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강의 내내 우리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김 교수는 유창한 영어로 학생들에게 마케팅 환경의 변화를 조목조목 설명했고, 대부분의 학생이 강의 내용을 무리없이 이해하는 듯했다. 몇몇 학생에게 영어 강의에 대한 반응을 물어보았다.
“기업들은 이미 해외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끼리 안에서 먹고살겠다고 할 수 있나요? 글로벌 마인드를 갖추려면 영어로 강의하고 듣는 것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수업을 듣고 있던 4학년 강신영씨(교육학과)의 답변은 기자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글로벌화’되어 있었다. 강씨는 “하버드대는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을 불러서 특강을 들었다던데, 우리도 빨리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안도 했다.
김 교수의 ‘마케팅원론’ 강의는 고려대가 몇 년 전부터 도입해 최근 비중을 크게 높이고 있는 영어 강의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경영학과에서 웬만한 강의는 대부분 영어로 진행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2중 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한 강씨만 해도 ‘마케팅원론’뿐 아니라 ‘국제경영’ ‘재무관리’ 등 세 과목의 영어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고려대의 영어 강의가 처음부터 매끄럽게 추진된 것은 아니다. 군 입대 후 복학해 취업을 준비중인 99학번 김진우씨(생명유전공학부)는 “2003년 무렵 영어 강의를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는 교수와 학생이 시행착오를 자주 겪었는데, 복학해보니 영어 강의가 완전히 정착돼 있더라”고 말했다.
전체 강의 30%는 영어로
김씨도 생명공학이나 유전학 같은 전공수업은 물론 2중전공을 하고 있는 경영학 관련 강의도 모두 영어로 듣고 있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느냐”고 묻자 김씨는 “전공수업은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경영학 수업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다소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씨가 말하는 ‘어려움’이란 것도 ‘수업내용의 10~20%를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라고 하니 별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고려대는 2003년 전체 강의의 10% 수준에 불과하던 영어 강의 비율을 최근 23%까지 높였고, 오는 2학기에는 30%까지 높인다는 방침이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고려대에서 신규 임용하는 교원은 무조건 영어로 강의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신임 교원을 채용하기 전에는 어윤대 총장이 직접 나서 영어로 면접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국문학과에도 외국인 교수를 채용해 영어 강의를 개설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최근 고려대가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국문학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국문과 외국인 교수 임용 계획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오는 2학기부터는 국문과에서도 영어 강의를 듣게 될 전망이다.
‘민족대학’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던 고려대에 숨돌릴 틈 없는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초 어윤대 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국제금융을 전공한 경영학과 교수 출신의 어 총장은 취임 직후 ‘고려대 글로벌화’를 내세우며 강력한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이른바 ‘글로벌 KU(Korea University) 프로젝트’.
‘막걸리대학’이라는 고려대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대 와인’을 수입하기도 했고 검정 예복으로만 제작해오던 졸업복을 고려대의 상징인 크림슨(심홍색)으로 바꾸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발상의 전환을 동반한 강력한 개혁 작업이 2년을 넘기면서 이제 고려대의 변화는 국내 대학은 물론 아시아 지역의 다른 대학이 주목하는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국제화’를 내세운 고려대의 교육 혁신 프로젝트가 여기저기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런민대(人民大) 다롄대(大連大),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와 소카(創價)대 등 아시아권 대학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하는 제7회 ‘한경 마케팅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고려대는 이제 일반 소비자들이 사용하고 제품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시장에서 인정받았다. 이 상은 일반 기업들의 마케팅 혁신 사례를 발굴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대학이 수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