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7·1조치’ 3년, 북한 경제 현장 르포

김일성 聖地’에서도 달러벌이 열중, 北 인민들도 버는 만큼 가져간다

  • 신석호 동아일보 경영전략실 기자 kyle@donga.com

    입력2005-07-28 18: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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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이 7월9일 6자회담 복귀를 전격 선언하면서 ‘북한 문제’가 다시 급류를 타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1년 동안 외부와 통하는 문을 닫았던 북한이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과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조치) 3주년을 계기로 국제사회와 다시 협상하기 시작한 것. 2002년 7월부터 네 차례 방북하며 7·1조치 이후 북한 경제의 변화를 추적해온 동아일보 신석호 기자가 6월29일부터 7월2일까지 국제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인터내셔날 (회장·이일하 목사) 회원 자격으로 다시 현지를 다녀왔다.
    ‘7·1조치’ 3년, 북한 경제 현장 르포
    다섯 번째 방북 취재 기간에 북한이 조만간 6자회담에 복귀할 것임을 암시하는 증거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평양 도심과 농촌 지역 등 북한 전역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격한 구호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2002년 10월 미국과의 핵 갈등이 발생한 뒤 2003년 세 번째로 방문한 평양 거리 여기저기에서는 미국을 공격하는 거대한 구호와 네댓 개의 그림이 목격됐었다. 당시 ‘미국’ 또는 ‘미제’라는 단어에는 하나같이 죽음을 뜻하는 검은색을 사용했었다. 2004년 4월 네 번째 방문했을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방문 때는 단 한 개의 그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남측 방문객을 인솔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소속 안내원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2003년 3월 방문했을 때 안내원들은 “우리가 핵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밝히면 이라크처럼 미국의 공격을 당한다”며 “미국이 핵 문제의 진실을 날조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안내원들은 “조만간 미국과 대화가 잘 되면 공화국도 강성대국으로 가는 길을 재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의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적어도 안내원들이 전처럼 미국을 의식적으로 비난하는 일은 없었다.

    7월1일을 기해 조선노동당 창건 60주년을 홍보하는 새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평양과 지방 거리 곳곳에 일제히 내걸렸다. 기념일은 10월10일로 100여 일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당 창건 60돌에 즈음하여 당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의 공동 구호를 철저히 관철하자’나 ‘모두다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구호 관철에로’ 같은 구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대혁신’ ‘대비약’ ‘10월의 축전’ 등 새로운 구호가 눈길을 끌었다. ‘구호의 정치’에 능한 북한 당국이 올해 10월10일을 계기로 무언가 중요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거리 곳곳의 광장에서는 체조 대형으로 늘어선 어린 학생들이 열심히 뭔가를 연습하고 있었다. 안내원들은 북한 당국이 10월10일 당 창건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아리랑 축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일러줬다.

    북한은 2002년 4월부터 8월15일까지 10만명의 학생을 동원해 아리랑 축전을 열었다. 그러면서 대담한 경제개혁조치인 7·1조치를 시작했고,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불러들였으며 신의주 특구 개방조치도 발표했다. 대규모 군중 행사가 중대한 정치·경제적 결정과 관련 있는 것이라면 이번 축전은 미국과의 핵 문제 타결과 관련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측 기자인 필자가 북한을 방문하게 된 것도 이러한 징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국내외의 중요한 환경 변화가 있을 때마다 남측 민간단체의 대규모 방문단을 받아들였다. 2002년 이후 네 차례 방북 취재에 참여한 기간 가운데 단 한 번도 평범한 시기가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7·1조치’ 3년, 북한 경제 현장 르포

    북한에서 ‘성지’로 불리는 만경대 고 김일성 주석의 생가와 인접한 곳에 수채화와 공예품을 파는 상점이 생겨나는 등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002년 7월 첫 방문과 동시에 ‘7·1조치’가 시작됐다. 그해 10월 두 번째 평양을 여행하는 기간에는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등 미국 대표단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고 미국과 북한의 핵 갈등이 시작됐다.

    2003년 3월 세 번째 방문은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이 전쟁으로 폭발한 직후였다. 2004년 3월 네 번째 방문을 끝으로 북한은 외부와의 문을 닫아걸었다. 이번 방북은 그로부터 1년4개월 만에 이뤄졌다.

