, 지리적 위치, 전통과 대의명분, 국가적 공신력, 동맹관계, 지도자와 외교관의 자질과 매력, 그리고 국제여론에 대한 호소력 등이다. 자산은 그 가운데서 약소국이 활용할 수 있는 위력 또는 영향력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상하관계에는 그다지 구애될 바 아니라 해도 대·소(강·약)관계의 엄존과 그 상쇄요인, 나아가서 호혜적 상생(相生)조건의 형성은 항상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자산의 조국 정나라는 중원(中原)의 전략적 요충에 위치했다. 강대국인 진(晋)국과 초(楚)국의 세력이 대치하는 접점이고, 서방 강대국인 진(秦)국의 동방 출구이기도 했다.

    그러한 국제전략 요충에 위치한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하나는 평화로운 환경 조성이다. 만약 과대망상적인 허장성세를 일삼는다면 주변세력들에게 ‘위험지대’라는 인식을 심어 필연적으로 그들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다 내전이라도 발발하면 어김없이 국제분쟁으로 번지고 말 것이다. 다른 한편 강대국들을 이간시키는 잔재주 모략을 일삼는다면 급기야 약소국의 내란이 국제화하면서 외세로 인해 국토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또 하나는 내부단결이다. 만약 국론분열이 격화되면 필연코 어느 한 쪽이 외세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사태발전 양상은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국민적 합의가 없는 ‘개혁’의 무리한 강행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춘추시대에도 내란국의 분할 점령이니, 위험지대에 대한 이른바 탁관(託管, 신탁통치)이니 하는 사례가 나타난 바 있다. 강대국들의 내정간섭은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국론분열과 내분에서 비롯된다.

    자산은 국제전략 요충에 위치한 약소국 생존의 두 가지 급선무, 즉 평화환경을 조성하고 내부단결을 이루기 전에는 외국의 초청이 있어도 방문외교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여론의 확실한 지지 없는 개혁에는 그야말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오늘날에도 식자들은 정치를 가리켜 ‘가능사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도약을 위해서는 안정된 발판이 필요하다. 그 안정은 불필요한 새로운 일을 되도록 벌이지 않는 데서 자연스레 다져진다. 이것이 자산이 헤아린 도리다.

    신의 있는 외교

    ‘춘추’는 원래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도 막상 노나라의 일보다는 정나라의 국제관계와 국내정치 및 인물 동향에 대해 더 많이 쓰고 있다. 약 3대 1의 비중이다. 그만큼 국제전략 요충에 자리한 약소국인 정나라의 일은 중원 제후국들의 총체적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이는 오늘날 태평양 너머 멀리 있는 초대강국 미국이 세계전략의 요충지인 한반도에 기울이는 비상한 관심도를 연상케 한다. 2004년 11월20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핵 문제를 가리켜 ‘vital issue’라고 표현했다. 이는 단순히 ‘중요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사활적 문제’ 또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 곧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꼭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 기분에 좌우되는 미봉책이나 기회주의적인 대응책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며 깊이 있게 연구하되, 우선 한·미 양국이 동맹관계에 있으니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야 하고 불협화음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함축이었다.

    그렇다면 춘추시대에는 어땠을까. 중원의 전략적 요충에 자리하여 진(晋)과 초(楚) 양대 강국의 틈에 끼인 정나라는 번번이 두 강대국의 침입을 받았다. 그래서 자산이 등장하기 전 역대 집권자들은 두 나라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 가령 아침에 진군이 쳐들어오면 거기 붙었다가 저녁에 초군이 들어서면 다시 다른 세력을 따르는 이른바 ‘조진모초(朝晋暮楚)’ 노선이었다. 그것이 ‘약소국 생존의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산은 국내정치의 분규요인을 수습한 뒤에야 국제정치로 중심을 옮겨갔다. 우선 종전의 외교노선부터 고쳐나갔다. 자산의 새로운 발상은 국제정치에도 신의가 필요하며, 잔재주나 기회주의를 자랑거리인 양 착각하다가는 유사시에 어느 쪽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끝내 패망할 것이라는 인식에 입각해 있었다.

    자산은 또 강대국들의 국정에 대한 조사연구를 폭넓고 깊이 있게 수행한 뒤 외교정책을 입안했다. 그들의 현실적 요청과 그 역사적 근거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나라가 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인가를 헤아렸다.

    진(晋)나라의 경우 당시 자주노선을 걷고 있었으나, 원래 주(周)왕조로부터 분기된 한족의 나라이고 예법과 습관도 정나라와 같았다. 그러니 대의명분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정나라 인민은 진과의 기존 동맹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한편 초나라는 원래 남방의 이민족 국가로 문화적 동화가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중원 제후국들에 의해 이단시되며 소외당했다. 그래서 중원 사태에 대한 참여는 물론, 대국으로서 인정받길 갈망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설령 중원으로 진군하더라도 보급선이 길어서 오래 있지 못하고 철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정나라의 대초(對楚) 외교는 그들의 소외감을 풀어주고 대국으로 대접해주는 것으로 설정됐던 것이다.

    이 경우 정나라는 쌍방간 오해가 생기거나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더욱 성실하게 행동하며 강대국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자산의 새 외교노선은 진나라와의 기존 동맹관계를 중시하면서 외교적 관례에서 벗어나지 않고 신용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설정했다. 다음으로 초나라와의 화친을 꾸준히 도모하며 무역관계와 민간외교를 확충해나가야 했다. 이러한 외교노선은 흔히 ‘종진화초(從晋和楚)’ 계략으로 불린다.

    이는 얼른 보아 조선시대의 외교 기조를 연상케 한다.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 하여 대륙의 중국 왕조에 대해 신례(臣禮)를 취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비록 격이 낮다 해도 통신사를 보내고 일부 무역거래를 허용하는 식이었다.

    자산의 외교정책 노선은 ①신의(信義)의 고수 ②기본수요에 대한 형평성 있는 봉사 ③성실과 신용을 바탕으로 한 관민합동의 홍보 노력에서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신용이 첫째였다.

    기회주의 중립외교의 위험성

    서구에서는 일찍이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가 ‘군주론’에서 신의를 망각한 기회주의 ‘중립외교’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근시안적 중립주의는 파멸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의 동맹외교는 신의로 지켜나가야 하며, 다른 한편 북측의 동맹관계도 현 단계에서는 이해되는 바가 없다. 반도의 분단된 남부가 해양 편이고 북부가 대륙 편임은 자연스러운 생존욕구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맹 자체는 상호간에 비난할 바 아니다. 앞으로 자유민주 통일이 현실적 일정에 오른다면 그때 새 국제관계 조정에 적극적 요인으로 활용될 수 있을는지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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