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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兵法 ③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 박동운 언론인

‘안정’에 뿌리박고도 신경지 개척한 子産의 정치·외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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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떡고물’을 챙기는 사람은 위에다 바치는 한편 자기 몫도 챙기는 법이다. 안 바치면 집권자가 먼저 알고 처단하니까. 언론보도는 그 다음인 것이다. 즉 권력형 비리는 상하간에 불가분의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자기만을 보도권 밖에 두려고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으레 밝혀지길 몹시 두려워하는, 그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부 사회지도자들이 ‘데모를 해야 두각을 나타내고 출세할 수 있다’는 천박하고 편면적인 현실파악하에 경솔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집권측 실무자들은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의 정치적·행정적 책임은 덮어둔 채, 원인요법 대신 혼란의 책임을 언론보도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나아가서 어떤 강력한 집권자는 임기 말에 그의 실정(失政)이 속속 판명되고 보도되자 언론을 지목하면서 자기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다’고 나무랐다. 그 말은 반성능력의 결핍을 통감케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러한 피상적 관찰에도 전연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무릇 언론사도 일제의 지배나 독재의 철권통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적응 방식을 시의(時宜)에 맞게 조정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전부냐 무(無)냐’ 식의 태도는 슬기로운 생존전략이 아니다. 최후의 결전이 아니라면 간단히 떠들 바 아니다.

물론 생존전략은 결코 노예적인 처지에서의 안주를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 참아가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즉 국민의 알 권리에 봉사하기 위해, 어렵지만 당장은 참아가며 필요할 때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이를 위해 우회할 수도 있고, 비원칙적 사안에 대한 일시적 타협도 고려한다.



그렇다면 언론이 본연의 존재의의를 밝히고자 기다리는 중대 시점은 언제인가.

하나는 독재자의 임기말 등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길 때다. 또 하나는 일제 패망 등 역사적 전환기다. 끝으로 국운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나 국민주권 원리가 완전히 무시당할 때 등 초비상 시국이다. 그 지경에 이르면 언론은 상응한 각오를 가다듬고 국민 앞에 밝힐 것을 밝힌다. 춘추시대의 자산은 그러한 언론의 힘을 언론의 긍정적 계몽가치와 더불어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의 선각자이니 더욱 위대한 정치가적 자질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정나라의 자산에 비견될 현대 미국의 정치가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있다.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이자 제3대 대통령인 그도 한때는 ‘언론의 피해자’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일부 신문의 부정확한 보도와 비우호적 논평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성인답게, 나중에는 ‘자유로운 신문을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사회에서는 만사가 안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신문은 인간 정신을 계발하여 합리적·도덕적·사회적 인간을 형성하는 최량의 도구다’라고 갈파했다. 일부 ‘옹졸한 야심가’나 ‘기회주의 정치인’과는 그릇이 다른 것이다.

자산의 정치적 업적

정치가의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결코 오늘의 척도로 측량될 것이 아니다. 그가 활약했던 국가사회의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요청 및 제약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원래 춘추시대에는 고작해야 관습법이 있었을 뿐 성문법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관료들의 자의에 의해 정치·행정이 운용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자산의 성문법 창시는 당시로서는 실로 놀랄 만한 생산적 개혁이었다. 그래서 국내 기득권층의 반대가 심했고, 심지어는 다른 제후국의 집권자들로부터 내정간섭에 가까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산은 백성을 보살피고 여론을 경청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인권옹호’와 ‘법치발전’으로서, 이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

또한 자산의 온갖 개혁은 모두 민생에 직결된 것이고, 여론의 요구를 광범하게 수렴한 것이었다. 민생과 아무 관련 없는 소위 ‘겉치장 개혁’에는 애당초 손을 대지도 않았다.

자산은 특히 인재의 발굴, 육성과 등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강점 본위의 인사를 했다. 결점의 거론은 거의 논외로 했다. 또 인재를 등용할 때는 여론을 참작하며 단독으로 결정하든지, 우수한 측근하고만 상의했다. 부족한 사람들과 상의하면 질투심과 ‘자리 지키기’ 심리가 작용해 자칫 우수한 인재를 놓칠 수도 있어서다.

자산의 그러한 내치 정돈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민생이 뚜렷이 향상됐다. 약소국 나름으로 국력이 증강했으며, 외세 침략 또한 특기할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국민이 태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가 기원전 522년에 병으로 서거하자 정나라의 모든 국민이 통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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