    이일하 목사가 150여 명의 대규모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에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드시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행사가 치러진 직후 남북간 화해 무드가 조성됐지만 북한이 6자회담에 곧 복귀할 것이라는 정치적 전망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1년 넘게 문을 닫아건 북한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북한 경제 전문기자로서 2002년 7·1 조치를 단행한 지 만 3년이 되는 북한 경제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평양 시민의 패션 감각

    이 목사와 방북하면 대체로 지난번에 방문한 곳을 다시 들른다. 굿네이버스인터내셔날이 지원하는 평양 구빈리 협동농장은 방북 때마다 찾아갔기 때문에 이번이 다섯 번째 방문이다. 물론 “다섯 번이나 북한에 가서 뭐 그리 볼 게 있으며, 다시 가면 전에 가보지 않은 곳엘 가야지, 왜 간 곳을 또 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자유로운 취재가 제한된 상황이므로 갔던 곳을 반복해서 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야 안내원들도 모르는 변화를 감지해낼 수 있다.

    2005년 7월의 평양 거리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거리를 오가는 주민의 화려하고 다양한 옷차림이었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 일색이던 여성들의 외출복은 총천연색 그 자체였다. 더운 날에는 색색의 모자로, 비가 오는 날에는 색색의 장화로 멋을 냈다.

    스타일도 현대적이어서 서울 명동 거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여성들도 있었다. 칙칙한 쑥색 인민복을 주로 입던 남성들 역시 말쑥한 색색의 노타이 남방셔츠에 검정색과 남색 양복바지를 차려입었다.

    처음에는 ‘혹시 북한 당국이 남측 방북단을 의식해 미리 좋은 옷을 배급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방북단을 안내하는 북측 민화협 소속 안내원들에게도 여러 차례 물어봤지만 ‘그렇다’는 대답을 받아낼 수 없었다. 동아일보에 함께 근무하는 새터민(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에게 물어봐도 “외부인을 의식해 주민들에게 옷을 나눠주는 일은 없다”고 했다.

    취재 결과 주민의 옷차림은 7·1조치 이후 경제개혁 3년의 결과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분홍색 원피스와 양산, 빨간색 장화 같은 것들은 지금 북한 주민 사이에서 부(富)의 상징이다.

    한쪽에서는 식량이 부족해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보도가 나오는 마당에 돈 버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고급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련된 중국산 의류가 실시간으로 평양 거리에 나도는 것은 2002년 경제개혁 이후 확대된 대외 무역의 증가 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개혁 3년, 이제 북한 지도부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인민 생활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분야의 생산과 소비를 끌고 나가는 주체는 국가나 공장, 기업소보다는 ‘개인’이다. 공장과 기업소가 여전히 에너지난과 자재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돈과 꾀를 가진 개인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한편 공장, 기업소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돈을 가진 개인들이 경제를 움직이면서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도 확대되고 있다. 대외의존의 급격한 증가는 북한 경제개혁 3년의 심각한 ‘후과(‘결과’의 북한식 표현)’인 것이다.

    구빈리 협동농장의 ‘기적’

    평양 구빈리 협동농장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 전면에 나서서 ‘생산의 정상화’라는 경제개혁 조치의 목적을 달성한 대표적 사례다. 1996년 축산단지로 지정된 이곳은 출범 초기에는 농장원 전체가 공동으로 염소를 사육했다. 그러나 1999년 마을(20~50가구) 단위의 경쟁체제가, 2002년 개인 단위의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면 남보다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개인의 이기심을 자극한 결과였다.

    지난 6월30일 다섯 번째로 방문한 구빈리 협동농장에서는 생산 기술의 발전을 나타내는 증거가 하나 둘 눈에 띄었다. 2004년까지만 해도 산유(요구르트)와 치즈가 이 농장의 주요 생산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급은 아니지만 먹을 만한 버터를 만들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산유를 우유병에 넣어 팔았으나 이제는 ‘떠먹는 요구르트’ 식의 포장용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굿네이버스인터내셔날 같은 외부단체의 지원도 한몫 했지만, 그보다는 개인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과 같은 7·1조치의 성과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농장의 2003년 총수입은 북한 돈 6000만원(이하 북한 ‘원’)이었다. 2005년 7월 현재 북한 화폐의 공식 환율은 1달러 당 150원, 암시장 환율은 1달러당 2000원 정도다.

    그러나 남측이 생산 기술과 젖소 등 생산수단을 지원하고 개인 단위 경쟁 생산체제를 가동한 결과 지난해 총수입이 1억500만원으로 늘어났다고 임귀남 지배인은 밝혔다. 2003년 425t이던 젖 생산량은 지난해 530t으로 늘었다. 이로 인한 수입은 6000만원으로 2003년 2500만 원의 두 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개인이 일한 만큼 벌도록 한 결과 많이 버는 사람과 못 버는 사람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가장 많이 번 사람은 연 소득이 17만원이라고 했다. 주민의 평균 소득은 10만원. 많이 번 사람은 좋지만, 적게 번 사람은 과거에 다같이 못살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2004년 3월 방문 때 임 지배인은 “많이 번 가정은 색테레비(컬러TV), 녹화기(비디오), 냉동기(냉장고) 등을 샀지만, 염소나 젖소를 잘못 키우거나 죽여 돈을 한푼도 못 번 집에서는 부부싸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젖소농장뿐 아니라 알곡 생산에서도 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6월30일 평양 낙랑구역 도로변 텃밭에서 ‘○○○ 포전(圃田·논밭)’이라고 씌어 있는 대리석 표지판을 목격했다. 7월1일 방문한 묘향산 보현사 인근 텃밭에도 ‘청년포전-도라지-250평’이라고 씌어 있는 나무 안내판이 서 있었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개인 또는 10명 이내의 소규모 집단이 포전을 가꾸고 생산물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구빈리 협동농장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기심을 이용해 농업 생산을 늘려 보자는 당국의 의도가 엿보인다.

    서비스업 개인 비중도 높아져

    농업뿐만이 아니다. 제조업과 유통업, 서비스업과 금융업 등에서도 개인 경제활동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아직 군수(軍需)나 에너지 등 중요 경제 분야의 생산과 소비를 계획경제의 틀 안에 두고 있다. 그러나 소비재의 생산과 유통이나 서비스업 같은 주민 생활과 밀접한 경제 분야에서는 개인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개인의 경제활동은 당국이 허용한 합법인 경우, 합법을 가장한 불법인 경우, 완전히 불법인 경우 등 다양하다. 어떤 경우건 북한의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해까지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았던 탈북자 M(43)씨는 유명한 ‘인조고기’ 제조업자였다. 2003년부터 인근 군부대 안에 생산설비를 차려놓고 근로자 6명을 고용해 하루 2교대로 인조고기를 만들었다. 인조고기는 콩 등 식물을 이용해 고기 맛이 나는 음식물을 만드는 것으로 단백질이 부족한 북한 주민에게는 고급 음식으로 통한다. 기술이 좋은 M씨의 제품은 종합시장을 통해 청진 외의 함북 지역에서도 널리 팔린다고 했다.

    M씨는 “아직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전기도 마음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군부대와 계약을 맺고 생산을 했다”며 “벌이가 좋을 때는 당시 한 달에 200달러 정도의 수입을 올려 이 가운데 약 10%를 군부대에 바쳤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 청진이나 신의주 등 지방도시 주민의 상당수가 개인 장사를 하면서 살아간다. 국가도 이런 현실을 인정해 ‘상인’을 공식 직업으로 인정했다.

    북한 당국은 2002년 7·1조치를 시작하면서 개인과 기업 등 ‘아랫단위의 창발성’을 강조하며 독자적 경제활동을 독려했다. 이후 2003년 종합시장이 도입돼 시장이 사회주의 상품의 유통공간으로 인정되면서 재간이 있는 개인들은 시장에서 합법 또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 과거에는 국가의 단속을 피해 숨어 살던 돈 많은 개인들도 경제의 전면에 나섰다. 북한에서 ‘돈주’라고 부르는 이들 ‘큰손’들은 대체로 ‘상인형’과 ‘고리대금형’ ‘권력결탁형’으로 나뉜다.

    개인이 벌면 국가는 어부지리

    평양에서 만난 북한의 한 안내원에게 “개인이 경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안내원은 “개인이 당국의 허락이나 지원 없이 아무것이나 할 수는 없지만 창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려운 국가 경제를 돕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7·1조치는 기업이 개인이나 위(국가)에 바라지 말고 자력갱생하라는 취지”라며 “국가는 전략적이고 중요한 산업만 틀어쥐고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에 자율성을 주었다”고 했다.

    국가도 개인의 경제활동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 이 안내원은 “개인들이 종합시장에서 장사를 하면 시장 사용료와 거래 수익에 따른 국가납부금을 내야 하고, 국가는 이 돈을 해당 지방 행정기관이 지방의 발전을 위해 쓰도록 했다”며 “공공건물 개보수나 어린이 보육시설 지원 등에 돈이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탈북자 M씨도 “중국 국경과 인접한 지방도시의 경우 재정의 60% 이상을 종합시장 사용료와 국가납부금에서 충당하고 있다”며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에 얹혀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임현진 교수(사회학과)가 지적한 것처럼(신동아 7월호 ‘7·1조치 3년, 북한경제 현주소’ 참조) 7·1조치 이후 북한의 경제개혁은 중국의 급격한 대북 투자 확대와 북-중 경제협력의 증진 현상을 초래했다. 투자를 통해 중국의 돈이, 무역을 통해 중국의 상품이 ‘쓰나미’처럼 북한 경제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대학원대 양문수 교수는 “내부 자원이 고갈된 상태에서 경제개혁을 하자면 외부의 물자와 자본 유입이 불가피하다”며 “자연히 정치적인 유대관계가 깊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덮친 ‘중국 쓰나미’

    2005년 7월 북한 여기저기에서도 ‘경제판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증거들이 발견됐다. 7월1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 선양(瀋陽)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국인 관광객과 대화를 나누던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들었다.

    고려호텔 옆 평양역 사거리에 있는 평양 역전백화점의 경영권을 최근 중국 저장(浙江)성 출신의 한족(漢族) 기업인이 인수했고, 중국인 관광객은 모두 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최근 중국의 북한 투자 붐을 고려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평양 구빈리 협동농장은 6월30일 남측 방문객에게 이례적으로 직접 만든 점심식사를 제공했다. 식사에 쓰인 플라스틱 접시 바닥에는 ‘MELAMINE WARE, MADE IN CHINA, NO6033’이라고 씌어 있었다. 식당 앞에 세워진 자전거 세 대 가운데 두 대에도 중국산임을 알리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한 안내원은 “국산 자전거인 ‘갈매기’가 우리 돈으로 1만원(1달러가 2000원인 경우 5달러) 정도 하지만 중국산 자전거는 50달러 가까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북한의 총 무역규모는 2003년보다 19.5% 증가한 28억5670만달러로 1991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주요 원인은 뭐니뭐니 해도 대중(對中) 무역 확대. 지난해 북한의 대중 무역 규모는 13억8521만달러로 2003년에 비해 35.4%나 늘었다. 남한과의 교역을 포함한 북한의 전체 무역 규모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25.4%에서 2003년 32.8%, 2004년 39%로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중 무역수지는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북한의 대중 수출은 5억8570만달러, 수입은 7억9950만달러로 무역 적자는 2억1380만달러에 달했다.

    탈북자 대다수는 현재 북한에서 거래되는 공산품의 90%가 중국산이라고 증언한다. 탈북자 A씨는 “북한의 공장, 기업소는 개인이 만드는 가내수공업 제품과 중국산 제품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속속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 M씨가 만든 콩고기처럼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은 기업소보다 개인 수공업 제품이 경쟁력이 있고, 플라스틱 접시처럼 개인이 만들 수 없는 종류의 상품은 중국산이 더 잘 팔리기 때문에 북한의 공장, 기업소 제품은 갈수록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북한 안내원도 “7·1조치와 종합시장 도입 이후 시장에 중국산 의류와 공산품이 많이 들어와 인민의 생필품 소비 사정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중국산이 판을 치면 같은 종류의 제품을 만드는 국내의 공장과 기업소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국이 중국산에 대한 관세를 올리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 “국가가 중요한 공장, 기업소부터 살려내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에너지와 자재가 없어 멈춰버린 공장, 기업소가 모두 정상화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경대에서 파는 수채화

    ‘간이 매대’로 상징되는 북한의 상업 유통망 개혁에도 새로운 변화가 감지됐다. 평양 주민의 통행이 잦은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주변 거리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던 간이 매대는 이미 한바탕 구조조정을 겪은 뒤였다. 2004년 3월 방문 당시보다 수가 크게 줄었지만 설비는 현대화됐다.

    세련된 매대 천막 안에는 어김없이 냉장고와 아이스크림 제조기, 생수기가 비치돼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100원, 빙수는 20원이다. 평균적인 북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 4000~5000원임을 감안하면 매우 비싼 편이다.

    고(故) 김일성 주석의 평양 만경대 생가는 7·1조치 이후 ‘달러벌이’에 열중하는 북한 기관들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년 전인 2002년 6월29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은 말 그대로 엄숙한 성지(聖地)였다. 북한 주민이 ‘아버지’로 떠받드는 김 주석이 태어난 곳에서 북측 인사들은 물론 이곳을 찾은 남측 인사들조차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만경대 경내에서 매대를 처음 발견한 것은 2003년 3월 세 번째 방문 당시였다. 생가를 보고 만경대(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정자가 서 있는 곳)로 오르는 길의 귀퉁이에 한 여성 판매원이 천막을 친 간이 매대를 놓고 빵과 과자 같은 가벼운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었다. 비록 만경대 구내였지만 김일성 생가와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2004년 3월에도 간이 매대가 아닌 정식 상점이 문을 열었지만 이 역시 생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6월29일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생가가 바로 보이는 가까운 숲속에서 판매원들이 각종 그림과 공예품 등을 팔고 있었던 것. 안내원은 방문객에게 생가를 간단하게 설명한 뒤 10m쯤 떨어져 있는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바로 옆 매대에서 그림과 공예품 등의 기념품을 사도록 안내했다.

    그림을 파는 안내원은 풍경 수채화 한 폭을 20유로(25달러)에 팔았다. 민화협 안내원들도 남측 손님들이 쇼핑할 시간을 배려했다. ‘자본주의식 실리 추구’ 바람 속에 만경대는 이제 성지가 아니라 관광지로 변한 것임이 분명했다.

    평양 거리 곳곳에서는 큼지막한 평화자동차 광고판을 볼 수 있었다.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가 모델로 등장했는가 하면, ‘강하고 든든한 자동차’ ‘강하고 아름다운 자동차’ 같은 광고문구도 눈길을 끌었다. 한 안내원은 “평화자동차 광고는 공화국 최초의 옥외 광고물”이라고 설명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 가격은 북한 ‘원’과 ‘유로’ 두 가지로 표시돼 있다. 외국인 전용 상점에서는 북한 원을 ‘경영상 환치 값’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순안공항 매점에서 팔리는 황구렁이술 한 병 가격은 5유로, 경영상 환치 값은 850원이다.

    육아원에도 농업 독려 구호

    북한은 올해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다. 세계식량계획(WFP)은 7월3일 긴급보고 27호를 통해 “국제사회의 지원 부족으로 노인층과 소학교(초등학교) 학생, 가난한 도시가구 360만명에게 식량지원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현재 북한은 한 해 100만t 정도의 식량을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지원으로 해결해야 할 만큼 구조적인 식량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2002년 이후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서방의 식량지원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이는 곧 북한이 단행한 농업개혁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증거도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은 올해 1월1일 발표한 당보(黨報)·군보(軍報)·청년보(靑年報)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올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주공(主攻) 전선은 농업전선”이라며 “농사를 잘 짓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 총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7월의 평양 거리 전역에서도 이러한 구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농업 생산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남포육아원에도 ‘올해 공동사설에서 제시된 과업을 철저히 수행하자’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한 중국인 관광객은 “종합시장에서 가장 비싼 남새(채소)는 고추로 1kg에 2400원”이라고 전했다. 2400원은 하급 노동자의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한다.

    일찍 보리를 수확한 밭에서는 옥수수 이모작이 막 시작됐다. 논에서는 색색의 작업복을 입은 농장원들이 나와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가끔 무리와 다른 복장을 한 이가 논 복판에 서서 일꾼들에게 지시하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당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와 농장원들을 감시하거나 격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안내원은 “인민들이 농업 생산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하늘도 우리를 도와 지금까지는 농사가 아주 잘됐다”며 “6월의 이상고온 현상이 농사에 도움이 됐지만 7~8월에 수해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고추 1Kg에 한 달치 월급

    평양 거리 곳곳에서는 한국과 일본 등이 지원한 쌀과 비료를 황급히 운반하는 트럭을 여러 대 볼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은 이제 물품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운반한다.

    6월30일 평양 보통강구역 봉수교회로 가는 길가에서는 한 노인이 ‘쌀 40kg-대한민국’이라고 씌어 있는 누런 포대를 순수레에서 내리는 장면이 목격됐다. 함께 여행한 정부 관계자는 “남측이 지원한 쌀 포대를 인민들이 요긴하게 쓰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식량난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11월 1kg당 400~500원이던 종합시장의 쌀값은 춘궁기를 지난 올해 6월말 현재 1000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접경 지역 주민 가운데 먹을것을 구할 재간이 없는 노인 중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고 있다는 일부 보도와 북한 당국의 전격적인 6자회담 복귀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11년 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함께 찾아왔던 4년여에 걸친 굶주림의 시기가 다시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북한 당국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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